사  건   2004노827  국가보안법위반 등

피고인   송   두   율




항 소 이 유 서







                                                        2004.     5.    .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  수, 정  평

                                                        변호사 안  영  도, 김    진





서울고등법원  제6형사부   귀중

목차...


1. 서론  (1)

  가. 원심판결의 요지

  나. 항소이유의 요지


2. 국가보안법의 위헌․무효성에 대한 원심 판결의 문제점  (3)

  가. 원심 판결의 요지

  나.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보는 것은 헌법에 반하는 것입니다.

다. 북한은 반국가 단체가 아닙니다.

  라. 국가보안법은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에 맞지 않는 반민주적 법률입니다

  마. 소결론 : 피고인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의 문제점


3. 간부기타주도적임무종사의 점에 대하여(범죄사실 제1항)  (22)

  가. 개요

  나.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위헌성

  다. 공소사실의 불특정

  라. 피고인이 북한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

  마. 저술활동을 간부 기타 주도적임무종사로 볼 수 있는지 여부.

  바. 나머지 범죄사실에 대한 검토

  사. 소결론


4. 특수탈출의 점에 관하여(범죄사실 제2항).  (84)

  가. 개  요

  나. 국가보안법 적용의 배제

  다. 외국인의 국외범 (1993. 8. 18. 이후 방북의 점)

  라. 이 사건의 경우

  마. 공소시효의 완성

  바. 소결론


5. 회합통신의 점에 관하여(범죄사실 제3항)  (105)

  가. 개요

  나.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 적용의 배제

  다. 외국인의 국외범

  라. 이 사건의 경우

  마. 소결론


6. 사기미수의 점에 대하여(범죄사실 제4항)  (114)

  가. 개 요

  나. 편취의 범의 및 불법영득의사의 부존재

  다. 기망행위의 부존재

  라. 소결론


7. 피고인에 대한 원심의 양형 이유와 그 부당성  (118)


8. 결 론  (121)

항소이유서


사  건   2004노827  국가보안법위반 등

피고인   송   두   율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항소이유를 개진합니다.


다     음


1. 서론 


  가. 원심판결의 요지

  

   원심은 공소사실중 1995년 이후 방북 및 북한이익대표부 방문, 피고인이 재야인사들의 방북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1991. 6. 범민련 회의에서의 발언, 통일학술회의 주도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각 무죄를 인정하고 나머지 범죄사실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하였습니다.


유죄 부분 범죄사실의 요지는, 

    

   ① 피고인은 1973년 조선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원으로 가입한 이후, 1991. 5.경.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공작금을 지급받고,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내재적 접근법을 이용하여 북한 체제 찬양 및 주체사상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학술연구원을 설립, 운영하고, 1994년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여 활동하는 등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성된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고, 


   ② 1991년 5.경 김일성을 면담한 이후 1994. 3. 12.까지 매 년 북의 지령을 받고 입북하여 학술 토론회 등에 참여하여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북의 체제를 찬양하고, 1994. 7. 11.에는 김일성 장례식에 장의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고,


   ③ 1996년 이후 3차례에 걸쳐 북한의 기념일 등에 축하전문을 보내어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연락하고,


   ④ 1998년 황장엽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금전을 편취하려고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이 밖에 원심은 국가보안법이 죄형법정주의 등에 위반한 위헌, 무효의 법률이므로 이 사건에 대하여 적용될 수 없고, 간부기타주도적임무종사의 점에 관한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규정 또한 위헌무효이고, 후보위원 선임 부분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피고인의 변호인의 변소 내용을 배척하였습니다.


  나. 항소이유의 요지


  원심 판시 범죄사실 중,

  ①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 종사의 점’은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적이 없으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거나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고,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1988. 12. <사회와 사상> 기고문이나 1992년경의 한국학술연구원활동, 김일성 장례식 참석, 저술활동은 모두 피고인이 북과의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수행한 활동으로서 대한민국 체제나 국민의 생존과 자유를 위태롭게 할 정도의 이적성이 없는 행위이므로 피고인이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할 수 없고,


원심 판단에 의하더라도(“피고인이 노동당의 활동을 조직, 지도한 증거가 없다”, 판결문 55쪽)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는 할 수 없고(이 부분은 판결 이유에 모순이 있는 경우임),

  ② ‘특수탈출’의 점 중 1993년 독일 국적 취득이후 피고인의 방북부분은 개념상 “탈출”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을 뿐아니라,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고,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한 입북이 아니므로 국가보안법상 특수탈출이 성립할 수 없고, 


  ③ ‘회합, 통신’의 점 중 축전을 보낸 것에 대한 부분은 피고인이 북에 보낸 축전은 의례적인 것으로서 “연락”의 개념에 해당하지 아니하고, 피고인은 남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할 어떠한 의도도 없었을 뿐 아니라, 외국인의 지위에서 행위한 것이므로 처벌될 수 없고,


④ ‘사기미수’의 점은 피고인에게 명예를 회복하려는 외에 어떠한 편취의사나 기망행위가 없었으므로 각 무죄 또는 공소기각 판결이 선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의 위 행위들에 대하여 유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은 채증법칙위배, 법리오해, 사실오인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할 것이므로 취소되어야 합니다.   


2. 국가보안법의 위헌․무효성에 대한 원심 판결의 문제점


  가. 원심 판결의 요지


  원심은 “지금의 현실로는 북한이 여전히 우리나라와 대치하면서 우리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하는 적화통일노선을 완전히 포기하였다는 명백한 징후를 보이지 않고 있는 이상, 북한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므로, 남․북한 사이의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의 규범력이 상실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국가보안법이 실효성이 없는 무효의 법률이라고 할 수 없다(대법원 2003. 4. 8. 선고 2002도7281 판결, 2003. 9. 23. 선고 2001도4328 판결 등 - 애초 이러한 판시는 헌법재판소 1997. 1. 16. 자 92헌바6 결정, 93헌바34, 35, 36 결정 등에서 비롯됨)”는 대법원 판결과


“북한이 우리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음이 분명한 상황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함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이 헌법에 위배되는 법률이라고 할 수 없고, 국가보안법의 규정을 그 법률의 목적에 비추어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한 국가보안법이 정하는 각 범죄의 구성요건의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하여 죄형법정주의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으며, 양심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등은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인 권리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니고,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국가의 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그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제한할 수 있는 것이므로, 국가보안법의 입법목적과 적용한계를 위와 같이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아니하는 한도 내에서 이를 제한하는 데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한 위헌이라고 볼 수 없(대법원 1993. 9. 28. 선고 93도1730 판결, 1999. 12. 28. 선고 99도4027 판결, 2003. 3. 14. 선고 2002도4367 판결)”다는 판시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국가보안법이 위헌이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보는 것은 헌법에 반하는 것입니다.


    (1) 원심 판결의 문제점


    원심은 북한을 “정부를 참칭하거나 국가를 변란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내외 결사 또는 집단”로 상정하는 논리 위에서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헌법이 추구하는 평화적 통일지향의 이념에 위배되는 것이고, 국민들에게 헌법이 지향하고 선언하는 평화적 통일 노력을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규범을 인정하는 것이어서, 헌법에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입니다.


    (2) 헌법 규정 사이의 관계


    종래 북한의 반국가 ‘단체’성을 주장하는 법 해석론적 근거는, 헌법상 영토 조항을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유일 합법 정부론」입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역이 구한말시대의 국가영역을 기초로 한다는 것(구한말영토 승계)과 우리나라의 영토의 범위를 명백히 함으로써 타국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음을 표시하는 국제평화지향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국제평화주의론). 그러나 이에서 더 나아가, 위 영토 조항을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 정부는 대한민국…휴전선 이북지역은 인민공화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미수복 지역”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① 남북 분단이라는 현실 인식을 전제로 하는 헌법의 평화통일조항과 논리적으로 모순되고, ② 현실적으로도 분단 이후 별개의 정부 수립이라는 사실과 “영토의 범위는 국가 권력이 미치는 공간까지”라는 국제법상의 원칙을 외면하는 것이며, ③ 구법(영토조항)에 대한 신법(통일조항) 우선의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권영성, 헌법학원론, 법문사, 1998, 122쪽 참조).


특히 1972년 제7차 개헌 이후 일련의 통일조항 (전문, 제4조, 제66조 제3항, 제69조, 제72조, 제92조)이 추가되고 특히 그 중에서도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한 헌법 전문과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한다”는 헌법 제4조의 규정 등이 헌법의 기본원리로서 작용하게 된 이후, 적어도 헌법이 인식하고 지향하는 남북 관계의 현실과 통일 정책은 분명히 변화된 것이라 보아야 하므로, 위 영토 조항을 여전히「유일정부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게 일면적이고 과도한 해석이라 할 것입니다.


    (3) 북한에 대한 우리 헌법의 태도


    헌법 전문은 “… 우리 대한민국은 …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라고 하고 있고,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하고 있으며, 제66조 제3항에서 다시 한번 “대통령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의무를 진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평화적 통일은 ⅰ) 분단이라는 현실, 그리고 두 개 이상의 실체의 공존 상태 인정을 바탕으로, ⅱ) 무력이나 강압에 의한 통일을 배제하고, ⅲ) 그 내용과 방향이 두 나라의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기초적인 전제는 바로 그 상대방을 ‘적’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헌법 어디에도 이러한 통일의 상대방 북한을 ‘적’으로 보는 것을 내비치는 부분이 없으며, 만일 헌법이 북한을 ‘적’으로 본다면, 이는 '적‘과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것이므로 헌법 스스로 논리적 모순이 될 것입니다.


    (4) 규범 체계에서 상호 모순적 이중적 평가가 가능한 것인지.


    원심 법원이나 종래 헌법재판소․대법원은 북한에 대하여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하고 있으나, 하나의 실체를 우리 체제를 전복하려고 획책하는 반국가단체로 보면서 동시에 동반자적 관계를 갖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입니다. 특히 국가보안법 제7조 제1항, 제5항은 북한에게 이로운 것은 대한민국에 해롭다는 상호 배타적인 적대관계의 논리를 강요하고 있어 더욱 평화통일조항에 위반된다고 할 것입니다.


하물며 규범의 세계에서 그러한 상호 모순적 이원성이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고 (상호 모순적인 법은 이미 행위지침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법이 아니며, 더욱이 그러한 모순적인 법을 근거로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 양건, 「국가보안법 위헌론」, 인권과 정의 제164호, 59쪽), 이렇게 형식적인 상호 모순성이 존재하는 경우 규범 체계는 ‘신법 우선’이나 ‘상위법 우선’에 따라 적용되어야 할 법을 정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규범적 평가는 우리 법체계의 최고 규범인 헌법에 의해 정해져야 하는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우리 헌법은 북한을 평화적 통일의 상대방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러한 정신에 위배하여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은 위헌․무효의 법률이라 할 것입니다.


  다. 북한은 반국가 단체가 아닙니다.


    (1) 원심 판결의 문제점


    원심 판결과 원심이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종전 대법원 판례는, 북한에 관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의 성격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변화된 현실과 남북 관계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국가보안법 합헌․존치론을 지탱해 온 기본적인 관점이기도 합니다. 즉 “아무리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보려는 새로운 상황․사정의 변경이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의 반국가단체로서의 성격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생각은 변화된 국제 정치와 남북 관계의 실질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못하고 있는 인식의 오류에 근거한 것입니다.


    (2) ‘반국가단체’ 규정의 역사적․정치적 배경과 상황의 변경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것은 해방 후 한국전쟁 전까지 항상적으로 존재했던 폭력 혁명적 방식에 의한 남한 정부에 대한 전복기도에 대처하면서, 한반도 남측에 극단적인 냉전․분단․반북체제를 구축하려 한 정치적 입장(미국 중심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어 한국의 역할을 친미 반공진영의 전초기조로 설정하는 것)을 반영해 왔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법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의 탄생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이후 한국전쟁의 경험은 국가보안법의 존립근거를 대중 속에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정 후 반세기가 지난 1991. 9. 18. 남북한 양측은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물론 이전에도 북한 단국이 휴전선 이북 지역에 대한 사실상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과거 남한 정부가 대한민국이 한반도 내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한 근거가 1948. 12. 12. UN 결의 제195조 III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바로 그 UN에 남북한이 ‘동등한 자격’으로 가입하였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할 것입니다), 유엔헌장 제4조에 따르면 유엔가맹국의 자격조건은 국제법상의 주권국가로서 유엔헌장의 의무를 수락하고 이러한 의무를 이행할 능력과 의사가 있는 ‘평화 애호국’으로 되어있습니다 (“Membership in the United Nations is open to all other peace-loving states…”). 즉 국제법적으로 북한은 한반도의 북측 지역으로 무단으로 점령하고 있는 반국가 ‘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과 대등한 ‘사실상의 국가’가 되었다는 점이며, 게다가 이렇게 북한을 국제사회에서 사실상 국가로 승인한 유엔가입은 북한의 반대를 뚫고 남측의 집요한 요구에 따라 성사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어 같은 해 12월 12일 남북한 당국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였고, 여기서는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제1조), “남과 북은 상대방의 내정문제에 간섭하지 아니한다 (제2조)”, “남과 북은 상대방을 파괴, 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한다 (제4조)”라고 선언함으로써 국가보안법이 전제하고 있는 기본논리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은 2000. 12. 29. 제정된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에 의하여 법정되었으며, 이 법률은 제3조 [다른 법률과의 관계]에서 “…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탈냉전과 평화공존의 흐름은 2000년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 공동선언으로 정점에 이르렀으며, 남북공동선언은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ㆍ문화ㆍ체육ㆍ보건ㆍ환경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였다”고 선언함으로써, 이제 한반도에서 냉전체제는 그 기반을 잃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요컨대 지금의 남북 관계는 원심과 대법원이 보는 바와 같이 “협력 관계”와 “반국가 단체로서의 적대성”이 기계적으로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적대적 관계였던 시기’를 지나 남과 북이 국제법상 동등한 국가로서 UN에 가입하고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체제로 발전․변화하였다는 것입니다.


    (3) “자유민주주의 전복 위험성”


    원심과 대법원이 국가보안법의 실효성을 인정하는 주된 논거는 “북한이 우리의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협이 되고 있음이 분명한 상황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위험성’의 구체적인 내용에 관하여 원심은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고 있으나, 종래 헌법재판소는 “… 남북 간에 일찍 전쟁이 있었고, 아직도 휴전상태에서 남북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대치하여 긴장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마당…”이라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존치가 필요하다고 하였고(헌법재판소 1990. 4. 2. 자 89헌가113 결정), 대법원은 “북한이 대남적화통일을 기본목표로 설정하고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관에 서서 한국의 역사를 지배계급에 대한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대남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술로 남한이 미제국주의에 종속된 식민지이고 남한정권이 반동적 파쇼정권이라고 매도하면서 남한의 노동자, 농민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지식인, 청년 학생, 도시 소시민 등에 이르는 각계각층을 그 보조군으로 삼아서 반미, 반정부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폭력, 비폭력, 합법, 반합법, 비합법 등의 모든 수단을 써서 미제국주의와 군사파쇼독재정부 및 매판자본가를 타도하여야 한다고 선전, 선동하고 통일방안으로 이른바 고려연방제를 제의하면서 그 선결조건으로 남한에서의 반공정권퇴진, 반공정책과 국가보안법 폐지, 미국과 북한간의 평화협정체결 및 주한미군철수 등을 내세우고 있는 외에 제3국의 공작거점 및 해외 반한교민단체를 전위조직으로 하여 위장평화 공세를 전개함과 아울러 국내반정부인사 및 운동권학생을 입북시켜 연공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획책하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 인정에 반드시 증거를 요하지 않는다”고 하여 왔습니다 (대법원 1993. 9. 28. 선고 93도1730 판결 등).


그러나 변화하고 있는 북한의 태도와 국제․국내 상황 속에서, 위와 같은 설명만으로 국제․국내 정치 질서의 다층적이고 복잡한 현실과 국가보안법 존치 이유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피고인이 북한의 사상을 전파하여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북한 김일성 체제를 찬양 선전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중형을 선고하게 되는 형벌 규범의 근거가 될 때에는, 더더욱 “공지의 사실로 증거 없이 인정”할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원심 변론 과정에서 주장한 바와 같이, 북한은 1991년 남북합의서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토대에서(남북합의서 제1조), “상대방을 파괴·전복하려는 일체 행위를 하지 아니하고, 평화상태를 전환시키기 위해 군사정전협정을 준수한다(제4, 5조)”고 약속하였으며,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하고(제9조)”, 통일의 구체적 절차는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6․15 남북공동선언 제4조)” 진행하기로 약속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 뿐 아니라, 1990년대 중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이후 개혁과 개방으로 방향을 바꾸어, ① 외교적으로 90년대 말부터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해 2000년에는 유럽연합과 공식적으로 국교를 수립하였으며, 2002년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북·일정상회담과 함께 소위 ‘고백외교’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고, ② 경제적으로 신의주 특별행정구(2002. 9), 금강산 관광지구(2002. 10), 개성 공업지구(2000. 11) 설정등을 통해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확실하게 편입해 들어오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2002. 7. 경제관리개선조치와 2003년 초 종합시장 대책으로 시장․개방 경제를 받아들이고 있으며, ③ 남한과도 경의선·동해선을 연결하겠다고 하면서 특히 우리 시민 사회의 민간교류협력과 한국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에 대해서도 매우 전향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 변화와 남한 정부의 포용 정책 추진에 따라 남북의 동반자적 지위는 큰 진전을 이루어, 남북한 당국자간 대화가 정례화되고 (2003년 장관급 회담 4회, 군사회담 8회), 철도, 도로 연결 사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개성공단은 2004년 하반기에 생산에 착수하고 1단계 100만평이 2005년 입주 계획이며, 금강산 관광은 육로관광이 시작되어 월 1만명을 상회하고 있고(지금까지 금강산 관광 인원 580,817명), 남북간 왕래인원은 2003년 한 해동안 16,000명, 물자교역 7억 달러에 이르고, 2003년에만 2,691명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의 2004. 2. 10. 자 통일부 사실조회 회신에 첨부된 「2003년 남북관계 평가 및 분야별 추진현황」에서도 “… 북핵문제, 이라크전 등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남북관계는 꾸준히 진전하여 남북관계가 분야별로 일상화, 제도화하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군사정책에서 북한에 대하여 “주적”개념을 사용하지 않기로 한 바 있습니다 - 증 제33호증의 1내지 3).


특히 최근 룡천역 폭발 사고에 대해서도, 의료와 구호체계 미비 등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수습과 복구를 감당하기가 어렵자 곧바로 국제기구와 평양주재 외국 대사관들에 폭발사고 발생과 피해가 크다는 사실을 알리며 사고 현장을 공개하면서 지원과 구호를 호소하고, 남한 정부와 국민들의 구호․지원에 대해서도 박봉주 내각 총리가 “(남쪽) 각계에 고맙다고 전해 달라”고 감사의 뜻을 밝히는 등 과거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마수드 하이더 유엔기구 평양주재 대표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과거 북한의 기준으로 볼 때 재난과 구조에 대한 대응에 혁명적인 변화가 있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뒤이어 올 5. 4.부터 같은 달 7.까지 열린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도 “6ㆍ15 남북공동선언의 기본정신에 맞게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점을 거듭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남북관계의 전향적 변화에 대응하여, 여야 모두 북한의 실체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남북관계발전기본법」의 제정을 추진하고 있고, 17대 총선 직후인 2004. 4. 17. 총선 당선자 299명 가운데 269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전체의 87.7%인 236명이 국가보안법의 개폐('일부 개정' 58.7%, '폐지' 29.0%)에 동의한다고 답한 바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원심 법원도 “우리 헌법이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있고, 피고인의 이 사건 행위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있은 이래 1991. 12. 남북한의 총리들이 남북 사이의 화해,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하고 위 합의서가 1992. 2. 19. 발효되었으며 2000. 6.에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나가기로 하는 등의 내용의 6․15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어 남북한 당국간에 교류와 협력을 위한 대화가 이어지고, 이에 따라 평화통일을 위하여 남북한간의 대화와 교류․협력이 절실히 요망된다는 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남북한간의 관계 변화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남북한 간의 관계는 화해와 협력을 향하여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되어 가고 있으며, 그 속에서 북한은 남한 체제의 폭력적 전복이 아니라 6․15 남북 공동선언에서 말하는 “(서로 공통성이 있는)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태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정과 거듭된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가침”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뒷받침해온 북한의 행동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이 합헌․유효하다고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처벌을 구하고 위 법률이 합헌이라고 주장하는  소추기관이 “북한은 여전히 반국가단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지, 만연히 “공지의 사실”이라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 국가보안법은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에 맞지 않는 반민주적 법률입니다


    (1) 원심 판결의 문제점


    원심은 “… (국가보안법 규정을)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한 그 적용단계에서 위 각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하다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국가단체의 조직 형태, 직위, 명칭 등의 다양성, 가변성에 비추어 대상 법률조항에 사용된 각 용어를 더욱 구체화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어느 정도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뜻을 지닌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므로 위 법조항이 죄형법정주의의 본질적 내용인 명확성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면서 국가보안법이 합헌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국가보안법 자체가 가지는 위헌성․반민주성과 그에 대한 변호인들의 주장을 단순히 그 조문 용어 해석의 문제 제기로 오인․축소하고 죄형법정주의에 대한 판단으로 제한한 것일 뿐 아니라, 죄형법정주의에 대한 법리 자체도 오해한 것입니다.


    (2) 국가보안법의 반인권․반민주성 ① : 죄형법정주의 위반


국가보안법의 법률적 문제로 가장 많이 지적되어 온 점은 동법이 근대 시민형법의 근본원리인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국가보안법 조문은 매우 모호하고 불명확한 개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제2조의 ‘정부참칭’, ‘국가변란’, 제3조의 ‘간부’ ‘지도적 임무’, 제4조의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 제4조와 제7조의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우려가 있는 사항’, 제5조와 제6조의 ‘지령’, 제6조의 ‘목적수행의 협의’, 제7조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찬양’, ‘고무’, ‘선전’, ‘동조’ 등이 있으며 이 외에도 국가보안법의 각 조문에는 ‘기타 중요시설’, ‘기타 물건’, ‘기타의 방법’, ‘기타의 무기, ’기타의 재산상의 이익‘ 등의 표현이 산재해있는데, 이러한 광범한 확대해석을 가능케 하는 ’백지 형법‘식의 구성요건을 둔 것 자체가 죄형법정주의의 본질을 훼손하는 것입니다.


헌법재판소가 1990년의 이른바 “한정합헌 (위 89헌가113호 등)” 결정에서 인정하였듯이, 이상의 개념들은 일반인의 이해와 판단으로는 행위유형을 정형화할 해석의 합리적 기준을 찾기 매우 어려우며, 따라서 이 경우 어떠한 것이 범죄인가를 사실상 공안당국이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결정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에서 공안당국이 체제유지를 위하여 위 개념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해석하여 처벌의 폭을 넓혀왔고, 이에 따라 분단․반공체제에서 일탈하는 어떠한 시민의 사상과 활동도 그 실제적 위험성과 관계없이 처벌되어 왔습니다. 위와 같은 국가보안법의 각 조항은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여 입법되었으므로 죄형법정주의를 위반이며, 또한 시민의 기본권 제한 법률은 막연하면 남용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무효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위 결정에서 “입법목적 등 합리적 기준으로 다의적인 규정을 한정적 제한해석을 할 때 제7조 제1항의 보호법익을 살리면서도 전면위헌의 문제를 피할 길이 열린다, 언론 · 출판의 자유 등 위축문제, 기본권의 본질침해의 우려는 해소되고, 행위의 기준제시로 법운영당국의 제도외적 오용 · 남용으로 인한 기본권침해의 사태는 피해질 것이다, 법 운영 당국의 해석권에 의하여 제도본지를 충분히 살릴 수 있을 것으로 죄형법정주의 위배소지도 없어지고, 평화적 통일정책추진의 헌법적 과제는 이룩될 수 있다, 제한해석에 의하여 구성요건해당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국가의 존립 · 안전을 위태롭게 하였는가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었는가“라고 하면서 법원에 의한 합헌적 해석을 긍정적으로 전망하였으나, 종래 법원은 이러한 문제가 있는 법 규정이 남용되지 않도록 해석하기보다는 “이적성”을 판단하는데 있어 구체적 위험과 가능성과 상관없이 남한 체제를 “위협하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표현”이기만 하면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벗어난 것으로 판정함으로써 현실적으로는 공안당국의 수사에 정당성을 부여해왔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국가보안법 규정 자체가 그 포괄성으로 인하여 본질적으로 ‘한정 적용’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헌법재판소가 들고 있는 기준 자체가 객관적으로 뚜렷한 기준 · 한계를 정할 수 없는 매우 애매모호하고 불명확한 것이어서 결국 수사기관이나 법관의 주관적 해석에 맡길 수밖에 없는 구성요건이기 때문이며, 위헌성이 뚜렷한 법률을 한정적으로 제한 해석하여 합헌 결정을 내린다해도 그 위헌성이 치유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위 결정에서 헌법재판관 변정수의 소수의견 참조).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행위에 대한 형량은 해당 구성요건의 가벌성에 비하여 매우 과중하여 범죄와 형벌 사이의 균형이 유지되고 있지 못합니다. 국가안보에 대해 구체적위험을 초래한 형법상의 간첩죄, 내란죄, 범죄 단체 구성죄 등과는 달리 국가보안법상의 범죄는 기본적으로 ‘정치범’, ‘사상범’임에도 불구하고, 사형이 가능한 구성요건만도 수 십개이며, 그 외의 경우에도 상당한 중형이 규정되어, 「적정성의 원칙」에도 위반됩니다.


    (3) 국가보안법의 반인권․반민주성 ② :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배


    국가보안법이 반인권․반민주적이라는 것은, 어떤 사람․경우에는 적용되고 다른 사람․경우에는 적용되어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 원칙에 반한다는 점입니다.


원심은 “… 법조항은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된 것으로 보이지 않으므로 사법당국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법적용으로 인하여 평등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고, “검사는 범죄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여 형사적 제재를 함이 상당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공소를 제기할 수 있고, 또 형법 제51조의 사항을 참작하여 공소를 제기하지 아니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며(대법원 1990. 9. 25. 선고 90도1613 판결, 1996. 2. 13. 선고 94도2658 판결 등 참조), … 동일한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피의자들의 연령, 가정환경, 범행의 동기, 피의자가 자신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고 대한민국 국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하는지 여부 등 여러가지 사항을 참작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평등권 침해 주장을 단순하게 부인하고 있으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당시 평양에 밀행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온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나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에서 시작하여 정부․재계 인사들이 한 일은 모두 “통일을 위한 정치적 행위”로 면책된 반면, 민간인 교류를 위해 평양축전에 참가한 학생이나 종교 지도자들이 처벌받는 등 검사의 기소 재량 범위 내라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자의적 운용의 실례는 무수히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에 따라서 적용되기도 하고 적용되지 않기도 한다면 이것은 법적 안정성을 해치는 결과가 되고, 국민들에게는 그러한 행위가 허용되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흐리게 하기 때문에 국민은 법의 적용여부에 대해 심히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예측 가능성이라는 법의 본래적 속성 중 하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게다가 실제로는 정부에 비판적 입장에 있는 사람이거나 반대파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적용되고, 정부 권력 측에 선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결국 정부 권력에 반대하는 세력의 탄압에만 이용되었다는 점까지 생각하면, 헌법상 법 앞의 평등원칙 침해는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입니다.


    (4) 국가보안법의 반인권․반민주성 ③ : 기본권 제한의 헌법적 한계 일탈


    국가보안법은 헌법 제37조 제2항의 기본권 제한 사유 중 ‘국가안전보장’을 이유로 하고 있으며, 국가의 안전이 국민생활에 필수적이며 생존의 밑바탕이 되므로 이를 위하여 국민의 기본권이 어느 정도 제한되는 것을 감수해야 함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기본권 제한은 부득이 필요한 경우에 한하며(불가피성 원칙),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정도에 그쳐야 하고(최소한의 원칙), 제한되는 기본권과 제한에 의하여 보호되는 공익상에 균형이 유지되어야 하며(이익형량의 원칙), 기본권의 성질에 따라 제한의 기준도 달라져야 합니다(이중기준의 원칙).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① 그 처벌하고 있는 행위 유형의 대부분이 형법의 내란․외환의 죄, 폭력행위처벌등에관한법률 등에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것이어서 불가피성의 원칙에 위반되고, ② 광범위하고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국가안전보장에 필요한 최소한이 아니라 불필요한 경우까지 최대한 기본권을 제한하여 최소한의 원칙에 반하며, ③ 표현의 자유․정치적 자유권 등 개인의 자유로운 인격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 권리를 국가안전보장을 위해 전면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익형량․이중기준의 원칙에 위반됨으로써, 기본권 제한의 법률이 갖추어야 할 제반 요건 중 어느 하나도 갖추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가보안법은, 그 자체가 사유의 본질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어서 법률로써 제한할 수 없는, 사상과 양심을 처벌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서,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한 것이라 할 것입니다. 동일한 서적(피고인이 저술한 책)을 누가 소지하고 있느냐, 같은 행위(피고인이 주최한 학술행사, 북한 방문, 북한 방문기 게재)를 누가 어떤 동기에 의해 하느냐에 따라 처벌되기도 하고 또는 않기도 하는 것은 결국 내심의 생각에 대한 처벌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인바, 이는 우리 헌법이 정하는 이른바 「헌법적 행위 내용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내심의 자유)」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국가보안법의 반인권․반민주성 ④ :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함


    국가보안법을 제한적으로 해석하면 합헌이라고 한 헌법재판소 다수의견은, 국가보안법이 합헌적으로 제한 해석되기 위하여 구성요건 해당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① 국가의 존립 · 안전을 위태롭게 하였는가, ②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주었는가의 두 가지 기준이라고 하면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준다함은 반국가단체(북한)의 일인독재 · 일당독재 배제나, 국민의 자치 · 자유 · 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 주의적 통치질서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곧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 내부 체제를 파괴 · 변혁시키려는 것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에서 요구되는 "자유"의 보호에서 출발하는 법이념이고, 우리 헌법 규정이 인용한 독일연방헌법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 (Freiheitliche und Demokratishe Grundordnung)" 역시 시민적 자유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 보호론에서 출발하였던 것임을 생각한다면, 바로 생각의 다름에 대한 관용과 이견 집단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이야 말로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인정하는 정상적인 보수와 진보는 이견 집단을 경쟁자로 간주하고, 당연히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지만 상대를 말살하려고 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를 존중하지 않는) 극좌와 극우는 이견집단을 적으로 보고, 경쟁에서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견집단의 존재 그 자체를 말살하려고 하며, 필요하다면 언제든 폭력까지 동원합니다. 국가보안법은 특정 이견집단을 격리하고 유폐시키고 말살하는, 이러한 '불관용'을 상징하는 법률입니다. 우리나라 극우파는 유럽의 극우파와 달리 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들이 극우가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보안법에 의거한 국가폭력으로 '적'을 말살할 수 있어, 사적 폭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 공안기관은 국가보안법 '전과자'였던 김대중 정권 아래서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에 의거한 국가폭력을 동원해 한총련을 비롯한 이견집단을 말살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국가보안법 체제’를 이용한 ‘공안 통치’이며, 이는 이미 사상과 문화의 다양성을 구가하고 있는 우리 사회 현실과도 걸맞지 않는 것입니다.


  마. 소결론 : 피고인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의 문제점


  백번을 양보하여, 대법원 판례가 말하는 북한의 이중적 성격 -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임과 동시에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의 성격 - 을 모두 인정하고, 국가보안법은 이 두 가지 성격 중에서 “반국가단체로서의 성격”에 기반한 법률로서 합헌․유효하다는 논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곧바로 이 사건 피고인에 대한 공소사실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대법원이 보는 바와 같이 두 가지 성격이 병존한다면, 북한과 관련된 행동이라고 하여 무조건 처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성격 중 어느 존재로서 관계를 가졌는지에 따라 판단해야 맞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원심 뿐 아니라 종래 ‘이중적 성격’을 ‘아울러 가진다’고 했던 헌법재판소․대법원은, 북한과 관련된 행위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와의 관계와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와의 관계로 볼 것인지에 관하여 아무런 기준도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며, 상식적 기준으로 볼 때 원심이 유죄로 판단한 피고인의 행위는, (그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모두 진실된 것으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모두 북한의 실상과 사상을 연구하고 알리는 일이거나 남북한 학자들의 교류를 주선한 것이기 때문에, “적화통일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대화와 협력․평화통일을 위한 일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원심이 지적하고 있는 피고인의 주장이나 사상 (피고인 스스로의 것 뿐 아니라 피고인이 접한 북한 학자들이나 피고인이 관여한 학술회의에서 나온 주장) 어디에도, 대법원이 북한의 ‘반국가성’의 근거로 삼는, ① “대남민족해방과 인민민주주의 혁명 전략의 목적”과 관련된 부분이 없고, ② “남한의 노동자, 농민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지식인, 청년 학생, 도시 소시민 등에 이르는 각계각층을 그 보조군으로 삼아서 반미, 반정부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폭력, 비폭력, 합법, 반합법, 비합법 등의 모든 수단을 써서 미제국주의와 군사파쇼독재정부 및 매판자본가를 타도하여야 한다”는 반국가단체에 관련된 선전․선동이 없습니다.


원심이 피고인의 저술 활동 중에 문제 삼고 있는 내용을 요약한 부분을 보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판단․요약 자체가 자의적인 것으로 심히 부당한 것이기는 하지만), ⅰ) 북한사회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 연구가 필수적이라고 하고(판결문  4쪽), ⅱ) 북한 권력의 정통성과 북한의 실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5쪽), ⅲ) 사회주의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고 북한이 동독과 다르며 독일식 흡수통일은 유혈사태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주체사상을 먼저 이해할 것을 권유하면서 주체사상을 옹호하고 북한 정부를 미화함과 동시에 남한 사회를 미국에 종속되었다고 비방하고(8쪽), ⅳ)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한 주한미군의 실체적 역할을 전면 부인하고 남한의 통일정책을 의도적으로 폄하하고(10쪽), ⅴ) 북한이 남한과 달리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유지한다고 평가하고 북한 정부를 미화하는 등 내재적 접근법을 빙자하여 주체사상에 기초한 북한의 주의․주장을 지속적으로 전파(11쪽)하였다는 것인바 -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대한민국 및 독일 교포사회에 주체사상을 전파하여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북한 김일성 체제를 찬양 선전하는 것 외에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판결문 제47쪽 - 가사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모두 평화 통일의 한 쪽 ‘주체’와  협력의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 평가․옹호이고,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을 바로 알기 위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일 뿐, 그것이 바로 북한의 또 다른 성격의 징표인 “적화통일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전복”과 연결된다고는 도저히 볼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원심은, 표현상으로는 북한이라는 실체가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ⅰ) 두 가지 성격을 나누는 객관적 기준을 제시하거나, ⅱ) 피고인의 행동을 평가함에 있어 두 가지 성격을 나누어 검토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북한과의 근접성․관여만으로 피고인을 처벌하여, 실제로는 “반국가 단체”로만 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실은 국가보안법의 본질 - 위헌성․다른 규범과의 상충성․반통일성 - 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행동․주장이나 사상은 모두 북한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 정치 세력의 실체와 특수성을 인정하고 우리나라와 북한을 모두 통일의 대등한 당사자로 바라봄으로써 평화적․자주적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하려 한 것이므로, 북한을 이중적 잣대로 보는 원심의 논리대로라면 오히려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처벌할 수 없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원심은 “… 피고인의 행위가 … 평화통일을 위하여 남북한간의 대화와 교류․협력이 절실히 요망된다는 점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가던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남북한간의 대화와 교류․협력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를 쌓기 위한 것이나 역으로 그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여야만 활성화될 수 있고 남북한간의 평화통일에 긍정적인 작용을 한다 할 것인데, 피고인의 행적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에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함이 마땅(판결문 93쪽)“하다고 하고 있으나, 그렇게 ‘평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설시하지도 않고 있을 뿐 아니라, 가사 ”남북한의 신뢰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하였다고 평가하더라도 그것이 곧바로 ‘반국가단체로서의 북한’이라는 성격 규정에 기반 하였다는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할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헌법재판소․대법원은 국가보안법의 존치 근거와 처벌의 필요성을 ”적화통일노선을 고수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고자 획책하는 반국가단체의 성격“에 두고 있는 것이지, 남북한간 신뢰에 대한 영향력 같은 것에 두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3. 간부기타주도적임무종사의 점에 대하여(범죄사실 제1항)


  가. 개요


  원심은 피고인이 1973. 9. 북한 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1991. 5. 일자 미상경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1994. 7.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고, 수년간 공작금을 지급받았으며,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체제 찬양 및 주체사상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성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노동당의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더불어,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는 위헌, 무효의 법률 조항이고, 피고인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부분의 공소사실이 특정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변호인의 주장을 배척하였습니다. 

피고인은 북한 노동당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바 없고, 독일에 유학하여 철학, 사회학, 사회주의 비교 연구 등을 전공한 해외동포 학자로서 한반도 분단 상황 및 통일 문제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언급하였을 뿐 북한체제를 찬양하거나 주체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저술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국가보안법상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피고인의 저술은 국내 학계에서 학문적으로 논의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미 국내 학계에서는 남북관계 등에 피고인의 견해 이상의 과거와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논의들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자유로운 토론과 의사표현들이 활발해지면서 동시적으로 북한의 개방이나 남북관계의 진전 또한 시대의 흐름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은 이러한 논의에 밑거름이 되고 촉진제 역할을 하였습니다. 원심은 분단 상황에 근거한 1970년대 이래의 해묵은 냉전논리를 그대로 답습한 결과 변화하는 남북관계의 현실에 대한 평가를 정확하게 하지 못하고 피고인의 저술 등이 국내의 학계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과 그 실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피고인의 저술활동에 대하여 이적성을 인정하였습니다. 냉전 논리에 근거한 판단의 기준을 배제하고 피고인의 저술을 검토해보면 국내의 일반적인 진보적 성향의 학자가 쓴 글들과 대동소이하고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피고인이 가진 경험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피고인의 저술들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관련 분야의 논의에 기여하는 바가 있습니다. 


가사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사실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당의 사업을 전반적으로 조직, 지도하였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음을 원심 스스로가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북한에서 필요에 의하여 자기들 임의로 직위를 부여하였을지도 모르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명목상의 명예직에 불과한 자를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는 노동당 간부라고 할 수 없고, 저술활동은 대한민국의 체제를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의 생존 및 자유에 해악을 가하였다고 할 수 없어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될 수 없는 바, 피고인이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볼 수 없습니다.  

           

  나.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위헌성


   검사는 피고인이 1991. 5.경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어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기관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피고인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는 헌법 제12조 제1항 신체의 자유와 죄형법정주의, 제11조 평등권, 제37조 제2항 과잉금지의 원칙 및 전문과 제4조 평화통일정책조항에 위배되는 위헌무효의 법률입니다.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이미 헌법재판소에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에 대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습니다.


    (1) 헌법 제12조 제1항 신체의 자유 침해 및 죄형법정주의 위배


      (가)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는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하나, “간부”란 그 자체로는 포괄범위가 불명확한 단어이고,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그 범위를 일의적으로 확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추상적 개념인데, 대법원은 이에 관하여 “그 단체를 위한 중요한 역할 또는 지도적 활동을 한 자”라는 극히 불명확하고 동어반복에 불과한 지표를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형법정주의의 기본원칙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형벌법규의 다의적 해석은 곧 광범위한 확대적용을 불러옵니다. 대법원은 중학교 및 고등기술학교 교장으로서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경우(대법원 1961. 10. 5. 선고 4294형상356 판결), 조총련 동경도본부 메구로지부 총무부장으로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한 경우(대법원 1991. 3. 12. 선고 91도3 판결)와 같이, 평당원으로 있었더라도 지도적 임무 종사로 처벌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노동당 당 세포위원장으로 피선된 경우(대법원 1971. 8. 3. 선고 71노277 판결), 민주애국청년동맹 부락선전책인 경우(대법원 1951. 4. 10. 선고 4283형상115 판결)로 전국적 규모 조직의 말단에서 일하였더라도 지도적 임무 종사로 확대해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건전한 일반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지닌 일반인으로서는 단체에서 어떤 지위로 어떤 역할을 할 경우 제2호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 또는 제3호 “그 외의 자”에 해당하는지 판별하기가 매우 어려워, 위 조항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나) 원심 판결에 대하여


      원심 법원은 이에 대하여,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인지 여부는 국가의 존립,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의 확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이 있는지 여부와 해당 반국가단체의 조직형태 및 대상자의 조직 내에서의 위치, 중요도, 해당 업무, 역할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해석하는 한 그 적용단계에서 그 개념이 애매모호하고 광범위하다고 볼 수 없으며, 반국가단체의 조직 형태, 직위, 명칭 등의 다양성, 가변성에 비추어 대상 법률조항에 사용된 각 용어를 더욱 구체화하는 것은 입법기술상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므로 부득이하게 어느 정도 보편적이거나 일반적인 뜻을 지닌 용어를 사용한 것이므로 위 법조항이 명확성의 원칙을 침해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라는 개념은 대법원 판례에서 보듯이 오랜 기간 동안 전국적 조직의 말단 구성원까지 포괄하는 매우 광범위한 개념으로 해석적용되어왔는바, 이는 개념의 모호성과 광범성에서 나오는 현실적인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 종사자라는 개념은, 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의 존재와는 무관하게 확대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반국가단체의 조직의 다양성을 고려하더라도, 각 단체구성원들의 단체구성행위를 그것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명백한 위험을 미치는 것인지 여부에 따라 판단하고 그 조직의 상부에 위치한 일부만을 처벌대상으로 하는 입법이 불가능한 것이 아닌 이상,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종사자라는 광범위한 규정은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2). 헌법 제11조 평등권 침해

      (가) 국가보안법은 삼엄한 남북대결상황에서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제정되고, 오랜 기간 동안 집권세력이 정권유지를 위하여 반대세력을 옥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그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집행이 크게 문제되었던 법률입니다. 제3조 제1항 제2호에 관하여,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여러 단체들의 최하부 구성원들이 이 규정으로 처벌받아온 것과 상반되게, 북한 고위관료나 탈북자들은 정부간 대화의 상대방 또는 정착지원대상이 될 뿐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어왔습니다. 피고인은 사법기관의 이러한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구속기소되어,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을 침해당하였습니다.    


       (나) 원심 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이에 대하여 원심 법원은, 동일한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더라도 검사가 피의자들의 연령, 가정환경, 범행의 동기, 피의자가 자신의 행위를 깊이 반성하고 대한민국의 국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하는지 여부 등 여러 가지 사항을 참작하여 기소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검사의 재량권행사를 들어 기소되어 처벌받는 자의 평등권 위반이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위 법원의 판단과는 달리, 같은 북한 또는 조선노동당의 구성원이더라도, 대한민국 정부와 교류의 상대방이 되는 북측 고위인사의 경우에는 검사가 아예 수사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탈북자의 경우에도 국가보안법위반죄로 입건하지도 않습니다. 위 사람들과 비교하면, 국가보안법의 처벌대상은 검사의 재량권 행사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정부 당국의 필요에 의하여 선별됩니다. 북한 주민 모두를 반국가단체구성범죄자로 보고 가혹하게 처벌하는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을 그대로 적용하여서는 헌법에서 규정한 평화통일정책을 추구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의 필요에 따라 위와 같은 자의적 적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3) 헌법 제37조 제2항 과잉금지의 원칙 위반


      (가)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과잉금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반국가단체로 보고 제정되었고, 제3조 제1항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붕괴시키는 것이며, 그 수단은 북한 주민 모두를 최소한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것입니다. 북한 붕괴 과정에서 인명손실이 커지고 민족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깊어질 가능성이 상당하여 헌법상 평화통일정책에 어긋나 위 조항의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하여 북한 주민 전체를 징역형에 처할 경우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와 방법의 적절성과 피해의 최소성에 어긋납니다.


     (다) 더구나 제3조 제1항 제1호가 수괴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한 것에 비하여, 제2호는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여, 조선노동당 최고책임자와 북한 정부수반을 제외한 그 2인자로부터 말단 당원과 일반 북한 주민까지 모두 5년 이상의 징역에 무기징역과 사형까지도 가능한 광범위한 처벌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반국가단체 전체의 운영에서 보면 극히 미미한 역할에 불과한 말단 당원과 일반 북한 주민까지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가벌성에 비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과하는 것이어서 법익의 균형성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법규적용자들의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라) 원심 법원의 판단에 대하여


       원심 법원은,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항이 위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 확보라는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함으로써 법집행의 신중성을 제고하도록 하고 있으며, 일정한 정상참작사유가 있는 경우 각 사법절차에서 그에 상응하는 처분을 받을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제3조 제1항이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1조 제2항은 말 그대로 선언적 규정에 그쳤고, 국가보안법이 제한적으로 해석적용된 사례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또한 제3조 제1항이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구성원을 최소한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하여 북한 주민 전체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고 그 중 상당수를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유기징역이라는 중형의 위험에 놓이게 하는 것 자체가 형벌권의 과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헌법 전문 및 제4조 평화통일조항과 배치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하고,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정하여 평화통일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일의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하며, 통일을 위하여 인도와 동포애에 기초한 민족의 단결을 높여야 한다는 헌법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은 통일의 일방이며 동포애에 기초하여 민족단결로 나아가는 동반자인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예정하고 있어, 헌법이 선언한 평화통일의 원칙과 헌법상 정책으로 채택된 평화통일정책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5) 소결론


      이와 같이 국가보안법 제3조 제2항 제1조는 죄형법정주의의 핵심 원칙인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여 헌법 제12조 제1항에 위배되고, 자의적 적용으로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에 반하며, 그 행위유형에 비하여 가혹하고 과중한 형벌로 과잉금지의 원칙을 규정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되고, 헌법 전문과 제4조의 평화통일원칙에 위반되어 위헌무효인 법률이므로, 피고인에 대하여 이 법률을 적용하여 유죄의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 공소사실의 불특정


   원심은 피고인의 변호인들이 제기한 공소사실 불특정 주장에 대하여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시기가 개괄적으로 기재되기는 하였지만 다른 공소사실과 식별이 가능하고 북한에서 피고인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 사실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한 면이 있고, 선임 절차는 경위 사실에 불과한 것이므로 공소사실이 특정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선임 시기를 특정할 수 없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공소사실에는 최소한 선임 일시와 방법은 기재되어야 합니다. 불명확한 공소사실을 부득이한 사정을 이유로 특정되었다고 용인하는 것은 수사의 부실을 용인하는 결과가 되고 맙니다.


반국가단체 가입 및 지도적 임무종사에 관한 범죄사실중에 선임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면 공소사실이 특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보는 검찰의 중요한 증거가 특히 황장엽이 김용순 등으로부터 들었다는 “전문진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의 공소 내용은 피고인이 노동당 규약에 따른 선거가 아닌 김일성 주석의 개인적인 지명에 의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이나, 김일성 주석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및 피고인에게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통보하였는지에 대하여 공소장에 아무런 기재가 없습니다. 공소장에 최소한 김일성 주석이 지명하여 선임하였다는 정도라도 기재가 되어야 공소사실이 특정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임이라는 개념 속에는 선임방법과 절차, 본인이 선임 사실을 인식하였는지 여부 등이 포함되는 것이므로 범죄사실에 있어서도 이와 관련된 부분들이 명기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 종사의 점의 중요한 전제사실인 후보위원의 선임절차, 방법 등에 대하여 공소사실이 불특정되어 있는 이 사건 공소장은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 소정의 범죄사실을 특정할만한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기재가 없어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되어 무효인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의하여 공소를 기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 피고인이 북한의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


    (1) 개요 


     원심은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신문조서, 황장엽의 원심 법정 및 수사기관에서의 각 진술 중 임동옥, 김용순으로부터의 각 전문진술 부분, 김경필이 작성한 대북보고문의 각 기재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후, 다른 증거자료들을 종합하여 피고인이 1991. 5. 방북시 김일성 주석을 면담한 무렵에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심이 증거로 채택한 증거들 중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는 변호인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된 위법수집증거로서 증거능력이 없고, 황장엽의 전문진술이나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은 전문증거로서 형사소송법에서 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지 않아 증거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사 위 증거들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위 증거들과 관련 증거들을 종합하더라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원심은 이처럼 채증법칙위배와 심리미진에서 비롯된 사실오인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습니다.


    (2) 증거능력에 대한 원심 판단의 문제점


      (가) 황장엽의 원심 법정 및 수사기관에서의 각 진술중 임동옥, 김용순으로부터의 각 전문진술 부분


        1) 검찰은 전 조선노동당 비서였다가 1997년 망명한 황장엽의 진술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 여부 및 선임 시기, 선임 방법 등을 입증하는 중요 증거로 들고 있으며, 황장엽은 국정원 이래 원심 법정에서의 증언에 이르기까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김용순과 림동옥으로부터 들어서 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점과 관련된 황장엽의 진술은 제3자인 김용순과 림동옥의 진술을 전달하는 전문진술에 해당하여 원진술자가 사망, 질병, 외국거주 기타 사유로 진술할 수 없고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진 때에 한하여 이를 증거로 할 수 있습니다(형사소송법 제316조 제2항). 김용순은 2003년 10월에 사망하였고, 림동옥은 북한에 거주하여 이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으므로, 황장엽의 전문진술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려면, 원진술자인 김용순과 림동옥의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때 즉 그 진술을 하였다는 것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대법원 2000. 3. 10. 선고 2000도159 판결).


원심은 황장엽이 1998년 민사소송의 본인신문시와 수사기관에서의 2000. 7. 3., 2003. 9. 28., 2003. 10. 7. 각 진술시 및 제8회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시 대체로 일관하여 ① 1991. 5.경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던 임동옥이 황장엽에게 “송교수는 남한에서 영향력이 크고 독일에서 다년간 조직사업을 하다보니 독일에 와 있는 남한 유학생들이 다 그를 따르고 있습니다. 위에서 크게 쓸 생각이고, 송교수에게 주체사상 교육을 시켜야 하는데 통일전선부 산하에는 유능한 학자가 없고, 그 쪽 부서에 주체사상 전문가가 많으니 그들을 동원해서 주체사상을 교육시켜 주십시오.”라고 하였고, 이에 학자들을 보낸 그 무렵 임동옥으로부터 “송교수를 김철수라고 부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②1991년 내지 1992년 초경 김용순이 “송교수를 위에서 직접 후보위원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피고인에 대하여 주체사상을 강의해 줄 것을 부탁하여 피고인을 처음 만났고, ③ 1993년부터 1994년 사이 김일성 장례식 전에, 피고인이 황장엽에게 남한의 잡지사에서 조선역사와 관련한 백과사전을 내는데 그 중 하나의 항목인 주체사상에 대하여 피고인에게 200자 원고지 100매 가량의 원고 집필을 청탁하여 왔다고 하면서 “황선생 직속 연구실 학자들의 방조를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부탁하여 이를 들어 준 일이 있고, 그 무렵 김용순이 피고인을 비방하여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더니 건방지게 되어 말을 잘 듣지 않는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고 인정한 후, 위 ①, ③의 진술에 대하여는 임동옥, 김용순의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다고 인정하여 증거로 채택하고, ②의 진술에 대하여는 김용순이 대남담당 비서로 재직한 시기와 황장엽이 김용순으로부터 피고인에 관하여 들었다는 시기가 불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2) 원심은 위 ①, ③의 진술에 대하여 ㉠ 피고인의 진술 중 1991. 5. 방북시 주체과학원 학자들과 토론한 사실, 주체사상에 관한 원고를 청탁받고 황장엽 등에게 피고인이 쓴 글을 1부씩 준 사실, 실제 한길사에서 발간된 “한국사” 22권에 피고인이 쓴 글이 실린 사실이 인정되어 위 ③부분 황장엽의 진술이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점, ㉡ 임동옥, 김용순과 황장엽은 당시 북한 고위직으로서 업무수행의 필요상 일상적으로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진술을 하게 된 것으로 보여 그 진술 경위에 의심할만한 사정이 없는 점, ㉢ 황장엽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있는 진술을 한 점, ㉣ 황장엽이 피고인에게 나쁜 감정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고 피고인의 처벌로 인하여 어떠한 이익을 받는 바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점, ㉤ 위 ①, ③의 진술 전문시 황장엽의 북한내에서의 지위 및 역할 등을 종합하면, 이 부분 황장엽의 전문진술의 원진술자인 임동옥, 김용순의 각 진술은 그 진술을 하였다는 것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인 정황도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원심이 근거로 들고 있는 사유들은 황장엽의 진술을 일방적으로 신뢰한 것으로서 황장엽의 진술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많다는 점에 대한 피고인의 변호인의 주장에 대한 심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입니다. 황장엽은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남한으로 귀순한 자로서 비록 한 때 북한고위직에 있기는 하였지만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북한체제내의 권력 핵심에서 소외되고 있었으며 결국 망명까지 하게 된 자입니다.


한국에 망명한 후 황장엽은 자의든 타의든 국내 정보기관에 협조하여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피고인을(해외 거주 관계로 방어능력이 떨어지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몰아붙여서 얻게 되는 정치적인 이익이 분명히 있는 자입니다. 황장엽은 이처럼 정치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으로서 피고인에 대하여 허위의 정보를 제공하거나 정보기관과 공모하여 허위의 사실을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그로 인한 개인적인 이익이 있는 사람입니다. 황장엽은 정보기관과의 교감아래(“진실과 허위”는 국정원에서 발간한 책임)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방어가 어려운 피고인을 타겟으로 피고인이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김일성 장례식에 초청받았다는 점을 부풀려 허위의 사실을 유포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뿐만 아니라 황장엽은 1991년 무렵에 대남사업을 담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있는 지위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황장엽의 진술은 오로지 자신의 추측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유죄인정의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이러한 점에 더하여 황장엽의 진술은 그 자체로도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 임동옥과 김용순이 위 ①, ③의 진술을 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허위개입의 여지가 매우 높습니다.


피고인의 진술중 1991년 방북시 이성갑 등의 학자를 만났다는 부분과 한길사에 기고한 주체사상 관련 글을 황장엽 등과 토론한 적이 있다는 사유만으로 임동옥 등의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인 정황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구체적으로 분설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발언 당시 임동옥의 지위에 대한 부정확한 진술

황장엽은 림동옥이 1991. 5.경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남쪽에서 파악하고 있는 임동옥의 경력과 차이가 납니다. 남쪽에서 파악하고 있는 바로는 임동옥은 1993년에야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황장엽은 림동옥을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호칭하다가 이 사건의 검찰 참고인 조사시부터 제1부부장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제1부부장과 부부장이 명백히 구분된다고 하면서도 검찰 조사 이전에는 제1부부장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모순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원심은 이 점에 대하여 황장엽이 최초 진술 당시 76세의 고령이고 8년 정도 후에 진술을 하였으며, 임동옥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무렵에는 망명을 예상하지 못하여 그 시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황장엽 망명시까지 임동옥이 제1부부장을 하고 있어 임동옥이 그 직위에 있는 자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고 이와 같은 세세한 불일치만 가지고 임동옥의 진술이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지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원심 판결의 입장은 황장엽의 입장을 지나치게 선해하는 것으로서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학자이자 망명후에도 다수의 저서를 내며 왕성하게 활동하여 온 황장엽의 지력이나 그의 남한내에서의 지위의 실질에 대한 경시에서 온 것입니다.


황장엽은 분명하게 단순한 부부장은 비서에게 직접 전화를 할 수 없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임동옥이 제1부부장이 된 것은 1993. 11.경이어서 임동옥이 황장엽에게 전화하여 주체사상 학습을 부탁하였다는 시점인 1991. 5. 무렵과는 시간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를 단순히 황장엽이 기억의 한계로 치부하고 황장엽의 전문진술의 신빙성을 쉽사리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임동옥의 지위에 대한 황장엽의 진술의 모순을 진술의 세세한 불일치에 불과하다고 보아 문제삼지 않는 것은 김용순에 대한 전문진술에 대하여 김용순의 발언 당시 통일전선부장이 아니었다는 점을 들어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것과도 모순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범죄사실 인정은 주되게 황장엽의 진술에 의존하고 있고 황장엽의 진술은 결국 임동옥 등의 진술을 전달하는 것인데 황장엽 자신의 직접 경험도 아닌 전문진술을 가지고 유죄 인정을 하면서(특히 황장엽의 전문진술은 원진술자인 임동옥이 공판기일에 출석하여 진술할 수 없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경우임), 위와 같이 원진술자의 진술 당시 지위에 의문이 제기되는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1991년 방북 당시 주체사상 전공 학자들과 토론한 사실이 있다는 점이  임동옥의 진술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하는 외부적 정황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피고인이 1991. 방북 당시 이성갑 등 주체사상 전공 학자들과 토론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피고인이 학자인 관계로 주체사상에 대한 피고인의 학문적 관심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되었다는 사실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피고인의 방북은 대부분 학술 단체들의 초청에 따라 행하여졌습니다. 피고인은 학문적, 연구적 목적으로 북한에 방문하였던 것입니다. 황장엽이 피고인이 북한 학자들과 대화시 서양철학을 인용하는 등 의견 불일치와 토론이 있었다고 한 진술에서 알 수 있듯이, 피고인과 북한 학자들의 만남은 학문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피고인의 학문적 관심에 대하여 북한측에서는 나름대로 우수한 학자들을 동원하여 대응하였던 것입니다.


피고인은 이에 대하여 “저는 임동옥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그런 이야기도 들은 사실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북에서 제일 우수하다는 세 사람을 만나서 토론을 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검찰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 수사기록 2087쪽)


이성갑 등을 임동옥이 주선하여 황장엽이 파견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도 없습니다. 또한 황장엽의 진술만으로는 임동옥이 1991. 5. 당시 피고인과 관련한 업무를 취급하였는지 여부도 분명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피고인과 이성갑 등이 만나 토론하였다는 사실과 임동옥이 황장엽에게 위 ①의 내용과 같은 진술을 하였다는 것을 연결시킬 수 없고, 이 사실만을 들어 임동옥의 진술에 임의성과 신빙성을 담보하는 외부적인 정황이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 피고인이 이성갑 등에게 한길사에 게재된 주체사상 원고를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가지고 김용순이 황장엽에게 하였다는 위 ③의 진술의 신빙성 및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 정황이 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피고인은 위 원고를 가지고 황장엽이나 김용순 등과 토론을 한 적도 없습니다. 황장엽에게 원고와 관련한 부탁을 한 적도 없으며 원고 작성후 추후에 이를 가지고 북측 학자들과 토론을 하였을 뿐입니다.


황장엽이 김용순과 위 원고를 가지고 피고인에 대하여 위 ③과 같은 내용의 논의를 하였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 또한 전혀 제출된 바 없습니다. 즉, 김용순과 황장엽이 위와 같은 대화를 하였다는 근거도 황장엽의 진술을 유일한 근거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한길사 기고 원고에 대한 황장엽의 진술을 보더라도 황장엽은 그 시기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며, 출판사도 “말”지로 기억하고 있고, 진술내용에 있어서도 “원고의 방향과 검토를 지원해 주었다”(수사기록 904쪽)고 했다가 피고인이 “이미 완성한 원고를 황장엽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가(민사소송 반대신문), “황장엽이 쓴 원고를 피고인에게 주었다”(민사소송 주신문)고 하는 등 그 상황에 대하여 엇갈리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민사소송에서 한길사에서 발간된 글이 자신이 검토해준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원심이 인정하고 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원고 검토 작업이 있던 그 무렵 김용순이 피고인을 비방하여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더니 건방지게 되어 말을 듣지 않는다”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는 것인데, 위 ‘원고 사건’과 김용순의 진술사이의 관련성을 인정할 자료가 없고, 위와 같이 원고와 관련한 황장엽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위 ‘원고 사건’이 김용순의 진술의 신빙성 및 임의성을 담보할만한 어떤 외부적 정황이 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황장엽은 자신의 주장을 보강하기 위하여 자신과 피고인 사이에 있었던 일을 과장하여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에 사이에 자기 자신이 유일한 근거인 김용순 등의 전문진술을 끼워넣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체사상 원고와 관련한 피고인의 진술과 황장엽의 진술이 일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황장엽의 진술에 여러 가지 모순들이 존재하고 ‘원고 사건’ 자체에 대하여도 불확실하게 진술하고 있는 한, ‘원고 사건’만으로 황장엽이 전하는 김용순의 진술의 신빙성과 임의성을 담보할만한 외부정황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 황장엽이 피고인의 후보위원 선임 여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추측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시기에 대하여도 황장엽은 1991. 5.이라고 하였다가 원심 제8회 공판기일에서는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이 사건 검찰조사에서는 피고인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도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황장엽은 송두율이 어떠한 활동을 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는지, 왜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검찰 진술조서 6쪽). 황장엽은 피고인이 대남공작을 총괄하기 위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다고 하다가 인텔리를 포섭하기 위하여 선임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등 그 진술이 일관되지 않습니다. 또한 황장엽은 피고인이 한 과거 또는 현재의 어떠한 대남공작활동 내용에 대하여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도 피고인이 대남공작활동에 종사하여왔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민사소송 본인신문에서는 북한에서는 대남사업하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한 사람만을 후보위원으로 뽑아 왔는데 이선실 대신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어 대남사업을 총괄하게 된 것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해외동포이자 학자로서 대남사업을 실제로 진행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도 않았고 그 어떠한 대남사업조직과 연계하여 활동한 바도 없습니다. 이 또한 황장엽의 진술이 오로지 추측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피고인이 주체사상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있는데(2003. 10. 7.자 검찰 진술조서 5쪽)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주체사상의 구현체인 당의 최고 권력기관의 최고위급 간부로 임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또한 황장엽은 정치국 후보위원이 선거로 선출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명하면 후보위원이 선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황장엽 자신도 그와 같은 사례를 들지 못하고 있으며 그와 같이 말하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일성이 지명하더라도 사후적으로라도 당에서의 인준절차를 거쳐야 할 것인데 당에서의 인준절차에 대하여 황장엽이 진술하고 있는 바는 없으며, 선임 여부의 통보 여부조차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2003. 9. 28. 국정원 진술조서 890쪽) 황장엽의 진술을 다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김일성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길이 없는 바, 황장엽의 진술만으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정식으로 선임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황장엽은 김철수가 피고인이라는 것을 당의 농업담당비서조차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2003. 9. 28. 국정원 진술조서). 그러나 정치국이 비공개조직이 아닌 한 주요 간부인 후보위원을 당 비서가 모른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황장엽은 자신이 정치국 회의에 거의 참석하였다고 하면서도 김철수는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는데(민사소송 본인신문), 만약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라면 김철수가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회의에 참석한 황장엽은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라는 것을 회의를 통하여 알 수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황장엽이 피고인이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임동옥, 김용순으로부터 들었다는 진술밖에 없는 바, 이는 황장엽이 정치국 회의에 계속 참석하였다는 주장과 배치되는 것이며 황장엽의 진술이 허위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황장엽은 “후보위원이 아니라면 김일성을 단독 면담하고 면담후 수일 동안 송두율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겠습니까. 송두율이 부인하고 있다면 어떻게 입증하겠어요”라고 하고 있는 바(검찰 진술조서 7쪽, 3090쪽), 황장엽이 피고인을 후보위원이라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중의 하나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김일성을 단독 면담하고 북한언론에 보도된 해외동포는 수십명이나 됩니다.


황장엽은 심지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김경필의 이야기를 자기 근거로 들기까지(2000. 7. 3. 국정원 진술조서) 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1998년 손해배상소송에서 “김철수는 사진을 절대 찍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조문과 장례식때 여러 장의 사진이 찍혀 TV나 노동신문, 중앙연감에 공표되었습니다. 황장엽은 “대남사업하는 사람들은 가명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여 피고인이 김철수라는 가명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대남사업을 한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하였습니다(1998년 민사소송 피고본인신문조서).

황장엽은 1999. 2.에 쓴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라는 책의 부록에서 노동당기구를 분석, 게시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증제16호증). 이 책 출판 당시는 이미 황장엽이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라고 밝힌 시점인데 자신의 그 후 저술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 것입니다.

 

㉥ 황장엽은 검사 및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조서의 내용에 조사자들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였습니다.(“그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물으니까 그때 그렇게 됐지. 묻는 사람들이” 제8회 공판기일 황장엽에 대한 증인신문조서 中). 


황장엽은 북한 체제의 권력투쟁에서 낙오하여 남한에 망명한 자로서 황장엽이 북한 체제의 상황에 대하여 진술한 내용은 정보기관이나 공안당국에 의하여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법정에서의 증인신문에서 황장엽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황장엽은 망명후 입국 당시부터 북체제의 개방을 요구한다고 하였다가 북한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모순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증제17호증의 2 동아일보 기사)


㉦ 황장엽은 김일성 장례식에 유럽 지역에서 많은 수의 해외동포가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정일이 피고인만 초청한 것처럼 진술하기도 하였고(1998년 민사소송에 제출한 피의자본인신문에 대한 답변서 3쪽), 김일성 장례식의 장의위원이 몇 명인지 해외동포와 관련하여 어떤 행사가 진행되었는지 등에 대하여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위 민사소송의 피고 본인신문조서).


이러한 점으로 보건대 실제 황장엽은 1990년대 초반에는 북한 권력기관의 핵심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이에 대하여는 자신의 저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도 언급하고 있음), 업무(국제담당비서)상으로도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 황장엽이 전하고 있는 김용순과 임동옥의 진술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피고인을 선임한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김용순과 임동옥이 어떠한 경로로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 게다가 황장엽은 임동옥이 “송교수는 젊고 또 청년들 속에서 인기도 있기 때문에 장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위에서 그를 직접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하였다고 국정원 이래 수사기관에서 진술하여 왔으면서 원심 제8회 공판기일에서는 “젊고 또 청년들 속에서 인기도 있고 ...”와 같은 말은 기억이 안나고, “위에서”라는 말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비서들은 “위에서”와 같은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심이 인용하고 있는 임동옥의 진술 내용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황장엽 관련 조서나 진술서 작성시에 황장엽 자신의 진술이 그대로 기재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목적하에 수사기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3) 소결론


         이상 검토한 바와 같이 황장엽의 이 법정 및 수사기관에서의 각 진술중 임동옥, 김용순으로부터의 각 전문진술은 허의개입의 여지가 매우 높고 김용순, 임동옥의 진술의 신빙성 및 임의성을 담보할만한 외부적인 정황이 존재하지 않는 바, 그 진술이 특별히 신빙할만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이 분명하여 증거능력을 인정하여서는 아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위와 같은 허위개입의 여지 및 원진술자의 진술의 신빙성,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 정황에 대한 심리를 함에 있어서 황장엽의 북한에서의 지위 등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황장엽의 진술을 일방적으로 믿고 이를 증거로 채택, 범죄사실 인정의 주요 근거로 인정하는 위법을 범하였습니다. 


      (나) 3.5인치 디스켓 2개(증 제1호) 및 그 출력문서인 각 대북보고문의 증거능력


         1) 원심은 검사가 제출한 위 디스켓 출력문서중 “1996년 독일 주재실 사업총화보고서”(TZR.BAK), “송두율과의 면담정형과 대책적 의견”(THD.BAK), “송두율 부부를 만난 정형과 대책적 의견”(DSF.BAK), 송두율을 만난 정형과 대책적 의견“(POO.BAK), "김관기 동무에게"(RHKSRLDP.BAK), “독일 주재실 상반년 사업총화보고서”(TKD.BAK)를 증거로 채택하여 피고인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스켓 출력문서는 전문증거로서 자필이거나 서명날인이 없어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이 적용 대상이 아니고, 가사 제313조 제1항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그 작성자가 김경필이라는 점을 인정하기 어렵고, 김경필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김경필이 공판기일에 참여하여 성립의 진정함을 진술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충분히 소명되지 않았으며, 더 나아가 김경필의 보고문 작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것으로 보기 어려워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2)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특수성 : 자필과 서명, 날인이 없는 서류로서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한 전문법칙의 예외규정이 적용될 사안이 아님.

 

         원심은 이 사건 디스켓은 원래 서명 날인이 적합하지 않은 증거방법이므로 이 사건 디스켓에 작성자인 김경필의 서명, 날인이 없다는 사정만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에 증거능력이 부여되려면 제313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하여 디스켓 저장문서가 김경필의 자필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거나 서명, 날인이 있어야 합니다. 피고인이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에 자필이나 서명, 날인을 요구하는 이유는 작성자나 진술자를 분명하게 특정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전문법칙의 예외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필이나 서명, 날인에 의하여 작성자를 확정할 수 없는 진술서에 대하여는 전문법칙에 대한 예외 규정인 제313조 내지 제314조 자체가 적용될 여지가 없습니다. 자필로 작성된 경우 그 필적을 확인하여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컴퓨터 워드 작업을 통하여 출력된 문서는 특별히 이를 표시하지 않는한 작성자를 특정하기가 곤란합니다. 디스켓 저장문서를 일반적으로 제313조가 적용되는 문서라고 본 위 대법원 판례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확대해석한 것으로서 법률해석의 범위를 벗어난 것입니다.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에 의하여 작성된 피고인이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는 출력된 문서에 작성자의 서명, 날인이 있거나 디스켓 자체에 작성자를 특정할 만한 표시가 있는 경우에만 제313조 제1항 소정의 전문법칙의 예외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김경필의 자필로 작성된 것이 아니고, 한글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문서가 디스켓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력문서에는 김경필의 서명, 날인이 없습니다. 디스켓 자체에도 김경필 자신이 작성한 것임을 표시한 어떠한 표지도 없습니다.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진정성립 여부를 진술할 수 없고 그 작성이 특별히 신빙할만한 상태하에서 행하여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판단함으로써 증거능력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위와 같은 형식적 요건이 충족되고 난 다음 단계의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제313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예외가 적용되는 서류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서 제314조에 의하여 특신상태를 판단할 필요도 없이 증거능력이 없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각 대북보고문의 작성자가 김경필임을 특정할 수 있는지 여부.


         원심은 제6회 공판기일 중 증인 최창동의 진술기재, 외교통상부 장관에 대한 2004. 1. 30.자 사실조회 회보서의 기재, 검사 작성의 제2회 피의자신문조서의 진술기재, 각 조선신보(증제 18호 내지 22호)의 각 기재 및 현존 등을 종합하여 최창동과 김경필이 컴퓨터를 교환하여 사용하다가 최창동이 대북보고문을 발견, 복사, 보관하였고 귀국시에 안기부에 제공한 사실, 김경필은 1994. 9.말-10초순경 독일 주재 북한 이익대표부의 2등 서기관으로 발령받아 그 이익대표부에 부임한 북한의 통일전선부 소속 공작원으로서  부임 이래 1999. 1. 경까지 교포, 유학생, 친북단체 등을 접촉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혼자 전담하여 온 사실, 이 사건 대북보고문이 북한 당국에 대하여 당시 독일 거주 교포나 유학생, 범유본 등 친북단체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이를 조정하는 등의 활동상황을 보고하고 그들에 대한 향후 대책 의견을 제시하는 내용의 보고문 형식의 글이므로, 이 사건 디스켓 입수 경위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 의 내용과 형식 등을 종합하면 대북보고문의 작성자가 김경필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디스켓 안에는 김경필이 작성한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한 서류가 상당수 들어 있어서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의 작성자가 김경필인지 여부를 분명하게 특정할 수 없습니다. 이는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김경필 외에 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나 피고인과 관련된 내용 역시 김경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99년 당시 베를린 주재 북한이익대표부에는 10명의 직원이 있었고(외교통상부장관의 2004. 1. 30.자 사실조회 회신), 최창동의 진술대로 북한이익대표부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1997년 무렵이라면 이 컴퓨터를 이익대표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독일어를 번역한 문서(최창동은 이 법정에서 김경필이 독일어 사용능력이 없다고 진술한 바 있음)나 일상적인 경제거래업무와 관련된 내용의 글, 리영빈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글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피고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내용도 다른 누군가가 작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런 점 때문에 원심에서도 일부 문서에 대하여 작성자를 특정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김경필만이 해외동포 관련 사업을 하였고 다른 이익대표부 직원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만한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주재성원이 김경필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여러 문서에는 “주재성원”을 “김형필”이라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김선생” 명의의 여러 문서가 김경필이 작성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최창동은 김경필이 김형필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최창동의 증인진술).   


문서 작성자가 독일주재실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독일주재실이 김경필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불명확합니다.


이상과 같은 점으로 보건대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의 작성자가 김경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4) 김경필이 공판기일에 출석하여 대북보고문의 진정성립에 대하여여 진술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충분한 증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지 여부.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진술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 분명하게 입증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법무부의 수사공조요청에 대한 회신에 의하면 “김경필의 소재는 파악되었으나 본인이 송두율 사건에 증언하기를 원하지 않고 있음”하고 있을 뿐입니다. 최소한 소재지의 개략이라도 포함되어 있어야 하나 사실조회 회신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실재로 김경필이 진술할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국정원 수사관인 증인 이재식은 김경필의 소재 확인 노력을 다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어떤 노력을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보안을 핑계대고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검찰은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진술할 수 없다는 점에 대하여 증명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에 대하여 제314조의 예외가 적용될 여지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5) 이 사건 대북보고문 작성이 특히 신빙할만한 상태에서 행하여졌는지 여부.


           가사 김경필이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을 직접 작성하였다고 하더라도 컴퓨터 플로피 디스켓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김경필 자신에 의하여, 혹은 최창동에 의하여, 혹은 정보기관에 의하여 디스켓의 내용이 변조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① 피고인 스스로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에 기재된 자신의 진술이 일부 표현을 달리 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외에는 허위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는 점, ② 송환 장기수 전창기에 대한 부분이 허위가 아님을 인정할 수 있는 점, ③ 대북보고문에 피고인에게 유리할 수도 있는 진술들이 포함되어 있는 점, ④ 각 대북보고문이 북한의 공작원인 김경필이 북한 당국에 대하여 자신의 활동상황을 보고하는 형식의 문서인 점, ⑤ 김경필 망명후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최창동이 김경필의 컴퓨터 입력자료를 절취한 사실을 비난한 점 등을 종합하여 김경필이 이 사건 디스켓에 담긴 문건들을 작성하였다는 것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기재에 신빙성이나 임의성도 있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가) 원심 판시 근거들에 대한 검토


① 피고인 스스로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에 기재된 내용이 허위가 아님을 인정하였는지 여부


피고인의 진술중 검사가 김경필 보고문을 제시한 것에 대하여 “대체로 맞다, 전체적인 취지는 맞다”는 등의 내용은 검사가 그때그때 제시한 해당 부분 보고문 내용에 국한하여, 피고인이 답변한 전후 취지를 종합하여 그 의미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피고인은 대부분 그 내용 중에 사실인 부분도 있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만난 사실 및 대화의 주제 등이 비슷하면 위와 같은 표현으로 답변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마치 피고인이 김경필이 작성한 내용을 모두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피고인의 진술 중 검사가 대북보고문 1104면 이하를 제시하고 “보고문에 기재된 내용이 모두 사실이지요”라고 한 것에 대하여 “예 맞습니다.”라고 한 것은(검찰 3회 피의자신문조서, 수사기록 2160쪽) 해당 1104면에 기재된 뮌스터대학 강의문제, 훔볼트대학 취직문제, 미국에 가는 문제 등의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보고문의 내용전체에 대하여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피고인의 진술 중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후의 문맥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3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2155쪽)라는 부분은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보고문 기재 내용과 같은 상황(김경필과 만나 황장엽 망명 문제와 가명 사용문제에 대하여 논의한 사실)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음을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심이 판결문 48쪽과 49쪽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고인의 진술 사례 역시 위와 같은 취지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위 진술들은 대북보고문의 내용이 허위가 아니라는 점에 대하여 피고인이 확정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일부의 모호한 진술만을 가지고 생사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김경필이 작성하였다고 주장되는 대북보고문의 기재 내용에 허위 개입의 여지가 전혀 없고 임의성과 신빙성이 있다고 곧바로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② 전창기 문제 및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이 기재되어 있다는 점에 대하여


  전창기라는 인물이 실제하였다는 점 혹은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이 일부 기재되어 있는 점만을 가지고 대북보고문 작성의 임의성과 신빙성을 인정하기에는 부족합니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이 기재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만의 하나 최창동 등에 의하여 디스켓 저장문서의 내용이 변조되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진술 때문에 오히려 허위 기재되어 피고인에게 불리한 내용이 진실인양 오인될 수가 있어서 결코 이를 피고인에게 유리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글 내용의 유리, 불리 여부를 가지고 ‘특별히 신빙할수 있는 상태’ 여부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③ 최창동의 디스켓을 국정원에 제출하자 김경필이 망명한 점 및 북측에서 이를 비난한 점에 대하여


  김경필이 망명을 하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김경필 컴퓨터 저장내용을 최창동이 절취하여 김경필을 납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하여, 김경필이 작성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문서들이 전부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김경필의 망명이 자신이 관리하는 정보가 유출되어 북한 당국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정황은 될지언정 그 자체로 피고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문서가 김경필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라는 점 및 그 작성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없다는 점이나 그 진술의 신빙성이나 임의성까지 뒷받침할 수는 없습니다.


           나) 허위개입의 여지

            

① 기술적인 변조가능성


  한글프로그램으로 작성된 문서를 플로피 디스켓에 저장하면서 새로운 내용의 문서를 원래부터 있던 문서인양 작성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최창동이나 김경필이 사용한 한글 프로그램은 국내 회사인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한 것으로서 작성일자를 설정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기능이 있으며, 작성일자를 김경필이 해당 컴퓨터를 사용한 시점으로 설정하고 원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한 후 새로 작성한 문서를 삭제하면 임의로 작성일자가 설정된 변경된 문서의 BAK.파일만이 남게 되고 이를 플로피디스켓에 복사명령어를 사용하여 그대로 복사하면 플로피디스켓에는 내용은 원래 문서와 다르지만 작성일자는 동일한 문서가 저장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최창동이 김경필의 컴퓨터에서 자료를 입수하였다는 시점이후에 언제든지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디스켓에 표시된 입력날짜는 문서의 작성 시기 및 진정성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는 최창동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충분히 변조가 가능한 것입니다(원심 감정인 양왕성이 작성한 감정서의 기재도 같은 취지입니다).


② 최창동이 김경필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방하였을 가능성


  최창동은 자신과 김경필은 언어 사용방법이 다르다고 강변하나, 김경필과 컴퓨터를 바꾸어 사용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면 최창동이 김경필이 사용하는 북한의 언어를 표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서류를 재작성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③ 디스켓 안에는 최창동 자신이 작성한 문서가 상당수 저장되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최창동은 여러 가지로 변명하고 있지만 그 변명 내용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최창동이 이 사건 디스켓을 이용하여 여러 차례 필요한 문서를 저장하고 삭제(수사기록 1195쪽)하기도 한 이상 최창동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를 직접  변조하였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할 것입니다.


④ 최창동의 경력 등


  최창동은 해직교수라는 미명하에 범민련 유럽본부에 접근하여 일을 하다가 범민련 관련 자료와 이른바 ‘김경필 파일’을 가지고 귀국하여 공안당국에 자수한 자로서 피고인과 관련된 내용을 공소유지에 유리하게 변개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창동으로서는 범민련 유럽본부에서 제적당한 후 귀국하는 마당에 정보당국에 그럴듯한 “선물”을 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김경필 파일”에 담긴 피고인 관련 내용은 그 중에서도 아주 정보가치가 높은 것이어서 최창동 스스로 혹은 정보기관과의 협력하에 내용의 일부를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일 수 있도록 내용을 수정,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망명을 하게 된 김경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창동이 자수 당시인 1998. 10.경 1998. 6. 발간된 황장엽의 “진실과 허위”에서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지칭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점도 최창동이 피고인을 타겟으로 삼아 문서 내용을 변조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최창동의 원심 증인 진술).   


⑤ 같은 보고서안에 “상층통일전선대상”이라는 용어와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모순된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도 변조 의혹을 가지게 합니다. 

    

⑥ 감정인 양왕성의 감정서 기재에 의하면, 디스켓 1에 저장된 문서 중 수정일자가 96-01-31인 문서들의 경우 작성 버전이 모두 한글 3.0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96-02-01 및 기타 문서들은 모두 2.0버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디스켓 2.에 저장된 문서들의 작성일자, 작성방식으로 유추하건대 이 사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들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작성, 저장되는 경우는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위와 같은 형태의 작성일자나 작성버전으로 보아 96-01-31에 최창동에 의해서든 디스켓 저장문서 작성자에 의해서든 정상적인 문서 작성이 아닌 어떠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였음을 추측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이 사건 디스켓 저장 문서의 변조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알 수 있는 바, 디스켓 작성자가 공판기일에 출석하여 작성의 진정함을 수 없는 이 사건의 경우에 상기와 같은 정도의 허위개입의 가능성이 예상된다고 한다면 디스켓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최창동이 피고인이 황장엽 등과 대화한 내용 등에 자신이 필요한 내용을 임의로 삽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증거능력이 인정된다면 피고인은 반대신문이 보장되지 않는 허위의 증거에 의하여 범죄사실이 인정되는 매우 큰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전문법칙이 원칙적으로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전문증거 자체에 이와 같은 매우 큰 위험성(허위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판례는 원진술자가 공판기일 등에서 성립의 진정에 대하여 진술할 수 없을 경우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없다는 점과 진술의 신빙성과 임의성을 답보할 외부적 정황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심은 기술적인 변조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이 사건 디스켓의 경우는 변조가능성이 없다고 판시하고 있으나, 변조가 범죄사실에 관한 주요 부분에만 이루어지더라도 판결 결과에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므로, 기술적으로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변조가능성이 높다는 사정이 충분히 밝혀진 이 사건의 경우에는 디스켓 출력 문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습니다.

 

          다) 진술의 신빙성, 임의성 및 임의성을 담보할 외부적 정황이 있는지 여부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을 보면 북한 통일전선사업부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업적을 포장하거나 보고내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하여 자기 생각을 피고인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북에 보고한 것이 많습니다. 김경필 보고서의 기재 내용은 사실관계가 부정확하고 과장되어 있으며, 언어 사용이나 사실 묘사에 있어서도 왜곡되고 과장된 부분이 곳곳에 있습니다.


① 김경필의 보고 내용 중 이미 언급한 부분 이외에도 사실 왜곡 사례로 들수 있는 것으로 ‘피고인이 1996년경 중앙일보로부터 공작금을 받는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충고를 듣고 이를 거절하였다’는 내용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실은 당시 피고인의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중앙일보사가 조의금으로 보내온 돈을 다른 언론사와의 관계를 감안하여 거부하였던 것으로 김경필 보고서의 내용과 실제 사정과는 아주 다릅니다. 


② 피고인의 집에 방문한 김경필이 피고인이 살림이 어려워 난방도 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은 실제 피고인이 실내공기가 건조하면 천식발작을 일으켜 겨울에도 스팀을 약하게 가동한 사정이 있는 것인데 김경필은 이를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보고서에 왜곡 기재하였던 것입니다. 


③ 재독 동포 사업가인 임희길을 통하여 북한에서 독일 전화번호부를 생산하여 독일로 들여오는 문제를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한 것처럼 기재하고 있는 내용도 기실은 김경필이 외화벌이 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피고인의 집에 수시로 찾아와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소개하여준 임희길을 만나게 해달라고 자기가 애달아했으면서도 이를 북에 보고할 때에는 자신의 체면이나 편의를 위하여 마치 피고인이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처럼 하여 실제 내용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김경필의 보고서중 피고인이 북과 ‘30년간 연계’하였다는 말이나 ‘지난 시기 비공개활동을 하였다’는 등의 말도 사실과 다릅니다.


보고서에는 “연계”, “비공개활동”등의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마치 피고인이 비공개로 북의 지시를 받으며 비밀활동하였다고 오해될 소지를 주고 있으나 피고인은 1970년대, 80년대에 간헐적, 일회적으로 학술연구를 위해 북에 가거나 독일에서 합법 공개활동을 한 것에 불과하며, 독일에서 북한과 연계한 어떠한 비밀활동이나 조직활동을 한 바가 없습니다.


피고인은 원심 보충반대신문(제10회 공판기일)에서 1970년대 방북 이유와 1980년대 방북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1970년대에는 당시 유럽의 학계에서 중요하게 토론되고 있던 사회주의 생산양식, 가치론 논쟁 등이 북한의 현실에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방북하였으며 그 결실이 1982년의 교수자격취득 논문인 “소련과 중국”등에 반영되었고, 1980년대에는 페레스트로이카 등 사회주의권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북한 사회주의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에서 방북하였던 것이고 그 결과물이 1995년에 발간된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등에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과거 방북은 피고인의 학문적 관심과 연관지어 파악해야 합니다. 당시 방북은 남북관계 현실상 공개적으로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이 감안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방북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여 피고인이 북한의 대남공작 조직에 가담하여 비밀활동을 한 것으로 등치시킬 수는 없습니다. 방북시에 한국 여권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 피고인은 북과 연계하여 조직적인 비밀활동을 한 바가 없습니다.


⑤ 피고인은 김경필에게 학술회의를 북한 통일정책의 선전장으로 이용하자고 말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경필은 그와 같은 취지로 북에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편 김경필은 그와 같이 보고함으로써 피고인의 편을 들어 통일학술회의 성사에 협조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6) 소결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최창동이 저장하였다는 디스켓에 담긴 대북보고문은 작성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특정하기 어렵고, 형사소송법 조문상 예상하고 있지 않은 전문증거로서 기술적, 현실적으로 변조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경필이 법정에 출석하여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도 없어 실제 김경필이 작성한 것인지 여부 및 그 내용의 진실성을 공판기일에서 법관의 면전에서 진정성립을 확인하고 피고인의 반대신문이 이루어진 경우와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등 보고문의 작성이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는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형사소송법이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지 아니하여 증거능력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다)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각 피의자신문조서의 각 진술기재


        원심은 피의자신문시의 변호인의 참여권은 구속 피의자의 권리로서  불구속 피의자에 대하여까지 인정된다고 할 수 없고, 피의자신문시에 변호인이 적극적으로 조언을 하는 정도에 이를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일단 참여가 허용된 상태에서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를 위법수집증거로 볼 수는 없으므로, 불구속 상태에서 작성된 제1회 내지 제20회 피의자신문조서는 그 신문시 변호인의 참여 혹은 실질적인 참여가 허용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이유로 위법수집증거라고 할 수 없고, 제31회 내지 제36회 피의자신문시에는 변호인의 입회가 허용된 이상 개개 신문에 대한 변호인의 조언 등 이 허용되지 않았다고 하여 위법수집증거라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구속 이후 변호인 참여가 불허된 제21회 내지 30회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하여만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피의자신문시 변호인의 참여권은 구속 피의자뿐만 아니라 불구속 피의자에 대하여도 인정되어야 합니다(헌법 제37조 제1항). 피의자신문 과정에서 변호인 참여를 통하여 조력을 받을 필요성은 구속 여하에 따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구속 상태였지만 변호인의 참여신청을 불허한 상태에서 작성된 검찰 1, 2, 3회 피의자신문조서 또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원심에서 1, 2, 3회 피의자신문시에 변호인의 참여신청이 있었느냐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는 바, 그에 관하여는 원심 법원에 제출한 2003. 12. 30.자 변호인 의견서 4.항과 첨부자료를 원용합니다. 검찰 1, 2, 3회 피의자신문시 서면으로 변호인 참여를 신청하지는 않았으나 변호인 참여가 핵심적인 이슈가 되어 있었고 국정원 이래 변호인이 지속적으로 참여를 요구해왔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며, 변호인의 참여를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는 수사기관의 태도에 비추어 참여신청서를 작성할 것을 기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참여신청서 작성은 변호인 참여가 허용된 4회 신문시 검찰측의 신청서 양식 교부가 있으면서 비로소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변호인의 참여권은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검찰 4회 내지 20회, 31회 내지 36회 피의자신문조서). 단지 참관만 허용되고 수사과정에 전혀 어떠한 조언을 할 수 없거나, 서명, 날인과정에 실제 진술과는 다르게 불리하게 기재된 진술을 수정하는데 변호인이 조언을 할 수 없다면 변호인의 조력을 충분히 받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의자신문시 변호인의 참여권을 인정한 대법원 2003모 402 결정에서 ‘신문을 방해하거나 수사기밀을 누설하는 등의 염려가 있다고 의심할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것이 객관적으로 명백한 경우가 아닌한 변호인의 참여를 제한할 수 없’고,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충분한 조력을 받을 권리를 의미’하며, ‘피의자신문을 받는 도중에라도 언제든지 변호인과 접견교통하는 것은 보장되고 허용되어야 한다’고 설시한 취지도 변호인의 참여권은 충분하게, 실질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여야 할 것입니다. 


수사과정에서 적극적인 조언을 하는 것이 수사에 방해가 될 수 있어 제한할 수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최소한 피의자신문 후 조서에 서명, 날인하는 과정에서는 함께 조서 내용을 검토하고 피의자가 진술한 내용과 조서에 기재된 내용의 일치 여부에 대하여는 변호인이 조력을 할 수 있어야 피의자신문에 변호인이 참여하여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조력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는 신문 중에 피고인에게 조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은 것은 물론 피고인에 대한 피의자신문 종료 후 조서에 서명, 날인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의 진술이 실제 진술과 다르게 기재되더라도 이를 변호인의 조언을 통해 정정할 수 있는 기회가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피고인에 대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는 변호인의 참여가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되거나 실질적인 참여가 허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된 위법수집증거로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라) 각 대북보고문에 기재된 피고인으로부터의 전문진술의 증거능력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가 전문법칙의 예외를 적용하는 대상이 되는 김경필 작성의 진술서임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진술이 기재된 부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 단서에 의하여 김경필의 진술에 의하여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성립의 진정이 증명되고, 피고인의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때에 한하여 피고인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증거로 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 법정에서나 수사과정에서 대북보고서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상황과 많이 다르고 과장, 왜곡되었음을 지적하여 왔습니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보고서에 사용된 용어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피고인이 김경필과 만났다는 것을 인정한 경우에도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에서 인용하고 있는 피고인의 진술은 피고인이 실제로 한 적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하였더라도 피고인의 진의와 다르게 해석하여 보고문이 작성됨으로써 김경필 자신의 사업성과를 과장하거나 자기 생각을 타인의 입을 빌어서 전달하고 있는 바, 피고인의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졌다고 보기 어렵다고 할 것이므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마) 소결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원심은 황장엽이 전언하는 임동옥, 김용순의 진술,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의 기재 및 이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 피고인에 대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 등 각 증거능력이 없는 서류 및 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위법이 있습니다.


  (3)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

    (가) 원심 판결의 요지


      원심은 ① 김일성, 오진우 장례식 장의위원 명단이 그 이전까지 공개된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명단과 일치한다는 점, ② 피고인이 저술한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북한의 권력구조를 분석한 부분에서 김철수를 후보위원으로 분류한 점, ③ 북한이 김일성의 지명만으로 후보위원이 될 수 있는 인치사회이고,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더라도 본인에게 반드시 선임 여부를 통보하는 점, ④ 피고인이 1991. 5.경 김일성을 면담한 점, ⑤ 1991년 전후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하여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김일성 체제를 찬양하는 저술활동을 한 점, 한국학술연구원을 재건하여 유학생들에게 북한 체제를 홍보한 점, ⑥ 1991. 5.경에 한 임동옥의 진술에 대한 황장엽의 전문진술, ⑦ 1993년 내지 1994년 무렵의 김용순의 진술에 대한 황장엽의 전문진술, ⑧ 피고인이 황장엽 망명시 김경필에게 우려를 표시하고 가명 사용 등을 중단해달라고 요구하자 김경필이 모략선전으로 반박하라고 지시하고 이에 황장엽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점,  ⑨ “지도기관성원”이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칭하는 점, ⑩ 노동당 가입 및 입북 사실을 숨긴 점 등을 종합하여 피고인이 1991. 5. 14. 김일성 주석을 면담할 무렵까지 대한민국 및 독일 교포사회에 주체사상을 전파하여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북한 김일성 체제를 찬양, 선전한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피고인도 이에 대하여 통보를 받았으며, 다만 그 이후로도 대남 통일전선사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피고인의 본명 대신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을 인정하면서, 김철수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표시하고 있는 공식적인 자료가 없는 점, 피고인이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는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할 증거가 없는 점,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에서 피고인을 “상층통일전선대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이 위와 같은 사실인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습니다.    


    (나) 원심이 적시하고 있는 후보위원 선임 근거에 대한 반박


      1) 장의위원 명단과 그 이전까지 공개된 후보위원의 명단의 일치.


       이 점에 대하여는 원심 증인 유영구 등에 의하여 사회주의 사회에서 국가 지도자 사망시 장의위원 명단이 권력서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하여 충분하게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에서 김일성 장의위원 명단에 김병식이나 김철수 등이 포함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사회당의 김병식, 천도교 청우당의 유미영 등이 장의위원 명단에 포함된 것도 장의위원 명단이 당 권력 서열과 무관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1994. 7.에 발표된 김일성 장의위원 명단과 1995. 2. 발표된 오진우 장의위원 명단에 김병식이 6개월도 되지 않아 7번째에서 20번째 바깥에 기재된 점으로 보더라도 장의위원 명단이 권력서열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장의위원 명단은 의전을 위한 것으로서 노동당 서열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2)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피고인은 자신의 저서인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에 김철수를 후보위원으로 표시하였다가 마치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것을 자인한 것으로 오인받았고 원심도 사실상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김철수를 후보위원으로 표시한 것은 책의 서술상 필요에 의하여 권력구조의 변동을 분석하다가 그렇게 표시하였던 것일 뿐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을 알고 이를 표시한 것이 아닙니다. 즉, 피고인이 위 책에서 김철수를 후보위원으로 표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가 객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라고 하더라도 곧바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의위원 명단은 조선노동당 서열과 관계없는 의전적인 성격이 짙고, 김철수는 조선노동당 간부가 아니지만 장례식 의전을 위하여 명단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피고인이 장의위원 명단을 분석자료로 삼은 것은 당시 북한 권력구조에 대한 별다른 자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북한 권력층의 변화에 관한 내용은 특별한 자료가 없어 워싱턴에서 출간된 북한학 개설서(Area handbook North Korea, 1989)에서 인용한 것이고,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해당 부분은 위 개설서에서 인용한 도표의 분류체계에 맞춰 장의위원 명단을 분류, 정리한 것으로 위 개설서의 체계를 따른 이외에 정리를 위한 일관된 무슨 다른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피고인이 북한 권력 내부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또 다른 반증입니다.


피고인은 김기남이 비서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고 비서 앞은 후보위원이라는 당연한 상식에 따라 비서 김기남 앞에 적혀 있는 김철수까지를 정치국위원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을 표시하는 부호 “2. k"로 표시된 것은 분석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재된 것일 뿐 피고인이 스스로 후보위원이라고 자인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피고인은 1994. 7.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대받아 장례식에 참석한 후 김철수의 장의위원 서열로 보아 자신이 후보위원급으로 대우받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주관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당 기구와 절차를 통하여 어떠한 공식, 비공식 통보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북에서 실제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피고인이 후보위원급 대우를 받는다고 주관적으로 짐작하게 된 것 역시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피고인은 위 책의 문제되는 부분에서 북한의 파워엘리트 중 항일빨치산 출신, 외국 유학경험이 있는 사람, 외교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분석함으로써 북한 권력체제의 연속성과 변화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 부분의 서술에 있어서 노동당 고위 당직자들의 직책이나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는 독일 통일에 비추어 한반도 통일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철학, 원칙 등을 서술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북한 내부의 권력구조에 대한 전문 연구서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북한권력구조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내용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원심 법정에서 감정증인으로 진술하였던 박순성이 제출한 증제10호증 “김철수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피고인의 분석 방법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분석의 오류를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정치국 후보위원과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되어야 하는데 1993. 12. 이후 당중앙위원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 일차적으로 송두율의 분석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1993년 12월 이후 재구축되지 않았으며, 재구축을 위해서는 최소한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되어야 함을 무시하고 있다.

   ○ 6차 전당대회(1980. 12) 정치국 구성과 관련하여 후보위원 중 정경희와 최영림을 누락하고 있다.

국가장의위원회(1994. 7. 9) 명단에서 윤기복(1980년 6차 당대회)과 박남기(1984년 9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박순성은 결론적으로 송두율의 분석은 제한된 자료로 북한 조선로동당 권력구조의 연속성과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고 판단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할 때, 피고인이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에서 장의위원명단을 기초로 북한 권력 구조를 분석하면서 김철수를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표시한 것은 분석 방법론의 타당성, 분석상 오류 및 분석자료의 부족함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는 바, 위 책자에서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음을 자인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3) 북한은 김일성의 지명만으로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될 수 있는 인치사회인가.


      이 부분은 원심 판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원심은 기본적으로 북한 노동당은 당 규약에 있는 정식 절차가 아니어도 정치국 후보위원에 임명될 수 있는 인치사회라는 대전제를 깔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이 인치사회라는 점에 대하여는 황장엽이 진술한 부분 외에는 그 어떠한 추가 증거도 없습니다. 이는 결국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방법에 관한 문제인데 그 선임방법에 대하여 노동당 규약이 정한 이외의 방법으로 후보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북에서 귀순, 망명한 특수한 이해관계를 가진 노정치인 황장엽의 일방적 진술에만 의존하여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인치사회여서 김일성이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후보위원을 임명할 수 있다는 사실은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점에 관한 아주 중요한 매개고리가 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에 대하여는 황장엽의 진술 이외에 어떠한 추가입증도 없습니다. 범죄사실 인정의 대전제가 되는 사실이 증인의 진술과 사실상의 추측에 의하여 인정되고 있다면 나머지 사실 인정 역시 그 타당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찰 역시 피고인이 정식 절차를 통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다고 기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어떻게 선임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입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근거가 오직 황장엽의 진술뿐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장엽만큼 북한 체제를 잘아는 사람이 있겠는가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황장엽은 북한 체제의 핵심에서 1990년대 초반부터 소외되어 있었던 사람이고 이미 남에 귀순한 후 북에 대하여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 진술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습니다.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임명된 후보위원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경우를 노동당 간부인 후보위원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하여는 별도의 입증이 필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심은 이 점에 대하여 아무런 의심도 가지지 않고 별다른 심리없이 황장엽의 진술을 믿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중대한 심리미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황장엽 본인 또한 김일성의 지명에 의하여 후보위원이 된 사람이 누가 있는지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황장엽에 대한 원심 8회 공판기일에서의 증인 신문조서). 원심 증인 유영구가 김일성이 임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김영주조차도 1993. 12. 당중앙위원회에서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음이 공개된 바 있습니다(1999. 8. 30.자 통일부 사실조회 회신, 11쪽).    


      4) 후보위원 선임 통보 여부


      원심은 북한 사회가 인치사회라는 전제의 연장선상에서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았더라도 후보위원에 선임되면 본인에게 반드시 통보한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 또한 황장엽의 진술을 유일한 근거로 한 것입니다. 피고인에게 후보위원 선임 여부가 통보되었는지에 대하여는 황장엽의 진술 외에 다른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황장엽 또한 피고인에게 선임 여부가 통보되었는지를 자신이 직접 아는 것이 아니라 통보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2003. 9. 28. 자 국정원 진술조서).


반면에 피고인은 수사기관 이래 일관되게 장의위원 명단에 김철수라는 이름이 등재된 외에는 북한 당국으로부터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통보받은 적이 없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에 대한 선임 통보 여부는 “선임”이라는 개념 속에 포함된 객관적 구성요건요소입니다. 북한 당국이 내부적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에 선임하였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에게 선임 사실을 통보하지 않았고 피고인이 이를 승낙한 바 없다고 한다면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통보사실을 객관적인 증거가 아닌 황장엽의 진술만을 가지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에게 선임 사실이 통보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황장엽의 추측 진술에 근거하여 추측하여 인정하고 있는 바, 이는 객관적 구성요건요소인 통보 여부 사실에 대한 심리를 다하였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5) 김일성 면담 사실.


       황장엽은 “후보위원이 아니면 김일성을 단독면담하고 면담 후 수일동안 송두율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겠습니까”라고 하고 있지만(검찰 진술조서), 민사소송에서의 국정원 사실조회(2001. 1.) 3.항에 의하면 1988. 1. 1. 이후 1994. 7. 8.까지 김일성을 직접 면담한 해외동포 등은 약 30여명이나 됩니다(증제23호증). 이들 중에는 여러 번 김일성을 단독 면담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일성을 단독면담하였다는 것이 후보위원 선임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당시 김일성이 “송교수 같은 학자가 한두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은 후일 피고인이 친척으로부터 전해들은 것일 뿐 김일성이 그러한 말을 했는지 여부는 확인된 바 없습니다.


      6)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 등을 통하여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북한바로알기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는 등 저술활동을 벌이고 한국학술연구원을 통해 유학생에게 북한 체제의 우수성을 알리는 활동을 하였는지 여부.


이 부분에 대하여는 관련 부분에서 상술하기로 하고, 다만 요지만 언급하자면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은 기존에 반공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아 북한 체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북한 체제를 실증적으로 내부의 논리에 따라 인식해보자는 학문방법론으로서 이 이론이 북한바로알기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없으며 피고인이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저술활동을 한 바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보는 원심의 견해는 추측에 의한 것일 뿐 증거에 의하여 증명된 것이 아닙니다.


북한이 왜 피고인을 후보위원에 선임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증거에 의하여 입증된 것이 없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은 황장엽의 추측 진술인데 이러한 추측성 진술만을 가지고 단정적으로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동기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이 북한으로부터 금전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주로 한국을 독일 사회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생들에게 북한제제를 선전하는 활동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한국학술연구원은 학술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사장시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던 것으로서 이 활동을 후보위원 선임 여부와 연결지을 수는 없습니다. 학술연구원 재개설은 1992년 이후의 일로서 검찰이 주장하는 후보위원 선임 이후의 일이므로 이를 가지고 후보위원 선임의 근거, 동기로 볼 수는 없습니다.


      7) 임동옥, 김용순의 진술


       임동옥, 김용순의 진술을 들었다는 황장엽의 전문진술이 증거능력이 없다는 점에 대하여는 앞서 검토한 바 있습니다. 가사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위 전문진술만으로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합니다.


임동옥의 진술은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위에서”라는 단어나 “인기가 있어서”와 같은 말은 한 적이 없다는 점에 대하여는 황장엽 스스로도 인정(원심 증인신문조서)한 바 있어 신빙성이 없습니다.   

김용순의 진술은 진술 안에 후보위원 선임 경위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은 단편적인 진술이고, 황장엽의 허위 진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8) 황장엽 망명시 김경필과의 대화.

       원심은 이 사건 각 대북보고문이 증거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 피고인이 황장엽 망명시에 김경필에게 황장엽이 피고인이 당지도기관성원임을 알고 있느냐고 우려를 표시하고, 김경필의 지시대로 황장엽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였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 대북보고문이 증거능력이 없음은 앞서 검토한 바와 같습니다. 가사 그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은 황장엽 망명시에 김경필에게 보고문에 기재된 바와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으므로 이를 근거로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인정하여서는 안됩니다.


피고인은 황장엽이 망명한 1997년경에 김경필과 만나 가명 사용문제, 황장엽이 피고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앞으로 가명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피고인이 황장엽 망명 직후에 김경필을 찾아간 것은 북에서 두 번 정도 황장엽과 장시간 토론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황장엽이 남쪽에서 피고인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도대체 황장엽이 왜 망명을 한 것인지, 이를 북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기 위하여 찾아간 것이었지 황장엽이 피고인이 후보위원인지를 알고 있는지 여부나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찾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은 황장엽의 망명을 계기로 가명 사용 문제를 분명하게 해둘 요량으로 김경필에게 그 시정을 촉구한 것이지 후보위원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은 황장엽 망명 전에도 1995. 8.과 1996. 3. 방북시에 김철수라는 이름 대신에 송두율 본명을 사용할 것을 북측에 요구한 적이 있습니다. 피고인으로서는 북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해준 이름으로 자신을 호칭하는 것에 대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고 껄끄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황장엽 망명을 계기로 하여 문제가 될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보고문 내용 중에는 마치 피고인이 비공개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가명을 사용하여 온 것처럼 기재된 부분이 있는데 피고인이 가명을 사용한 것은 1970, 80년대에 입북상 편의를 위하여 사용한 것과 1994년 이후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북에서 호칭된 것이 전부 입니다.


피고인이 북에서 공식적으로 피고인을 김철수로 호칭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1995년 방북시 약봉지에 김철수라는 이름과 송두율이라는 이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부터 입니다. 약봉지에 쓰여진 ‘김철수’ 가명 사용문제에 대하여는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에도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북에서 피고인을 호칭할 때에는 본명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피고인을 직접 김철수라고 호명한 적은 없습니다. 황장엽 역시 피고인을 만날 때 김철수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음을 밝힌 바 있습니다(원심 증인신문조서).

      9) 노동당 가입, 1970-80년대 방북 문제에 대하여


       피고인은 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노동당 가입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것으로 생각하였을 뿐 자신의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이를 구태여 밝힐 필요를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노동당 가입이나 방북 사실이 일반인들에게 주는 부정적 인식이 있는 바에는 이를 밝히는 것이 피고인에게 당위로 느껴질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일관되게 노동당 가입 사실이 피고인의 정체성에 있어서 아무런 비중이 없는 먼 과거의 일일뿐이었다고 진술해왔습니다.


노동당 가입에 대하여 원심은 황장엽의 진술을 토대로 보통 사람이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이 아주 힘든 일이라고 보고 통과의례로 행하여진 것이라는 피고인의 주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유럽에서 유학생이 평양을 방문하고 노동당에 가입하는 것은 남한과 체제경쟁을 하고 있던 북한의 입장에서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수 있어 북한측에서 적극적으로 가입을 권유하였기 때문에 유학생의 노동당 가입 절차는 전혀 까다롭지 않았고 그야말로 통과의례일 뿐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었다고 보는 것이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원심은 이 부분에 대하여도 황장엽의 진술을 그대로 믿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노동당 가입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수사기관 등에서 진술하였으나 황장엽의 진술이 1970년대 당시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심 제10회 공판기일에서 피고인이 밝힌 바와 같이 피고인의 저술활동과  노동당 가입이나 방북 사실은 전혀 무관하게 진행되었습니다. 피고인은 그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을 가지고 남과 북을 아우르는 사상 및 학문활동을 하였으며 북한에 일방적으로 경도되어 활동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피고인의 저술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으며 학술회의를 주선하면서 북측을 설득하고 회의의 성공를 위해 노력한 점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지뢰제거작업 등을 통하여 의제와 내용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평양에서의 학술회의를 성사시키고, 핵문제등을 의제로 설정한 것 등에서도 피고인의 남북문제에 대한 균형있는 입장과 태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1970-80년대 방북과 노동당 가입 사실이 오히려 피고인이 반공이데올로기나 북에 대한 선입견, 남한의 독재체제에 대한 두려움 등에 구애받지 않고 용기있게 행동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 시기에 그와 같이 북을 오갈 수 있었다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피고인에게는 시대 상황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탐구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피고인 정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박사학위만 받고도 국내에 들어와 충분히 교수가 되고 출세할 수 있었지만 피고인은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와 양심에 따라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올바른 실천과 학문의 길을 모색해나갔던 것입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피고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분단과 냉전적 사고에 영향받지 않았던 피고인의  자유정신과 용기있는 실천을 포용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사회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서구에서는 많은 학자들이 정당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고 있지만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이들의 학문활동에 대하여 법률로 문제삼는 경우는 없습니다. 학자가 가진 정치적 입장이나 견해 때문에 그의 학술적 견해가 불법시 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을 통해 일정한 학문 활동을 위법한 것으로 판단하고 학문활동의 영역에서 배제하고 형사처벌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상 학문의 자유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에 반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피고인이 197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이 있다고 하여 피고인의 학술활동을 위법하다고 보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입니다. 

 

    (다) 그밖에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점을 의심할만한 사정들에 대한 검토. 


      1)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가 아닐 가능성


       피고인의 변호인은 원심에서 장의위원 김철수가 북한 내부 인물이거나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라고 하여도 북측의 필요에 의하여 장의위원으로 거명된 다수의 김철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현 단계에서 북한 내부의 인물정보를 남쪽에서 소상하게 알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검찰에서 제출한 여러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소시키기에는 부족합니다. 국내 북한 인명정보에 북한 내부인물 김철수가 언급되어 있는 점(증제11호증), 피고인이 김일성 장례식 때 정식으로 김철수로 호칭된 적이 없고, 북에서 피고인을 정식으로 김철수로 호칭한 것은 1995년이 처음이라고 진술하는 점, 황장엽도 원심 증인신문시에 피고인과 만날 때 김철수라고 호칭한 적이 한 번도 없음을 인정하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가 아니고 장의위원 ‘김철수’는 북한 내부인물이나 해외동포 조문객중 주요 인사에 대한 보통명사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은 “김철수”라는 이름이 북한에서 보통 명사처럼 사용되고 있고, 피고인 이전에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4명 정도 더 밝혀진 것에서 합리적으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추론이 합ㄹ적으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라는 전제하에 범죄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원심 범죄사실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입증되었다고 불 수 없습니다.

     

      2) 원심조차 피고인이 노동당의 당 사업을 조직, 지도한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판결문 55쪽).


        후보위원은 당의 지도기관인 정치국의 일원으로서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는 지위와 역할을 가지고 있습니다. 황장엽 또한 피고인이 전국적으로 대남조직을 대표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민사소송 본인신문조서)  

그러나 피고인이 그러한 지도적 역할을 한 바 없음은 원심이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하려면 피고인이 당에서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점이 입증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수십년을 학문연구에 매진하여 온 학자인 피고인의 일상적인 학문, 저술활동만을 가지고 후보위원으로서의 지도적 임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원심은 황장엽의 진술을 근거로 이선실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면서도 회의에 참석한 적이 없고 대남사업을 한 외에 아무런 권한도 없었던 사실이 인정되므로 피고인이 주체사상 전파 등이 역할밖에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북한 노동당 간부로 선임되었다는 점에 부합하는 증거들의 증명력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원심의 견해는 매우 궁색한 것입니다. 후보위원이지만 저술활동만 하고 당 활동에 대하여는 전혀 권한이 없는 후보위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단 한 사람의 증인 황장엽의 진술을 가지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내 정보기관 등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북한 내부의 최고위 권력구조에 대하여 그렇게도 정보가 없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은 후보위원의 지위와 역할에 부합하지 않는 아주 미약한 활동으로서 당 간부인 후보위원의 역할이라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3) 후보위원 선출 절차, 당 규약 및 당 운영 실태에 반함.


     정치국 후보위원은 당의 공식기구로서 선임 여부와 명단은 원칙적으로  공개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당 기구에서 가명을 사용하는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없습니다.


후보위원은 노동당 규약에 의거 선거로 선출되며 선임시 공식적으로 공개되어 왔습니다. 선거를 거치지 않고 선임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노동당 규약에 선거를 거치지 않아도 후보위원이 될 수 있다는 근거가 없다면 선거없이 김일성의 지시로 정식절차 없이 선임된 후보위원(?)(후보위원이라고 할 수도 없을 것임)을 노동당 간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공개된 후보위원에 김철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고 국내외 자료 어디에도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라는 자료는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원심은 피고인이 비밀리에 대남사업을 하기 위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이상 북한에서 공개적으로 이를 밝힐리가 없다고 판시하고 있지만 당 공식기구의 간부를 비밀로 선출한다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어서 비밀후보위원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특별한 입증이 없는 한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선실의 예에 대한 근거도 역시 황장엽의 진술입니다.


      4) 정치국 후보위원과 “통일전선대상”의 양립 불가


       이에 대하여 원심은 김경필이 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도 함께 사용하고 있고 피고인이 재독동포로서 변절할 위험이 있어 후보위원에 선임된 후에도 계속적인 공작대상으로 인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아 지도기관성원과 통일전선대상이 양립가능하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경필의 보고서에서 피고인을 지칭하는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용어는 “상층통일전선대상”(대북 보고문의 소제목으로 사용되고 있음)이라는 말입니다. 상층통일전선대상으로는 윤이상의 처 이수자등 독일 동포사회의 운동단체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피고인은 이들 해외동포들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식적인 호칭이 북에서 인식하고 있는 피고인의 지위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김경필이 피고인의 말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는 “당 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은 일회적으로 사용된 비공식적인 언어일 뿐입니다.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은 김경필이 북에 보고하면서 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서 피고인은 김경필과의 대화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 용례이며, 이 단어가 “후보위원”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알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어를 김경필이 직접 사용하였는지 최창동이 가필하여 넣은 것인지도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문서의 내용을 보면 피고인은 일관되게 “통일전선대상”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통일전선대상과 당지도기관성원은 양립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일개 해외공관 주재원으로부터도 통일전선대상으로서 지도, 교화할 자로 폄하되고 있는 피고인이 당의 최고지도부의 성원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황장엽에 의하면(98년 민사소송 피고본인신문조서), 북측은 이선실이 더 이상 대남사업을 하기 힘들어지자 김철수를 후보위원(전국적으로 1명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한다고 하였음)으로 선임하여 대남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것인데, 김경필이 피고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당의 후보위원에 대하여 해외공관의 일개 주재원으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김경필은 오로지 피고인을 해외동포중에 중요하게 관리하여야 하는 대상, 이른바 “통일전선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경필은 피고인을 “적들의 조국에 대한 비방중상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면서...”, “그는 순수한 부르죠아인테리인데, ...특히 구라파교포사회와 운동권에서 아무러한 권위도 없고, 그가 남과 북에 대하여 명백한 립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모두다 의심을 품고 있는 조건에서...”, “그는 조국의 일군들과 학자들이 남조선의 사정을 너무도 모른다느니, 주관주의가 많다느니 하면서 비꼬는 소리를 하고는 하는데... 주재성원은 그에게 한 번 짭짤하게 말해주려고 하다가도..”(이상 1996년도 독일주재실 사업총화보고서), “수령님 서거 3돐과 관련하여 조국방문을 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기는 하지만 정세 변화와 기분 상태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통전 대상이 라는 점을 고려하여....”(97. 7. 14.자 독일주재실 상반기 사업총화보고서)라고 하는 등 주요 보고서에서 피고인을 분명하게 동요하는 통일전선대상으로 서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김경필은 여러 곳에서 피고인을 동요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재 내용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지도기관성원 운운하는 부분은 전체 문맥에 어긋나 믿기 어렵고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가지게 합니다.     


      5) 피고인이 김철수라는 이름의 사용중단을 북측에 요구한 점, 학술회의에 대한 북과의 입장 차이 및 갈등, 피고인이 북한을 비판한 점, 황장엽의  진술로도 피고인이 주체사상에 무지하였던 점, 김용순이 피고인을 미치광이로 표현하기도 한 점, 미국 이주계획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던 점, 피고인이 한시라도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 한 점 등의 사유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지위 및 역할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밖에 외국인이 조선노동당 핵심간부가 될 수 없다는 점, 자녀 병역문제로 국적을 변경할 정도의 평범한 사람이 당의 핵심간부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인 점, 가명을 사용한 정치국 후보위원이 없는 점 등을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적이 없다는 반대정황으로 들 수 있습니다(구제적인 내용은 원심 변론요지서에서 서술한 내용을 원용합니다).


     (라) 이상 살펴본 조선노동당 권력구조의 성격, 정치국 후보위원의 선임과정, 피고인이 북한당국과의 관계에서 보여  온 태도 등으로 보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핵심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피고인은 민주화운동을 한 해외동포 인사로서 북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리한 통일전선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고인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4) 소결론 


  이와 같이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원심 범죄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믿을 수 없어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기에 불충분하고, 오히려 그 사실 여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만한 합리적인 사유들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이러한 의심들을 배제할 만큼 충분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부분의 공소사실은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어 무죄입니다.


  마. 저술활동을 간부 기타 주도적임무종사로 볼 수 있는지 여부.


  (1) 원심은 피고인의 학문 활동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작성된 기고문이나 서적을 국내에 들여보내는 사업인 저술활동을 통해 북한체제를 찬양하고 주체사상을 전파하는 “주도적임무”에 종사하였고, 저술활동을 통해 남한사회와 남북 관계의 진전에 부정적 영향(심지어는 ‘장애’라고도 표현하였음)을 미쳤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2) 그러나, 피고인의 학문활동은 조선조동당의 핵심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의 임무로 보기에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보는 원심의 시각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피고인의 저술활동만으로는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피고인의 저서에는 학문적인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이적성도 없습니다. 학문활동에 대하여 ‘이적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가사 북에서 명목상으로나마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다고 하더라도 국내의 진보적인 학자들의 견해보다 결코 더 나아간 바 없고 대동소이한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주도적 임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3)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의도적으로 추출된 일면이 아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결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위해가 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은 오랜 기간 해외에서 진보적인 견지에서 철학, 사회학을 공부하고 사회주의 비교연구에 진력하여 왔던 학문적 배경과 남북 분단 상태에서 대치중인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대하여 기여하고자 하는 실천적 지식인의 의무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피고인의 각종 저술은 이와 같은 피고인의 특수한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바, 이러한 피고인 학문적 우수성과 경험의 특이성은 우리 사회에 대하여 일종의 거울이 될 수 있는 독특한 역할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피고인의 학문적 활동에 대하여 학문적 비판을 넘어 실정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원심 판결은 학문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였으며, 피고인의 저술활동 목적을 왜곡하면서 학자로서 통일에 기여하고자 한 활동을 친북활동으로 단순히 폄하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는 피고인의 학문방법론인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하여 북한과 남한사회에 대한 피고인의 분석과 평가를 단순한 친북행위로 단정지었습니다. 원심은 헌법상 보호받는 학문·사상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 자의적으로 불명확한 기준에 따라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심은 친북이냐 아니냐라는 이분법적·반학문적인 잣대로 학문연구 결과의 발표행위 내지는 표현의 자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있습니다. 이는 학문자유의 내용 중 본질적 내용에 해당하는 학문 연구의 자유를 침해하였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한 저술활동의 목적을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옹호·선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곡해함으로써 실천적으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피고인의 모든 활동을 일거에 범죄행위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수십년간 한국사회와 독일을 비교·연구하는 가운데 독일통일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독일통일의 성과와 한계를 면밀히 분석하여 얻은 자신의 통찰을 북한과 남한 양쪽 모두에게 전달하고자 하였을 뿐입니다


원심이 학계의 지적을 인용하면서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결하자마자 판결문에서 인용된 학계의 당사자인 강정인 교수는 2004. 4. 7.자 한국일보 기고문을 통해 “판결을 지켜보면서 나에 대한 부당한 의혹을 해명하는 것은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학문의 자유를 위해 이제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나는 내재적 접근법이 통째로 잘못되었다는 일방적 비판을 제기한 적이 없다”고 반박한 바 있습니다.


   (4) 원심은 직접증거없이 황장엽의 전문진술,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 등의 전문증거에 의존하여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전제하고(원심은 스스로 피고인을 ‘명예직’ 후보위원이라고 판단함), 이러한 선입견에 근거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후보위원의 주도적 임무행사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만약 피고인에게 후보위원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고 피고인의 저술을 평가한다면 결코 원심과 같이 판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원심은 1988년 이래 피고인의 노골적으로 친북적이지도 않은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후보위원으로서의 지도적 활동이라고 하면서도 1995년 이후 2003년까지의 남북통일학술회의 개최활동에 대해서는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원심은 피고인의 학술회의 활동에 대하여 “우리 남한 사회는 이미 북한의 위장평화공세나 선전, 선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보여질 뿐만 아니라 ........., 피고인이 당시 북한의 고위직 간부인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는 사정만으로는… 피고인이 북한을 위한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는 원심이 후보위원 여부와 무관하게 학술회의의 위법성을 독립된 기준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원심은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이란 점을 전제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점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저술활동만 가지고는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할 수 없다는 점은 익히 밝힌 바와 같습니다. 


   (5) 또한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에 대해 분석하면서 북한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해 찬양·옹호하였다고 판단하였으나 원심이 북을 찬양했다는 취지로 인용한 글의 대부분 피고인의 기행문이나 저서 속에 등장하는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표현입니다. 원심 판결 중 피고인의 글에서 인용한 내재적 접근법, 북한체제, 주체사상 등은 피고인의 생각 또는 이론을 정리한 부분과 북한의 체제우월성을 피고인에게 설명하는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말이 뒤섞여 있는데, 이러한 나열은 마치 모든 인용부분이 피고인의 표현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6) 한편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국내의 주체사상 연구와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판단은 1980년대 후반의 국내 사정과 통일운동의 현황, 운동권내 사정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한데서 비롯된 판단입니다.


피고인의 학문방법론 및 저서내용을 비판하고 있는 증인 김광동, 증인 홍진표는 피고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전문성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주장은 피고인의 학문활동을 냉전적, 극우적 이념의 잣대로 단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학문적 결과물에 대하여 북한 체제를 일반적으로 옹호하고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있다는 등의 논리로 폄하하는 것은 정당한 평가가 아닙니다.


당시 운동권들은 노동 현장 지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일종의 관념적 도피로, 그래서 강단운동으로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1988년 하반기부터는 이론적인 면에서 본격적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되고 논쟁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운동권들은 논쟁에 빠져드는 것 자체를 소모적으로 보고, 금기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관념적이고 현학적이어서 결국은 실천이 아니고 논쟁과 관념으로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던 실정이었습니다. 피고인이 1988년에 쓴 글은 운동권들보다는 국내 일부 대학원생들이나 읽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피고인의 글은 관념적 논쟁을 거부하며 실천과 투쟁을 강조하는 운동권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현학적인’ 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학생운동과 주사파 운동권에게 피고인의 저술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실제 당시 상황과는 괴리된 것입니다.

  (7) 이상과 같이 어느 모로 보아도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국가보안법상의 “간부 기타 주도적임무 종사행위”로 평가하여 처벌할 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인 저술활동의 이적성에 대한 논의는 분량관계 및 논의의 집중을 위하여 항소이유보충서로 별도 제출하도록 하겠습니다.]


  바. 나머지 범죄사실에 대한 검토


   (1) 1988. 12. <사회와 사상>에 내재적 접근법에 관한 글을 기고하여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내재적 접근법을 북한 연구 방법으로 제시한 위 글은 학문방법론에 대한 것으로서 학술적인 글이지 북한체제를 선전하거나 주체사상을 전파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당시는 1987년 민주화항쟁 이후 전국민적으로 북한에 대한 관심, 민족 문제에 대한 인식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던 때로서 1960년대 4. 19이후 통일운동이 분출되었던 상황과 비견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해보자고 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구사항이었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북한바로알기운동으로 전개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시대 상황에 부응하여 피고인은 실천적인 해외동포 학자로서 북한이해방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하였으며, 내재적접근법은 1970년대 이래 피고인이 수행하여온 사회주의 비교연구방법을 북한에 적용한 것으로서 학문적으로 일관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위 기고문 게재 경위도 출판사측에서 피고인을 섭외한 것이지 피고인이 먼저 적극적으로 기고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시 같은 호에 게재된 다른 글들 역시 북한의 이해를 위한 여러 영역의 학술적 글이 특집으로 연재되고 있으며 피고인의 글이 특별히 더 두드러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의 글이 국내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원심 증인 홍진표, 김광동의 진술은 북한바로알기 운동의 진행 과정의 전후사정을 모두 생략한 채 피고인의 영향력을 주관적으로 확대한 것이고 비전문적인 견해여서 믿을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1992년 “말”지에 기고한 “조국을 위한 상념”이라는 글에서 1990년대 초반에 피고인의 주된 활동 무대가 서울이 아니어서 남한에서는 알만한 사람이나 알고, 상당히 제한된 수의 독자만 있었다는 점을 소회한 적이 있습니다(“역사는 끝났는가” 87-89쪽). 이처럼 1990년대 초반까지도 피고인의 남한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의 위 소논문이 북한바로알기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여 남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원심 판시 내용은 당시 상황을 과장하여 인정한 것입니다.


또한 원심의 판단은 1990년대 이후 학문의 르네상스를 맞았던 우리 학계가 송교수의 저술에 순진하게 현혹되어 그것을 그대로 추종할 만큼 기반이 취약하지 않았음을 간과하고, 학계 전체를 매도하고 비하하는 것으로서, 학문의 발전 측면에서 보면 퇴행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한편 원심은 북한바로알기운동이 불법적이라는 전제하에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북한바로알기운동은 이후 남북관계 개선과 교류협력을 강화하는 주춧돌이 되었으며 현재의 남북관계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원심은 북한바로알기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자체도 냉전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피고인의 위 소논문을 불법이라고 보고 이 또한 “주도적 임무종사”라고 보는 것은 논문의 내용, 논문 게재의 경위 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학문영역에 대하여 법률로 판단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난 위법한 것입니다(증제31호증 전 사회와 사상 편집주간 조희연의 진술서에 관련 내용이 상술되어 있음).    

    

   (2) 1992년-1994년 한국학술연구원 활동에 대하여

  

   원심은 피고인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운영한 한국학술연구원 활동도 “간부기타주도적임무종사”행위로 의율하고 있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학술연구원에 북한 도서를 비치하여 유학생들에 대하여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학술연구원은 윤이상 선생의 제안에 따라 김길순이 원장을 맡아 프랑크푸르트 근교 오펜바흐에서 1982. 2. 설립된 것입니다. 연구원은 당시 중국·일본과 달리 경시되었던 한국을 유럽인에게 소개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해외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추구하는 순수학술연구단체였습니다.


위 학술연구원은 주로 한국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김길순의 사망으로 위 연구원을 피고인이 관리하게 된 1992년경에는 수집한 서적과 자료가 15,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 되었고, 독일법에 의한 비영리공익재단으로, 세금감면 해택까지 받으며 운영되었던 것입니다. 위 자료 15,000여권은 대부분 한국어, 영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로 된 한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것이고, 그 중 북한에 관한 자료는 비율적으로 남한에 관한 자료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증인 양정옥의 법정 진술 및 증제30호증 독일 아시아 재단 코레아 협의회 총무 최현덕 박사의 도서현황 사실확인서 참조).


피고인은 위 학술연구원의 초기에 연구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한국의 발전모델을 연구하는데 주력했을 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학술연구원이 존속하는 동안 단 2회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강의를 했을 뿐 입니다. 그런데 연구원 운영을 맡은 김길순이 중병에 걸리자 연구원은 1987년에 사실상 문을 닫았고, 1991년 김길순이 사망하자 연구원의 자료수집활동은 거의 중단되어 중요한 자료들이 사장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위 자료들을 아깝게 여겨 1992년 말부터 자료들을 베를린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연구원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연구원 운영자금을 북한으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처음에는 미국 유럽 등지의 지인들로부터 모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모금실적이 저조하여 연구원을 폐쇄할 지경에 이르자 그동안 수집한 자료의 소중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북한측에 자금지원 요청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받은 지원자금은 1992년에서 1994년까지 연간 2만불(원화로 월200만원) 정도였고, 이 정도 되는 금액으로 ⅓은 연구원 운영비로, 나머지 ⅔는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연구원을 운영·관리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피고인이 더 이상 연구원을 혼자 운영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1994년 7월에 훔볼트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 결국 1994년말 에센시 소재 아시아재단 한국문제연구소에 모든 자료와 서적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자료들은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한국 유학생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학자들도 활발하게 이용하는 중요한 한국관련 정보가 되었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학술연구원을 통하여 유학생들에게 북한체제를 선전, 찬양한 것처럼 판단하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피고인이 어떤 북한체제 선전 활동을 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술자료에 남과 북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술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는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다만 외국인 관계로 국내보다는 자유롭게 북한 서적을 상당히 수집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한국학 자료가 전무하다시피한 독일에 한국 관련 자료를 남과 북에 치우치지 않게 균형있게 소장하고 있는 것 자체가 학문적으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심은 김길순이 국내에 귀국하여 안기부에서 받은 조사 내용을 근거로 학술연구원이 친북적인 활동을 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는 듯하나, 김길순의 진술은 반체제인사가 노년에 귀국을 위해 자수하여 정보기관에서 한 것으로 있는 그대로 믿기 어렵습니다. 피고인이 학술연구원을 운영할 당시에는 자금 지원을 북에서 지원받았을 뿐 어떠한 친북적인 활동을 한 바도 없습니다.  

   (3) 김일성 장례식 참여에 대하여

   원심은 피고인이 김일성 장례식에 참여한 행위도 “간부기타주도적임무종사”행위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럽 거주 해외동포로서 정식 초청을 받아 장례식에 참석한 행위가 어떤 불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단순한 조문행위조차 불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국가보안법이 그 해석적용에 있어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확장해석이나 기본권 침해를 부당하게 제한하여서는 아니된다고 규정한 취지에도 반하는 것으로서 지나치게 처벌 범위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장례식에 참여한 후 국내 일간지에 방북기를 공개적으로 게재하는 등 특별히 국가에 위협이 될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해외동포로서 정식 초청을 받고 입북하여 장례식에 참여하고 주최측에서 주관한 각종 행사에 참여한 것 자체를 국가보안법상의 “주도적 임무”로 볼 수도 없습니다.

  사. 소결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죄형법정주의와 헌법상 평화통일 조항 등에 위배되는 위헌, 무효의 법률 조항인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를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바도 없고, 피고인의 저술활동 기타 활동을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도 없습니다.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하는 원심 판시 내용은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없는 황장엽의 전문진술, 김경필이 작성하였다고 하는 대북보고문 등을 핵심증거로 하여 인정된 것으로 모든 증거들을 종합한다고 하여도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인정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저술활동은 피고인의 해외에 유학하여 1970년대부터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던 실천적 지식인이자 진보성향의 사회주의 비교연구 기타 학문활동을 왕성하게 벌여온 피고인의 개인적 이력과 그 저술의 각 내용으로 판단하건대 학문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의 영역을 일탈하여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해를 가할 정도의 불법이 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무죄입니다.



4. 특수탈출의 점에 관하여(범죄사실 제2항).


  가. 개  요


    (1) 원심 판결의 요지


    원심은, 피고인이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면 처벌받는 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 1991. 3.경 북한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주체철학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1. 5. 10.경 북한에 들어가 같은 해 5. 13. 좌담회를 개최하고, 5. 17. 학술토론회에 참석하여 주체철학 강의를 듣고, 5. 17.부터 5. 18.까지 관광을 하며 애국열사릉에 있는 허담 묘 앞에서 묵상하고, 5. 20. 학술좌담회에서 “남쪽에서도 주체사상에 대한 관심이 일고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하고, 5. 24. 김일성과 단독 면담을 하고, 그 직후 일시 미상경 황장엽의 지시를 받은 이성갑, 박승덕, 김영춘으로부터 주체사상 학습을 받고, 5. 29. 환송만찬에서 만찬사를 듣고, 5. 30. 독일로 되돌아가고,


      (나) 북한으로부터 한국학술연구원 재개설 관련 운영자금을 받으려고 입북희망의사를 전달하고, 위 사회과학원으로부터 입북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1. 7.  일자 미상경 북한에 들어가 운영자금 지원를 고려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황장엽, 이성갑, 박승덕, 김영춘으로부터 주체사상 학습을 받고 독일로 되돌아가고, 


      (다) 1992. 7. 초순경 북한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 리지수로부터 주체철학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2. 9. 일자 미상경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정치․경제 등에 관한 토론을 하고, 독일로 되돌아가고,


      (라) 북한으로부터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3. 3. 19. 북한에 들어가 황장엽 등으로부터 주체사상 학습을 받고, 3. 26. 독일로 되돌아가고,


      (마) 1994. 2. 초순경 북한 사회과학원 제1부위원장 김철식으로부터 북한에서 개최되는 학술토론회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받고, 1994. 3. 12. 북한에 들어가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인 김용순에게 ‘독일과 한국 1945-1955’라는 국제세미나에 북한측 대표참석을 요청하고, 남․북한 및 독일학자들의 언론 관련 세미나 개최문제를 협의하고, 3. 20. 독일로 되돌아가고,


      (바) 1994. 7. 11.경 북한 이익대표부 송룡욱으로부터 김일성 장례식에 참가하라는 지령을 받고, 7. 14. 북한에 들어가 7. 15. 김정일을 만나 조문하고, 7. 19. 장례식에 참석하고, 7. 20. 추도식에 참가하고, 장례식에 참석한 해외동포들을 위한 위로연에 참석한 후 7. 23. 독일로 되돌아감으로써


      각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령을 받거나 또는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 이 부분 항소이유의 요지


    그러나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은 이 부분 공소사실이 형법 등 다른 법률들을 통해 충분히 규율할 수 있고, 나아가 국가보안법 제6조가 정하는 ‘탈출’ 등의 용어가 그 해석․적용 과정에서 오히려 불명확해지고 광범위하게 되는 위헌적인 요소가 있는 법률 조항으로서 그 적용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피고인이 독일국적을 취득한 이후의 방북 사실은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재판권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모두 공소기각을 면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 부분 공소사실들은 모두 증거능력이 없거나 증명력이 없는 증거들에 의하여 범죄사실로 인정된 것들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들은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여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나아가 검찰이 적시한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을 이 부분 공소사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의 지령수수, 목적수행 협의를 위한 탈출이라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할 것인데, 가사 원심이 사실인정을 위해 사용한 증거들이 모두 증거능력이 있고, 증명력이 있는 경우라고 하여도,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지령’ 등의 개념을 해석함에 있어 법문해석의 기본원칙인 문리적 해석의 범위를 넘어 피고인이 ‘지령’을 수수하거나 ‘목적수행 협의’를 위해 탈출하였다고 판단하고 있는바, 이는 명백한 죄형법정주의 원칙 위반이어서 부당하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피고인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들은 모두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가사 이 부분 공소사실들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 해당하지 아니하나, 피고인이 방북한 사실만을 들어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에 해당하는 잠입․탈출의 축소사실로 인정하고 위 법조항에 따라 의율한다고 하여도, 모두 공소시효(7년)가 완성된 것들이어서 공소기각을 면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나. 국가보안법 적용의 배제


   (1) 다른 법률에 의한 의율 가능성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본조의 규정은 일반적으로 “정당한 사유없이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과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간을 왕래하거나 반국가적 활동에 관한 지령을 수수 또는 의사연락을 위해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을 출입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통치권(영토고권 및 대인고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즉, 그 보호법익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영토고권 및 대인고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한민국의 출입국으로 인한 통치권의 침해에 대해서는 현행 출입국관리법, 여권법 및 밀항단속법에 의하여 규율하고 있습니다. 위 법률들은 이미 사전에 규정된 절차에 따르지 않는 출입국행위에 대해 처벌규정을 두고 있는 만큼 영토고권과 대인고권을 지키기 위해 별도로 다시 국가보안법 규정을 둘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 제6조를 두어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은 ‘국가안보’에 맞춰져 있다고 할 것인데, 국가안보에 관해서는 이미 형법에서 내란죄와 외환죄 등으로 충분히 보호하고 있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 다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한편, 구 국가보안법 중 제6조 제3항이 삭제된 경위를 보더라도 탈출에 관한 위 규정은 폐지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위 제6조 제3항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국외공산계열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 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로 제2항의 형과 같다”고 규정되었으나, 1991년 공산권과의 교류확대를 위하여 삭제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국회에서 제6조 제3항이 사회주의권과 교류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고, 제6조 전체가 북한과의 교류를 가로막아온 기능을 하여왔고, 북한과의 교류가 활성화된다면 제6조 제3항과 마찬가지로 제1항과 제2항도 폐지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건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을 적용하지 않는 것이 구체적인 법현실에 부합한다고 할 것입니다. 가사 위 규정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문리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적용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이 올바른 법률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원심은, 이와 같이 급변하는 남북교류협력관계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 군부독재정권 아래서 정권유지를 위한 억압과 탄압의 수단으로 사용되던 국가보안법을 피고인에게 적용하였는 바, 이는 결국 민족의 분단으로 인한 고통을 함께하고, 민족의 통일을 고민하며 경계인으로서 내 안의 타자를 일깨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온 피고인의 학문적 성취와 업적을 평가절하 하는 것은 물론 과거 냉전시대로의 회귀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습니다. 원심이 국가보안법의 기반이 된 냉전 논리를 답습하고 이에 대한 극복의지를 전혀 보여 주지 못한 것은 남북관계 진전이나 평화통일에 e한 자유로운 논의에 장애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다른 관련 법률을 통해서도 충분히 의율이 가능한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을 적용하여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2) 불명확하고 광범위하여 무효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의 ‘탈출’의 개념을 원심과 같이 해석하는 한(원심의 해석은 아래에서 볼 대법원 판결의 변경된 해석방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고 할 것입니다.


형사법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그 자체로 명확하여야 하고, 그 정도는 통상의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떤 행위가 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인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로 예측가능성을 가져야 할 것인데, 일견 명확하게 보이던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의 ‘탈출’의 개념은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여 이미 예측가능성을 가질 수 없는 범위까지 확대되었다고 할 것이고, 해석을 통한 적용 범위의 확대로 인하여 명확한 것으로 보이던 법문의 개념 자체가 다시 불명확해지고 광범위하게 되었습니다. 죄형법정주의의 명화성의 원칙에 이 부분 법률 조항은 위헌, 무효이므로 피고인에 대하여 적용될 수 없습니다.


  다. 외국인의 국외범 (1993. 8. 18. 이후 방북의 점)


    (1) ‘탈출’의 해석과 관련하여


    원심은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 방북한 사실에 관하여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탈출의 경우 외국인의 국외범 문제가 아닌 외국인의 국내범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판시하고 있습니다.


즉,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에서 정하는 ‘탈출’의 의미에 관하여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자의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위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에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직접 들어가는 행위와 제3국을 통하여 들어가는 행위 및 제3국에 거주하다 들어가는 행위 등 세 가지 행위유형이 있을 수 있는바,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에 정한 탈출죄의 경우에는 자의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만을 그 처벌대상으로 하고 있어 위에서 본 세 가지 행위유형 모두가 그 처벌대상이 된다고 할 것이나, 그 제2항에서 정한 지령탈출죄의 경우에는 그 외에 자의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도 그 처벌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위에서 본 세 가지 행위유형 중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직접 들어가는 행위와 제3국을 통하여 들어가는 행위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이미 그 범죄가 기수에 이르게 되고 따라서 고유한 의미에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로서 처벌되는 것은 제3국에서 거주하다가 들어가는 행위뿐이라고 할 것이다”라고 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원심의 판단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서 정한 ‘탈출’의 개념에 관한 법리오해에 기인한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가) ‘탈출’의 문리적 해석


      형사법의 해석은 법문의 문리적 의미를 파악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문리적 해석의 한계를 일탈한 해석은 일응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해석이라고 판단될 수 있고,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해석을 통하여 국민의 신체적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를 헌법상의 원칙으로 규정하여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헌법의 기본 이념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그 부당함에 관하여는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탈출’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환경이나 구속에서 몸을 빼어 도망”하는 것입니다. 즉, 어느 행위가 ‘탈출’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도망행위를 하게 된 ‘구속이나 환경’이 존재함을 개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탈출’이라는 행위를 형사법에 규정하게 된 이상, 그 도망행위의 전제가 되는 ‘구속과 환경이 무엇인가’에 관하여는 형사법의 목적론적 해석을 통해 보완될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지만, 원심의 경우처럼 개념 자체에서 전제하고 있는 ‘구속과 환경’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탈출’의 개념을 해석하는 경우 그것은 법률해석의 기본원칙인 문리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어서 응당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고 할 것입니다.


‘탈출’에 관하여 문리적 해석을 하는 경우 그 ‘탈출’ 행위의 개념에 원심이 인정한 것처럼 여러 가지 행위유형을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즉, 문리적 해석의 범위 내에서는 ‘탈출’이란 자의로 (행위자를 구속하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는 행위를 제외하고는 개념적으로 ‘탈출’에 해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 ‘탈출’의 목적론적 해석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한 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이 규정을 통해, ‘탈출’의 개념은 원래 ‘탈출’이라는 용어의 사전적 의미에서 좀더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고, 결국 원심은 이를 근거로 하여 자의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나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는 행위뿐만 아니라, 제3국으로부터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 제3국에 거주하다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행위를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의 ‘탈출’의 행위유형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탈출’의 문리적 해석 범위 내에서는 (행위자를 구속하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직접 들어가는 행위만 해당한다고 하여야 할 것이지만,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은 ‘탈출’의 물리적 전제인 출발․도착지역(내지 개념적 전제인 행위자가 처한 ‘구속이나 환경’ 등)에 대한 규정을 두지 아니한 관계로 제3국을 통해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도 위 ‘탈출’에 해당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다만, ‘탈출’ 행위의 물리적, 개념적 전제인 ‘출발․도착지역’이나 ‘구속 내지 환경’이 없다면, 단순히 행위자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행위를 하였다고 하여 처벌할 수는 없는 것인데, 형법은 그 적용범위와 관련하여 속지주의를 보충하는 의미에서 속인주의 원칙도 채택하고 있고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제3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도 대한민국 통치권의 추상적인 범위 내에서 구속된다고 할 것이므로, 대한민국 국민이 이러한 대한민국의 추상적 통치권이라는 구속을 벗어나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간 행위에 대하여는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이 정하는 ‘탈출’ 행위로 포섭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국가보안법 제6조의 진정한 보호법익이 ‘국가안보’라는 점을 감안하여 ‘탈출’ 행위를 목적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에도, 그 행위는 적어도 대한민국의 통치권에 추상적으로 구속되는 자의 ‘탈출’ 행위만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고, 이 범위 내에서만 원심이 인정한 ‘탈출’ 행위의 세 가지 유형이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이 정도의 최소한의 구속마저 받지 아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가 비록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하였다고 할지라도 ‘탈출’이라는 행위의 개념적 전제인 ‘구속이나 환경’이 없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이 정하는 ‘탈출’ 행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


      (다) 소결(법문의 문리적 해석 범위 일탈)


그런데, 원심은 외국인인 피고인의 1993. 8. 18. 이후의 방북 행위가 위와 같은 ‘탈출’ 개념의 기본적(물리적, 개념적) 전제요소 조차 갖추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점을 간과한 채 만연히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탈출’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여 법률해석의 기본원칙인 문리적 해석의 한계를 넘어 선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2) 외국인의 국외범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 방북한 행위는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합니다.


원심은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북한도 대한민국의 영토에 속하는 것이 분명하므로 독일 국적을 가진 피고인이 북한의 지령을 받기 위하여 독일 베를린을 출발하여 북한 평양에 들어간 이 사건 공소사실 중 1993. 8. 18. 이후의 국가보안법위반(잠입․탈출)의 점은 제3국과 대한민국 영역 내에 걸쳐서 이루어진 것이고, 이와 같은 경우 형법 제2조, 제4조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형벌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원심의 판단은 국제법적 현실에도 부합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는 헌법현실에도 부합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영토고권 및 대인고권이 미치는 물리적 한계는 휴전선 이남에 제한되고 있습니다. 헌법 제3조는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구한말영토의 승계와 국제평화주의를 반영한 것일 뿐 그런데 이에서 나아가 휴전선 이북지역을 조선인민공화국이 불법으로 점령한 미수복 지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실질적 통치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휴전선 이북 지역에 출입한 행위를 두고 이를 외국인의 국내범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더구나 대한민국과 북한은 독일과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함으로써 국제법상 독일에 대하여는 서로 독립된 국가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독일과 북한이라는 독립된 국가 공간에서 외국인이 대한민국 형법 제5조에 정하지 아니한 범죄행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를 외국인의 국내범으로 처벌하는 것은 형법의 장소적 적용범위를 넘어선 부당한 해석이 됩니다. 즉, 독일에 대하여는 대한민국과 북한은 각각 별개의 국가로 존재하는 것이고(이 점은 남북의 유엔동시가입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정신에도 부합하는 해석입니다), 외국인이 독립 국가라고 볼 수 있는 북한 안에서 행한 행위에 관하여(그것이 전쟁범죄 내지 반인륜적 범죄로 판단되지도 아니한 상태에서) 제3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의 형법으로 처벌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자국민에 대하여 행사하는 국가의 인적 관할권을 배제시키는 결과에 이르게 되고, 결국 타국 국민에 대하여 자국 형사법 규정을 세계주의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되어 자칫 외교적 분쟁까지 야기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현재 형사법의 세계주의가 인정되고 있는 범죄는 전쟁범죄, 반인륜적 범죄, 제노사이드, 아파르트헤이트 등 범죄에 제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고 하여 달라진다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지 아니하는 지역인 북한에서 한 행위를 모두 국내범으로 보아 처벌하는 것은, 이미 남과 북이 유엔에 동시에 가입하고, 남과 북이 서로 세계 대부분의 국가와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남과 북 사이에서만 남북의 관계를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아닌 잠정적 특수관계로 설정하고 있는 현실 등에 비추어, 변화무쌍한 남북관계, 국제관계를 반영하지 못한 법 해석․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독일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의 방북은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고,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는 우리 법원에 재판권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여 결국 공소기각판결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해석을 통한 ‘탈출’ 행위의 범위 확장


      (가) 죄형법정주의 원칙 위반


      종래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탈출죄를 규율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경우라도 위 법조항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1976. 5. 11. 선고 76도720 판결, 대법원 1983. 4. 18. 선고 83도383 판결). 이는 형법이 그 적용범위와 관련하여 속지주의를 원칙으로 하면서도 속인주의를 가미하고 있고 대한민국 통치권의 추상적 범위 안에서 구속을 받는 대한민국 국민에 대하여는 위 법조항에 의한 처벌의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에 처벌을 위한 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탈출’ 행위의 개념을 목적론적 해석을 통해 확장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을 외국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 그 자체로 법률해석의 한계를 넘는 것이 되어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반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점에 관하여는 위에서 본 바와 같습니다.


     (나) ‘탈출’의 확대해석에 따른 대법원 판례 변경


      한편, 대법원은 1997. 11. 20. 선고 97도2021 판결에서 위 국가보안법 제6조에서 정하는 ‘탈출’이 신분범이 아닌 이상 외국인이라고 하더라도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나는 행위와 제3국에 거주하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외국인의 국외범 해당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모두 위 법조항에서 정하는 ‘탈출’행위에 해당한다고 하여, 결과적으로 종전 판례가 외국인의 국외범으로 해석하던 행위유형을 가벌적 ‘탈출’ 행위로 포섭함으로써 외국인에 관한 한 해석을 통해 그 처벌범위를 확장하였다고 할 것입니다(그런데 신분범의 문제이기 이전에 ‘탈출’ 행위에 관한 문리적 해석범위의 문제라는 점을 간과하였다는 비판이 가능합니다).


      (다) 1991. 5. 31.자 국가보안법 개정 취지에 반하는 확대해석


      이러한 대법원 판례의 변경을 통한 가벌적 행위의 범위 확대는, “국가보안법에서 정하고 있는 금품수수죄, 잠입․탈출죄, 찬양․고무죄, 회합․통신죄 등의 구성요건에 관한 헌법재판소의 한정합헌결정 취지를 반영하여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행위만을 처벌하도록 함으로써 입법목적과 규제대상을 구체화하고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과의 적용한계를 명백히 하는 동시에 국가보안법에 의한 처벌대상을 축소함으로써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국회가 국가보안법에 관하여 1991년 5월 31일 법률 제4373호로 개정한 입법취지에 정면으로 반한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국회의 국가보안법 개정 취지는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항을 통해 명백히 드러난다고 할 것인바,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적용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하여 국가보안법의 무분별한 확대해석을 경계하는 한편, 그를 통한 기본적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이 정한 ‘탈출’의 세 가지 행위유형에서 제외되어 있던 외국인의 제3국을 통하거나 제3국에 거주하다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까지 가벌적인 구성요건행위로 포섭함으로써, 국가보안법 개정을 통해 종전에 처벌 되던 행위에 대하여도 축소해석하여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입법자의 입법 취지에 역행하는 확장해석을 한 것입니다.


따라서 종전 대법원 판결에서 외국인이 제3국을 통하여 또는 제3국에 거주하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를 가벌적 구성요건행위에서 배제하던 태도를 버리고, ‘탈출’에 관한 확장해석을 통해 그 가벌적 구성요건행위에 포함시킨 것은 국회의 국가보안법 개정 취지(입법권자의 입법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어서 부당한 것입니다.


      (라) 소결


      그렇다면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의 ‘탈출’행위와 관련한 해석의 가능한 범위는 자의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제3국을 통하거나 제3국에 거주하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까지라고 할 것인바,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의 행위에 관하여서까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탈출’행위로 포섭하고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 피고인에게 유죄판결을 한 원심 판결은 위와 같은 입법취지 및 ‘탈출’에 관한 법리오해에 기인한 것이고, 나아가 외국인의 국외범으로 보아야 할 사안에 관하여 남북관계, 국제관계(국제법관계이기도 합니다)를 반영치 못한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할 것이고, 결국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무죄이거나(외교관계까지 고려한다면 이 부분 공소사실에는 범죄 될 사실이 포함되지 아니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아 공소기각 결정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에 대한 재판권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여 공소기각을 면치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라. “지령수수” 및 “목적수행 협의” 유무


    (1) ‘지령’ 등에 관한 원심의 해석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잠입․탈출죄에서 ‘지령을 받는다’라고 함은 반국가단체 또는 그 구성원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 지령을 받은 자로부터 다시 지령을 받는 경우까지 포함하는 것이고, 그 지령은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반드시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가 있을 것을 요하지는 아니하고 그 지령의 형식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다”고 판시하여 ‘지령’ 내지 ‘지령을 받는다’는 의미에 관하여 판단하고 있습니다.


   (2) 지령수수 또는 목적수행 협의의 의도


      (가) ‘지령’의 문리적 해석 및 목적론적 해석


        1) ‘지령’의 사전적 의미


        ‘지령’에 관한 사전적 의미는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원서(願書) 또는 품의(稟議)에 대하여 내리는 관청의 통지 또는 명령이라고 하거나, 감독관청이 하급관청에 대하여 내리는 직무상의 지휘명령이라고 하거나, 법률․명령 따위의 해석․적용에 관한 하급관청의 품의(稟議)에 대하여 상급관청이 내리는 지휘명령을 ‘지령’이라고 합니다.


        2) 원심의 ‘지령’에 관한 해석방법의 분석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지령’이 지시와 명령을 내포한 개념이라는 점은 인정을 하면서도 반드시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가 있을 것을 요하지는 않는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는 위에서 본 ‘지령’의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 해석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원심의 해석을 형사법 해석 원칙과 관련하여 분석하면,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지령’의 문리적 해석상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보고 있지만, 나아가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와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국가보안법의 목적을 감안하여 목적론적으로 해석할 때 위 ‘지령’의 개념 안에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까지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3) 유추해석 및 확장해석 금지


        그러나 이러한 원심의 ‘지령’에 대한 해석은, 그것이 비록 목적론적 해석에 의하여 도출된 결과라고 할지라도, 용어의 자연스러운 해석 범위의 한계를 넘은 것으로 정당한 해석으로 볼 수 없습니다.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은 구성요건과 법적 결과를 명확하게 규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고, 이렇게 명확하게 규정된 구성요건에 관하여는 유추해석이나 부당한 확장해석을 통해 무리하게 사안을 포섭하여 법률을 적용하는 것까지도 금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심의 ‘지령’에 관한 해석은 목적론적 해석방법을 염두에 둔다고 하여도 그 자연스러운 해석의 한계를 일탈한 것이어서 정당한 해석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는 것이고, 자연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할 것입니다.


즉, ‘지령’의 문리적 해석에 의하면 그것은 지시와 명령을 포함한 것으로서 당연히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까지 요구하는 개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격한 상명하복의 지배관계를 요구하는 경우 반국가활동의 규제를 통해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보호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는바, 이 지점에서 ‘지령’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의 필요성이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론적 해석의 필요가 있는 경우에도 ‘지령’이라는 용어의 자연스러운 해석의 한계는 적어도 지령을 받는 자가 지령을 하는 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종속적인 지위에 있을 것을 요구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또한 ‘지령’의 형식에 관하여 원심이 판단하는 바와 같이 특별한 제한이 있을 것까지는 요구되지 않지만, 이를 통해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므로 그 내용은 적어도 그를 통해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특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 지령을 받는 자와 지령을 하는 자 사이에 수평적 관계여도 상관없고, 나아가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확장하여 ‘지령’의 의미를 단순한 ‘의사의 전달’ 정도로 변용시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 결국 지령을 단순한 ‘의사의 전달’과 같이 보고 있는 원심의 해석은 용어의 자연스러운 해석의 한계를 넘는 부당한 확장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러한 해석과 결합하여,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을 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반국가단체 또는 그 구성원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는 경우뿐만 아니라 그 지령을 받은 자로부터 다시 지령을 받은 경우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고, 그 지령의 형식에 아무런 제한이 없다고 해석하는 경우,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누구로부터든 단순히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의사의 전달’만 받으면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 의하여 처벌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고, 이는 국가보안법이 의도한 목적을 넘어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하는 결과를 야기한다고 할 것입니다(이는 국가보안법 제1조 제2항에도 저촉되는 해석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에 관한 원심의 해석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명백히 위반되는 것입니다.


        4) 정당한 해석의 범위를 넘어선 사례


        실제로 과거 일부 대법원 판결은 ‘지령’의 의미를 원심과 같이 무분별하게 확장해석한 사례가 있습니다. 즉,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1989년도 신년사에서 남한의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총재들,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등을 북한으로 초대한다고 한 일방적인 발언까지도 위 ‘지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한 바 있고, 또 범민족 대회 추진을 위해 북측이 남측의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전달한 서신도 위 ‘지령’에 해당한다고 해석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는 통상의 판단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지령’의 의미를 부당하게 확장해석한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사정이 이 정도 되면 북한에서 남측과 관련되어 하는 모든 언동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으로 해석되고, 나아가 북한이 일방적으로 언급한 모든 남한 구성원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심지어 북한의 대화제의 조차도 지령으로 해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든 남한 구성원을 지령수수자, 즉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는 지경이니 위와 같은 ‘지령’ 해석은 결국 남북한의 자유로운 교류․협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5) 소결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에 관한 원심의 해석을 유지하는 한 법 집행기관의 자의에 따라 국민 누구든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날로 진전되는 남북관계에 역행하는 것임은 물론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법집행을 막아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고자 하는 죄형법정주의의 기본정신을 근본부터 훼손하는 것이 될 것이고, 나아가 국가보안법을 통해 지키고자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오히려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고 할 것입니다.


      (나) 피고인은 ‘지령수수 또는 목적수행 협의’를 위해 탈출한 적이 없습니다(1991. 3.부터 1994. 7.까지 6회의 방북과 관련하여).


        1) 원심이 인정한 각 지령의 내용


        원심은 ① 1991. 3. 중순경 북한 사회과학원으로부터 받은 초청장을, ② 1991. 일자 미상경 한국학술연구원의 재개설과 관련 운영자금을 협의하기 위한 위 사회과학원의 입북요청을, ③ 1992. 7. 초순경 북한 ‘조선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 리지수로부터 받은 초청장을, ④ 1993. 일자 미상경 주체사상토론회에 참석하여 달라고 받은 초청장을, ⑤ 1994. 2. 초순경 북한 사회과학원 제1부위원장 김철식으로부터 받은 초청장을, ⑥ 1994. 7. 11.경 재독 북한 이익대표부 송룡욱으로부터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달라는 요청을 각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서 정한 ‘지령’으로 판단하여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 유죄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2) 위 각 초청장 및 요청의 ‘지령’ 해당 여부


        그러나 북한의 위 사회과학원이나 사회과학자협회와 피고인이 종속관계에 있었다고 볼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편, 원심이 인정한 바와 같이 피고인이 만일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피고인이 위 사회과학원이나 사회과학자협회에 대하여 지령을 하달할 지위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피고인이 지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원심이 논리의 모순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에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아 피고인이 수령한 위 각 초청장과 요청을 ‘지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초청장이나 입북 요청을 지시나 명령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초청 내지 요청은 말 그대로 초대 내지 청탁을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학술토론회 참석 초청, 입북요청, 장례식 참석요청 등을 받고 한 피고인의 위와 같은 방북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서 정하고 있는 지령탈출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목적수행 협의’ 해당 여부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 노동당에 가입하고 그 이후 간부로 선임되어 해외에서 남한 및 해외 교포들을 상대로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선전, 찬양하는 대남 통일전선사업을 추진하여 온 자로서, 북한측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공작금 문제에 관하여 협의하였으며 김일성 장례식에도 참석하였다면 피고인이 방북한 주된 의도는 북한 노동당으로부터 대남공작이나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체제를 유지, 존속시키기 위한 지령을 받거나 목적을 협의하기 위한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심이 인정한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전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우선 피고인은 비록 북한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사실은 있으나, 간부로 선임된 적이 없고, 대남 통일전선사업을 추진한 적도 없습니다.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이 부분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피고인의 방북은 북한의 공식적인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고, 그 주된 목적은 반국가단체의 목적인 국가전복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남과 북의 교량역할을 하기 위하여 북한 사회 연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1991년의 방북은 당시 서울대학교가 피고인을 초빙교수로 초청하려다가 무산된 차에 이루어진 것으로 역시 북한 사회과학원의 공식초청에 따른 것이었고, 공개적․공식적인 것이므로 피고인은 방북 기행문을 한겨레신문에 기고하기까지 한 것입니다. 당시 피고인은 방북하여 내노라는 북한의 주체철학자들과 토론을 하였고, 학문적으로 폐쇄된 북한에 서구사회의 학문적 경향과 철학, 페레스트로이카 등 서구사회의 변화실상을 소개하고 제공해 주는 역할을 하였던 것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노동신문은 피고인의 방북을 기사화하면서 피고인이 하지도 않은 발언을 피고인의 발언인 것처럼 보도하여 독자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1991년과 1992년에는 피고인이 관여한 한국학술연구원의 재개설을 위한 운영자금 지원을 요청하고(원심이 인정하는 바와 같은 공작금 협의가 아닙니다), 독일에서 북한 관련 책을 써 달라는 요구를 받고 북한의 나진․선봉지구와 중국의 개혁, 개방을 비교 연구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방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아가 피고인이 김일성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은 북한측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피고인이 재직 중이던 학교의 학사일정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해외동포들 중 일인으로서 위 장례식에 참석한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목적수행 협의’라는 것은 ‘반국가단체의 대한민국 전복이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협의’라는 의미로 그 목적의 내용이 특정되어야 할 것인데, 피고인의 방북의 목적은 오히려 학술토론회 참가, 한국학술연구원의 재개설 운영자금의 요청, 장례식 참가 등에 불과한 것들이어서 이를 두고 국가전복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협의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 공소시효의 완성


  피고인이 방북에 대하여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여도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즉,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의 방북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지령수수 및 목적수행 협의를 위한 탈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무죄입니다. 만일 축소사실을 인정하여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이 정한 탈출행위에 해당한다고 보는 경우에도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을 위반한 잠입․탈출죄는 공소시효가 7년이므로, 이 부분 공소사실이 이 사건 공소가 제기된 2003. 11. 19.로부터 7년 전에 이루어진 것이 역수상 명백하여 모두 공소시효가 완성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공소기각을 면치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바. 소결론


  피고인의 1991. 3.경부터 1994. 7.경까지 6차례의 방북행위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다른 법률에 의하여도 충분히 규율이 가능한 사안이고, 국가보안법이 국민의 기본적 인권에 중대한 침해를 가할 수 있는 법률이고 해석 여하에 따라서는 위헌으로 판단될 수 있는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 관하여 위헌적인 판결을 할 위험을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외면한 채 아무런 고민없이 만연히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을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 적용한 원심은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의 방북에 관한 이 부분 공소사실은 ‘탈출’행위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자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는 ‘탈출’ 행위의 범위를 해석을 통해 확장하고 그를 통해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한 원심은 국회가 국민의 기본적 인권침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취지에도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정하고 있는 ‘지령’ 및 ‘탈출’의 해석과 관련하여 정당한 범위를 넘어서는 해석을 하고 있는 바, 그와 같은 해석에 의하여 피고인에게 유죄를 인정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되는 것입니다. 또한 원심은 위와 같은 ‘지령’의 가능한 범위를 넘어선 해석을 통해 학술토론회 초청장, 입북 요청, 장례식 참석요청 등을 지령으로 보고, 나아가 피고인의 학술토론회 참가, 한국학술연구원의 재개설 운영자금의 요청, 장례식 참가 등의 활동을 목적수행 협의를 위한 행위로 보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을 적용하여 유죄를 인정한 것이어서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이 적용될 사안이 아니므로 무죄이거나 공소시효가 완성되어 공소기각을 면치 못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무죄이거나 공소기각을 면치 못한다고 할 것인바, 결국 원심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5. 회합통신의 점에 관하여(범죄사실 제3항)


  가. 개요


    (1) 원심 판결의 요지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공산집단이 김일성, 김정일 생일, 노동당 창건일에 해외동포들로부터 축전을 받으면 이를 이용하여 북한 주민들이나 국내 좌익세력들에게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홍보하고 세습체제 유지의 방편으로 활용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축전을 보내던 중


    (가) 1996. 12. 일자 미상경 김정일과 북한 정권을 찬양하는 ‘설 명절 축하편지를 김정일에게 보내어 언론에 보도되게 하고,


    (나) 1997. 2. 일자 미상경 위와 같은 내용의 ‘경애하는 장군님 탄생 55돐 축하편지’를 김정일에게 보내어 언론에 보도되게 하고,


    (다) 1997. 4. 일자 미상경 위와 같은 내용의 ‘위대한 수령님 탄생 85돐 축하편지’를 김정일에게 보내어 언론에 보도되게 하여


    각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연락하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2) 이 부분 항소이유의 요지


    그러나 이 부분 공소사실에 적용되는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은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동일한 상황을 규율하고 있는 점, 피고인이 외국인인 점, 남북화해분위기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주선, 중재하는 등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형식적 서신에 불과한 것들인 점등에 비추어 그 적용이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행위들은 모두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 8. 18. 이후에 있었던 행위들로서 모두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한다고 할 것인바, 우리 법원에 재판권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여 공소기각을 하여야 할 경우라고 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 부분 공소사실에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의 각 축하편지들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경우에 해당하여야 할 것이나, 가사 원심이 사실인정을 위해 사용한 증거들이 모두 증거능력이 있고 증명력이 있는 경우라고 하여도, 이 부분 공소사실들이 적시하고 있는 축하편지들은 모두 의례적인 수준에서 작성된 것에 불과하고, 나아가 목적수행 내지 임무수행과 전혀 무관한 것들이어서 위 법조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바, 따라서 피고인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들은 모두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나.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 적용의 배제


    (1) 다른 법률에 의한 의율가능성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9조 제3항이 정하는 내용과 일치한다고 할 것입니다. 즉, 위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9조 제3항은 “남한의 주민이 북한의 주민들과 회합․통신 기타 방법으로 접촉하고자 할 때 …”라고 규정하고,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 “…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보는 이상 북한의 주민들은 모두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인 북한 주민과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접촉 내지 연락을 하게 되면 도무지 어느 법률에 의하여 규율되어야 하는 사안인지 판단조차 불가능하게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3조는 “… 남북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하여는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고 규정하여 마치 법 집행기관이 판단하는 정당성 여하에 따라 국가보안법이나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적용된다는 것인바, 이는 동일한 구성요건에 관하여 법집행기관의 자의적 법해석․적용의 가능성을 열어놓아 결국 죄형법정주의 원칙은 무력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헌법재판소 1993. 7. 29. 선고 92헌바48 결정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재판의 전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3조에 관한 판단을 보류한 바 있으나, 당시 변정수 재판관은 위 법조항이 위헌이라는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고, 2000. 6. 15.에는 남북의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남북관계의 역사적 진전을 이룩하는 등 시대적 흐름이 화해와 협력을 향해가고 있는 마당에 동일한 구성요건적 행위에 관하여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을 제쳐두고 냉전시대의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용인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원심이 이에 관한 적극적인 고민 없이 피고인의 이 부분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행위에 대하여 만연히 죄형법정주의의 위반의 결과를 무릅쓰고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을 적용한 것은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2) 외국인에 대한 적용 배제


    한편,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등과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접촉하고자 할 때 …”라고 규정하고 있는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 제9조 제3항과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한 자”라고 규정하고 있는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은 행위주체를 정함에 있어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국가보안법에서는 행위주체에 관하여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아니한 반면,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에서는 ‘남한의 주민’으로 그 행위주체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국가보안법의 해석을 통해 반국가단체라고 인정하는 북한의 주민들과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접촉하는 행위를 하는 자를 남한 주민만으로 제한하고 있는 점은 외국인에 대하여는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정하는 통일원장관의 승인이 없어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급진전하는 남북관계 속에서 보다 원활하고 폭넓은 교류․협력을 이룩하기 위하여 마련한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취지에 비추어 보면,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인지 여하를 막론하고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적용되는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적용되지 않는 외국인의 회합․통신 등의 행위는 그 어떠한 법률에 의하여도 규제하지 않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더구나 1993. 8. 이후 독일 국적을 취득한 피고인은 이 부분 공소사실이 적시하고 있는 1996. 12.경부터 1997. 4.경 사이에는 이미 제1차, 제2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진행하였고 다시 제3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를 한창 준비하고 있던 때인바, 위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관하여 원심이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위 회의가 북한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하여 상호간에 신뢰를 쌓고 이해를 넓히는 과정은 우리나라에서 추진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정착과 통일정책에 필수적인 것이고 이후 이어진 일련의 남북화해분위기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회의를 대한민국측의 요청에 따라 중간에 주선하고, 중재하며, 원만하게 성사시킨 피고인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을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평화통일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 헌법에 위반되는 법 적용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외국인인 피고인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을 적용하여 유죄를 인정한 원심은 부당하다고 할 것입니다.


  다. 외국인의 국외범


  원심은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이 정하는 ‘연락’이란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 사건에서 비록 피고인이 외국인 독일에서 편지를 발송하였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인 김정일이 대한민국의 영토인 북한에서 이를 전달받은 이상 피고인은 대한민국 영역내에서 죄를 범하였다고 할 것이라는 이유로 이 부분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피고인의 행위가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원심의 태도를 그대로 일관하여 외국인이 북한과 연락을 한다고 하여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규율한다면, 북한과 수교를 맺거나 북한과 거래를 하는 모든 외국인들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 되고, 국내에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웃지 못할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한편, 원심이 판단의 근거로 삼은 대법원 1997. 11. 20. 선고 97도2021 판결이 외국인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6조가 정하는 탈출죄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태도를 변경한 것은 사실이지만, 위 판결에서 외국인에 대하여 국가보안법 제8조의 회합․통신죄까지도 적용할 수 있다고 선언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외국인이 제3국에서 북한과 연락을 하는 행위에 관하여는 종래의 대법원 판례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여야 할 것인바, “반국가단체나 국외의 공산계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통신 기타 연락을 한 자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미치는 영역에서 한 자임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인 이상 제3국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것이므로 원심이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이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지역이 아닌 일본에서 소련을 거쳐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고 일본 기타 제3국에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통신 기타 연락을 하거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것인즉 이는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여 반공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판시한 대법원 1976. 5. 11. 선고 76도720 판결은 이 부분 공소사실을 판단하는데 있어 여전히 유효하다고 할 것입니다.


한편, 위 4. 다. (2)항에서 본 이유에 따라서도 피고인에 대한 이 부분 공소사실은 모두 외국인의 국외범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은 1993. 8. 18. 독일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이 부분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대한민국 국적을 상실한 이후에 행하여진 것임은 공소사실 자체로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외국인인 피고인의 북한에 보낸 축전 등에 관하여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을 적용하여 유죄의 판단을 한 원심은 외국인의 국외범에 관한 위와 같은 법리를 오해한 하자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라. “연락” 해당 여부 


    (1) 원심의 판단


    원심은 대법원 1997. 7. 16. 선고 97도985 판결을 인용하여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의 죄는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이나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하면 성립한다고 하면서, 피고인이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을 감춘 채 국내에서는 북한 관련 저술활동을 활발한 독일 교포인 교수로만 알려져 있는 상태였는데, 북한은 이러한 위치에 있는 피고인이 김정일에게 설 명절 축하편지나 김일성, 김정일 생일축하편지를 보낸 사실(특히 당시 김일성은 이미 사망하였음에도 아들인 김정일에게 생일축하 편지를 보냈다)을 노동신문을 통하여 보도함으로써 김일성 독재체제 및 이를 이은 김정일 독재체제인 북한 정권을 선전, 찬양하는 방편으로 사용한 사실이 인정되고, 피고인이 북한 등 사회주의 국가에 대하여 정통하므로 자신의 편지가 위와 같은 선전도구로 사용될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위 각 편지를 발송하여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인 김정일과 연락한 것이라고 봄이 상당하므로, 이는 일반 사인인 북한 주민들과 사이에 단순히 안부 편지를 주고받는 것과는 달리 피고인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연락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 유죄의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2)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이 정하는 ‘연락’의 의미


    ‘연락’이란 연락을 하는 사람이 연락을 받는 사람에게 자신의 사정을 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과 관련지어 해석하면, 본조에서 정하는 ‘연락’이란 연락을 하는 사람이 연락을 받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임무의 수행과 관련한 어떠한 사정을 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원심은 본조의 ‘연락’을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모든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으나, 단순히 친척간의 정이나 친우간의 친분으로 안부를 묻거나 축하편지를 하는 등 자기의 (임무 수행과 관련된) 의사를 전달하는 것과 상관없는 것인 이상 본조의 ‘연락’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연락’이 임무수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그 내용면에서 본조 제1항 전단의 주관적 인식요소인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라는 구성요건을 배제하여 판단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국가의 존립․안전을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협․침해하고 영토를 침략하며 헌법과 법률의 기능 및 헌법기관을 파괴․마비시키는 것으로 외형적인 적화공작 등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지배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 우리의 내부체재를 파괴․변혁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것입니다(헌법재판소 1990. 4. 2. 선고 89헌가113 결정).


그런데, 단순히 설 명절 축하편지를 보내고, 김일성, 김정일에게 생일축하편지를 보냈다는 사실이 도대체 대한민국의 독립을 침해하고 영토를 침략하며 헌법과 법률의 기능 및 헌법기관을 파괴․마비시키는 외형적인 적화공작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는 것인지, 나아가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 등 우리의 내부체재를 파괴․변혁시키는 것과 어떤 연관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인지에 관하여 원심은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피고인에게 유죄의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의 단순한 대면이나 그의 목적수행을 위한 활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전연 다른 의도 하에서의 모임이나 순수한 인도적 의미에서의 도움은 구 국가보안법 소정의 회합죄에 해당하지 아니한다는 전제 아래 제1심판결이 들고 있는 증거들을 종합하여도 피고인이 제1심 판시와 같이 인사와 안부를 묻기 위하여 위 이선화를 만나 그와 일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대화를 나눈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뿐 위 이선화를 만난 것이 동인의 신상 및 활동방향에 변화가 있음을 직감하고 그 진위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그 밖에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할 만한 자료를 발견할 수 없다 하여 같은 취지에서 이 부분 공소사실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제1심판결을 유지하고 있는 바, 원심의 위와 같은 전제는 옳다고 여겨지고…(대법원 1993. 9. 28. 선고 93도1969 판결)”라고 판시하고 있는바, 그 취지는 결국 목적수행과 아무런 관련 없는 의례적이고 사교적인 회합․통신 기타의 방법에 의한 연락은 본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심은 위와 같은 대법원 판결의 취지에 도 반하여 단순한 설 명절 축하편지와 김일성, 김정일 생일축하편지를 목적수행과 관련된 연락으로 판단한 하자가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국회가 1991. 5. 31.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면서 구체적으로 “이 법을 해석적용함에 있어서는 제1항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필요한 최소한도에 그쳐야 하며, 이를 확대해석하거나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된다(국가보안법 제1조 제2항)”고 하는 규정을 넣어 과거 군사독재정권시절 이 법의 남용으로 인하여 일어난 국민의 기본적 인권침해의 폐해를 시정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이러한 입법자의 의사에 역행하여 피고인의 설명적 축하편지, 생일축하편지를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의 ‘연락’ 행위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부당한 확대해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피고인은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도 아닐 뿐더러(이를 입증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피고인은 김일성 독재체제 및 이를 이은 김정일 독재체제인 북한 정권을 선전․찬양한 적도 없습니다(이를 입증할 증거도 역시 전혀 없습니다).


  마. 소결론


  이 부분 공소사실에 관하여는, 피고인이 외국인이라는 점과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과의 관계에 비추어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의 적용은 배제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고인의 이 부분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행위는 모두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는 경우이므로, 우리 법원에 재판권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설 명절 축하편지나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축하편지는 그 내용조차 증거에 의하여 확인되지 아니한 것이고, 나아가 의례적인 수준에서 작성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 것인바, 목적수행 내지 임무수행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위 서신들을 국가보안법 제8조 제1항이 정하고 있는 ‘연락’에 해당하는 것으로 본 원심에는 사실 오인, 법리오해 및 채증법칙 위반의 하자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분 공소사실은 무죄 또는 공소기각을 면치 못한다고 할 것인바, 결국 원심은 취소되어야 합니다. 


6. 사기미수의 점에 대하여


  가. 개 요

  원심 범죄사실의 요지는 ‘피고인은 황장엽이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기재된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책자를 발간, 배포하자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후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된 사실이 있고, 김일성 장례식 장의위원 서열 23위의 ‘김철수’가 피고인이면서도 1998. 10. 13. 서울지방법원에 황장엽을 피고로 하여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함으로써 법원을 속여 청구금액 상당의 금원을 편취하려고 하였으나 패소판결이 선고되어 미수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1998년 황장엽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은 명예회복을 위한 것으로서 피고인에게는 금전을 편취하겠다는 고의와 불법영득의사가 없었고,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주요 부분이 진실이었고 다른 내용은 밝히기 어려운 상황이었던만큼 법원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도 없는 바, 피고인의 민사소송 제기 행위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은 사기죄의 구성요건요소가 되는 사실오인 및 법률적 평가를 그르친 위법이 있습니다.


  나. 편취의 범의 및 불법영득의사의 부존재


  사기죄는 재산죄이므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에게는 황장엽으로부터 돈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1998년 민사소송 제기 당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진실과 허위”의 해당 부분 내용이 명백히 사실과 다른 것었기 때문에 즉,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진실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고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피고인에게 편취의 의사나 불법영득의사가 없었다는 점은 피고인이 1심 패소후 판결 내용중에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자 항소를 포기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피고인이 민사소송을 제기하게 된 경위를 보더라도 홍성담 사건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김성수가 김철수라고 기재되어 있는 영사증명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김철수가 보통명사라고 생각될만한 자료들이 발견되자 국내의 피고인의 지인들이(특히 원심 법정에서 증인으로 진술한 박호성 교수가 적극적이었음) 황장엽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명예를 회복할 것을  권유하고, 이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획소송으로 맡아 처리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은 애초부터 명예회복 의도 외에 황장엽을 상대로 금전을 편취하겠다는 의사는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보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소송을 시작하였고, 소송과정에서 황장엽이 김주석의 장례식 때 해외에서 유일하게 초대된 사람이 피고인이라고 하는 등 사실이 아닌 내용을 주장하여 오랫동안 소송이 진행된 것이고,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남쪽의 자료를 보았을 때 김철수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일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황장엽이 다른 김철수를 피고인으로 지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제3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계속하여 피고인은 ‘피의자는 소송제기 당시 본인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서열 23위로서 김철수로 행세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황장엽씨의 주장은 송두율=김철수=정치국 후보위원=유럽의 대남공작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조건에서 80년대말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영사증명을 발견하여 나 이외에도 김철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경원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입북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구주공잭책으로 지하공작을 한 번도 해 본 사실이 없고,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활동한 사실도 없기 때문에 황장엽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한국에서 온 박호성 교수에게 위임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정치국원으로서의 김철수, 구주총책으로서의 김철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1997년 이후에는 북과 저의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정치국원 송두율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6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피고인은 이어 ‘처음부터 김철수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김철수가 본인임을 시인하는 순간 황장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시인할 수 없었다.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장의위원 명단에 올랐지만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나 조선노동당 구주총책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민사소송이 시작된 1998년에는 피고인과 북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검찰 18회 피의자신문조서)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민사소송을 통해 황장엽으로부터 돈을 편취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원심 법정에서의 증인 박호성의 진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박호성은 ‘1심 판결 후 민변 변호사들과 나는 항소하자고 하였으나, 피고인은 일단 진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고 항소를 포기하였다. 자신은 송두율 교수에게 화가 나 1년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 기망행위의 부존재


  피고인이 당시 재판에서 주장한 중요 부분인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점이 허위사실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법원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결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밝힌 바 있어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겠습니다.


당시 피고인이 스스로 노동당 가입 사실과 김일성 장례식 장의위원 김철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피고인은 최근까지도 장의위원 김철수가 본인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앞서 검토한바와 같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인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습니다) 김철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바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송의 쟁점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인가에 맞추어져 있어서 이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위 민사소송 재판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이 장의위원 김철수라는 점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를 가지고 법원에 대한 기망행위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라. 소결론


검토한 바와 같이 피고인은 민사사송 제기 당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도 외에 황장엽으로부터 금전을 편취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으며 이는 허위사실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법원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에 대한 소송사기미수의 점은 구성요건해당성이 없어 범죄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하므로, 원심은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하였어야 합니다.


7. 피고인에 대한 원심의 양형 이유와 그 부당성


  가. 원심은 피고인에게 징역 7년이라는 중형을 선고하면서 그 이유로, ① 객관적이고 균형감 있는 학자의 저술로 볼 수 없는 정도로 … ‘내재적 접근법’이나 ‘주제사상에 관한 연구’등은 …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며 …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 대중으로 확산되어 나가는데 크게 공헌 … 북한의 간부의 지위에까지 오른 피고인이 신분을 숨기고 이와 같이 북한에 편향된 저술활동을 할 것은 올바르고 냉철한 남, 북한의 현실 파악이 선행되어야 할 남북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장애물로 작용하였고, ② ‘경계인’으로 포장한 채 일방적으로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 찬양하는 저술활동을 하여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하였으며, ③ 남한 (특히 지식인) 사회의 신뢰를 저버리고 이를 악용하여 결과적으로 그들을 기망한 셈이 되었으므로 마땅히 진지한 사과와 반성을 하여야 할 것인데, 자신의 행적에 대하여 자백하지 않고 부인으로 일관하고 있어 피고인이 진정으로 반성하는지 여부가 심히 의심스럽고, ④ 피고인의 행적,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 국가의 안보에 위태로운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하여는 단호하게 처벌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나.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피고인의 저술 활동, 특히 방법론으로서의 내재적 접근법은 어디까지나 학문적 활동의 영역으로 학계에서 논의되어 학술적 검증을 받아야 할 사안이지 법률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으며, 가사 그것이 ‘북한에 편향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역시 자유로운 사상의 시장에서 다른 정보․생각들과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학문적으로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지 법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는 영역이 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원심이 들고 있는 ‘주체사상파’에 대한 피고인의 영향력은 사실이 아니며, 북한에 대한 피고인의 주장이 일방적으로 옳다고 평가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되지 않았다는 점은 이 사건 재판 과정에도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습니다). 북한이나 통일에 대한 생각이 불변의 가치로 통일되어야 한다는 원심의 생각은, 학문의 자유나 우리 사회가 가진 다양성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폭을 간과한 것일 뿐 아니라, 특히 북한의 사상과 실상을 알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겠다는 생각이 (일방적 흡수통일이라면 몰라도) 평화 통일에 장애물이 된다는 판단은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생각입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평화 통일은 상대방을 ‘대상’이 아닌 ‘주체’로 인정하고,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으로 긍정하는데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피고인이 남과 북의 지식인간의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증진 및 이를 통한 화해의 진전에 기여하였다고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은 피고인의 활동은 변화하고 있는 남북관계 및 한반도 정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변화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다. 또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의 지도적 임무 수행이나 북한의 지령에 의한 명예훼손 등이 사실이 아니고 노동당 입당 사실을 굳이 밝히지 않은 것 또한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남북의 특수한 상황을 바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은 앞서 본 바와 같고, 무엇보다 북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저술 활동에 일부 편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고 자유 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심대한 위협으로 작용”한다는 양형 이유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원래 학문․저술 활동에 대하여 이적성이라는 이념적, 법률적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와 개념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저술은 합리적 진보에 가까우며 이적성을 논의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피고인의 저술 내용 어디에도 자유 민주주의 질서를 부인하거나 폭력적인 방법을 옹호하는 내용이 없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될 만한 것이 없음에도 이를 중요한 양형 사유로 삼은 원심판결의 양형은 부당합니다. 


  라. 원심 법원은 반복하여 피고인이 “반성하지 않았다”는 점을 중형 선고의 이유로 삼고 있으나, 피고인은 이미 조선노동당을 탈당했고 수사단계에서 북한에 기울어진 생각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다짐했습니다. 법원이 요구하는 반성이 도대체 무엇에 대한 반성인지 알 수 없으나(반성이 필요하다고 한 부분은 대부분 잘못된 사실인정이나 평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한 지성인에게 그 이상의 반성을 요구하거나, ‘반성의 모습’이 없다고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생각이 다른 사람에게 전향을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어서, 사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현행 헌법 하에서는 인정될 수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원심이 ‘기망의 대상’이 되었다면서 ‘사과’하라고 하는 지식인들과 각급 사회단체들은, (피고인 생각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모두 이구동성으로 피고인의 학문활동을 처벌하는 것에 심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탄원서등을 통하여 법원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마. 원심은 피고인의 행적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고려하여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하고 있으나, 오히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과 국제사회는, 이 사건 원심 판결 과정의 위험성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즉 한 차례도 간첩(그 개념상 적국에 제공할 목적으로 기밀을 탐지하거나, 기밀에 속하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 행위를 한 적이 없는 한 학자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매도하는 언론의 마녀 사냥식 보도와 학문․저술 활동에 사법적 재단을 가하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다양한 사상이 활발하게 논의될 수 있는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을 저해하게 될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2003년도 미국무부 인권보고서에서도 피고인의 사례를 국가보안법의 모호한 규정에 의한 인권침해 사례로 언급하고 있으며, 독일의 일간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원심 판결이 난 날 “학문과 양심의 자유가 국가보안과 법규에 따라 제한될 수 있다는 판결은, 소름 끼치는 개발독재에서 자유로운 법치국가적 질서로 한국이 발전해가는 전환기적 풍경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이 판결로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에서 주빈국으로서 현대적 문화국가의 모습을 선보이려던 한국의 위상이 크게 손상됐다”고 평가하면서 “그러나 그때까지는 아직 고칠 시간이 남아 있다…한국의 관료집단, 특히 정보기관들은 1945년부터 이 나라를 지배해온 세대의 사고방식에 지배되고 있다”고 지적했고, <쥐트도이체 차이퉁>지도 “37년간의 망명 끝에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한 독일 국적의 학자가 북한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마치 중범죄자 처럼 감옥에 갇혔다”며 “설령 (검찰이 제기한) 혐의가 모두 맞다고 해도 송 교수는 북한 정권이 매수한 동조자이지 테러범이나 거물간첩이 아니다”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 및 사회의 역사적, 구조적 모순이 반영된 상징적 사건입니다. 변하지 않는 과거의 잣대로 평가하기 보다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숙 정도를 한 단계 높이고 사회구성원간의 통합수준과 정도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의미에서, 피고인에 대한 중형 선고는 재고되어야 마땅합니다. 이를 통해 법원과 우리 사회가 가지 포용과 열린 생각의 폭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8. 결 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피고인에 대하여 원심이 인정한 유죄부분 범죄사실은 모두 범죄사실을 인정할만한 증거가 없어 무죄이거나, 공소기각 판결이 내려져야 할 사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전논리를 답습하고 있는 검찰이 주장하는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한 원심 판결에는 국가보안법의 위헌성을 도외시하고 무리하게 법적용을 한 점, 채증법칙에 위배한 사실오인으로 판결에 영향을 미친 점, 이 사건에 적용되는 국가보안법 규정들의 해석에 관한 법리오해의 점 등의 위법이 있습니다.


피고인을 중형에 처한 원심의 양형은 피고인이 살아온 인생여정, 피고인이 우리나라 민주화에 기여한 점, 우리사회가 이미 상당한 정도로 다원성이 보장되는 사회로 접어들었고 남북관계의 현실도 급격하게 화해와 통일로 나아가고 있는 점, 피고인의 행위가 국가의 존립이나 자유민주질서를 위태롭게 할 만큼 이적성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 피고인과 같은 “경계선”상의 해외동포를 포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성숙에 크게 기여할 수 있는 점, 스스로 대한민국 체제를 선택하여 귀국한(법질서를 준수하겠다는 의사까지 밝힌 바 있음) 피고인을 우리 민족의 평화와 통일, 우리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촉발하는 중요한 재원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지나치게 과중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피고인에 대하여 법원이 과거의 분단, 냉전, 대결, 처벌의 논리를 벗어나 화해, 통일, 평화, 상생적 발전의 논리에 입각한 사법적극적인 판단을 내려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미 변화된 법현실을 법원의 전향적인 법률해석, 적용을 통해 규범영역에서도 현실화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와 민족이 보다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정표가 제시되어야 할 때입니다.


                                                2004.    5.    10.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 수

                                                담당변호사  이   돈   명


                                                    변호사  김   형   태


                                                법무법인 정평

                                                담당변호사  심   재   환


                                                변  호  사  안   영   도


                                                변  호  사  김        진


서울고등법원  제6형사부   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