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건   2004노827  국가보안법위반 등

피고인   송   두   율

 

 

 

항 소 이 유 서(보충)

 

                                                        2004.     5.    17.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  수

 

                            담당 변호사 송  호  창

 

 

 

서울고등법원  제6형사부   귀중

 

---------------------------------------------

[목차]

1.      저술활동 관련 원심 판결의 주요내용

2.      원심 판결의 문제점 요지

3.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학문의 자유

4.      저술활동의 배경과 목적

5.      저술에 대한 구체적 분석(원심 판결의 저술에 대한 곡해)

6.      저술과 행적의 상호관계에 대한 원심판결의 곡해

7.       저술활동이 국내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8.      결론

-----------------------------------------

 

1.      저술활동 관련 원심판결의 주요내용

 

원심 법원은 아래와 같이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국가보안법 제3조 2호의 지도적 임무종사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선험적 분석에 입각하여, 북한은 정권과 주민이 상호 이해가 일치되는 공동운명체의 관계라고 전제하고, 저술활동을 통해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북한의 평가와 이해를 주장함으로써, 국내¡외 친북세력들 사이에 주체사상 학습 분위기를 고취시키고 ‘북한바로알기운동’을 대중에게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이 시기는 사회주의가 붕괴되던 시기였지만, 피고인 자신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북한 당국자의 발언¡입장을 자신의 저술에 그대로 옮겨 적는 방법의 저술활동을 통해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의 옹호와 선전에 성공했으며 국내의 자생적 ‘주체사상파’에게 이론적 무기를 제공했다.

 

1991년 5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주체사상 확산과 북한체제의 유지·강화 및 그동안 유럽에서의 친북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 국가주석인 김일성의 지명에 의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91년 6월 이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선전하기 위하여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작성된 기고문이나 서적을 ‘국내에 들여보내는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저술활동을 통해

   - 첫째, 북한의 주체사상과 북한 권력의 정통성, 김일성의 정치력 등을 찬양하고, 김정일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고, 북한의 실상을 호도하고, 남한 사회와 통일정책을 비방하고, 주한미군의 실체적 역할을 전면 부인했다.

   - 둘째, 남¡북에 대해 자신이 주장한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분석을 실시하기보다는 외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편향된 평가를 내리고자 했다.

   - 셋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속이고 남¡북 사이의 ‘경계인’으로 자신을 포장한 후,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주체사상 및 북한 체제의 우수성을 선전하고 이를 수용하도록 만들었다.”

 

요컨대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의 간부의 지위에까지 오르고도 그 신분을 숨기고 북한에 편향된 저술활동을 함으로써 올바르고 냉철한 남, 북한의 현실 파악이 선행되어야 할 남북 평화통일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장애물로 작용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2.      원심 판결의 문제점 요지

 

그러나 원심 판결은 학문의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였으며, 피고인의 저술활동 목적을 왜곡하면서 학자로서 통일에 기여하고자 한 활동을 친북활동으로 단순히 폄하하였고, 구체적으로 피고인의 학문방법론인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몰이해에 근거하여 북한과 남한사회에 대한 피고인의 분석과 평가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여 단순한 친북행위로 단정 지었습니다.

 

원심은 1988년 이래 피고인의 학문적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후보위원의 지도적 활동이라고 하면서도 1995년 이후 2003년까지의 남북통일학술회의 개최활동에 대해서는 후보위원의 활동이 아니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즉 원심은 피고인의 학술회의 활동에 대하여 “우리 남한 사회는 이미 북한의 위장평화공세나 선전, 선동에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정도로 성숙하였다고 보여질 뿐만 아니라 ........., 피고인이 당시 북한의 고위직 간부인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는 사정만으로는......... 피고인이 북한을 위한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에 해당한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이는 원심이 후보위원 여부와 학술회의의 위법성을 독립된 기준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후보위원 여부와 학술회의의 위법성은 그 구성요건이 전혀 다른 것이므로 이를 별도로 다루고, 독립된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심은 학술회의와 마찬가지로 저술활동에 대해서도 후보위원 여부와는 별도의 기준에 따라 범죄성립 여부를 판단하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심은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이란 점을 전제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진정 후보위원으로서 대남공작활동을 하려고 했다면 별로 큰 파급력도 없는 저술활동보다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되고 남한학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남북통일학술회의에서 친북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남북학술회의에서 특별히 친북활동을 한 바가 없습니다. 피고인은 후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애초부터 친북활동을 할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한쪽에 편향된 태도는 통일을 위한 경계인으로서 역할을 하고자 하는 기본취지에 맞지 않으며, 학술회의를 위해서도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원심은 동일한 사람의, 동일목적의 활동에 대해 저술활동은 국가보안법 제3조를 적용하여 유죄판결을 하고, 학술회의는 무죄판결을 하는 일관되지 못한 법적용을 한 것입니다. 이는 국가보안법의 위헌성, 즉 형벌법규의 불명확성으로 인한 자의적 법적용 · 법 앞의 평등원칙 위반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원심은 헌법상 보호받는 학문¡사상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 지극히 자의적으로 불명확한 기준에 따라 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문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였습니다. 원심은 친북이냐 아니냐 라는 이분법적 · 반학문적인 잣대로 학문발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피고인의 저술활동의 내용을 낱낱이 분해하여 재단함으로써 학자의 양심을 발가벗겼으며,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학문자유의 내용 중 본질적 내용에 해당하는 학문연구의 자유를 법의 이름으로 침해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심은 피고인이 한 저술활동의 목적을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옹호¡선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곡해하여 그 동안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온몸으로 노력해온 한 학자의 활동을 일거에 범죄행위로 취급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수십 년간 고국에도 들어오지 못하는 고통을 견디며, 한국사회와 독일을 비교¡연구하는 가운데 독일통일의 과정을 직접 체험하였고, 그 과정에서 독일통일의 성과와 한계를 면밀히 분석하여 한반도 통일을 위한 학자의 역할의 중요성을 깨달았으며, 학자적 양심에 따라 북한과 남한 양쪽 모두를 한발 다가서도록 설득하려고 하였습니다.  

 

원심은 제대로 된 증거자료도 없는 상태에서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성급하게 전제하고(그러므로 원심은 피고인을 ‘명예직’ 후보위원이라고 판단함), 이러한 선입견만으로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후보위원의 주도적 임무행사라고 규정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의 목적이 한반도의 발전적 통일이란 점과, 이런 목적이 모든 기고문과 저서에서 항상 확인된다는 점을 원심은 애써 외면하였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내용을 해석함에 있어서 무색투명하게 그 이적성 여부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후보위원의 저술이란 예단을 갖고 그 예단에 따른 결론과 그 결론의 근거를 찾는 본말이 전도된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친북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남북을 포용하는 매개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고자 부단이 노력하였다는 학문적 평가를 받는 피고인의 글이 친북적 또는 후보위원의 저술이라고 평가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원심이 학계의 지적을 인용하면서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의 입장을 두둔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결하자마자 인용당한 학계의 당사자인 강정인 교수는 2004. 4. 7.자 한국일보 기고문을 통해 “판결을 지켜보면서 나에 대한 부당한 의혹을 해명하는 것은 물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학문의 자유를 위해 이제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나는 내재적 접근법이 통째로 잘못되었다는 일방적 비판을 제기한 적이 없다”고 반박하였습니다.

 

내재적 접근법에 따른 북한 이해는 우선 북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피고인은 자신의 주관적 지적과 평가를 전혀 반영시키지 않았습니다.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정리되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입장을 섣부르게 밝히는 것은 무책임하고, 전혀 학자적 태도가 아닙니다. 나름의 주관적 기준에 의한 냉철한 분석과 평가, 비판은 이러한 객관적인 소개 이후에야 가능한 것입니다.

 

또한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에 대해 분석하면서 북한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해 찬양¡옹호하였다고 판단하였으나 원심이 북을 찬양했다는 취지로 인용한 글 의 대부분은 피고인의 기행문이나 저서 속에 등장하는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표현입니다. 원심 판결 중 피고인의 글에서 인용한 내재적 접근법, 북한체제, 주체사상 등은 피고인의 생각 또는 이론을 정리한 부분과 피고인에게 북한의 체제 우월성을 설명하는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말을 혼동하여 나열하고 있는데, 이러한 나열은 마치 모든 인용부분이 피고인의 표현인 것처럼 오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한편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국내의 소위 ‘주사파’ 운동권과 ‘북한바로알기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이러한 판단은 1980년대 후반의 운동권내 사정에 대해 전혀 무지한 판단입니다.

 

당시 운동권들은 대학원 진학을 일종의 관념적 도피로 치부했고, 그래서 강단운동은 폄하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1988년 하반기부터는 이론적인 면에서 본격적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되고 논쟁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운동권들은 논쟁에 빠져드는 것 자체를 소모적으로 보고 금기시하였습니다. 피고인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관념적이고 현학적이어서 결국은 실천이 아니라 논쟁과 관념으로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라면서 비판하고 있었던 실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학생운동과 주사파 운동권에게 피고인의 저술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완전히 현실과는 괴리된 궤변입니다.

 

원심은 자생적으로 진행되던 ‘북한바로알기’라는 정서적 운동에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이라는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였다고 하나,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서적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운동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완전한 오해라고 할 것입니다.

 

3.      헌법상 기본권으로서 학문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헌법적 차원에서 보호하려는 이유는 학술자료, 저술에 대한 법적 평가와 처단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 때문입니다. 한 학자의 수십년 동안의 연구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이론은 사회 현상을 해석하고, 과거와 현재를 비교¡분석하여 그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수백년 동안 발전되어 온 문화인류학과 칸트이론을 법정에서 처음 접한 재판부가 그 오랜 기간 땀과 노력이 베어있는 학문연구의 결과를 짧은 재판기간 동안 단 몇권의 수사기록만으로 판단한다는 그 자체가 넌센스이며, 그러한 법률적 재단은 반드시 학문내용에 대한 곡해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의 이론과 관점에 반대하는 학자들까지도 피고인의 학문적 연구성과가 학술토론장이 아닌 법정에서 재단 당하는 것에 분노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본 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여론의 관심대상이기 때문이 아니고, 이와 같은 학문의 자유에 대한 보호필요성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피고인에 대한 처벌, 특히 피고인의 저술에 대한 유죄판단에 대해 좌·우와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전체 학계가 분노하며, 절규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학문활동의 자유는 어떠한 이유로도 그 본질적인 내용이 침해 받아서는 안됩니다. 학문의 자유는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 가운데 하나로서 학문연구의 자유와 연구결과 발표의 자유, 교수의 자유 및 연구를 위한 결사의 자유를 그 내용으로 합니다. 이 가운데 연구의 자유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유로서 어떠한 형태로도 방해받을 수 없는 절대적 자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의 자유는 연구결과 발표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 무용한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학문연구는 단순한 자기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고 연구와 분석을 통해 공동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학문연구는 연구성과의 발표와 공개를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공개적으로 비판과 반비판을 받는 것을 속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헌법을 포함한 우리의 전체 법체계가 상정하고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상은 자신의 사상 및 연구의 결과를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토론하는 자유롭고 비판적인 문화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연구의 자유와 연구성과 발표의 자유는 절대적 기본권으로서 동전의 양면이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침해될 수 없는 학문 자유의 본질적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피고인이 이미 공개된 학술지나 저서, 신문, 시사잡지 등을 통해 발표한 내용을 문제삼아 유죄판단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연구결과 발표의 자유를 정면으로 침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헌법이 보장하는 또 다른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에도 반하는 것입니다. 표현의 자유 역시 자유민주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며, 사회발전을 위해 다른 기본권 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기본권이므로 ‘실질적으로 해악을 야기하는 명백한 위험이 없는 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확립된 원칙입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이것이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수렴되는 것을 체제의 기본원리로 하고 있습니다. 특히 학문적 성과는 학문의 세계에서 상호 토론을 통해 검증되는 것이 문명사회의 확립된 원칙입니다. 나아가 원심에서 문제삼고 있는 피고인의 글들은 이미 십여 년 전에 공개적으로 발표된 것으로서 이것이 지금에 와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구체적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새삼 사법적으로 문제 삼기는 어려운 성격의 것들입니다.

 

더욱이 원심은 피고인의 연구내용 자체에 대해 이것이 남한 체제를 의도적으로 비판하고 폄하하면서 상대적으로 북에 대해서는 옹호하고 찬양했다는 등의 내용에 관한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 자유인 연구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므로 사법부의 권한을 넘어서는 월권적인 것입니다. 학문이나 예술을 포함한 사상의 자유는 그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정신적 기본권에 대해 확립된 이론입니다. 이와 같은 사법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연구 내용에 대해서 까지 법적 판단을 감행함으로써 국민의 사상과 정신적 영역에 개입하려는 전근대적이고 권위적인 태도를 보여주었습니다.

 

도대체 원심이 적시하는 ‘북한에 이롭고 남한에 해로운’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모든 학문과 사상을 ‘적에게는 이롭고 우리에게는 해로운’ 이분법적 방식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요? 원심은 이번 피고인에 대한 판결에서 스스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질서 수호 및 국가안전에 위해를 준다고 판단될 때만 최소한의 범위에서 적용되어야 합니다”라고 밝히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본질적으로 유린하는 이율배반적인 결과까지 연출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사법부의 자의적인 판단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한, 또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합니다’는 명분아래 아직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합리화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 한, 이러한 상황은 계속될 것입니다.

 

둘째, 피고인의 북한 왕래 또는 북한 인사들과의 접촉이 학문활동을 목적으로 필요한 범위에 한정된 것이었다면 이 또한 학문의 자유의 한 부분으로 보아 넓게 인정해야만 합니다. 피고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가 북한을 방문하고 북의 인사들을 만난 것은 북한의 사회 그리고 사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현존하는 실정법에 반하고 처벌된다고 하기 위해서는 위의 일반적인 학문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현 사회질서를 구체적으로 위협했다는 특별한 사정이 요구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방북과 북한 연구가 도대체 한국사회에 어떤 위협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북한 방문은 주 목적이 학문활동을 위한 것이었으며, 북한 인사와의 접촉이나 교류도 이를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피고인은 바로 이러한 목적 때문에 그 연구결과를 남한의 공개적 잡지와 저서를 통해 발표하였으며, 이것은 이미 우리의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공유된 바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이미 공개되고 널리 알려진 학자의 연구결과 발표를 이유로 형벌, 그것도 중형을 선고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는 학문의 자유에 대한 침해임은 물론 우리 법질서의 근본원리인 자유민주주의 체제와도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4.      저술활동의 배경과 목적

 

1.      피고인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전망과 기여

 

동서독의 경우 통일 이후 15년이 지났으나, 경제적 사회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진정한 내적 통일의 길은 요원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정치 경제 체제의 통합은 이루어졌지만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측면에서 보면 독일은 여전히 분단상태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형태로 통일이 진행되면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더욱 철저하게 관철되어 독일사회가 발전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채 동독이 사실상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 냉엄한 현실은 아직도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반면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일과정에서 독일 지식인들이 보여준 이론과 실천의 행적 또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독일통일은 전통적으로 보편적 가치의 담지자 혹은 민족의 양심으로 존경받아온 지식인들을 패배자로 전락시켰습니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통일을 하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던 대다수 지식인에게는 독일이 통일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에는 패배를 의미했습니다. 서독 지식인들은 독일현대사의 특수한 발전을 들어 거대 민족국가 독일의 재등장을 ‘유럽의 독일화’로 우려했고, 동독 지식인들은 서독에 대한 발전적 대안으로서 동독 땅에 진정한 민주적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꿈 때문에 통일에 반대했습니다. 그 결과 두 독일의 지식인들은 통일을 추진하던 보수세력, 특히 보수언론의 집중포화의 대상이 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독일과 한국 지식인의 통일관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대개 진보적 지식인들이 통일에 반대했고 보수적 언론이 통일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한국에서는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통일에 대한 찬반 입장만 놓고 보면, 한국의 진보파는 독일의 보수파와 같은 입장입니다.

 

독일통일의 과정과 결과,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했던 우리 학계가 대체로 합의한 역사적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통일논의의 핵심은 통일의 형식이 아니라 통일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연합이냐 연방제냐 하는 국가형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통일한국이 어떤 사회적 실체를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엄밀하게 따져보면 독일의 지식인들이 보인 반통일적 입장이라는 것도 통일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통일 이후 사회의 성격에 대한 고민의 표현이었습니다.  

 

둘째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경제적 정치적 통합, 즉 외적 통합보다 심리적 정서적 문화적 통합, 그러니까 내적 통합이 훨씬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독일에서 심리적 정신적 ‘내적 분단’이 지속되고 ‘머리 속의 장벽’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통일이 서독에 의한 동독의 ‘내부 식민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동독의 가치를 철저하게 매장하면서 서독의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점령군식 통일의 결과인 것입니다.

통일이 제도의 통합이기에 앞서 인간의 융합이라면 통일의 과정은 멀고도 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한사람은 북한사람에 대해 또 북한사람은 남한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지난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두 사회에서 자라나온 고유한 가치들을 상호 인정하고 슬기롭게 조화시키는 관용의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셋째, 독일통일이 우리에게 부정적 교훈만 주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우리가 독일 통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서독정부가 1970년대 초부터 일관되게 추진해온 일방주의 정책입니다. 이는 서독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일방적으로 동독을 지원해왔고 이러한 장기적인 우호정책이 결국 상호신뢰의 기반을 조성하여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독일의 통일과정은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상호주의’라는 것이 북한에 대한 적대의식에서 나온 냉전적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넷째, 독일 지식인들이 통일논의에서 보인 깊이와 폭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통일을 단순히 분단된 민족국가의 복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이상적인 사회, 바람직한 세계를 건설하는 기회로 파악했습니다. 남한의 지식인들 역시 통일논의의 깊이와 폭을 넓혀야 합니다. 통일한국이 이루어야 할 바람직한 사회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성찰로까지 논의가 깊어져야 합니다.

 

분단 이후 우리 사회의 지상목표는 통일이었습니다. 분단은 우리 민족의 발전을 가로막는 질곡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통일을 위한 우리의 노력이 결코 폭력적 수단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중의 하나입니다. 전쟁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1970년대부터 소위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통한 남북통일을 추구해 왔습니다. 바로 여기에 대북포용정책, 또는 남북교류협력을 통한 통일정책의 기원이 놓여 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시기에 동독의 공산주의체제가 붕괴하고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방식으로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자, 우리 사회에서도 통일에 대한 기대가 부풀었습니다. 이미 지구상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사회 전체가 정치¡경제적으로 난관에 봉착하여 그 대부분이 붕괴된 상태에서, 북한 공산주의체제 자체도 위기에 처해 있을 것이며 따라서 남한도 다가올 흡수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1990년대 초반 많은 북한전문가들과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 통일에 대비한 가상시나리오를 세우고 통일비용에 대해 다양한 분석을 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스러운 생각’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동독과 북한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였습니다. 지금 되돌아보면 당시 우리 사회가 북한 현실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지, 또한 예상되는 위험을 얼마나 쉽게 간과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됩니다. 북한 체제에 대해 전혀 무지하면서도 서독과 한국을 단순 평면적으로 비교하여 우리 사회의 역량 부족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했던 사례들은 당시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이 한국 사회에 개입하면서 독일통일의 성과와 한계를 지적하고, 독일경험을 한국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의 위험을 경고한 것은 바로 이 지점이었으며, 그의 개입은 매우 적절하면서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과거 한국 사회의 비민주성을 가장 잘 바라볼 수 있었던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발달한 서구 사회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 청년들과 거기에 머무르고 있던 한국 지식인이었던 것처럼, 한반도 통일과 관련하여 유익한 지혜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독일 통일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았던 독일에 있던 한국 지식인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독일 통일의 경험으로부터 완벽한 교훈을 도출하여 우리에게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또한 한국의 경우가 독일의 경우와 반드시 일치하리라는 것 역시 예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쪽으로 지나치게 사고가 편향되어 있던 한국의 상황에서 그들의 개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은 그러한 지식인들 중에서 저술활동뿐만 아니라 북한과 남한의 지식인 사회를 연결하는 활동을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개입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이미 철학계에서 인정받는 세계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는 이하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통일을 직접 목도하고 경험했던 한국 지식인으로서 독일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모순을 분석하면서 독일 통일의 경험이 그대로 한반도에도 적용될 것이라고 믿는 상당수의 지식인들에게 양자간의 극명한 차이를 설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그리고 ‘통일학술대회’ 등을 통해 통일 과정에서의 지식인들의 적극적인 역할을 추동하고자 했습니다. 1990년대 그의 학문 활동의 화두는 단연 ‘통일’이었습니다. 그는 ‘시장의 논리’보다 ‘마음의 통일’을 강조했고 상호주의가 아닌 ‘나눔의 철학’에 뿌리를 둔 상생을 주창했습니다.

 

“독일통일의 중요한 동인으로 내세우고 있는 브란트의 ‘동방정책’도 실은 동독체제의 안정화를 전제로 한 것이었지 이를 붕괴시켜 흡수통합하려고 한 정책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통일을 사회과학이 전혀 예견하지 못했던 문제와 관련해 베를린에 있는 ‘과학교수원’ 원장인 사회학자 레페니스는 ‘마음의 통일’이 안고 있는 엄청난 과제야말로  통계나 수치를 금과옥조로 여겨 사회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의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사회인간학 내지 사회심리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한겨레> 1994년 5월 15일 자).  

 

“미국과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그리고 군사적 세계관과 항상 ‘동시에’ 움직이는 남한과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라는 구호 밑에 그러한 세계 속에 흡수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해온 ‘비동시적인’ 북한의 경험은 같은 분단의 운명을 맛보았던 동서독의 경험과도 크게 다르다” (<한겨레>  1994년 5월 15일 자)  

 

“남북이 서로에 대해 단정하는 것은 결국 서로가 만든 타자일 뿐이다. 학문 언론이 이런 타자상을 만드는데 앞장서 왔다. 그러나 이번에 학자와 언론이 이런 자리를 마련, 타자상을 수정해나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내가 이런 지식인공동체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독일 경험에 따른 것이다. 동서독 학자들이 서로 많은 교류를 해왔지만 민족문제는 절대 말하지 않았다. 반면 우리가 민족주의를 말할 수 있다는 점은 학문공동체 형성에 매우 중요한 계기다”(<중앙일보> 1996년 9월 16일 자)

 

“남북학자들이 만나 학문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남북대화를 풀어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인들의 문제 제기와 해법을 찾기 위한 노력은 사회 계몽성이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대화문화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한겨레> 1996년 9월 16일 자)

 

“독일 통일은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동방정책으로 기반이 쌓여있던 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촉발된 소련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로 인해 동서방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가능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정세는 독일의 경우와는 너무 판이하다. 중국을 뒤에 업은 북한과 미국 일본과의 공조에 기초한 남한의 경쟁구조가 더욱 고착화하면서 통일에 대한 전망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라는 물리적 대결을 경험한 한반도의 대결구조는 이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한반도에 독일식 흡수통일이 일어난다면 자칫 유혈사태와 민족공멸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독일통일과정은 인적교류 등을 통한 상호이해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한국일보> 2000년 5월 5일 자)

   

“자나깨나 통일을 이야기하는 한국인들은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반면 통일이야기를 하지 않던 독일인들은 이미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과 북은 과연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섞인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남과 북이 꼭 같다면 통일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고, 서로 완전히 다르다면 통일을 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분단 반세기동안 남과 북에서 각각 달리 구축된 경험세계로 인해 남과 북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차이점도 많이 생겼다. 남과 북은 상대방을 각각 ‘자기 속에 있는 타자’로서 바라보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자기와 똑같지 않으면서도 남이 아닌 타자로서 상대방을 대할 때 남과 북은 관점을 서로 바꾸어 볼 수 있는 합리성과 함께 관용과 여유를 배울 수 있다.”(<동아일보> 2000년 6월 14일 자)

 

“정치는 정치원리로, 경제는 경제원리로 접근하면서 순차적으로 교섭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저쪽에 돈이 없으니 이쪽에서 물질을 주면 저쪽에선 정치적으로 양보해야 하는 형편이지요. 그렇다 보니 자꾸 혼동이 빚어져 이것도 저것도 제대로 안 되는 겁니다. 서로 다른 코드를 무리하게 맞추기 때문이에요. 경제는 합리성이나 이윤이라는 코드에, 정치는 사회안정이나 공존관계 유지 같은 코드에 맞춰야 합니다. 경제 관계에서 손익이 안 맞더라도 정치는 개입하지 말고 경제논리로 풀어야 해요. 현대 금강산관광이 좋은 예입니다. 적자를 본다고 해서 북을 정치적으로 압박해선 안 돼요. 북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평안도 출신 사람의 입국을 거부했다는데 그건 잘못된 거죠. 돈 내고 금강산 관광을 신청한 사람이니 단순한 관광객으로 봐야 하거든요. 그런데 북에선 이를 정치적 시위로 받아들인 모양이에요.

독일의 경우 각 분야의 코드가 따로따로 작동했어요. 그러니 정권이 바뀌어도 기본 틀이 바뀌지 않았지요. 그런데 남북은 동서독에 비해 사이클이 크게 다르고 남남간 사이클이 또 달라요. 따라서 우선 서로의 사이클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해요.

북한의 태도도 문제예요. 북은 유일체제로 정치와 경제가 하나 아닙니까. 경제요구가 정치요구로 환원되다 보니 경제가 독자적으로 움직일 여지가 없어요. 그러면 남쪽이 주는 것에 상응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부응하는 뭔가는 내놓아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야 남쪽 사회를 설득할 수 있잖아요”(‘황장엽과 국정원은 거짓말 그만하라’ <신동아> 2001년 5월호 158쪽)

 

남북은 정치는 정치논리로 경제는 경제논리로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 피고인의 논리의 핵심입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지나치게 정치 중심적입니다. 피고인은 이런 정치편향성에 대해 북한 정부쪽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과연 피고인의 이러한 주장 중에 어떤 부분이 북한을 이롭게 하고, 남한을 비난하며 체제를 위협하는 북한의 정치국 후보위원의 발언입니까? 과도한 정치논리로 본다면 남한보다 북한정부가 그 정도는 훨씬 심하며, 정치논리를 배제한 경제논리와 사회·문화 등 나머지 영역에서 남북한 대등한 교류를 확대한다면 당연 자유민주사회의 논리가 우세할 것인 바, 피고인이 과연 후보위원이라면 이와 같은 친남적·반북적 언동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표1> 피고인의 동서독 통일 관련 논저 목록

 

    현대와 사상(1990)   제4부 독일과 한반도     2. 현실로 떠오른 독일통일 1) 독일통일의 과제 2) 동서독의 문제와 남북한의 문제  3. 독일의 통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1) 독일통일의 과제 2) 두개의 국가냐 통일이냐 3) 독일통일과 국제정치적 균형 4) 한반도통일문제의 내부적 구성의 특징   

  역사는 끝났는가(1995) 제3부 헛된 꿈에서 깨어날 때     -독일통일의 해부 -북한은 동독과 다르다 -양자택일이 아닌 총체적 지혜를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1995)      제1부 독일통일과 한반도 1. 독일통일 - 한반도 통일의 거울인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2000)    3부 독일 통일을 뒤돌아보며      -‘시장의 논리’보다 ‘마음의 통일을’ -독일 통일의 경험과 교훈 

 

2.      피고인의 북한 현실 분석과 전망

 

뒤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피고인의 북한에 대한 분석은 당시 한국 내 북한연구자들 및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연구자들의 분석과는 여러모로 달랐습니다. 그는 북한이 바깥에서 평가하는 것과 달리 비교적 안정된 정치체제(안정되었다는 것이 바람직하고 정상적이란 의미는 아닙니다)를 유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 체제 유지¡강화를 위한 ‘학습’을 해왔기 때문에(흔히 남한에서 북한 사회를 ‘세뇌된 사회’로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의외로 주민들의 의식상태 때문에 체제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점을 지적하면서, 흡수통일이 가져올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북한 체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한 체제를 외부의 시각이 아니라 내부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그런데 원심은 피고인의 이런 분석을 북한을 찬양한 것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부의 시각은 단순히 북한 체제를 ‘체제 안에서’ 바라본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시각은 체제의 작동원리와 가치관에 기초하여 체제를 분석함으로써 체제의 강점과 단점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피고인은 이러한 방법을 칸트의 철학을 원용하여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미 소련과 중국을 분석하는 과정(1984년 저작, 국내 번역 소개 1990년)에서 이러한 방법론을 사용하였던 적이 있던 피고인은 내재적 접근법이 가진 장점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 칸트가 ‘내재적’이라는 개념과 관련하여 강조하였던 ‘비판적’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미 1984년에 자신의 방법론을 ‘내재적¡비판적 연구 검토’라고 지칭한 바 있었습니다(“소련과 중국”, 11쪽).

 

모든 사물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사물 자체가 그 내부에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사물은 그 자체의 일체성에도 불구하고, 그것과 관계하는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양면적일 수 있습니다. 한 사상가 또는 이론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하나의 사상이나 이론이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에 따라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은 구태여 예를 들어야 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의 경우에도 이러한 일반법칙은 잘 들어맞습니다. 그의 내재적 접근법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한국 사회가 한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되어 있는 상황에서 모든 행위와 사상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다른 방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더구나 한 사상가나 이론가가 사회 전체의 균형을 위해, 자신의 주장을 좀더 강한 방식으로 표현할 때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균형을 맞추기 위한 실천  대부분은 일시적으로 편향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을 올바로 수립하는 데에 기여하게 됩니다.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지닌 의미도 이런 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의 북한에 대한 인식이 편향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가 북한에 대하여 지극히 편향적이었음은 역사적으로 증명되는 사실입니다. 피고인을 북한에 경도된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편향된 시각으로 피고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경도된 것은 피고인이 아니라 원심 법원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사회의 북한에 대한 편향된 인식으로 인해 남북관계에서 발생할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경고한 피고인의 주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북한 체제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 달리 나름대로의 체제작동원리가 있으며, 경제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내구성을 지닌다는 것이며(원심은 이러한 평가를 친북적인 편향이라고 해석하였으나 이는 전혀 주관적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객관적인 사실기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러한 내구성을 고려할 때 흡수통일에 대한 기대는 비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것입니다(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북한에 대한 객관적 사실기술이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1990년대 초중반을 10여년이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피고인의 지적은 매우 정확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한 체제는 그 후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으며(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고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북한에 대한 압박정책이 두 번에 걸친 북핵위기를 가져왔음은 이미 공지의 사실입니다(물론 여기에서도 우리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이용한 긴장고조정책을 찬성하는 것은 아닙니다).

 

남한의 북한에 대한 흡수통일이 위험한 이유에 대해 피고인은 1994년 무렵에 북한 주민들은 동독 주민과 달리 흡수통일을 수용하지 않고, 극단적으로 반발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관련된 피고인의 글(‘북한은 동독과 다르다’, “역사는 끝났는가”, 166쪽; 최초 발표, 한겨레신문, 1994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옛 동독사람이 느꼈던 긴장감과 현재 북한 사람들이 느끼는 긴장감의 원인과 정도도 무척 다르다.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무서운 인내를 전제하기 때문에 현재 북한 사람들의 일반적 정서 속에 흐르는 인내와 또 이의 한계에 우리는 특별히 주목을 돌려야만 한다. 피땀으로 건설한 사회주의에 대한 애착도 크지만 ‘전쟁을 원하지는 않지만 두려워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이 전달하는 결정론적인 의지를 단순히 수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로서 독일통일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다는 경험을 한반도에서도 반복되리라고 믿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지적을 하면서 피고인은 자칫 북한 주민이 생각하고 있지 않은 독일식의 일방적 흡수통일을 남한이 추구하려고 한다면, 북한 주민들의 폭동을 포함한 엄청난 혼란을 부를 수 있으며, 북한 주민의 반발은 한반도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경고하였습니다. 이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이 북한 정권에 의한 의식세뇌에 따른 결과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동독 주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측면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피고인의 분석과 위험한 흡수통일에 대한 경고는 원심 판결에 의해 북한을 옹호하고 찬양한 것으로 곡해되고, 폄하되었습니다.

 

북한이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기 전인 1994년 북한 주민이 가지고 있었을 무모할 정도로 ‘결정론적인 의지’에 대한 피고인의 평가는 북한이 반세기 동안 실시한 교양사업과 사상통제를 고려할 때 매우 정확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북한 주민의 의식과 태도는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심각한 경제위기(무엇보다도 식량난에 따른 아사)와 탈북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반체제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충분히 확인된다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많은 북한연구자들이 북한의 붕괴를 예측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결국 1990년대를 넘어 2000년대에도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제개혁¡개방을 통해 새롭게 경제회복¡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즉 북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체제 자체가 생명력이 있으며, 나름의 자기 유지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진정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려 한다면 남한 정부에게 반드시 필요한 정보이며, 남북 대화를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인 것입니다. 피고인은 바로 이런 점을 남한 사회에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원심 판결은 이러한 피고인의 노력을 친북 저술행위로 재단한 것입니다.

 

인권보호와 난민지원을 목표로 하는 시민단체인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2000년 실시한 탈북 난민들의 통일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남북한 주민의 통일의식 동시 비교조사 결과>, 2000. 6), 북한을 떠난 대부분의 탈북 주민들은 북한 체제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 자연자원¡복지부문¡군사력¡인적자원¡정치사상성 등에서 북한이 남한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이들은 탈북 후 남한의 주민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위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미군철수를 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남한 측의 통계자료를 보더라도 피고인이 북한 체제와 주민들의 상태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러한 북한 주민들의 의식을 고려할 때,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서는 북한 주민들의 의식변화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북한 주민의 의식변화는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에서도 이를 충분히 고려한 대북포용정책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입니다. 그런 전제요건이 충족된 가운데 남북간에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이해의 증진이 있어야만 평화통일은 가능한 것입니다(사실상 상호이해 증진이란 바로 이런 북한의 사정을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바로 이러한 상호이해 증진을 위해 북한의 사정을 남한에 소개하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1990년대 이래 흡수통일이 갖는 위험성을 직시하고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방안에 기초해서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통해 평화통일을 추진하자는 것이 피고인의 주장인 이상, 이는 1980년대 말부터 한국 정부가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는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3단계 통일방안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피고인의 주장을 부정하고 친북적 주장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1980년대 말부터 추진하고 있는 점진적¡단계적 통일방안을 북한 옹호적이라고 부정하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피고인이 ‘김주석 이후의 한반도’(“역사는 끝났는가”, 193~202쪽; 최초 발표, <한겨레21> 1994)에서 북한에 대해 예측한 전망을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남한의 전문가들은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 북은 대혼란에 빠지고 이를 기회로 북의 지도부가 이판사판식의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라는 전망을 내리고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북의 체제는 인민들의 저항에 의해서가 아니라 군부의 동요에 의해서 무너진다고 추축하고 있는데, 이러한 추측은 신빙성이 없으며, 김정일 체제의 군기반은 결코 취약하지 않다.

 

- 김정일 체제의 기본 노선과 정책은 김 주석의 그것과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의 전망도 어둡지는 않다. 김 주석이 마련해준 한반도 위기극복의 돌파구는 북에서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김 주석의 유언이다.

 

이러한 전망은 1994년 이후 10년이 지난 2004년의 시점에서 확인해 보면, 현실의 변화와 크게 틀리지 않은 정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이러한 분석은 당시 정보와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토한다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북한 체제는 1990년대 중반의 심각한 위기에도 비교적 안정을 유지하였으며, 군부 역시 김정일체제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북미간에는 1994년 10월 1차 북핵위기를 해결하는 기본합의가 채택되었으며, 남북관계도 꾸준히 발전되었습니다. 피고인의 전망이 뛰어난 점은 당시 남한 언론에 실린 대부분의 전문가 예측이 북한 체제의 혼란과 한반도 위기였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집니다.

 

피고인은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기 전인 2000년 5월 3일 <시사저널>과 한 인터뷰에서 몇 가지 전망을 하였으며, 이는 이후 남북정상회담에서 현실로 드러났습니다. 여기에서 인용해 보면(“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 277~280쪽에서 재인용),

 

① 김정일 위원장과의 회담 성사 여부: 분명 회담을 할 것입니다.

② 가장 중요한 논의 사항: 신뢰 구축을 위한 큰 틀의 합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공동성명 또는 공동선언 형식으로 발표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③ 남북기본합의서와 7·4공동성명의 차이에 대해: 두 합의서 정신을 절충해 정상간 합의서를 도출할 것입니다.

④ 경제협력 등: 이후 실무협의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⑤ 김정일 위원장 서울 방문: 당분간 어려울 것입니다.

⑥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정상회담의 의제로 삼을 것인가: 불필요하며,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피고인의 전망은 거의 대부분 맞아 떨어졌으며, 이 때문에 <시사저널>은 다시 인터뷰를 하게 됩니다(2000년 7월 31일). 인터뷰 앞부분에 실린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 교수는 당시 인터뷰에서 김정일 위원장의 통치 스타일과 정상회담의 양상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막상 뚜껑이 열리고 나자 송 교수의 예측은 대부분 현실로 나타났고, 그는 일약 국내 언론의 관심을 끄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 동안 ‘해외 반체제 인사’로만 인식돼 온 송 교수가 북한 지도자와 그 체제에 대해 뛰어난 감수성을 가지고 정확하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인물로 떠오른 것이다.”(“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286쪽)

 

결국 피고인의 전망이 현실과 일치할 수 있었던 것은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하여 북한 체제의 기본 원리를 충실하게 분석하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당하다고 할 수 있는 자신의 북한 체험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는 태도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이 한반도의 통일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피고인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37년 동안 남과 북의 바깥에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제3자적 입장을 항상 유지해왔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을 경계인으로서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사실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에 있어서 남과 북의 그 누구도 할 수 없으며, 피고인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지위와 역할로 인해 피고인은 강단의 학자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입니다.

 

서독과 동독, 남한과 북한을 단순 비교함으로써 흡수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태도는 흡수통일의 부작용과 남한 사회의 역량에 대한 과대평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를 지적한 피고인의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체제붕괴가 확실시되고 있다고 믿어지는 북한과 현재의 모순이 지양된 미래의 남한을 단순 대비시켜 보는 이러한 관측은 우선 독일통일 이후에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체제 상호간의 교류가 두 체제에게 동시에 얼마나 큰 충격을 주고 있는지에 관한 경험을 잊고 있다.” (‘북한은 동독과 다르다’, “역사는 끝났는가”, 170쪽)

 

“이러한 희망이나 확신 속에는 남한이 서독과 꼭 같지는 않아도 이와 비슷한 사회이고 북한은 동독과 같아서 머지 않아 당연히 붕괴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라인강의 기적’에 버금가는 ‘한강의 기적’이 있고, 서독의 복지 수준은 아니지만 복지정책도 80년대부터 도입되었으며, 특히 가히 선진국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남한 ‘중산층’의 소비생활은 통일을 이룩한 서독의 모습을 현재의 남한 모습이 이미 보여주고 있다는 확신이 전제되어 있다. 이러한 남한의 자화상은 그러면 어느 정도 인정될 수 있는가?”(‘헛된 꿈에서 깨어날 때’, “역사는 끝났는가”, 171쪽)

 

“남한이 서독도 아니지만 또 일본도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인식조차 전제되지 않은 통일논의가 너무나도 무성하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남한을 서독과 일본의 거울에 자주 비추어 볼 필요를 느낀다. 이를 통해서 우리의 남북통일 논의에서 자주 드러나는 관습적인 사고의 틀을 교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헛된 꿈에서 깨어날 때’, “역사는 끝났는가”, 178쪽)

 

흡수통일의 부작용과 남한 사회의 역량 부족을 고려할 때, 흡수통일은 한민족에게 기회가 되기보다는 위험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학자들 뿐만 아니라 남한의 정부 당국자들도 인정하는 공지의 사실입니다. 충분한 준비 없는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사회¡경제적으로 매우 큰 부담이 되고 우리 사회의 발전을 지체 시킬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는 세계경쟁에서 우리 사회를 뒤쳐지게 할 것이며, 이는 통일지상주의자가 아니라면 위험이라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우려는 수천 명에 불과한 탈북 난민들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는 남한 사회의 역량에 비춰볼 때, 분명 근거가 있는 지적입니다. 남한 사회가 흡수통일을 이룰 역량을 갖추었는가 하는 의구심은 이러한 탈북자들에 대한 처우뿐만 아니라 지역감정으로 인한 남한 사회의 분열, 중국에서 들어온 조선족 동포에 대한 멸시,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 등의 현재 수준을 고려할 때 여전히 유효한 우려입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도 남한 사회는 1997년 말 외환위기를 겪고 난 후, 빈부 격차의 심화와 성장 동력의 상실이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우려는 우리 사회가 앞으로 평화통일을 위해 어떠한 문제를 극복해야 할 것인가를 정확히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의 이러한 지적은 북한 찬양이라는 단 한마디로 묵살당하고 말았습니다.

 

1차, 2차 북핵위기는 대북포용정책과 대북강경정책의 장단점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경제침체의 장기화로 체제의 안정성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북한을 국제사회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 체제를 인정하고(사실 남북한은 1990년대 초 이미 유엔에 동시 가입하여 서로의 존재와 체제를 국제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북한 지도부가 안심하고 개혁¡개방정책을 펴도록 해 주는 방법 이외에는 적당한 수단이 없습니다. 따라서 흡수통일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것이 아니라 점진적¡단계적 평화통일론에 기초한 대북포용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현 단계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북¡통일정책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대북¡통일정책은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이 점에서 피고인의 저술들이 일정한 기여를 하였음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5.      저술에 대한 구체적 분석(원심 판결의 저술에 대한 곡해)

 

1.      기본인식

 

원심 판결이 피고인의 저술활동에 대해 유죄를 판단한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저술자체의 내용보다는 저술의 저자가 정치국 후보위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심은 통일학술회의에 대해서는 후보위원의 활동으로 보지 않아 판단의 일관성을 상실하였습니다.

 

저술활동과 학술회의를 비교해 보면, 원심 법원이 부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무리하게 저술부분의 유죄인정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저술을 통해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북한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용이 실린 저서는 한정된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하고, 독자들이 직접 책을 구입하여 열독할 때에만 세상에 공개될 뿐만 아니라 그 전문적인 수준과 내용에 비춰볼 때 통일·철학 관련 대학원생 이상의 소수 관심있는 사람들만이 보았으므로 그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비해 통일학술회의는 그 영향력이 가히 가공할만한 정도였습니다. 남한의 대기업과 언론사의 재정적 지원으로 진행되었으므로 국내 언론은 학술회의의 준비에서부터 진행과정까지 모든 내용을 앞 다투어 연일 상세하게 보도하였습니다. 국내 신문과 방송은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의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한 찬양, 북한체제 우수성 선전발언을 아무런 여과없이 국내에 보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추진된 통일학술회의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후보위원의 북한 선전활동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통일학술회의에서 피고인의 활동이 후보위원으로서 활동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원심이 스스로 밝힌 바와 같이 후보위원 여부와 학술회의의 이적성을 별도의 기준에 따라 판단하여야 한다면, 피고인의 저술활동 역시 후보위원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술의 내용 자체를 보고 이적성을 판단하여야 할 것이며, 저술 그 자체를 다른 사람들의 글과 비교해 보면, 피고인의 저술을 두고 후보위원의 북한 선전활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술활동 부분도 통일학술회의와 마찬가지로 무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현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

 

원심은 피고인이 남한측만 비난하고, 북한측은 비판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태도는 북한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옹호한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릅니다. 원심의 판단은 학문의 세계에서 비판과 반비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피고인의 이론과 북한관련 저술의 이적성을 분석함에 있어서 피고인의 학문형성 과정에서 갖고 있던 문제의식을 전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편적이고, 상황에 따라 서술된 몇 가지 글만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이는 피고인이 1982년에 작성한 현실사회주의체제의 한계에 관한 논문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바로 이때부터 현실사회주의의 문제와 한계를 직시하고, 북한을 비롯한 사회주의 사회를 연구해왔으며,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이 당시부터 유지·발전되면서 그 이후 모든 저술활동의 근저에 깔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원심이 피고인의 저술을 분석하면서 북한 사회에 대한 비판은 없고 찬양만 있다고 평가한 것은 피고인의 저술에 바탕이 되고 있는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은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하여 북한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하여 분석하면서 현실사회주의체제의 한계에 대하여 명백하게 비판하는 글들을 발표하였습니다. 피고인은 1982년에 행한 뮌스터 대학 교수취임 강연, ‘현존 사회주의의 한계문제에 대해서’(“소련과 중국” 225~236쪽)에서 아래와 같이 이미 명확하게 현존 사회주의의 10가지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①공산당 자체가 사회주의 사회의 한계문제가 되어버렸다. ②마르크스의 ‘국가 소멸’의 테제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란 새로운 생활형태의 형성은 이미 레닌의 ‘국가와 혁명’의 테제를 통해 부인되어 버렸다. ③소유관계와 생산관계에 대한 스탈린적 구상은 사회주의내에서의 상품범주를 일면적으로 법적인 범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하였다. ④레닌의 ‘테일러주의’의 권장, 스탈린의 ‘평균주의’의 비판, 그리고 ‘NOT’(과학적 노동조직)란 약자는 자본주의에서 사용되는 노동측정방법과 다르지 않다. ⑤계획경제체제로 인한 개인적 소비물품 특히 식료품의 만성적 부족은 종종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다. ⑥사회정책―교육, 의료, 저렴한 주거비용 등―이 ‘현존 사회주의’의 중요한 ‘업적들’로 꼽힌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만, 경제위기가 최근에 실업문제를 야기하고, 이는 현존 사회주의의 ‘업적’을 허물어뜨리고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어렵게 하는 중대한 실책이다. ⑦농촌 주민의 물질적인 불이익 때문에 농촌에 대한 도시의 ‘비정당한’ 지배는 사회주의에서도 지적되는 한계이다. ⑧가정과 직장이라는 여성의 이중적 부담의 극복은 여성과 사회주의에 있어서 중심문제이다. ⑨한 체제 내에서 사회통제가 강하게 작용하면 할수록 규범침해는 사회적으로 더욱 더 심하게 다루어진다. ⑩캄푸치아와 아프가니스탄은 ‘현존 사회주의’의 외연적인 한계문제, 말하자면 사회주의적 ‘헤게모니즘’ 혹은 ‘사회제국주의’의 두 가지 예에 해당된다.

 

피고인이 지적한 위 열 가지 한계는 사회주의 사회에서 당과 국가, 경제체제와 통제경제, 사회정책, 도시와 농촌의 관계 등 사회 전반을 대상으로 분석하고 있으며, 당시 서구 지식인들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비판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이러한 분석은 20여년이 지난 현재에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당시에는 국내 진보적 지식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지적입니다. 위 열가지의 한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피고인이 파악한 현존사회주의의 한계는 각각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위 첫번째 한계인 ‘공산당 자체의 한계문제’에 대하여, 피고인은 중국과 폴란드의 예를 들면서 현존사회주의 위기의 주원인은 당이 ‘전체 이해’ 혹은 ‘보편적 이해’를 매개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한데 있다고 평가하고, 이는 ‘노멘클라투라’라는 당 간부가 새로운 지배 엘리트를 구성하면서 ‘신계급’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결국 “공산당은 현존 사회주의에서 국가와 사회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지 못하고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해왔고, 또 군림하고 있다”고 현존 사회주의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지목하여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존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정치와 경제, 사회 · 문화 모든 영역을 공산당이 유일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존사회주의에서 공산당이 국가와 사회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비판보다 더 날카로운 지적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두번째, 피고인은 마르크스의 국가소멸이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부정되었다고 지적하면서 ‘현재 후기자본주의에서 국가는 통합과 안정을 위해 중심적인 기능을 떠맡고 있다. 그러나 현존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의 행동방식이 공산당을 통해 여전히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한계를 꼬집었습니다. 즉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른다면 국가는 사회의 최상위에 있는 인간에 대한 통제 시스템이고, 이러한 통제 기구로서의 국가는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통한 발전으로 종국에는 소멸되어야만 하는 것(이를 인간해방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임)인데, 현존사회주의에서 피고인이 발견한 것은 공산당이 국가의 행동방식을 엄격히 통제함으로 인해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가로막고, 이로써 국가는 소멸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위 첫번째 한계와 함께 국가에 대한 공산당의 통제에 관한 지적입니다.

 

세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사회주의의 생산과 상품에 대해 언급하면서, 현존사회주의는 ‘생산재와 소비재의 만성적인 부족, 생산이 여전히 무계획적이고, 무정부적’이란 점을 지적하고 있는바, 이는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현실적 한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겠습니다.

 

네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현존사회주의에서 생산과 분배의 문제를 직업별 임금격차에서 발견하고 ‘하여튼 사회주의에서의 불평등문제는 정치적으로 자본주의에서의 그것보다 정당화되기 어렵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이는 현실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특히, 분배에서) 불평등문제를 타파하겠다고 하면서도 정작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식료품의 만성적 부족이 정치적 위기를 초래할 수 있으며, 그 원인을 농업의 만성적 불황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는 현존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역설적인 무계획성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현존사회주의가 사회보장과 복지문제에 집중한 것은 일정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나, 경제위기와 실업이 발생하면서 이러한 성과는 별로 의미 없어지고, 사회의 통합과 안정을 어렵게 함으로써사회보장 정책이 경제정책과 조화되지 못하여 실패하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일곱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농촌이 모든 생산의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도시에 의해 지배되고, 도시에 비해 저급하게 취급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와 다르지 않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는 농촌사회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만 현실사회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여덟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여성이 가정과 직장에 대한 이중의 부담을 안고 있어서 이를 보호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존사회주의에서 여성은 봉급수준이 낮은 분야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고, 지위도 여전히 낮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아홉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현존사회주의의 강한 사회통제로 인한 병폐현상을 지적하면서, 절도 및 청소년 범죄의 증가와 특히 미래세대인 청소년이 스스로를 ‘미래사회주의를 위한 유용한 바보’라고 냉소적으로 평가한다고 언급하였습니다. 청소년이 스스로를 이처럼 비관적으로 평가한다는 사실을 통해 현존사회주의의 미래가 그만큼 비관적이란 것을 피고인은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열번째 한계와 관련하여, 피고인은 사회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경제적 동맹이 서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자 하는 음모에 따라 헤게모니즘으로 변질되면서, 새로운 형태의 제국주의로 강화되었음을 지적하였습니다. 이는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 시대에 각축을 벌였던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행태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존사회주의의 한계에 관한 비판은 사회주의 국가체제의 가장 핵심적인 동력인 공산당과 공산당의 정치 · 경제정책이 초래한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위와 같은 현존사회주의체제의 한계를 교수자격취득 논문인 ‘소련과 중국’을 집필하면서 확인하였으며, 이러한 현존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이후 사회주의와 북한사회에 대한 분석을 하는데 있어서 일관되게 견지 되었습니다. 피고인이 1982년 이후에 만든 저술에는 이러한 현존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항상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피고인 저술을 단편적이고,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쳐 이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표 2> 피고인의 국내 출판 저서 목록

번 호   저술 연도       성격    출판 연도       제목    출판사  

1       1972    철학박사학위  논문      1988    “계몽과 해방” 한길사  

2       1984    교수자격취득 논문       1990    “소련과 중국 -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농민¡지식인”      한길사  

2       1982    뮌스터대학 교수취임강연 1990    현존 사회주의의 한계문제에 대해서 (“소련과 중국” 부록)        한길사  

3       ’88~90        “사회와사상”  발표글 모음집   1990    “현대와 사상 - 사회주의¡(탈)현대¡민족”      한길사  

4       ’90년대 초반   글 모음집       1995    “역사는 끝났는가”     당대    

5       1995    새로 쓴 글      1995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한겨레 신문사   

6       1997~8 글 모음집       1998    “21세기와의 대화 - 발상의 전환을 위한 20가지 테마”    한겨레 신문사   

7       ’90년대 후반   글 모음집       2000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한겨레 신문사   

8       2000년 대 초    글 모음집       2002    “경계인의 사색 - 재독 철학자 피고인의 분단시대 세상읽기”      한겨레 신문사   

   ※ ‘북한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1988년 저술)는 “현대와 사상”에 수록

 

공안당국이 사용하는 ‘용공’의 의미가 ‘현존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이들을 흔히 공산주의 국가들이라고 부른다)을 지지하면서 북한을 찬양하고 옹호한다는 뜻이라면, 피고인의 현존 사회주의 한계에 대한 10가지의 비판적 지적은 그가 결코 ‘용공적’일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당시 대부분의 서구 지식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현존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아직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의 조짐을 분명하게 보이지 않고 있던 1980년대 초반인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이미 공산주의 국가들에 대해 분명한 비판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 체제와 주체사상을 옹호¡찬양했다고 주장하지만, 1982년 위 “현존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1980년대 말에도 집필하여 1990년에 국내에서 번역한 “현대와 사상 - 사회주의¡(탈)현대¡민족”에서, 피고인은 현존 사회주의의 문제점 중의 하나인 관료주의의 극복과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의 정립을 다루면서, 북한 권력체제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통치불능’의 상태 직전이라고 천안문 광장의 시위를 판단한 중국이나, 제국주의와 직접적으로 대치하고 있는 북한이나 쿠바는 여전히 공산당의 유일적 영도원칙을 계속 고수하고 있다. 막스 베버는 그의 “지배사회학”에서 관료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 힘은 ‘초자아’적인 ‘카리스마’적 지배양식에 있다고 지적하였지만, 평준화된 일상적인 관료적 지배체제를 근원부터 흔들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오늘 북한과 쿠바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이 중국 문화혁명이 동반했던 혼돈을 피하면서 관료주의를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예시적’ 힘을 통해서 근본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고도 판단된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가 전개하는 ‘합리적 지배양식’에 의한 관료주의 극복과는 다른 이념형으로서의 이러한 ‘카리스마적’ 지배에 의한 관료주의의 타파는 ‘비일상적인’ 것에는 틀림없지만 그러한 가능성을 우리는 앞으로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현대와 사상” 25~26쪽)

 

피고인의 분석은 매우 조심스러우며, 표현 역시 객관적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관료주의의 극복 방안으로서 ‘합리적 지배양식’인 민주적 사회주의에 대비하면서, 북한을 비합리적 · 비이상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일상적인’ 카리스마적 지배라고 지적하고, 동시에 북한에서 카리스마적 지배가 상당기간 유지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피고인이 1980년대 말에 제시한 이러한 전망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적 지배체제가 김일성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유훈정치의 형태를 거치면서 북한에서 유지되고 있는 현실로 나타났습니다(원심은 이러한 북한 정권의 상당기간 존속에 대한 예견을 북한 찬양으로 해석하였습니다).

 

아마 북한의 권력체제에 대하여 좀더 적극적인 비판이 요구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적대관계에 빠져 있는 분단국가에서 우군이 아니라면 적군이라는 식의 이분법은 우리의 일상적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문제와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사회과학자-철학자에게 이러한 이분법은 분명하게 배제되어야만 하는 방법입니다. 이미 피고인은 “현대와 사상”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는 지식인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으며, 따라서 북한에 대한 관점도 단지 정치체제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할 수 없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라는 태도 역시 거부하는 자세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피고인은 북한사회주의의 혁명과 건설의 특수성을 부정적으로만 음각시키는 태도와 반대로 특수성을 긍정적으로만 양각시키는 태도 모두를 거부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나아가 피고인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일반성을 북한과 남한에 단순하게 확장해서 적용하는 것도 거부합니다(“현대와 사상” 149~150쪽).

 

원심이 피고인의 친북성을 보여주기 위해 인용하는 ‘평양에서의 강의 - 한 철학자의 북한 이해’(<한겨레신문> 1991. 6. 29)를 보면, 북한 철학연구소 소장 리성갑이 피고인의 카리스마이론에 기초한 수령제 비판을 반비판하였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북한 철학자들이 1990년대 초반에 피고인을 비판하였다는 점은 피고인의 저술이 결코 친북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북한 지식인과 지도부가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3.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평가

 

원심은 피고인이 남¡북 연구에서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외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다고 지적합니다. 이것은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북한 연구 방법론에 대한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된 단견입니다.

   

피고인이 촉발했던 북한학 연구에서의 ‘내재적 접근법’ 논쟁은 북한 연구를 학문적으로 정립시킨 계기였습니다. 80년대까지 국내 북한연구는 소수 정보 분석가들의 정보 독점에 의한 비학술적 분석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고, 일본 등 해외에서 지역학의 일종으로 북한학이 자리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국내 북한 연구가 학문 영역이라기 보다는 이데올로기 편향이 강한 협상론과 한국사회 통치학으로 자리 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내재적 접근법이 갖는 의의는 이러한 협상 기술론이자 통치학의 일부에 머무르고 있던 국내 북한 연구를 학문 영역으로 정립시키는 중요한 계기였다는데 있습니다. 원심은 이 같은 의의를 인정한다면서도, 실제 판결문 곳곳에서는 내재적 접근법을 학문사적 의미에서 보다는 대남 공작의 도구로만 다루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북한 인식 및 연구 방법론의 대전환을 의미하는 내재적 접근법이 제기됨으로써 비로소 북한 연구가 학문으로 정립될 수 있었습니다. 이는 굳이 피고인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제기되었을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연구가 학문으로 정립되었다는 것은 북한을 단순한 남북대립의 일방 당사자에서 대화의 상대방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하며, 북한을 정치적 이용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이해를 바탕으로 한 통일의 일 주체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내재적 접근법’을 둘러싼 1990년대 초중반의 논쟁은 피고인이 ‘내재적’이란  의미를 ‘선험’에 대비되는 ‘경험비판(immanent)’을 내포한 개념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사실상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심은 ‘경험 비판’ 개념을 의식하고 이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심은 ‘경험비판’의 개념을 북한에서 (6개월간을) 살아본 후, 이를 통해 ‘경험’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으로만 단순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인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6개월 현지조사를 수행한 적이 없는’ 피고인의 모든 ‘주장’을 선험적인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고인의 ‘6개월 체류’ 언급 부분은 북한 연구를 위해서는 현지조사를 통한 충분한 자료수집과 직접적 경험이 절실하다는 연구자의 학자적 진술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원심은 위 진술을 오용하여 피고인의 연구가 ‘경험비판’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왜곡하여 해석한 것입니다.

 

또한 피고인의 이러한 언급은 북한 연구를 인류학적 방법론에 의해 진행해야 함을 강조한 학문적 절박성의 토로이기도 합니다. 이같은 학자의 ‘고백’은 학문적 겸손함으로 간주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도적’ 임무에 의한 것이었다는 ‘자백’으로 등치시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아전인수식 해석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끊임없이 이 진술을 문제 삼아 피고인의 학술 활동을 비학술적·정치적인 것이라고 오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단순화된 인식을 버리지 않는 한, 현지 조사가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 수행되는 모든 북한 연구를 ‘선험적’이고, 친북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므로 북한학 전체를 폄훼하고, 범죄행위로 취급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재적 접근이라는 것은 북한을 가봐야 북한을 연구할 수 있다는 단순하고 천박한 의미가 아니고, 북한을 가지 않더라도 북한 스스로의 논리나 전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에 기반해서 북한을 연구할 수 있다는 시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북한 방문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학문적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에서의 북한학은 내재적 접근법이 제기된 후, 일본과 미국 등 해외의 북한학보다 앞서면서 90년대에는 큰 성과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에 가야 북한을 내재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모든 국내 북한 연구를 학문적으로 무시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또한, 북한을 6개월 이상 방문해야만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연구가 가능하다는 피고인의 진술은 북한사회를 분석함에 있어서 스스로 내재적 접근법을 포기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재적 접근법에 따른 연구를 하였으나 충분하지 못하였다는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북한 체제가 워낙 폐쇄적이기 때문에 북한 주민의 실제 생활과 관련하여 외부로 나온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북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기초적인 사실들(북한 수령제에서 수령과 주민의 관계, 소위 세뇌교육이라 불리는 사상교육과 교양학습을 통한 체제원리의 내재화 등)은 피고인을 반대하는 북한 연구자들까지도 대부분 인정하는 공인된 사실자료로써 북한연구에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들입니다.

 

이는 통일부의 문헌들을 보아도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최근 북한에서 경제체제의 변화가 북한 주민의 사회의식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는가를 많은 연구자들이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도 피고인이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의 패쇄성 때문에 대부분 북한에서 발간된 소설이나 탈북자들의 면담을 통해 연구가 진행됩니다.

 

내재적 접근법이란 방법론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연구결과의 이적성을 논하는 것은 예단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재적 접근법이 북한 체제를 옹호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는 판단은 매우 선험적인 판단입니다. 이러한 판단은 민주주의 신념을 가진 연구자가 전체주의 체제를 내재적으로 분석한다면, 그는 그 체제를 옹호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신념을 가진 연구자는 자신의 선입견을 전체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작동원리를 올바르게 파악하는 데에 장애물로 인식하고, 최대한 가치판단을 자제하려고 할 것입니다.

 

원심은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북한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으며, 또한 올바른 가치관에 기초한 외재적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실재로 피고인은 서구 지식인들의 가치관으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카리스마이론에 기초한 북한 수령제 비판은 엄격하게 서구적 합리성에 기초해 있습니다. 사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북한의 철학자들은 피고인의 수령제에 대한 해석을 비난하였고, 피고인과 북한학자들은 이 주제로 인해 상당한 논쟁을 하였습니다(‘북한에서의 강의’ 참조).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정작 북한에서는 피고인이 북한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비난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반면, 북한체제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 남한의 정부와 법원은 피고인에 대해 북한체제를 찬양·옹호했다고 비난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된 상황이 된 것입니다.

 

4.      북한 체제 평가

 

 

(1)     정권과 주민이 공동운명체라고 주장했다는 해석과 관련하여

 

원심은 아래와 같이 피고인이 북한 체제와 정권을 옹호한 대표적인 예가 북한 정권과 주민을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보는 주장을 하는 데 있다고 파악합니다.

 

“피고인은 ....... 다음과 같이 그의 저술 곳곳에서 북한은 정권과 주민이 상호 이해가 일치되는 공동운명체의 관계라고 전제하고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즉, <인용문 1> “오랫동안 김주석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살아왔던 북녘동포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역사는 끝났는가"(증 제26호)(192면)의 기재], <인용문 2> “북한은 하나의 가정과 같아 넉넉하지 못해도 다같이 고루 나누어 먹고 인민들의 물질 생활에서 표출되는 욕구도 소박하다. 인민들이 지금보다 더 풍요한 물질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미국의 항시적 위협과 남북간의 군비경쟁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근검하게 살고 있으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지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평도 없다.”["평양에서의 강의<하>"{수사기록 3308면, 1991. 7. 5.자 한겨레신문(증 제9호)의 사본임}의 기재], <인용문 3>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단결은 남의 개인중심의 벤처열풍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의 동력이다. 집단적 열정은 밖의 세계에서는 '항상 자기동일'이라는 신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화도 계몽의 역할을 한다는 변증법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전망"]역사비평, 2001년 봄호}(수사기록 3769면)의 기재, "경계인의 사색"(증 제27호)(159~160면)에도 범죄사실 제1항에 기재한 바와 같이 거의 같은 내용의 글이 실려 있다.}, <인용문 4> “북한 주민은 최근 몇 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김위원장의 판단과 식견과 정치력에 의존해 극복해 왔습니다. 오죽했으면 '김위원장만 믿고 따른다'는 슬로건이 있겠습니까.”["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증 제28호)(287면)의 기재]라고 하고 있다. 이는 피고인이 종래의 외재적 접근법의 오류라고 지적하는 선험적 분석에 입각한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통상적으로 독재사회에서 그 체제를 정당화시키고 이를 유지하기 위하여 펼치는 선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위 원심 판결은 피고인이 북한 정권과 주민을 공동운명체의 관계로 선험적으로 전제하고 이론을 전개하였다고 판단하였으나 이는 전제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분석의 결과이며, 또한 위 인용부분 중 일부는 피고인의 말이 아니라 북한에서 만난 북한 주민들이 피고인에게 한 표현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원심은 피고인의 글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그 내용을 곡해하였습니다.

 

○ <인용문 1>에 대한 해석

 

이 구절의 앞뒤를 정확하게 인용하면서 해석한다면, 이를 외재적 접근법에 따른 선험적 분석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며, ‘독재사회를 정당화하는 선전’이라고는 더욱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수없이 강조하였던 바와 같이 북한의 주민은 자신의 사회와 체제에 대해 통일 당시 동독주민과 달리 (세뇌에 의한 것이든 어떤 다른 이유에서든) 과도한 자신감을 갖고 있으며, 스스로 정부·수령과 동일체라는 의식을 갖는 등 상당히 다른 차이를 갖고 있으므로 대북정책을 마련하는데 있어서 이점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요소입니다. 바로 이런 점을 피고인은 강조한 것입니다.

 

더구나 원심은 피고인의 “역사는 끝났는가”를 인용하면서 위 글이 전체글의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이 인용하였습니다. 위 글의 해당부분을 다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수없이 많은 과제를 여지껏 안고 있는 예기치 못한 독일의 통일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여러 가지 교훈 가운데 아주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오래 떨어져 살아왔던 사람들의 복잡한 ‘마음의 논리’를 전제하지 않는 미래 전망은 모두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김주석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살아왔던 북녘동포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김주석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여겨왔던 서방 7개국의 정상들이 김주석의 서거에 애도를 표시하는 마당에 북녘동포의 마음도 헤아릴 줄 모르는 미래 전망이나 분석이 우리의 통일에 도대체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가? 김주석이 우리 현대사에 남긴 의미의 가감없는 평가와 더불어 슬퍼하는 북녘동포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전한 양식으로부터 우리의 북에 대한 전망도, 그리고 통일에 대한 전망도 열리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 인용문은 독일통일 이후 동서독 주민 사이에 존재하고, 시간이 갈수록 증폭되었던 사회의식 차원의 갈등을 고려할 때, 남북 주민들 사이에 충분한 상호이해가 존재하여야만 평화로운 통일이 가능하다는 주장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남북 주민 사이의 상호이해는 남한 주민이 북한 주민의 의식을 무조건 수용하고 그것에 찬성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인용문은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 볼 때 통일의 주체가 될 가능성이 높은 남한의 주민이 북한 주민의 ‘마음의 논리’를 잘 읽어냄으로써 북한 주민이 남한 주민에게 열린 마음으로 다가오도록 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의 사망 당시 평소 북한에 대해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총부리를 겨누던 서방국가들에서도 북한에 조문객을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당시 남한사회에서도 ‘아무리 적이지만 사망한 마당에 김영삼 대통령이 애도의 뜻 정도는 표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속좁은 정부의 대응태도를 비난하기도 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위 표현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실 분단 반세기 동안 북한 체제는 북한 주민들에 대해 사상통제와 교양학습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 대해 ‘의식의 세뇌’를 추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뇌작업은 북한 주민이 자신들과 김일성 주석을 동일체로 여기도록 만드는 심리적 작업이며, 그 결과 북한 체제는 경제위기에도 불구하고 유지되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이런 분석은 북한을 찬양하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세뇌만으로 유지되는 북한 체제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정확한 비판인 것입니다. 이러한 북한 체제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많은 북한 연구자들이, 심지어 통일부 조차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볼 때, 이러한 피고인의 분석을 선험적이라거나 북한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인용문 2>에 대한 해석

 

원심은 ‘평양에서의 강의’ 중 위 인용문을 발췌하면서 위 표현이 마치 피고인 자신이 북한 체제에 대해 한 말인 것처럼 나열해 놓았으나 이는 명백히 잘못 인용된 것입니다. 이 인용문은 피고인이 김일성 주석과 만나 대화를 나눈 내용을 기록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말을 옮긴 것입니다. 이는 인용된 문장이 포함되어 있는 부분의 앞뒤에 분명하게 김일성 주석의 이야기임을 밝히는 문장이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되는 것입니다. 다만 신문사의 원고편집과정에서 인용문의 앞뒤에 따옴표를 하지 않아 누구의 말인지를 혼동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용문이 김일성 주석의 주장임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인용문의 시작과 끝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한겨레> 1991년 7월 5일(금요일) 7면

 

“김 주석은 서방쪽이 오랫동안 동유럽을 소련의 ‘위성국’이라고 비난했는데 사실이 그렇다. 브레즈네프가 기침을 하면 호네커는 감기가 걸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 코메콘이 생길때 북한더러 들어오라고 했으나 거절하자 업저버로서라도 참석해 달라고 했지만 우리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었다........... 북한은 하나의 가정과 같아 넉넉하지 못해도 다같이 고루 나누어 먹고 인민들의 물질생활에서 표출되는 욕구도 소박하다. 인민들이 지금보다 더 풍요한 물질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미국의 항시적 위협과 남북간의 군비경쟁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근검하게 살고 있으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고 있는지 서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평도 없다.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에서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체제통합을 기도하면 남북전체민중에게 엄청난 불행을 가져올 것이고 세계평화도 중대한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는 논지를 김 주석은 펼쳤다.”

 

신문기사를 자세히 읽어보면, 편집과정의 불성실성에도 불구하고, 인용문이 분명 김일성의 발언임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 발언 자체가 담고 있는 내용은 북한 체제를 분석할 때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적이 있는 <사단법인 좋은벗들>이 2000년 실시한 탈북 난민들의 통일의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남북한 주민의 통일의식 동시 비교 조사 결과>, 2000. 6), 북한 주민은 가장 중요한 통일의 장애요인으로 주한미군과 남북군비경쟁을 들고 있는데 이러한 조사결과는 김일성이 말한 내용을 확인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독재체제에서 최고 권력자의 발언 내용과 주민들의 사회의식이 일치하는 것은 독재체제 자체가 지닌 특성에 비추어볼 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독재체제는 주민들의 의식마비를 통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독재체제의 붕괴는 주민들의 의식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독재체제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주민들의 의식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의식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예측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분석은 결코 외재적¡선험적 분석이 아니며, 내재적¡경험적 분석이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 현실(독재자의 사고방식, 주민들의 사회의식 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 <인용문 3> <인용문 4>에 대한 해석

 

이 인용문에서 문제삼은 것은, 이는 북한의 집단적 열정을 ‘신화’로 파악한 뒤, 신화도 계몽의 역할을 한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원심은 위 ‘신화’와 ‘계몽의 역할’, ‘김위원장에 의존’이란 표현을 문제 삼아 친북적이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러나 북한 주민들의 집단적 열정을 지적한 것이 북한을 찬양한 것인가, 이를 ‘신화’로 표현한 것이 북한을 옹호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일의적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습니다. 북한 주민의 집단적 열정으로 인한 신화적인 체제유지는 북한 사회 내부의 갈등과 모순이 제대로 표현되고 해소되지 않은 채 사회 내에 침잠하면서 사회 근간을 갉아먹는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며, 이런 방식의 계몽은 사회의 발전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계몽에는 다양한 측면이 존재하며, 따라서 특정한 상황 하에서 계몽은 대중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지배집단에 의해 강제된 계몽은 지배집단의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오용되는 것입니다. 위 인용문은 이런 점에서 단순히 북한의 사실을 분석한 문장이라고 파악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원심이 위 인용문에서 북한을 옹호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선입견 하에 과도하게 일면적인 의미를 확대해석하는 태도입니다.

 

(2)     주체사상과 수령론을 옹호했다는 해석과 관련하여

 

피고인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수령론을 옹호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원심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북한의 입장(주체사상)에 의하면, 수령, 당, 인민을 삼위일체, 즉 하나로 보고 있으며, 관료주의의 폐해로 인하여 장기집권, 1인의 절대적 권력, 권력의 부자세습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3회 피의자신문조서(수사기록 3642~3643면)의 진술기재], "주체사상은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전제로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인간의 자주성'을 '인민의 자주성'이 아니라 뇌수에 해당하는 '수령의 자주성'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결국에는 수령 1인의 절대적 권력과 장기집권 형태로 나타남에도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이 되어버리고, 나아가 '주체사상'은 정치사상적 생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육체적 생명을 동등시하여 수령 세습(김일성에서 김정일로 '대를 이어 충성하자'는 내용)을 정당화해 버리는 모순이 있다."[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14회 피의자신문조서(수사기록 3643면)의 진술기재]라고 각 진술하는 등 주체사상이 북한 사회에 구현된 결과 드러난 주체사상 자체의 문제점과 모순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이렇게 잘못 설정된 사상이 아무런 비판 없이 계속 사회를 지배하는 경우 나타나게 될 위험성에 대하여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었다고 볼 것이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자신의 저술에서는 <인용문 5> "북한의 주체의 정치사상은 당의 영도는 본질에서 수령의 영도라고 보고 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체제에서 수령·당·계급·대중은 서로 떼어낼 수 없는 전일체를 이루고' '현명한 수령이 없는 당은 진정으로 노동계급의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러한 수령과 당 또는 수령과 대중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북한의 주체적 정치사상이 '스탈린적 개인우상' 또는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적인 유교적 유산이라고 흔히 비판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수정주의 해독', 또는 단결과 영도의 중심으로서의 수령은 뇌수가 인간활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는 '비유'(analogia)로써 응답하고 있다. 아마도 주체사상이라는 '텍스트' 중에서 가장 난이한 이 부분을 서독의 여류작가 루이제 린저는 괴테가 나폴레옹을 보고 '여기 한 인간이 있구나'고 경탄했던 비슷한 감정을 김주석과의 개인적 만남에서 얻었으나 동시에 이에 걸맞지 않는 '개인우상'은 종교가 없는 사회에서 종교적 우상이거나 유교적 봉건적 정치문화의 유산이 아니겠느냐고 지적한 적이 있다. 수령과 대중과의 관계를 북한 스스로 '혈연적 관계'로서도 설명하고 있지만, 이 관계가 현대적인 당 및 국가 관료제도를 매개로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전통적인 지배양식도, 또 철저한 '사람에 관계없는 심급순서(審級順序)'를 전제한 합리적 지배양식도 아니다. ……이러한 카리스마적 지배양식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기회적 합리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유일적', '공간적', 그리고 '개성적'인 특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역사는 끝났는가"(증 제26호)(229~230면)의 기재]라고 하여, 피고인이 검찰에서 진술한 주체사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로 하여금 이해를 구하는 기술을 하거나, <인용문 6>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계는 나아가 혁명과 건설에서 노동계급의 당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데서도 핵심적 문제로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령론은 개인우상의 다른 표현이라는 집중적 비난에 대하여 수령과 대중의 운명공동체를 이루는 것을 파괴하려는 제국주의와 기회주의자들의 책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응수하고 있다."["역사는 끝났는가"(증 제26호)(278면)의 기재]라고 하여, 앞서 본 주체사상의 문제점에 대하여 피고인 자신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고 북한 당국자의 발언·입장을 자신의 저술에 그대로 옮겨 적는 방법으로 이른바 '수령론'을 옹호하여 북한 연구의 과학적 객관성 확보를 포기하는 태도까지 보일 뿐, 그간의 피고인의 저술 중에는 앞서 본 이 사건 수사과정에서 피고인 스스로 인정한 주체사상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점이나 모순을 들어 주체사상을 비판한 글을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주체사상은 정치, 외교, 국방 등 각 방면에서 민족 스스로 외세의 간섭 없이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내용이라는 등으로 긍정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을 뿐이다.(“피고인의 변호인의 주장에 대한 판단” 중에서 인용)

또한, 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 선전하기 위하여 내재적 접근법에 따라 작성된 기고문이나 서적을 ‘국내에 들여보내는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 1991. 6. 29.부터 1991. 7. 5.까지 3회에 걸쳐 <한겨레신문>에 “평양에서의 강의<상>·<중>·<하>”라는 제목으로 북한방문기를 기고하면서

        <인용문 7> 리송갑 교수는 북의 ‘수령’을 흡사 ‘절대군주’처럼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수령론’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는 것으로 주체사회주의 사회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평등’과 ‘사랑’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수령과 인민의 관계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고 ‘사랑’ 없는 ‘평등’은 사회를 자칫하면 혼란으로 몰고 갈 수도 있다고 그는 설명하면서, 내가 어떤 글에서 ‘수령’을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들어 설명한 것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했다[1991. 6. 29. “평양에서의 강의<상>”].

        <인용문 8> 나는 몇 번의 강연과 토론에서 북의 주체사상이 북의 내재적 요구에 의해서 설명되고 전개되어 왔으나, 온갖 사상조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남한사회에서 이러한 사조들과 만나고 부딪혀서 그 생명력을 보여주었을 때만, 남북통일에 있어서도 주체사상의 위상은 인정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1991. 7. 2 “평양에서의 강의<중>”].

        <인용문 9> 이번에 필자가 평양에 머무르면서 만난 많은 학자와의 토론에서 제일 많이 논의된 문제는 역시 북한의 사회주의와 사라진 동유럽 사회주의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었다. …… 반면 조선의 실정에 맞게 전개된 ‘우리식 사회주의’는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통일된 사상적 무장 위에서 전개되었기 때문에 외부세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릴 염려가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내가 만난 북쪽 사람은 열이면 열 확신에 차서 주장했다[1991. 7. 5 “평양에서의 강의<하>”]. -

        등의 내용을 기술하여, 북한의 주체사상을 찬양하고”

 

먼저 원심은 인용문의 앞부분에서 피고인이 북한 주체사상과 수령론의 한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지적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용문의 그 다음 부분에서 원심은 피고인이 주체사상, 수령론, 북한 체제를 옹호¡찬양하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즉 원심의 논리는 피고인이 북한의 주체사상과 수령론의 한계를 인식¡지적하면서도 북한 체제를 비판하지는 않고 옹호¡찬양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원심의 논리는 그 자체로 모순되고 있습니다. 원심의 논리대로 되려면, 피고인은 처음부터 일관되게 주체사상과 수령론에 대해 일체의 한계 지적과 비판을 하지 않으면서 수령론 등을 옹호¡찬양 하여야만 합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원심이 전반부에 스스로 인정하였던 것처럼 주체사상과 수령론의 한계를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지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한계가 현실적으로 발현되어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까지 정확하게 분석하였습니다.

 

피고인의 서술은 분명 주체사상과 수령론의 한계와 함께 그 내적 작동원리를 분석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피고인의 분석은 객관적이며, 이러한 객관적 해석은 북한 사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높여줍니다. 바로 이러한 북한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북한 사회의 변화가능성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국내¡외 대부분의 북한 전문가가 자의적인 북한 체제 해석 때문에 북한의 체제 변화에 대한 전망에서 실패했을 때, 피고인의 전망은 비교적 현실과 일치하였다는 점은 이러한 객관적인 관점으로 북한 사회를 이해하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 <인용문 5> <인용문6>에 대한 해석

 

여기에서 쟁점이 되는 것은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기회적 합리성’으로 파악한 점입니다. 그런데 이 인용문 전체를 잘 읽어보면, 피고인은 수령체제를 전통적이지 않은 지배양식이지만, 합리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합리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성격을 지닌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소위 ‘기회적 합리성’이라는 표현은 대체로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근대적 합리성 또는 서구적 합리성에 의해 충분하게 해석되지 않는 ‘독특한 합리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흔히 북한 연구자들 사이에 북한의 합리성과 관련하여 벌어지는 논쟁 중의 하나는 북한의 협상태도가 지니는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보수적이거나 진보적이거나 구분 없이, 북한의 협상태도가 서구적 기준에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파악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에서 미국과 남한 사회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북한 사회가 지닌 독특한 합리성의 성격을 잘 밝혀낸다면 이는 학문적 기여일 뿐만 아니라 이후 북한과의 협상과정에서 정말 유용하고 필요한 기재를 얻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피고인이 북한 수령제를 ‘기회적 합리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연구자의 고민을 담고 있는 것이며, 상당히 예리한 북한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연구자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북한 체제의 성격을 어떻게 일반적인 사회주의체제이론으로 설명하면서도 동시에 특수성을 간과하지 않는가 하는 점입니다. 지나치게 일반이론에 의존한다면 북한 체제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할 것이며, 지나치게 특수성을 강조한다면 북한 체제가 결국에는 도달하게 될 중장기적인 전망을 놓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북한 체제 연구와 관련하여 직면하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는 반드시 북한 체제 연구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대부분의 사회과학연구에서 직면하는 어려움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보편적 개념을 어떻게 적절하게 변용하여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 이론가들의 역량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이 됩니다. 곧 보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특수성을 동시에 반영하기 위해, 일반이론에서 만들어진 개념을 적절히 변용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북한 주체사상과 수령체제를 이런 점에서 ‘기회적 합리성’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합리성’이 일반이론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기회적’은 북한의 특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피고인에 따르면 북한 수령체제는 결과적으로 합리적일 수는 있지만, 일반적이지 못하며 ‘기회적’일 뿐입니다.

 

사회학 이론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배양식은 관료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근대적 지배양식으로서 합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의 수령제는 카리스마적 지배양식이면서도 수령과 대중의 관계를 ‘혈연적 관계’로 설명하는 전근대적이고 전통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 중간에 관료제도가 매개물로서 작용하여 그 모순이 증폭됩니다. 북한의 정치체제는 모순적인 요소들(혈연관계, 관료제, 개인숭배, 카리스마 등)이 기묘하게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체제를 유지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기회적 합리성’만을 지니고 있는 북한 정치체제는 보편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일시적이며(okkasionelle), 특수한(singulär) 지역에서(raumgebunden) 개인(김일성, persönlich)에 의존하여 유지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이는 결코 북한 체제에 대한 옹호나 선전이 아니라,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이론적¡객관적 분석입니다.

 

원심은 위 <인용문 5>을 발췌하면서 피고인이 규정한 ‘기회적 합리성’ 중 비정상적이고 특수한 것이란 의미인 ‘기회성’은 무시한 채,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인 ‘합리성’만을 부각시켜 친북적 표현인 것처럼 해석합니다. 그리고 원심은 피고인의 규정 중 ‘기회성’을 버리고, ‘합리성’만을 채택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설명도 하지 않으며, 피고인의 분석에 대해 일면적인 해석을 하는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습니다(이러한 원심의 편향적¡일면적 해석으로부터 우리는 학문의 영역을 법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는 것이 왜 위험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곧이어 원심은 위 책자의 다른 부분에서 북한 당국자 또는 주민들의 주장인 <인용문6>을 갖다 붙여 마치 피고인이 수령론을 개인우상으로 보는데 반대하는 것처럼 묘사하고, 피고인이 분석에서 객관성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체사상의 긍정적 측면만 부각시켰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인용문 5>에서 본 바와 같이 북한체제에 대한 피고인의 ‘기회적 합리성’이라는 해석에 따르면 <인용문 6>과 <인용문 5>는 상호모순되는 논리이며, <인용문 6>은 피고인의 주장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이 인용문은 소련의 전 연맹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 총비서인 니나 안드레예바가 1992년 10월 6일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행한 <사회주의 위업은 필승불패이다>라는 강연의 내용 일부임, <로동신문> 1992년 10월 26일 자). 피고인은 주체사상과 북한체제에 대해 ‘기회성’과 ‘합리성’의 양면을 모두 지적하고 있는 반면, 원심은 피고인의 위 저술에서 ‘기회성’에 대한 지적과 그 의미는 보지 못하고, ‘합리성’이라는 표면적 의미만을 부각시켰습니다. 결국 객관성을 상실 내지 포기한 것은 피고인이 아니라 원심 법원인 것입니다.

 

○ <인용문 7>에 대한 해석

 

이 인용문은 원심이 주장하는 것과 정반대로 피고인이 카리스마 이론에 기초하여 북한의 수령중심 체제에 대해 단순히 비판적 견해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공식적인 자리에서 북한 학자 앞에서 주장하기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주체사상 비판에 대해  북한 철학자들이 반발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즉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 체제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드러낸 문장을 오히려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로 이 점 때문에 피고인은 북한 정부당국자에 의해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통일전선운동의 대상’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피고인이 ‘평양에서의 강의<상>’을 통해 남한의 독자들에게 스스로 북한 학자 앞에서 수령론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였다는 점을 밝혔다는 사실을 원심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피고인의 기고문이 어떻게 ‘주체사상을 선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 <인용문 8>에 대한 해석

 

원심은 위 인용문을 가지고 피고인이 마치 남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주체사상의 위상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처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 글은 앞뒤 맥락없이는 이해할 수가 없는 글입니다. 위 글은 피고인이 남북간 학술회의의 성사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북한 학자와 당국자를 설득하면서 북한 당국자에게 한 말입니다. 위 표현은 북한 학자들이 남한 학자와의 토론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주체사상이 남한의 여러 사상조류와 만날 필요가 있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지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위 인용문의 바로 앞부분은 피고인이 북한측 윤기복 비서에게 학술회의 성공을 권유하는 내용이 기술되어있습니다.

 

“우리 땅에서 학자들의 만남과 대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다. 강한 집념으로 남북대화의 실제적인 북의 지령탑 역할을 해내고 있는 윤기복 비서를 며칠 뒤 만났을 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 문제에 대하여 나의 의견을 말하고 협조를 구했다. 윤비서는 .......... 남쪽 정부가 예민하게 반응을 보여온 주체사상 분야의 전문가들이 10여명이나 서울에서 자유스럽게 발표하도록 내버려 두겠느냐고 학회성공에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미 나와 토론을 나눈 학자들의 긍정적 반응이 있었던 터라 윤비서도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나는 나대로 북쪽 학계 뜻을 서울쪽에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몇번의 강연과 토론에서 북의 주체사상이 북의 내재적 요구에 의해서 설명되고 전개되어 왔으나, 온갖 사상조류가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남한사회에서 이러한 사조들과 만나고 부딪혀서 그 생명력을 보여주었을 때만......” [평양에서의 강의<중> (수사기록 3307쪽)]

 

결국 원심은 피고인이 북한 당국자에게 학술회의에 참여하라고 권유하는 말을 마치 남한 독자들을 대상으로 주체사상을 선전하는 것인 것처럼 발췌하여 사실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 당국자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피고인은 주체사상을 노골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었던 것이며, 주체사상이 남한사회 사상조류와 부딪혀 그 생명력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표현은 오히려 주체사상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라고 할 것입니다.

 

○ <인용문 9>에 대한 해석

 

위 인용문도 ‘평양에서의 강의<하>’ 중 북한 당국자의 말을 나열한 것이고, 피고인의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이를 피고인의 주장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 인용문 뒤에서 북한 당국자의 말과 그 말이 실린 신문기사를 인용한 후 “이 글은 <로동신문>에 발표된 뒤 모든 언론매체를 통해서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 낭독보도 되었는데, 현재 북이 국제정세를 어떻게 보고 있고 앞으로 어떤 노선을 택할 것인가에 관한 많은 시사를 해 준다고 생각된다........북은 남을 모르고, 남 또한 북을 모른다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라고 그 소회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피고인은 북한의 주체사상을 찬양한 것이 아니라 ‘우리식 사회주의가 외부세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릴 염려가 없다’는 북한 당국자의 확신에 찬 주장에 대해 북한은 남한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원심 판결은 피고인의 저술을 발췌 인용하면서 피고인의 주장을 왜곡하고, 북한 당국자의 표현을 마치 피고인의 말인 것처럼 인용하면서 피고인이 북한체제를 찬양한 것으로 오해를 하였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아전인수식 해석이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위 인용문 중 ‘평양에서의 강의’는 피고인이 북한을 방문하면서 있었던 사건과 소감을 정리한 기행문이며, 기행문에는 당연히 작가 자신의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작가가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표현됩니다. 피고인의 북한에 대한 저술과 기고문의 상당부분에는 이렇게 북한당국자와 학자들의 말과 표현이 들어있습니다. 피고인은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북한의 생각과 태도를 남한에 소개하여 남과 북이 상호 이해를 높이는데 일조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피고인은 북한의 주체사상, 수령론 등에 대해 매우 함축적이지만 핵심을 짚은 비판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비판은 북한의 철학자들과 논쟁하면서 비판과 반비판을 받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이러한 피고인의 비판은 간과하고, 엉뚱하게도 피고인의 말이 아닌 북한 당국자의 표현을 들어 피고인이 북한체제와 주체사상을 찬양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왜 원심법원은 북한 당국자와 학자들이 북한체제와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이라고 받아들인 피고인의 지적과 이론을 정반대로 북한 체제를 찬양¡옹호하는 이론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는가. 이는 다름 아니라 원심법원이 북한 당국자, 학자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양 극단에 서있을 때, 중간에 서있는 사람과 이론은 언제나 양쪽으로부터 왜곡되고, 잘못 해석되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북한 사회에 대한 분석에 있어서 객관성을 잃고, 편향된 관점을 가진 것은 피고인이 아니라 원심법원인 것입니다.

 

5.      남한 사회 평가

 

피고인의 남한평가와 관련해서 원심은 아래의 인용문을 들면서 대한민국 사회의 긍정적인 면을 기술하였다고 지적하고, 사실상 피고인이 일방적으로 남한을 비방하거나 비판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남한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었고, 오늘날 사회발전론적 범주인 ‘신흥공업국'의 선두주자로 불릴 만큼 일정 정도의 경제수준을 갖추었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62쪽)

 

“‘남한모델’이 경제성장을 통해서 민족적 자부심을 높인 것은 사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72쪽)

 

그러나 동시에 원심은 아래와 같은 인용문을 들어 피고인이 남한사회를 ‘비방’했다며 문제삼고 있습니다.

 

“북한에 비해 앞선 남한의 근대화가 결코 긍정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남한 소녀들의 성경험 연령이 점점 낮아진다는 최근의 통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여성해방의 정도를 증명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62쪽)

 

“그것은 민족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남한의 일방적인 대미종속에 있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72쪽)

 

그런데, 남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소위 ‘비방’했다는 인용문은 본래 각각 하나의 단락 내에 포함된 문장들입니다. 이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남북분단으로 남북한의 두 사회구조는 독일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겪었다. 두 사회의 사회구조적인 변화의 방향은 서로 다른 형태와 기능을 갖는 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이루었다. 남한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루었고, 오늘날 사회발전론적 범주인 ‘신흥공업국’의 선두주자로 불릴 만큼 일정 정도의 경제수준을 갖추었다. 자본주의적 축적단계없이 사회주의발전전략을 추구한 북한의 발전속도도 완만했다고는 볼 수 없다. 서독을 앞선 근대화로, 동독을 뒤처진 근대화로 비교하는 공식이 한반도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북한에 비해 앞선 남한의 근대화가 결코 긍정적으로만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남한 소녀들의 성경험 연령이 점점 낮아진다는 최근의 통계가 사회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여성해방의 정도를 증명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62쪽)

 

이 인용문을 포함한 논문의 제목은  <남북사회는 얼마나 다른가?> 로서 주로 동서독과 비교하면서 “동서냉전을 축으로 분단된 남북한은 각자 경쟁적으로 이상화시켰던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인 정치와 경제발전 모델을 받아들였다. 북한은 ‘주체 사회주의’ 혹은 ‘우리식 사회주의’를 통해 상대적으로 빨리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모형을 만들었고, 남한은 박정희 정권의 ‘한국적 민주주의’, 전두환 정권의 ‘한국적 복지사회’, 김영삼 정권의 ‘신한국’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모형 자체가 대개는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여 왔지만 경제성장을 기반으로 외연적 확장을 이룩했다(162~163쪽)” 등의 서술 등을 통해 남북사회의 이질성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의도적으로 북한사회를 찬양하고 남한사회를 폄하하려는 목적에서 서술한 것이 아니라, 학자로서 남북사회를 역사적·구조적으로 분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인용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남한모델’이 경제성장을 통해서 민족적 자부심을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민족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못했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남한의 일방적인 대미종속에 있다. 북한이 보여준 중·소 분쟁시의 독자적인 외교정책과 최근의 핵협상에서 보여준 그들의 자주적 외교전략에 적지 않는 남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었다. 북한은 현재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지만, 그들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오늘의 북한을 건설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동독 사람들이 통일이 공산주의의 모든 악으로부터 그들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었다면, 북한 사람들은 통일이 민족 비극의 종말이라고 확신하고 있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172~173쪽)

 

이 인용문이 포함된 논문의 제목은 <남북사회의 동질성의 뿌리>로 남북  상호간의 동질성 회복을 통한 분단문제 해결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이 인용문은 그 가운데 북한사회가 갖고 있는 ‘상대적 자주성’을 남한과 대비하여 설명하고 그에 대한 남한인들의 평가를 언급했을 뿐이지, 결코 이를 통해 북한을 찬양하고 남한을 비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독해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의 경우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학자인 관계로 남한 사회가 성취한 양적인 경제성장보다는 외교안보적 차원에서의 대미 종속, 그리고 경제성장과정상의 대미, 대일 종속성의 문제를 더 중시할 수 있는 바, 이는 학자의 학문적 경향성의 문제이고, 이를 대미종속성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단죄할 수는 없는 사항입니다.

 

이상의 인용문에 등장한 남한에 대한 평가는 현재 대부분의 비판적 사회과학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인식내용이기도 합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 오랜 군사독재 기간에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발전해온 남한의 비판 사회과학 진영의 경우 남한 사회의 핵심 특징으로서 1) 정치적 독재, 2) 외교안보적 대미 종속성, 3) 경제적 대미, 대일 종속성, 4) 정권의 반(反)민중성, 5) 불균형 발전전략의 사회적 폐해, 특히 산업간, 지역간 불균등 발전과 계층간 경제적 격차의 확대 등을 공통적으로 지적해왔습니다. 피고인의 서술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1980년대 초에 전두환 정권의 폭압 속에서 맑스주의가 도입, 확산되어가는 과정에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남한 사회를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로 보거나 ‘식민지반(半)자본주의’ 사회로 보는 학자들 사이에 공식적인 학문적 논쟁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남한 사회의 기본 성격을 이렇게 규정하는 이론들이 공식 학계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점을 고려하면, 주로 서술적 차원에서 남한 사회의 부정적 측면들을 산발적으로 꼬집는 피고인의 남한 평가가 매우 인색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매우 온건한 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원심이 남한에 대한 비방이라고 인용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나 남한이 일본과 유사하게 발전하는가에 대한 비교분석은 남한의 미래가 논란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남한이 서방 선진 7개국(G7)과 중국, 아세안 국가들과 같은 후발국가군 사이에서 점차 어려움에 봉착할 수도 있다는 점도 시사해 주었다.”(“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218쪽)

 

그런데, 이 인용문은 원심이 주장한 것처럼 남한 비판이 아니라 피고인의 남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입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남한을 일본이나 서독의 ‘어제’로 간주하기 어렵다는 이러한 지적은 1997년 말 우리 사회가 IMF 경제위기를 맞아 큰 고난을 겪기 전에 나온 것으로  피고인의 저술이 나온 당시에 한국 경제학계 내에 원활한 경제성장의 지속을 전망하는 낙관적 견해가 지배적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피고인의 지적은 결과적으로는 매우 통찰력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원심은 판결문에서 30여 년간 대한민국 사회를 경험한 적이 없는 피고인이 남한 사회를 비판한 것은 그가 주장하는 ‘내재적 접근법’에도 위배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직접경험’을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경제현상의 경우 다양한 통계자료 등 이용할 수 있는 경험자료들이 풍부하므로 이런 경험자료들에 기초하여 내재적-비판적 접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남한의 어떤 경제학자가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해서 미국 경제에 대해 분석과 평가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한 영역은 북한학 분야였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남한에 대한 저술은 피고인이 갖고 있는 남한에 대한 학문적 연구일 따름입니다. 이를 북한학 연구 방법론으로 제기된 내재적 접근법과 연관지어 재단할 필요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6.      ‘인용이나 전언을 통한 북한 체제 옹호’라는 해석에 대하여

 

철학은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을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인 피고인이 글쓰기에서 인용이나 전언을 즐겨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종종 자신의 주장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뒤, 해석의 권한을 독자들에게 맡깁니다. 철학자들은 스스로 독립된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타인들의 독립된 사고와 평가를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실증적 연구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과 관련된 것을 왜곡 없이 전달함으로써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를 독자들이 재구성하여 판단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자료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당대의 북한 당국자나 철학자¡이론가들의 사고를 잘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북한의 주장을 주관적으로 해석하면서 왜곡하지 않고, 듣고 본 있는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학자로서 가장 정직한 태도입니다.

 

과거 독재시대에 우리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와 관련된 서적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공산주의를 찬양하든 하지 않든 무조건 불온서적이 되었고, 그런 불온서적을 읽은 사람은 바로 그것에 물이 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민주화가 이루어진 현재 우리 사회는 과거와 같은 무지막지한 제약이 없습니다. 인용이나 전언을 하였다고 북한을 옹호¡찬양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과거 독재시대에 불온서적을 금지하였던 태도와 한 치의 차이도 없는 비민주적인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6.      저술과피고인 행적의관련성에대한원심의문제점

 

1.      원심의주장

 

원심은 판결문의「이유」, “피고인의변호인들의주장에대한판단”중‘저술활동에대한평가’부분에서 피고인의저술활동이행적과분리되어있지않다며 아래와 같이 판시하였습니다求

“피고인은 1973. 9경북한평양으로들어가노동당에가입한뒤노동당에 가경다시 북한에 들어가9북한1외교부장 허담을면담하고주체사상을학습받았으며공작금명목으로미화허담을달러및인삼주등의선물을교부받았고학【주장騁}1980년대에독일에서계속적으로친북활동을전개하던중친북활동경 입북하여노동당 통일전선부산하8조국평화통일위원회부위원장 전금철을만나미화舅紈군달러및인삼주를교부받았는데일【주장廢}그로부터약터개월뒤인같은해뒤월에국내월간지 1사회와 사상에 "북한 사회를어떻게볼것인가 북한사회를제대로 인식하기위해서는정당한방법론이마련되어야한다라는 제목의글을 기고하여 내재적접근법 을통하여북한을평가및'이해할것을제시함으로써국내·외친북세력들사이에주체사상학습분위기가급격히확산되게하였고위기가 급격히 입북하여같은 달臼일에,김일성과1단독으로 만나. 시간동안여러 분야에대하여 대화하였는데 【주장성】그로부터약한달 뒤인나 3시간 동안부터같은 해棘傷?까지하회에 걸쳐화한겨레>에 ‘평양에서의 강의의상>·<중>·<하>’라는 제목으로북한방문기를기고하여주체사상을찬양하였으며?주체사상초순경북한사회과학원제,부위원장4김철식으로부터초청장을받고?사회과학원 입북하여노동당대남담당비서인김용순을만났는데殼【주장을】그로부터 약99달.뒤3. 12. 입북하자한겨레21>에 "북한은 동독과다르다라는 제목의글을 기고하여 북한권력의정통성을찬양하는한편북한의실상을호도하였고聆求?한편 북김일성 장례식에을김철수라는가명의국가장의위원.신분으로1참석하였는데성【주장례】그바로'뒤인철수'라는 가명한겨레21>에 "김주석 죽음그 이후 북한은곧붕괴한다?곧엉뚱한정보에나의존하는서글픈시나리오라는 제목의글을 기고하여 주체사상과김일성의정치력을찬양하는한편김정일후계체제의강고함을강조한사실이 인정되는 점窪【주장 】피고인의김일성을장시간동안단독으로면담하고노동당중앙위원회정치국 후보위원으로임명되며6김일성장례식에참석하는등피고인과북한과의관계가가장밀접하였던때 무렵인翅構년노월과당월에발간된㎰역사는 끝났는가는증제(호 이2책의상당부분은피고인이상당년부터은 피년까지다른 인쇄매체에발표하였던1글들이다瘦沮통일의 논리를찾아서찾증제?호의 내용이5피고인이?내년이후에저술한책이나1기고한글에비하여북한편향墟경도의정도가더욱심한점 등에비추어보면臼【주장逑】피고인이주장하는대로피고인의글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더라도피고인이 순수한학문활동의일환으로이러한저술을하였다고볼수없고?북한과의의사연락하에북한의주체사상을 전파하고김일성窩김정일,체제를선전할 목적으로이와같은저술활동을한것으로 인정할수있다?판결문虛「이유」, 2-라?(2)-가가)- ”

 

원심 주장의핵심은【주장은】에잘요약되어있는데 그에따르면“피고인의저술활동은 전체적인 맥락에서파악하더라도북한에편향경도되어 있으며戍이는북한과의연락하에주체사상을전파하고북한체제를 선전하려고했기때문이다”고

2.      원심은 학문활동의독자성을 부정하고부당한 전제위에 피고인의 글의 이적성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저술활동과 행적의연관성에대한핵심주장인【주장母】은다시두부분으로구성되어있습니다다【주장두 】”피고인의저술활동은북한에 편향경도되어있다”는 것과  【주장聆?】”이는주체사상을전파하고북한체제를 선전하려는목적을위한활동이다 ”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입니다.

 

위 【주장聆】에서문제가되는것은‘피고인의저술활동은북한에편향경도되어 있다’는【주장은 】이‘객관적인증거에의해판단되었나’하는점?‘북한에편향경도된1학술활동은주체사상을전파하고북한체제를 선전하려는목적을위한활동이다’는【주장?위】가 ‘편견에기초하지않은 판단인가’하는7점입니다가

먼저 【주장聆?】는2학문활동과정치활동을분리불가분의관계로보면서 학문활동자체의독자성을부정하는 해석입니다다이러한태도는헌법이보장하는학문의자유를근본적으로부정하는인식이라고하지않을수없습니다로학문의자유는학문이갖는독자적성격을인정할때가능하며 저술활동은학문활동의본질적 영역에속합니다橘그렇지만【주장셉聆】는7학문활동과정치활동을하나의행위로파악함으로써막학문자체가고유한영역을갖는다는점을완전히부정하고있을뿐만아니라÷나아가저술활동이학문활동의본질적영역이라는점을부정하고있습니다아

다음으로 【주장聆?】는2학문활동의본질적영역에속하는저술활동을정치영역에서흔히사용되는이분법의논리에의해재단하고있습니다 북에대한긍정적평가가일부포함되어있는저술을 두고 이를 무조건적으로주체사상과 북한체제를옹호하고선전하는행위라고판단하는태도는‘적이아니면아군이다’는이분법적사고에의해서만가능한것입니다적이미 냉전체제해체기에들어선우리사회는이러한이분법적사고를거부하고있으며만국민들은민주화와남북정상회담.이후평화 통일에대한전망을적극적으로받아들이고있습니다리최근북한에서 일어난룡천참사에대해정치권과경제계를 뛰어넘어온국민이인도적차원의지원에동참하고있다는사실은이를너무나 분명하게보여주고있습니다 

 

끝으로 【주장聆】은7객관적증거에의해전혀증명되지 않은전제를상정한목적의식적이고 왜곡된판단입니다를원심은 피고인이조선노동당정치국후보위원이라는증명되지않은판단을전제로상정한다음玆이를바탕으로피고인의저술활동을정치활동의하나로파악하고構나아가저술활동의 성격을자신들의의도에맞추어재단하고있습니다 앞에서도지적하였지만통일학술회의에대해서는그자체로.객관적인판단을내리면서浩유독저술활동에대해서는선입견에기초한 판단을내리는원심의판결은자체모순이라고 아니할수없습니다 아

3.      피고인의저술활동은통일을지향하고 있으며북한에대해균형잡힌평가를내리고있습니다

 

원심의 핵심주장중【주장중【】은【주장-1】【주장【】에의해1뒷받침되고있지만 6이러한주장들은전혀근거가없을뿐만아니라만앞에서도누누이 지적하였지만부당전제에기초한왜곡된 판단일뿐입니다?

원심의 【주장聆】에1따르면?피고인은“, 피년대에독일에서계속적으로친북활동을전개하”였다고 되어있으나岵오히려 그는이미뮌스터대학교수취임강연굻눼년?‘현존사회주의의한계문제에대해서’에서현실사회주의국가들이갖고있는한계에대해명확하게(지적한2바있습니다.

 

원심의 【주장聆】에2따르면?피고인은북한을방문한직후인 북한년?월에“국내월간지인사회와 사상에 ‘북한사회를어떻게볼 것인가뺐북한사회를제대로인식하기위해서는정당한 방법론이마련되어야한다’라는제목의글을기고하여‘내재적접근법’을통하여북한을평가및이해할것을제시함으로써국내·외친북세력들사이에주체사상학습분위기가급격히확산되게하였”다고합니다

 

그렇지만이미재판부가인정하였듯이내재적접근법자체는소위‘이적성’이없는순수한학문적연구방법일뿐입니다缺더욱이아래에서다시확인하겠지만?피고인의저술활동때문에‘주체사상학습분위기가 급격히확산되었다’는주장은 전혀근거가없습니다겠

무엇보다도 중요한점은 이시기 피고인은북한 주체사상과정치체제의특성을‘카리스마론’에 기초하여비판하고있다는점입니다‘카리년대말집필되고?기년도국내에서출판된저서 “현대와사상점사회주의?탈1현대0민족”에서피고인은‘내재적접근법’을소개하고있을뿐만아니라酬그러한 접근법에 기초하여북한정치체제를 ‘합리적지배양식’이아닌‘비일상적인것’이라고비판하고 있습니다인은 쪽?이러한피고인의북한정치체제에대한비판은 북한체제에상당한부담이되었으며是이에따라피고인이,북한을방문하였을때북한철학자들은피고인의주장을비판하기에이르렀습니다逑

원심의 【주장聆】에3따르면?피고인은김일성과단독으로만난후한달이지난“뗌막?만난 부터같은해이 지까지“회에9걸쳐 6한겨레>에 ‘평양에서의강의?상>·<중>·<하>’라는 제목으로북한 방문기를기고하여주체사상을찬양하였”다고합니다?그러나재판부가“평양에서의강의”에서.이적성이있다고판단하여인용하고있는구절들은오히려피고인이북한에대해비판적관점을유지하고있다는사실을보여주고있거나고기껏해야북한인사들이자기체제에대해생각하고있는 사고를그대로인용해 줌으로써남한 지식인들과대중이북한체제에대해객관적으로판단할수있게 해주는 것입니다다.

이미 1990년대초반이되면남한사회에서는동유럽사회주의국가들의 붕괴에따라 사회주의국가들이자본주의국가들과의체제경쟁에서완전히패배하였다는 사실이북한전문가들뿐만아니라일반대중에게도널리 퍼져있었습니다占사실이러한인식때문에북한붕괴에기초한흡수통일론이일시적으로설득력을얻기도했습니다灸따라서당시 문제가되었던것은 ‘북한체제가남한체제에비해어떠한가’라는 점보다는‘북한지도부가북한체제의한계에대해얼마나잘알고있으며개혁 개방을할역량을가지고있는가’하는점이었습니다고다시말해‘북한지도부가과연체제를개혁개방할수있을정도로 유연한사고를가지고있는가’하는점이문제가되었습니다椒피고인의글들은당시북한체제의지도부와지식인들이 북한체제의 한계에대해 잘알지못하고있다는 사실을보여줌으로써館역설적으로북한체제의한계를더욱분명하게보여주는효과도가져왔습니다명

 

원심의 【주장聆】에4따르면?피고인은면, 년봄북한을 방문한4뒤?“‘북한은동독과 다르다’라는 제목의 글을기고하여북한 권력의정통성을찬양하는한편북한의실상을호도하였”다고합니다하그러나이글은오히려북한체제에대한객관적사실을전달한 것이고, 이러한 북한 체제에 대한 객관적 서술은 가장 정확한 북한에 대한 비판이며, 또한 당시남한사회에 퍼져있던흡수통일의위험성을 지적한것입니다의피고인의이러한주장은당시상당한공감을얻었을뿐만아니라?결과론적으로 보면북한체제에대한정확한평가를제시함으로써남한정부가대북포용정책을통해 남북화해협력으로나아가도록하는 데에기여했다고할수있습니다정

판결문의 【주장聆】에5따르면?피고인은김일성장례식에참석한직후“?장례식에 참한겨레21>에 ‘김주석죽음그이후북한은 곧붕괴한다逑記엉뚱한정보에나의존하는?서글픈시나리오’라는제목의글을 기고하여주체사상과김일성의 정치력을찬양하는한편김정일후계체제의강고함을강조”하였다고 합니다섶누누이강조하지만究이부분과관련해서도피고인의주장은이후거의 대부분이사실로확인되었습니다?당시수많은북한전문가들이북한의붕괴를예측해지만다북한체제는경제위기에도불구하고유지되었습니다분여기에서도피고인의‘내재적접근법’에기초한북한체제 분석은오히려객관적인전망을가능하게하였다고판단됩니다을사실북한체제가 특수성으로쉽게 무너지지않을것이라는피고인의예측이 사실로드러남에따라성남한의언론들은이후피고인의북한관련분석과전망을높이평가하기시작하였습니다이

원심의 【주장聆】에6따르면?피고인이북한과관계가깊던?북년대초반에집필되고발간된 “역사는끝났는가”서울에당대暉茄품와“통일의논리를찾아서”서울〕한겨레신문사?서울:의내용은,“피고인이)와 년이후에저술한책이나기고한글에비하여북한편향한경도의정도가더욱,심”하다고)합니다내하지만이러한주장은이미저술을9분석하는부분에서도 확인되었듯이 잘못된전제나선입견에 기초한오독誤讀에 의한것입니다?스피노자가일찍이이야기했듯이銖잘못된해석 특히부당전제와선입견에기초한오독을통해나쁜 의미로변하지않을만큼완벽한저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의

두 책이발간되었던당시국내의 서평을보면뭄저자의 두저서에대해매우,객관적으로평가하면서학계에서엄중한토론을통해 올바르게평가되기를 바라고있습니다서원심의우려와달리우리학계는이미북한문제와관련하여한쪽으로 치우치지않으면서련토론을통해나름대로올바른방향을찾아나갈수있는역량을 갖추고있었다고할수있습니다酉역으로재판부가 피고인의저술이당시국내에 지나치게큰영향을량그것도북한에경도편향된영향을 미치는결과를낳았다고주장하는것은학문의자유를억압하고국내학계를 폄하하는냉전적이고비학문적인태도라고아니할수 없습니다되피고인의 서적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아래의 이종오 교수의 서평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평: 건강한북한이해방법론제시 분단시대민족문제연구기여 >

송두율 교수의다양한논문을모아놓은〈역사는끝났는가〉는몇가지주제로나뉘어진다는그러나이책전체에일관되게흐르는기조는한반도의민족문제를어떻게바라보고이해해야하느냐로압축된다품저자는현대서양철학의성과를바탕으로하여 현대를어떻게이해해야하느냐는 문제를제기하고 다음에제세계론그리고북한사회를어떻게이해하고바라보아야 할것이냐는문제를제기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대로 저자는?년대이래 해외에서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헌신한대표적인한국지식인의한사람이다동저자는민주인사?통일인사로불릴 수있고 경우에따라서는반한인사汰반체제인사또는친북인사로분류될수도 있다일저자는渶년대말이래로 비교적활발하게남한의 각종매체에기고하고몇권의저서가이미출간되었으므로비록 해외에거주한다하더라도한국지식인세계의한부분을차지한다고8할수있다?

저자와 그의저작이가지는의미는두가지로정리된다 하나는분단시대 한국지식인의한 입장또는좌표를대표한다는 점이다?또하나는그것이단순히한입장을극명히드러낸다는점뿐아니라이입장을발전시킨 학문적대표성을지니고있다는 점이다?

이미 지상으로전개된 강정인났이종석의저자의,북한사회에대한‘내재적연구방법론’에대한비판과이에대한저자의답변은북한연구에서중요한학문적인성과이다綢주체사상이북한사회주의및북한의통일정책을어떻게보고이해할것이냐는 잘알려진바대로지극히논쟁적인주제이며이를두고진보적학문공동체안에서도첨예한 대립이존재한다?

현재 학계의과제는첨예한대립이존재할수밖에없는이문제를이성적이고학문적인수준에서토론의주제로 만들어내는일이다?이문제에대한 결론이나종합에 앞서이문제를접근하는 이성적인자세뺨방법론의개발이.문제라고할수있다대저자의노작은이러한 토론이가능한한단초로서 중요한의미가있다

북한학계와 남한학계가민족및 통일문제를두고직접토론하는것은당장은 가능하지 않을것이다는직접토론에앞서서양자의언어를이해할수있는매개자에의해상대의 언어와논리를이해하는학습과정이필요하리라여겨지는데그런의미에서도저자의저작은의의를 가진다

저자의 저작자체도남과북을초월한 제의논리나언어는 아니다의저자의저작은 북한의논리와입장을한국사회에설파한다기 보다는한국 지식인의 입장에서북한과 민족문제를어떻게이성적으로 이해할것이냐는노력의일환으로 이해해야한다?

이 과정에서아마어느누구도완전히 객관적이고공정할수없으며그점에서저자도예외는아니다?바로이지점이저자의저작에 대한비판?곧토론이가능한지점이라 여겨진다  

〈역사는 끝났는가〉에대한비판적독서와 토론은한국사회와한국학계의건강한북한이해에분명기여하리라고본다 뿐만 아니라이책은남한사회의 건강한이해를위한 토론에도중요한시사점을 제공할것으로기대된다?(1995.7.5.자 <한겨레신문> 이종오 계명대교수·사회학)

 

피고인의 저술활동이행적과분리될수없다면龜이는피고인이민족의평화와통일을 위해기여하려고 했다는관점에서평가해야 할것입니다 하지만 원심의저술활동과행적의연관성에대한주장은부당한전제에기초하여 피고인의저술을.의도적으로곡해하려는태도에기인한다고판단되며행이는냉전적사고에매몰되어학문의자유의본질적영역을침해하고제한하려는태도라고볼수밖에없습니다저

7.      저술활동이 국내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1.      당시 운동권 학생들[특히 주사파2.        ] 사이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는 주장에 대하여

 

우선 이 같은 주장이 유의미하기 위해서는 ‘주사파’에 대한 개념 정의가 분명해야 합니다. 용공 매도가 횡행하던 시절 관언 유착으로 조작된 개념을 무분별하게 사용해서는 엄밀한 개념에 의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주사파’ 확장이 당시 학생운동 세력이었던 ‘전대협’ 간부 조직원들의 확장을 의미한다면, 이들 세력의 확장이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 때문이었다는 논리는 무리한 평가이고, 비약입니다. 원심이 의미하는 ‘주사파’ 즉 전대협이 확장된 계기는 87년 학생 운동의 노선 투쟁과정에서 전대협 진영이 6월 항쟁을 지도하면서부터 입니다. 실질적인 전대협의 확장은 87년 6월 항쟁 이후 88년 청년학생회담 성사 운동 그리고 88년 하반기의 전두환, 이순자 구속 투쟁과정을 통해 진행되었습니다. 그 이후 전대협 운동은 정체되기 시작했고, 특히 89년 평양축전참가 투쟁 이후 성장세는 급속히 둔화되었습니다.

 

당시 각 학교 학생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다양한 조직체들이 만들어졌고 이미 상당한 이념적 지향성과 운동론을 정립한 상태였으므로 피고인의 글이 준 영향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88년 하반기 시점에는 북한에 대한 이념적 편향을 두고 내부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NL진영(민족해방파) 내부에서는 이미 주사NL이니 비주사NL이니 하는 분화가 이루어지던 시점이었습니다. 즉, 피고인의 저술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시점은 88년 이후로서 이미 이 시점에는 앞서와 같은 NL 내부의 분화가 일정한 방향을 잡고 있었습니다. 특히 학생운동권 내부에서는 나름대로의 투쟁 지침서가 돌고 있었고, 학생운동 세력들은 이같은 문건들이나 전대협 투쟁 방향 지침서를 통해 운동 방향을 잡는 것이 정례화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 세력들은 피고인류의 논의를 비실천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운동권들은 노동 현장 지향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일종의 관념적 도피로, 그래서 강단운동으로 폄하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88년 하반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체사상에 대한 비판이 공론화되고 논쟁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에, 운동권(특히 주사파)들은 논쟁에 빠져드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관념적이고 현학적이어서 결국은 실천이 아니고 논쟁과 관념으로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었던 실정이었습니다. 피고인이 88년에 쓴 글은 운동권들보다는 국내 대학원 학생들에게 열독되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실제로 피고인의 글은 운동권들이 읽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현학적인’ 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학생운동과 주사파 운동권에게 피고인의 저술이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증인 홍진표의 주장은 현실과는 괴리된 궤변인 것입니다.

 

당시 전대협은 단일한 운동권이 지도하는 조직이 아니었고, 소위 4개 정도의 내부 조직이 상호 긴밀한 논의와 논란을 통해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4개 조직은 대체로 자민통 그룹, 조통그룹, 반제청년동맹그룹, 관악자주파 그룹으로 나눌 수 있고, 이들 중 반제청년동맹을 제외하면 사실상 비주사NL 운동 그룹이었습니다. 나머지 그룹들은 주사 논쟁 자체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피고인의 글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고, 반면 주사그룹으로 자처한 반제청년동맹 그룹은 피고인의 양비론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실정이어서 피고인의 주장이 발붙일 데가 없었습니다.

 

소위 반제청년동맹으로 분류되던 그룹은 김영환, 홍진표 등이 속한 그룹으로서, 당시 이들은 피고인의 글이 양비론적이고 개량적이라 하여 비판하였습니다. 반제청년동맹 그룹은 4개의 조직 중 가장 친북 편향이 강했던 조직이라고 할 수 있고, 이 조직성원들은 그러나 1997년을 전후하여 대대적인 자기반성을 통해 북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현재 홍진표 등은 북한 정권 타도 투쟁에 매진하고 있고, 이같은 적개심이 피고인에 대해 매도에 가까운 비판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북한바로알기운동’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는 지적에 대하여

 

원심은 자생적으로 진행되던 북한바로알기라는 정서적 운동에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이라는 이론적 무기를 제공하였다고 하나,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서적 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대중운동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었습니다. 원심의 주장은 당시 북한바로알기운동이 갖는 통일 운동적 의의를 애초에 부정하는 냉전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북한바로알기운동이라는 것은 북한을 뿔달린 사람들이 사는 세상 정도로 바라보게 하던 국내의 대북한 시각을 교정하는 유의미한 대중운동으로 어떤 경우에도 그 의의가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북한바로알기운동은 김일성 가짜론이 가짜라는 점을 바로 알고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 정도로 대북 인식 틀을 바로잡자는 시각 교정 운동이었을 따름이고 이는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고 또한 진행되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아직도 이러한 북한바로알기운동이 통일교육의 중요한 한 구성요소로 자리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사회의 대북 인식은 편향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남북관계의 개선에는 남북의 서로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한 바탕이란 점을 부인할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이러한 상호이해는 상대방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에 기초한 분석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원리입니다. 남과 북을 통틀어 이러한 역지사지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이 피고인이란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은 남한 사회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던 ‘북한바로알기운동’이 빠지기 쉬웠던 함정(무조건적 이해 또는 추종)을 극복하게 해주었으며(내재적¡비판적 연구), 이러한 ‘북한바로알기운동’은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성숙시킴으로써 남북의 평화통일과정에서 남한 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원심은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북한바로알기운동’에 미친 부정적인 일면만을 보고 있으나 사실상 이 운동은 현재 남한사회가 통일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화해¡포용정책의 디딤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4.      ‘밀입북’투쟁에 계기를 제공했다는 주장에 대하여

 

피고인의 저술이 심지어 임수경 등의 방북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하나 이는 당시 학생운동 지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허위주장입니다. 당시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자주적 교류’와 ‘비핵군축’이라는 노선 대립이 있었습니다.

‘자주적 교류’론은 88년 청년학생회담 성사 투쟁이 자주적 교류를 제기하였지만 이를 실제 성사시키는 데는 실패한 만큼, 다음 단계는 회담을 성사시켜 자주적 교류를 민족통일의 흐름으로 이끌어가야 한다는 논리가 전제된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자주적 교류’론자들은 89년 임수경 방북을 통해 자주적 교류를 상징적으로라도‘성사’시키는 것, 90년 범민족대회를 통해 자주적 교류를 대중적으로 성사시키는 것, 91년 범청학련(범민족청년학생연합)을 통해 자주적 교류의 상설 기구를 성립하는 등의 발전 단계를 상정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주적 교류론자들은 대체로 남북회담의 ‘성사’에 초점을 두고 있었고 이들의 주된 근거는 남북관계는 통일운동의 영역으로서 정서적 운동에 기반하여 진행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비핵군축’론자들은 자주적 교류나 북한바로알기운동은 정서적 운동인 만큼 운동론적 의의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반독재투쟁과 통일운동을 결합시킬 수 있는 투쟁을 제안하였습니다. 이들 두 노선간의 대립 과정에서 전대협은 임수경, 박성희, 성용승 등의 연이은 방북을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이들 간의 논쟁은 이미 88년 청년학생회담 성사 투쟁과정에서 빚어진 것이었으므로, 사후에 발간된 피고인의 저서는 영향을 줄 여지가 없었고 방북운동을 추진하는 자주교류파들에게 오히려 관념적이고 현학적인 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내재적 접근이니 뭐니 하는 논의자체가 이미 정서적 운동을 반대하고 뭔가 이론적이고 복잡한 개념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자주적 교류를 강조한 운동 세력들은 이를 비실천적인 주장이자, 정서적 운동에 기반해야 할 통일운동에 역효과를 주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의 저술이 방북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입니다.

 

5.      냉전 해체 시기에 붕괴하는 북한에 대해 환상을 주고 한국사회의 안정에 위협을 가했다는 지적에 대하여

 

사회과학의 중요한 의의는 예측력에 있습니다. 북한과 관련해서 북한 체제 붕괴론을 비판한 피고인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타당합니다. 북한의 경우 체제 유지가 가능하고 그것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분석한 피고인의 저술들은 오히려 지금 돌아보면 다른 모든 저서들보다 북한 체제 변동에 대한 높은 예측력을 발휘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원심은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 때문에 한국에서 주사파가 확산되어 북한을 더 압박하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이 붕괴되지 않고 한국사회의 안정에 위협이 발생했다는 억지논리일 따름입니다. 이같은 억지 논리에서 한발만 물러서면 피고인의 북한 체제 변동론의 기본 판단은 인정할 만한 내용입니다.

 

피고인의 남한에 대한 평가에 성취와 함께 비판적인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 비판의 내용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 우리 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발전시켜가는 데 유용한 자극제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비판적 설명이 ‘생산적인 비판’이 되느냐 아니면 그저 감정 섞인 ‘비난’으로 전락하느냐는 문제는 비판자의 비판 내용이 어떤 것이냐 보다도 오히려 비판을 받는 쪽이 어떤 자세로 비판을 수용하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고인이 가한 비판은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1960년대 이후 국내에서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것들로 한국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자양분이 되었던 것들이었습니다.

 

8.      결론

 

남한 사회의 민주화에 나름대로 기여하였던 독일 유학생이 이제는 학자가 되어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기여했다는 것은 우리가 지난 15년간의 남북관계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내리게 되는 결론입니다. 북한에 대한 공포, 국가보안법이라는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낡은 법으로부터 벗어나 우리 사회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 우리는 피고인의 역사적 사명의식과 선견지명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한 사상가나 이론가의 사상이나 이론, 삶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이는 두 번이 아니라 세 번, 네 번 말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는 한 개인이 지닌 한계 자체 때문만이 아니라, 그를 수용하는 사회 자체의 한계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사상가나 이론가는 신중해야 합니다. 한 사회가 사상과 이론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나 때론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1980년대 말 동구 공산권 사회에 대한 비판을 서구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함께 대등하게 공유했던 피고인이 남북의 화해와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이미 ‘약자’의 위치에서 ‘방어적 사고’와 ‘벼랑끝 전술’에 집착하던 북한에 대해 비판을 가할 때 조심스러운 표현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는 점에 대해 우리는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남북으로 나뉘어 60여년을 살아왔던 우리 민족이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하나로 되어 가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우리 사회를 성숙시키는 데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사회는 피고인의 재판에서 다시 한번 우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 민족의 나아가는 길을 지켜 보고 있습니다. 역사는 종종 늦게 오는 자들을 심판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피고인에 대해 10년도 훨씬 지난 과거의 행적에 대해 사법적 심판을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법적 심판을 내리는 시점은 현재이며, 이러한 사법적 심판은 우리 사회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만일 우리 사회 내부에서 그의 과거 행적과 그러한 행적의 결과에 대한 논란과 평가가 획일적이지 않고 다양하다면, 나아가 과거의 평가와 현재의 평가가 다르다면, 우리는 과거의 기준이 아니라 현재의 기준을,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까운 미래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을 내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재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해, 나아가 우리 자손들의 미래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 우리 사회는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 사회의 발전은 그 사회의 도덕적, 법적 판단기준이 얼마나 미래지향적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그 시험대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과거 저술활동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 및 한반도 미래에까지 미칠 영향을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피고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저술활동을 했는가 하는 점과 함께 그의 행동(과 저술)이 실제로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어떤 결과를 낳았는가 하는 점을 동시에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미 그의 행동은 우리 사회에서 주요한 의미를 지닌 ‘공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의 평가가 갖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일은 단순히 그에 대한 평가에 그치지 않고, 장차 우리가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점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2004.    5.    17.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 수

 

           담당 변호사   송   호   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