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건    2003고합1205 국가보안법위반 등

피고인    송  두  율




변 론 요 지 서






                                         2004.     3.    9.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수, 정평, 해마루, 한결

                                         변호사 안영도, 김진, 장경욱, 황희석






서울중앙지방법원  제24형사부   귀중

목차..


1. 공소사실의 요지 및 변소의 요지 

  가. 공소사실의 요지

  나. 변소의 요지


2. 변화된 시대상황과 국가보안법의 문제점

  가. 남북관계의 급격한 변화

  나. 국가보안법의 문제점

  다. 소 결


3.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종사의 점에 관하여

  가. 개요

  나.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위헌성

  다. 공소사실의 불특정

  라.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

  마. 피고인의 1991년 5월(검찰 주장 후보위원 선임 일시) 이전 행적과 후보       위원 선임의 관련성 여부

  바.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조선노동당 간부로서의 주도적 임무인가?

  사. 남․북․해외 통일학술회의 중재활동이 조선노동당 간부로서의 주도적임무       인가?

  아. 소결


4. 특수탈출 및 회합통신의 점에 대하여(공소사실 제2, 3, 4,항). 

  가. 특수탈출의 점

  나. 회합 · 통신의 점(공소사실 제4항)


5. 소송사기미수의 점에 대하여

  가. 개 요

  나. 편취의 범의 및 불법영득의사의 부존재

  다. 기망행위의 부존재

  라. 소  결


6. 결  론

변 론 요 지 서


사  건  2003고합 1205 국가보안법 위반 등

피고인  송두율


   위 사건에 관하여 피고인의 변호인은 다음과 같이 변론의 요지를 진술합니다.


다   음 


1. 공소사실의 요지 및 변소의 요지 


가. 공소사실의 요지


① 피고인은 1973년 조선 노동당에 가입하여 당원으로 가입한 이후, 1991. 5.경. 북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공작금을 지급받고,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내재적 접근법을 이용하여 북한 체제 찬양 및 주체사상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거나 통일 학술회의를 주도함으로써,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성된 반국가단체인 북한 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고(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2호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 종사),


② 1991년 5.경 김일성을 면담한 이후 1994. 3. 12.까지 매 년 북의 지령을 받고 입국하여 학술 토론회 등에 참여하여 주체사상을 학습하고, 북의 체제를 찬양하고, 1994. 7. 11.에는 김일성 장례식에 장의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북한의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하고(위 법 제6조 2항 특수 잠입, 탈출),


③ 1995년부터 2003년까지 6차례에 걸쳐 지령을 받고 남북 해외 통일 학술회의를 개최를 협의하기 위하여 북한에 입국하여,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회합하고(위 법 제제6조 제2항 잠입, 탈출, 제8조 1항 회합, 통신),


④ 1996년 이후 3차례에 걸쳐 북한의 기념일 등에 축하전문을 보내어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 구성원과 연락하고(위 법 제8조 1항  회합, 통신),


⑤ 1998년 황장엽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금전을 편취하려고 하였으나 미수에 그쳤다는 것입니다(형법상 소송사기 미수).


나. 변소의 요지


이 사건 각 공소사실중,

① ‘간부기타 주도적 임무종사의 점’은 피고인이 노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적이 없으며, 검사가 제출한 증거는 증거능력이 없거나 모든 증거를 종합하더라도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는 점을 증명할 수 없고, 1991년 이전의 피고인의 행적이나 저술활동, 학술회의 중재활동은 모두 피고인이 북과의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수행한 활동으로서 어떠한 이적성도 없어 피고인이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할 수 없으므로(공소사실 불특정, 제3조 제1항 제1호의 위헌 무효주장도 하고 있음),


② ‘특수탈출’의 점 중 1993년 독일 국적 취득이후 피고인의 방북부분은 개념상 “탈출”의 범위에 해당되지 않을 뿐아니라,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고, 지령을 받거나 목적수행을 협의하기 위한 입북이 아니므로 국가보안법상 특수탈출이 성립할 수 없으므로(1991년부터 김일성 주석 장례식 이전까지의 방북은 모두 학술자료 수집 및 연구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고, 1995년 이후 방북은 학술회의 중재를 위한 것으로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적이 없는 독자적인 활동이었음),


③ ‘회합, 통신’의 점 중 축전을 보낸 것에 대한 부분은 피고인이 북에 보낸 축전은 의례적인 것으로서 “연락”의 개념에 해당하지 아니하고, 피고인은 남한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할 어떠한 의도도 없었을 뿐아니라, 외국인의 지위에서 행위한 것이므로 처벌될 수 없으므로,


④ ‘사기미수’의 점은 피고인에게 명예를 회복하려는 외에 어떠한 편취의사나 기망행위가 없었으므로


각 무죄입니다. 


피고인이 40여년간 해외에서 민주화 및 통일을 위하여 기여한 점, 2000.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교류가 전면적으로 확대되는 등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된 법현실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점, 피고인의 학문적 역량을 활용할 필요가 있는 점, 피고인이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 체제를 선택하여 헌법준수 의사를 밝힌 점 등을 감안하여 시대정신의 흐름에 부합하고 우리 사회의 통합 및 성숙에 기여할 수 있는 전향적인 판결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2. 변화된 시대상황과 국가보안법의 문제점


가. 남북관계의 급격한 변화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난 후 40여 년 동안 상대방을 절대적인 적으로 상정하고 대립·갈등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일하고 민족의 번영을 이루는 것은 시대적 과제입니다. 1980년대 후반 사회주의권의 몰락으로 인한 동서냉전이 급속하게 해체되던 시기, 한민족이 직면한 시대사적 과제는 세계사적 차원의 냉전해체에 발맞춘 한반도 냉전체제의 해체와 평화적 남북통일이었습니다. 이는 20세기 중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통일된 근대국민국가 형성에 실패한 우리 민족이 21세기에 와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근대민족사의 숙원입니다.


남북의 화해와 평화, 나아가 통일을 위한 노력은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1960년대에는 시민사회 차원(민족민주주의 진영의 다양한 통일논의)에서, 1970년대 초에는 국가 차원(비밀협상과 7·4공동성명)에서, 그리고 다시 1980년대 초에는 정부 차원(남한 정부의 남북정상회담 제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나름대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를 현실의 변화에 반영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국가와 시민사회의 공동 노력, 또는 정부와 민간의 공동 노력이 없이는 고착된 남북의 적대관계를 깨는 데 역부족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남한 사회 내부의 한계도 쉽게 넘을 수 없었습니다.


분단 반세기 남북의 적대관계는 단순히 남북 당국자와 주민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불신의 벽을 심는데 그치지 않고, 남한 내부 시민들 사이에도 이데올로기적 적대감을 심어놓았습니다. 이러한 불신과 적대감이 존재하는 한에는 쉽사리 민족의 화해와 한반도의 평화가 찾아올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독일 통일의 경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독일 통일은 일차적으로 공산주의 독재에 항거하는 동독 주민들의 저항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정치적 통합 이후에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이 무난하게 통합될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앞서 동독 주민들이 서독과의 통합을 바랐던 것은 바로 동서독 주민간의 민간교류와 협력이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은 결국 한반도에서의 통일도 단순히 정부차원에서가 아니라 시민사회 차원에서도 통일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되돌아보면 198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전개된 ‘북한바로알기운동’을 비롯한 통일운동은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상태에서, 민족의 문제에 좀더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징표는 한국 시민사회가 그동안 한반도 남쪽에만 자신의 시야를 고정했던 한계를 벗어나 한반도 전체로 자신의 시야를 넓혔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은 이후 남한 사회가 1980년대 말을 지나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북한 동포까지도 끌어안고 한반도 통일문제를 주도하게 되도록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시민사회 차원의 통일운동과 교류협력은 때로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심화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때로는 정부 차원에서 막힌 남북관계의 정체를 극복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 1차 북핵위기 때 남북간에 이루어지고 있던 경제교류는 남북 당국이 심각한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완충역할을 했으며, 1990년대 중반 북한의 경제위기 상황에서 남한 시민사회가 주도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북한 주민의 남한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북한 지도부의 남한에 대한 인식을 바꾸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연결되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알려져있듯이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개방은 서구 자유자본주의 국가들의 봉쇄정책이 아니라 포용정책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았습니다. 북한 역시 이의 예외가 아닙니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은 이후 개혁과 개방으로 완전히 방향을 바꾼 것으로 판단됩니다. 여기에는 남한의 대북포용정책이 크게 기여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북한의 변화는 크게 두 가지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대외개방입니다. 1990년대 말부터 유럽연합 소속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하여, 2000년에는 유럽연합과 공식적으로 국교를 수립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북한은 2002년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북·일정상회담과 함께 소위 ‘고백외교’라는 어려운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후 미국이 제기한 2차 북핵위기로 북한의 대외관계 개선 노력은 잠시 중단된 상태이지만, 경제정책 차원에서 개방정책은 급속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신의주 특별행정구(2002. 9), 금강산 관광지구(2002. 10), 개성 공업지구(2000. 11) 설정은 북한이 지역개방을 통해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확실하게 편입해 들어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으로 판단됩니다. 더욱이 남북간에 경의선·동해선이 연결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이는 더욱 분명합니다. 최근 개최된 2차 6자회담에서도 북한의 태도는 상당 정도 유연한 것으로 참가국들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다른 변화 중의 하나는 경제개혁입니다. 북한은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국정가격체제를 근본에서 수정하는 개혁을 단행한 바 있습니다. 물가를 상승시킨 동시에 임금도 상승시켰으며, 이를 통해 주민이 스스로 자신의 경제적 합리성에 의해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국영기업소의 경우에도 분권화를 추진함으로써 자원의 확보와 생산물의 공급에서 독립채산제를 강화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경제개혁은 실질적으로 주민들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킨 것으로 판단됩니다. 특히 2003년 초 북한은 그동안 통제해 왔던 농민시장을 종합적인 소비품 시장(소위 종합시장)으로 확대·개편하고, 주민들이 시장을 통해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하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이러한 개방·개혁정책은 남한의 대북포용정책으로부터 상당 정도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 한국 시민사회의 민간교류협력과 한국 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이 놓여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는 세계적 추세인 화해와 협력체제를 수용하고, 토착화하고 있는 중 입니다. 그리고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이러한 원리를 적용하여 한국정부는 교류를 확대하고, 유연한 포용정책의 추진을 기본적인 방침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포용정책이 정치적·정책적인 측면에서 그쳐서는 완결적일 수 없으며 자기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대북포용정책이란 남한정부 정책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사회 내에 제도적·법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그 법적인 측면의 첫 번째 과제는 남북관계의 교류와 협력을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이며, 국가보안법에 의한 처벌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나. 국가보안법의 문제점


(1) 국가보안법의 태생적 무효


국가보안법은 자본주의의 이식, 사회주의자에 대한 탄압의 필요성, 반공이데올로기의 유지가 결합되어 1948년 12월 1일 그 첫모습을 드러낸 이후 1980년 5.17 군사쿠테타 세력이 주도하는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반공법을 통합해서 현재의 국가보안법으로 제정되었습니다. 입법회의는 그 성립 당시 상황이 긴급을 요하는 비상사태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전원 임명하는 소수(80인)의 입법회의 의원들이 입법권을 행사한 것은 권력분립의 원칙과 대의제민주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비록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형식적으로 수권규정이 있었다 하더라도 입법회의에서 전면개정된 국가보안법은 당연무효라 할 것입니다.


(2) 국가보안법의 존립기반의 붕괴


국가보안법의 가장 핵심적인 존립기반은 제2조의 반국가단체의 개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고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등 남북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시대에 있어서 북한을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로 보는 것은 시대착오적이고 자기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법적 규범력이 없습니다. 또한 평화통일정책을 선언하고 있는 헌법에도 위배된다고 할 것입니다. 만일 북한을 반국가단체로 본다면 평화통일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군사력과 경찰력을 동원한 진압과 영토의 수복이 있을 뿐입니다.


(3) 국가보안법의 내용상의 문제점


첫째로, 국가보안법은 헌법이 지향하고 선언한 평화적 통일 노력을 국민들에게 포기하도록 강요하는 법이기 때문에 헌법 제4조의 평화통일 조항에 위배되는 위헌적인 법률입니다.


둘째로, 국가보안법은 그 구성요건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추상적이며 불확정적이기 때문에 헌법상의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위헌적인 법률입니다. 제2조의 ‘반국가단체’, ‘정부참칭’, ‘국가변란’, 제3조의 ‘수괴의 임무’,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 제5조와 제6조의 ‘지령’, 제6조의 ‘협의’, 제8조의 ‘기타의 방법’ 등 대부분의 규정이 해당됩니다.


셋째로, 국가보안법의 규정은 행위의 가벌성의 정도에 비하여 너무나 과중한 형량이 규정되어 죄와 형의 균형을 요구하는 적정성의 원칙이라는 죄형법정주의의 파생원칙을 위배한 위헌법률입니다.


넷째로, 국가보안법은 매우 추상적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학문․예술의 자유 및 언론․출판․집회․결사등 표현의 자유를 유린하는 위헌법률입니다.


다섯째로, 국가보안법은 반공 및 반북이데올로기를 강요함으로써 헌법상 기본권의 본질적 내용에 해당하는 사상 및 양심의 자유를 근본적으로 짓밟는 위헌법률입니다.

 

(4) 국가보안법 적용절차상의 문제점


국가보안법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절차상의 원칙에 대한 특칙을 마련함으로써 파행적 적용의 여지를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참고인의 구인․유치제도, 구속기간의 연장, 공소보류제도등이 그대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특칙 규정들은 순전히 수사기관의 편의를 위한 것인 반면, 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법연행, 장기구금, 고문이라는 위법한 수사절차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여 조작하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최근 수지김사건이 국가보안법의 남용사례를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다. 소 결


이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급변하고 남북간의 인적, 물적 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는 상황은 국가보안법이 더 이상 규범력과 구체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제한적이고 엄격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에게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처벌하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의 추세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3.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종사의 점에 관하여


가. 개요


이 부분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이 1973. 9.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이후, 1991. 5. 일자미상경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김일성 장례식에 참석하고 수년간 공작금을 지급받았으며,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북한체제찬양 및 주체사상 전파를 위한 저술활동을 전개하거나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함으로써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결성된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변소의 요지는 남북간의 대립이 완화되고 민, 관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는 등 급변하는 21세기의 한반도 현실에서 국가보안법의 규범력과 실효성이 감소하였다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이 부분 공소사실에 적용되는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규정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 평등원칙, 평화통일조항 등에 반’하여 위헌, 무효이므로 본 조항을 피고인에게 적용할 수 없고,


이 사건 공소장에는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절차와 방법 등이 특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피고인에 대하여 공소기각의 판결을 하여야 하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점에 대한 증거가 없으며, 오히려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지 않았음이 분명하고, 검찰에서 주장하는 1991년 5월 이전의 피고인의 행적은 북한과 무관한 “독자적인” 활동으로 피고인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선임과 연결지을 수 없고, 검찰이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서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주요 활동으로 들고 있는 각종 저술활동이나 남북한해외통일학술회의 중재 노력 등은 피고인이 학자로서, 해외동포로서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며 자기 소신을 가지고 활동한 것이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북한의 대남공작조직과 연계하여 북한체제의 일원으로서 ‘지령’을 받거나 ‘임무수행’으로 행위한 것이 아니며, 저서와 학술회의 중재활동에 아무런 이적성도 없고, 이러한 모든 활동을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무죄라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주도적 임무에도 종사하지도 않았습니다.         


나.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위헌성


검사는 피고인이 1991. 5.경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어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기관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피고인에게 적용된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는 헌법 제12조 제1항 신체의 자유와 죄형법정주의, 제11조 평등권, 제37조 제2항 과잉금지의 원칙 및 전문과 제4조 평화통일정책조항에 위배되는 위헌무효의 법률입니다. 피고인의 변호인들은 이미 귀원에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에 대한 위헌심판제청을 신청한 바 있습니다.  


  (1) 헌법 제12조 제1항 신체의 자유 침해 및 죄형법정주의 위배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는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를 처벌대상으로 하나, “간부”란 그 자체로는 포괄범위가 불명확한 단어이고,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는 그 범위를 일의적으로 확정하기가 더욱 어려운 추상적 개념인데, 대법원은 이에 관하여 “그 단체를 위한 중요한 역할 또는 지도적 활동을 한 자”라는 극히 불명확하고 동어반복에 불과한 지표를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습니다. 죄형법정주의의 기본원칙인 명확성의 원칙에 어긋나는 형벌법규의 다의적 해석은 곧 광범위한 확대적용을 불러옵니다. 대법원은 중학교 및 고등기술학교 교장으로서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경우(대법원 1961. 10. 5. 선고 4294형상356 판결), 조총련 동경도본부 메구로지부 총무부장으로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가입한 경우(대법원 1991. 3. 12. 선고 91도3 판결)와 같이, 평당원으로 있었더라도 지도적 임무 종사로 처벌하였습니다. 또한 조선노동당 당 세포위원장으로 피선된 경우(대법원 1971. 8. 3. 선고 71노277 판결), 민주애국청년동맹 부락선전책인 경우(대법원 1951. 4. 10. 선고 4283형상115 판결)로 전국적 규모 조직의 말단에서 일하였더라도 지도적 임무 종사로 확대해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건전한 일반상식과 통상적인 법감정을 지닌 일반인으로서는 단체에서 어떤 지위로 어떤 역할을 할 경우 제2호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 또는 제3호 “그 외의 자”에 해당하는지 판별하기가 매우 어려워, 위 조항은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2) 헌법 제11조 평등권 침해

   국가보안법은 삼엄한 남북대결상황에서 국가권력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제정되고, 오랜 기간 동안 집권세력이 정권유지를 위하여 반대세력을 옥죄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그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집행이 크게 문제되었던 법률입니다. 제3조 제1항 제2호에 관하여,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여러 단체들의 최하부 구성원들이 이 규정으로 처벌받아온 것과 상반되게, 북한 고위관료나 탈북자들은 정부간 대화의 상대방 또는 정착지원대상이 될 뿐 처벌대상에서 제외되어왔습니다. 피고인은 사법기관의 이러한 자의적 판단에 따라 구속기소되어, 헌법상 보장된 평등권을 침해당하였습니다.    


  (3) 헌법 제37조 제2항 과잉금지의 원칙 위반


   (가)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과잉금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나) 국가보안법은 북한을 대한민국의 존립과 안전을 저해하는 대표적인 반국가단체로 보고 제정되었고, 제3조 제1항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북한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붕괴시키는 것이며, 그 수단은 북한 주민 모두를 최소한 2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는 것입니다. 북한 붕괴 과정에서 인명손실이 커지고 민족의 분열과 갈등이 더욱 깊어질 가능성이 상당하여 헌법상 평화통일정책에 어긋나 위 조항의 목적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고, 대한민국의 존립을 위하여 북한 주민 전체를 징역형에 처할 경우 당사자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피해를 가져와 방법의 적절성과 피해의 최소성에 어긋납니다.     


  (다) 더구나 제3조 제1항 제1호가 수괴를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도록 한 것에 비하여, 제2호는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자를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여, 조선노동당 최고책임자와 북한 정부수반을 제외한 그 2인자로부터 말단 당원과 일반 북한 주민까지 모두 5년 이상의 징역에 무기징역과 사형까지도 가능한 광범위한 처벌에 처해질 수 있습니다. 반국가단체 전체의 운영에서 보면 극히 미미한 역할에 불과한 말단 당원과 일반 북한 주민까지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가벌성에 비하여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과하는 것이어서 법익의 균형성을 충족하지 못하면서 법규적용자들의 신체의 자유 등 기본권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3) 헌법 전문 및 제4조 평화통일조항과 배치


   헌법 전문은 “대한민국은 ···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라고 하고, 제4조는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정하여 평화통일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일의 방법은 평화적이어야 하며, 통일을 위하여 인도와 동포애에 기초한 민족의 단결을 높여야 한다는 헌법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런데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은 통일의 일방이며 동포애에 기초하여 민족단결로 나아가는 동반자인 북한 주민들에 대한 가혹한 처벌을 예정하고 있어, 헌법이 선언한 평화통일의 원칙과 헌법상 정책으로 채택된 평화통일정책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4) 소결


   이와 같이 국가보안법 제3조 제2항 제1조는 죄형법정주의의 핵심 원칙인 명확성의 원칙에 반하여 헌법 제12조 제1항에 위배되고, 자의적 적용으로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의 원칙에 반하며, 그 행위유형에 비하여 가혹하고 과중한 형벌로 과잉금지의 원칙을 규정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되고, 헌법 전문과 제4조의 평화통일원칙에 위반되어 위헌무효인 법률이므로, 피고인에 대하여 이 법률을 적용하여 유죄의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다. 공소사실의 불특정


형사소송법 제254조 제4항은 공소사실의 기재는 범죄의 일시, 장소, 방법을 명시하여 사실을 특정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구체적 범죄사실의 기재가 없는 공소장은 그 효력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검찰은 공소장에 “피고인이 1991. 5. 일자미상경 북한 조선노동당의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기재하고 있는 바, 그 선임 시기가 불명확하고 선임방법에 관하여는 전혀 특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국가단체 가입 및 지도적 임무종사에 관한 범죄사실중에 선임방법에 관하여 구체적인 기재가 없다면 공소사실이 특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 보는 검찰의 중요한 증거가 특히 황장엽이 김용순 등으로부터 들었다는 전문진술”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검찰의 공소 내용은 피고인이 노동당 규약에 따른 선거가 아닌 김일성 주석의 개인적인 지명에 의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이나, 김일성 주석이 언제, 어떤 방법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여 피고인에게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통보하였는지에 대하여 공소장에 아무런 기재가 없습니다.  

이처럼 간부 기타 주도적 임무 종사의 점의 중요한 전제사실인 후보위원의 선임절차, 방법에 대하여 공소사실이 불특정되어 있는 이 사건 공소장은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 소정의 범죄사실을 특정할만한 구체적인 범죄사실의 기재가 없어 공소제기의 절차가 법률의 규정에 위반되어 무효인 때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7조 제2호에 의하여 공소를 기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라.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  


(1) 개 요


검사의 기소내용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친 피고인의 유럽에서의 민주화운동의 공로와 피고인이 학자로서 국내외에 영향력이 있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대남통일전선전술에 이용하기 위하여 1991. 5. 피고인의 방북시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노동당 규약에 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직접 피고인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하였다는 것입니다.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검사가 제출한 증거는 ⓛ 피고인에 대한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 ② 황장엽에 대한 사법경찰관 및 검사 작성의 진술조서, 이 법정에서의 증인 진술, ③ 사법경찰관 및 검사 작성의 최창동, 오길남 등에 대한 각 진술조서 혹은 동인들이 증인으로 한 진술, ④ 김경필이 작성하였다고 주장하는 대북보고문, ⑤ 피고인의 저서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중 북한 권력구조의 연속성에 관한 글 등이 있습니다.


검사가 제출한 주요 증거를 다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점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만큼 범죄사실에 대한 입증이 충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하에서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들의 증거능력 및 신빙성에 대하여 검토한 후 피고인이 결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일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도록 하겠습니다. 


(2)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검찰 기소 내용을 뒷받침하는 증거들에 대한 검토


(가) 피고인의 진술


1) 피고인의 진술을 기재한 사법경찰관 및 검사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 및 피고인이 작성한 진술서의 증거능력


가) 국정원 수사관들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 및 피고인이 국정원에서 작성한 진술서는 피고인이 그 진정성립 및 내용을 부인하고 있으므로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나) 검사 작성의 피고인에 대한 제20회 내지 30회 피의자신문조서는  2004. 1. 27.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귀원이 증거능력을 인정한 나머지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들 역시 변호인의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헌법상의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와 적법절차원칙에 위반한 위법수집증거이므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2) 피고인은 일관되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을 통보받은 적은 물론 수락한 적도 없고, 후보위원으로서 활동한 적도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가)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에 대한 검토 


① 검사는 검사 작성의 피의자신문조서에 기재된 피고인의 진술 중 몇몇 부분을 들어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음을 시인하였다고 주장합니다.


피고인의 진술을 전체적인 맥락을 및 피고인이 수사받은 상황을 이해한다면 피고인이 스스로 후보위원임을 인정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이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김일성 주석 장례식에 초대받았다는 말을 듣고 북한에 갔을 때 김철수가 장의위원 명단에 23번째 올라 있어 자신이 후보위원급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수는 있으나, 정식으로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통보받은 적이 없어 정말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나 언제 선임되었는지 여부 등에 대하여 전혀 알고 있지 못합니다. 검사가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 여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진술하였다고 주장하는 애매한 표현들은 “만약에 북한 당국이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다면...”이라는 가정 하에 답변이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접근하여야 피고인의 진술의 진의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② 검찰 조사시 피고인의 상황에 대한 이해


피고인은 독일에서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하다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주관한 해외민주인사 초청행사 참가 및 한국철학자대회 참석을 위하여 37년만에 가족을 동반하여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피고인은 동포사회에서 모국어를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피고인의 사회생활은 독일어로 이루어졌습니다. 피고인은 본디 철학자로서 수십년간 독일에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왔기 때문에 한국에서 사용하는 일상언어의 의미, 그중에서도 특히 수사기관에서 사용하는 용어들의 법률적 의미 등에 대하여 지극히 낯선 상태였습니다.


피고인은 한번도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아본 적도 없고 자신의 말 한마디가 법률적으로 평가될 경우 불리한지 유리한지에 대하여 생각해본 적도 없이 귀국한 그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아침부터 저녁 11시경까지 조사를 받는 상황이었습니다(독일 시간으로는 심야, 철야조사라고 할 수 있음).


피고인은 본래도 책이나 논문을 개요 중심으로 빠르게 읽는 편인데 자신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하여도 서명날인전 검토과정에서 말한마디 단어 하나가 애매하게 해석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술한 취지와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에도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치거나 정정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검사가 자신이 진술한 취지대로 조서에 기재하였을 것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조서를 꼼꼼하게 재검토하지 않은 사정도 있으나, 검사는 기본적으로 기소를 목적으로 조사를 하기 때문에 피고인의 진술을 피고인과는 다르게 해석하여 조서에 기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미 여러 번 거론한 “김일성 주석 존경”등의 조서 기재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피고인이 얼마나 한국사회에서 사용되는 일상언어의 의미나 국민정서를 모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것입니다.


4회 검찰 조사 이후에는 변호인의 참여가 허용되고 피고인도 언론이나 야당의 여론몰이에 따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는 조사에 대하여 그나마 주의를 기울였으나, 조사 과정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변호인들은 피고인이 서명, 날인한 후에야 조서를 보았기 때문에 피고인이 생각한 진술의 의미와 법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파악되는 의미가 상이한 경우에도 이를 수정하여줄 수 없었습니다.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필요가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였던 피고인이지만 실질적인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하고 조사를 받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수사기록 4017쪽의 조사 후 조서 검토과정에서 피고인이 검사가 작성한 내용을 수정한 부분을 보면(“명예상으로 정치국 후보위원의 자리를 주었다는 뜻입니다”라고 기재한 것을 “후보위원급으로 대우해주었다”로 수정) 피고인이 조서를 수정하기 전 검사의 기재는 단정적으로 후보위원의 자리를 주었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어 피고인이 이를 수정하지 않았더라면 마치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임명된 것을 인정한 것처럼 보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검사가 피고인의 진술 취지와 다르게 조서에 기재한 부분에 대하여는 피고인의 장기에 걸친 외국생활 및 조사시에 처하였던 신체적, 정신적 곤란을 감안하여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피고인은 거의 수미일관하게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음을 정식으로 통보받은 바 없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이와 다른 부분의 진술은 피고인의 주관적인 추측을 검사가 객관적인 사실인양 기재하고 피고인은 자신이 진술한 취지와 상이하다는 것을 느끼거나 발견하지 못하고 혹은 검사가 피고인이 진술한 그대로 조서에 기재하였을 것이라고 신뢰하고 조서 열람후 서명한 것입니다.  


③ 피고인의 진술의 일관성  


피고인은 1973. 9. 노동당 가입사실, 1991년 방북시 김일성 주석 면담 사실, 1994년 김일성 장례식때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장의위원으로 초대받아 간 사실, 김철수가 장의위원 명단  23번째에 있었던 사실에 대하여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통보를 받은 적도 없고 이를 수락한 적도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장의위원 명단에서 정위원과 비서의 중간에 있었기 때문에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정식으로 통보받지 않았고 다만 북한에서 자신을 이 정도로 높게 평가하는구나라고 느꼈을 뿐입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19-20쪽)(이 부분의 피고인의 진술 기재는 주관적으로 장의위원 명단에 기초하여 후보위원일수도 있다고 추측하였다는 취지입니다).


피고인은 공식행사에서 김철수라고 불리워진 적이 없으며 공식행사에는 송두율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하였습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21쪽).   


피고인은 정식으로 통보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는 등 공식적으로 후보위원으로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24쪽, 27쪽).


피고인은 “물론 그 사람들이 저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명한 것은 시간적,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1994년 이전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식으로 통보를 받은 사실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24쪽, 17회 피의자신문조서 23쪽)라거나  “그 사람들이 어떠한 논의를 거쳐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알 수 없고 북한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결정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저로서는 왜 지명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26쪽)라고 하고 있으며, 북에서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왜 선정하였는지 알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검찰 2회 피의자신문조서 27쪽),


피고인의 진술 중 “제가 생각하기에는 북에서 해외와 남한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목적으로 저를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후에 그런 추측을 하였습니다”(검찰 17회 피의자신문조서 25쪽)라고 기재되어 있는 것은 “만약 북한 당국이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다면...”이라는 전제하에 진술된 것이며, 피고인은 실제 선임 여부 및 선임 절차, 방법 등에 대하여 전혀 알고 있지 않습니다. 


장례식 당시 정치국 후보위원의 대우를 해준다는 것을 느꼈지만 정식으로 통보받은 것은 아닙니다.... 오길남도 부총리급 대우를 받았지만 노동당에 입당도 하지 못하였다는 말과 동일하지 않겠습니까(검찰 16회 피의자신문조서 40쪽).


검사도 피고인에게 “피의자는 일관되게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통고받거나 활동한 바 없다고 하였고 현재까지 그렇게 진술하였지요”라고 하여 피고인의 진술의 일관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검찰 제19회 피의자신문조서 15쪽).


피고인의 진술을 전체적으로 검토하면, 피고인은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을 수도 있다고 주관적으로 추측을 하여본 적은 있으나 북한 노동당이 피고인을 언제, 어떻게, 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여부에 대하여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과 북한 노동당으로부터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여부를 통보받지 않았다는 점, 후보위원이라면 당연히 참여하여야 할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나 정치국의 공식 회의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점, 자신이 후보위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활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이 법정에서의 진술


피고인은 자기 진술의 기본적인 내용을 이 법정에서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다) 소 결


이처럼 피고인은 후보위원 선임 여부에 대하여 주관적으로 추측하여 본 적은 있으나, 정식으로 통보받은 적이 없어 북한 당국이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여부를 알 수 없고, 후보위원의 지위에서 활동한 적도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여 왔습니다. 


(나) 증인 황장엽의 진술 및 진술조서


1) 증인 황장엽의 진술중 김용순, 림동옥 등의 진술을 인용하고 있는 부분의 증거능력


가) 검찰은 황장엽의 진술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 여부 및 선임 시기, 선임 방법 등을 입증하는 중요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망명후 1년 정도가 지난 1998. 6. 통일정책연구소에서 간행된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책자에서 “나는 독일에 있는 송두율 교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총명하고 박식한 학자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 학생들과 독일에 있는 남한 유학생들을 끌어당기기 위하여 ,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목적에 이용하기 위하여 그를 ‘김철수’라는 가명 밑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하고 김일성이 접견한 사진을 신문에 크게 보도하였다”라고 쓰고 있으며, 국정원이나 검찰에서는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김용순과 림동옥으로부터 들어서 안다고 진술하고 있고, 이 법정에서도 같은 취지로 진술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황장엽의 진술은 이 사건 요증사실과 관련하여서는 제3자인 김용순과 림동옥의 진술을 전달하는 전문진술에 해당하여 원진술자가 사망, 질병, 외국거주 기타 사유로 진술할 수 없고 그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진 때에 한하여 이를 증거로 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형사소송법 제316조 제2항).


나) 특신상태에 대한 검토


① 김용순은 2003년 10월에 사망하였고, 림동옥은 북한에 거주하여 이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으므로, 황장엽의 전문진술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려면, 원진술자인 김용순과 림동옥이 그 진술을 하였다는 것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대법원 2000. 3. 10. 선고 2000도159 판결).


② 김용순, 림동옥이 하였다는 진술 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없습니다.


황장엽이 김용순이나 림동옥으로부터 피고인에 대한 말을 직접 들었는지 여부, 실제 그러한 진술을 했는지 여부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김영순과 림동옥이 황장엽에게 피고인이 후보위원이라는 취지로 말하였다는 점에 대한 다른 추가증거가 없는 한 황장엽의 전언만으로 법정 최고형이 사형인 중대범죄인 본 건 범죄사실을 인정하여서는 아니될 것은 물론 황장엽의 진술 자체도 전문법칙에 위배되는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로 채택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형사소송법이 원진술자가 법정에서 진술하는 것이 불가능한 전문진술에 대하여 특신상태를 요구하는 것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보장되지 않고 전문진술에 신용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황장엽의 전문진술에 대하여는 원진술자들이 사망하거나 북한에 거주하고 있어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김용순, 림동옥의 진술은 황장엽이 그렇게 들었다는 것일 뿐 그 외 반대신문에 대신할만한 그 어떠한 외부적인 정황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③ 황장엽의 경력  


황장엽은 북한 체제의 권력투쟁에서 낙오하여 남한에 망명한 자로서 황장엽이 북한 체제의 상황에 대하여 진술한 내용은 정보기관이나 공안당국에 의하여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법정에서의 증인신문에서 황장엽은 자신이 하지도 않은 말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고 진술한 바 있습니다. 실제로 황장엽은 망명후 입국 당시부터 북체제의 개방을 요구한다고 하였다가 북한에 어떠한 지원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모순된 언행으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증제17호증의 2 동아일보 기사)


황장엽은 김일성 장례식에 유럽 지역에서 많은 수의 해외동포가 참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김정일이 피고인만 초청한 것처럼 진술하기도 하였고(1998년 민사소송에 제출한 피의자본인신문에 대한 답변서 3쪽), 김일성 장례식의 장의위원이 몇 명인지 해외동포와 관련하여 어떤 행사가 진행되었는지, 등에 대하여도 전혀 알고 있지 못하였습니다(위 민사소송의 피고 본인신문조서). 이러한 점으로 보건대 실제 황장엽은 1990년대 초반에는 북한 권력기관의 핵심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이에 대하여는 자신의 저서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에서도 언급하고 있음), 업무(국제담당비서)상으로도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④ 김영순, 림동옥의 진술과 관련된 황장엽 진술의 자체 모순


  ㉠ 황장엽은 림동옥이 1991. 5.경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이는 남쪽에서 파악하고 있는 임동옥의 경력과 차이가 납니다. 남측에서 파악하고 있는 바로는 임동옥은 1993년에야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황장엽은 림동옥을 통일전선부 부부장으로 호칭하다가 이 사건의 검찰 참고인 조사시부터 제1부부장이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제1부부장과 부부장이 명백히 구분된다고 하면서도 검찰 조사 이전에는 제1부부장이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모순된 진술을 하고 있습니다.


  ㉡ 황장엽은 국정원 이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에서는 “1991. 5.에 림동옥이 ‘송두율을 김철수라고 호칭하기로 하였다’”고 진술하여오다가 이 법정에서는 “김철수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그 나중에 통보받았다”고 하면서 진술을 번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황장엽은 림동옥이 언제 자신에게 교육을 해달라고 하였는지, 피고인이 언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말해주었는지 대하여 모르고 있습니다. 이는 이전까지의 국정원 진술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 황장엽은 림동옥이 ‘송교수는 젊고 또 청년들 속에서 인기도 있기 때문에 장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위에서 그를 직접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내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국정원 이래 수사기관에서 진술하여왔으면서 이 법정에서는 “젊고 또 청년들 속에서 인기도 있고 ...”와 같은 말은 기억이 안나고, “위에서”라는 말도 사용한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 황장엽은 1991. 5.로부터 몇 달뒤 김용순으로부터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내세우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용순은 1990. 5.부터 국제담당비서로 일하다가 1992. 10.경에야 대남담당비서에 임명된 것이 분명한 바,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되었다고 들었다는 시기와 김용순의 대남담당비서 재직 개시 시기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황장엽 스스로도 피고인의 후보위원 선임 문제는 국제부장의 임무가 아님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 또한 김용순이 황장엽이 전하는 내용의 말을 하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게 하는 사유가 되고 있습니다.


  ㉤ 황장엽은 검사 및 국정원 직원이 작성한 조서의 내용에 조사자들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였습니다.(“그 사람들이 자꾸 그렇게 물으니까 그때 그렇게 됐지. 묻는 사람들이” 이 사건 증인신문조서 中)


  ㉥ 수사기관에서의 황장엽에 대한 진술조서에서는 황장엽 등이 피고인을 “교육, 강의”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황장엽은 피고인이 출석한 이 법정에서의 증인진술에서는 “교육이나 강의라기 보다는 담화”라고 하여 스스로 표현을 완화하고 있습니다.

  ㉦ 황장엽은 1999. 2.에 쓴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라는 책의 부록에서 노동당기구를 분석, 게시하였는데 여기에는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책 출판 당시는 이미 황장엽이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라고 밝힌 시점인데 자신의 그 후 저술에서 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주장과 모순된 것입니다. 


이처럼 황장엽의 진술은 그 자체로만 보더라도 여러 가지 모순을 내포하고 있을 뿐, 김용순과 임동옥으로부터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정황에 대하여는 추가로 믿을만한 내용을 진술하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황장엽은 이 법정에서 “분명한 것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인 사실이다”라고만 되뇌일뿐이어서 더더욱 그의 말을 믿을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다) 소 결


황장엽이 전하는 김용순, 림동옥의 진술을 증거로 채택하려면 김용순, 림동옥이 그 진술을 하였다는 것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 외부적 정황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있어야 하는데 제출된 증거 중에는 그에 부합하는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황장엽이 전하고 있는 김용순, 임동옥의 진술은 특히 신빙할만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으므로 증거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2) 황장엽의 전문진술의 증명력


가사 김용순, 림동옥과 관련한 황장엽의 전문진술에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김용순, 림동옥이 하였다는 진술은 황장엽이 이들의 진술을 들은 그대로 전달하였다는 점을 보장할 수 없고, 그 진술 내용에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한 시기, 방법, 피고인의 후보위원으로서의 활동 등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점을 황장엽의 전문진술만 가지고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황장엽이 전하고 있는 김용순과 림동옥의 진술은 당중앙위원회에서 선거로 선출하도록 되어 있는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피고인을 선임한 구체적 과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김용순과 림동옥이 어떠한 경로로 후보위원 선임 여부를 알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한편 황장엽의 진술이 기재된 자료들을 보면 김용순으로부터 들었다는 말과 림동옥으로부터 들었다는 말이 혼동되어 사용되고 있는 바, 이 또한 황장엽의 말을 믿을 수 없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할 것입니다.  


3) 황장엽 자신의 진술


황장엽이 피고인의 후보위원 선임 여부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추측에 근거한 것들입니다.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시기(즉 자신이 림동옥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피고인에게 주체사상을 강의한 시점)에 대하여도 황장엽은 1991. 5.이라고 하였다가 이 법정에서의 증인신문에서는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이 사건 검찰조사에서는 피고인을 처음 만난 것이 언제인지도 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황장엽은 송두율이 어떠한 활동을 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는지, 왜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는지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검찰 진술조서 6쪽). 황장엽은 피고인이 대남공작을 총괄하기 위하여 후보위원이 되었다고 하다가 인텔리를 포섭하기 위하여 선임되었을 것이라고 하는 등 그 진술이 일관되지 않습니다. 또한 황장엽은 피고인이 한 과거 또는 현재의 어떠한 대남공작활동 내용에 대하여도 알고 있는 것이 없다고 하면서 피고인이 대남공작활동에 종사하여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피고인이 주체사상을 전혀 모른다고 하고 있는데(검찰 진술조서 5쪽) 주체사상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을 주체사상의 구현체인 당의 최고 권력기관의 최고위급 간부로 임명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입니다.

      
또한 황장엽은 정치국 후보위원이 선거로 선출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지명하면 후보위원이 선임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황장엽 자신도 그와 같은 사례를 들지 못하고 있으며 그와 같이 말하는 근거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일성이 지명하더라도 사후적으로라도 당에서의 인준절차를 거쳐야 할 것인데 당에서의 인준절차에 대하여 황장엽이 진술하고 있는 바는 없으며, 선임 여부의 통보 여부조차 모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2003. 9. 28. 국정원 진술조서 890쪽) 황장엽의 진술을 다 믿어준다고 하더라도 김일성이 언제 어떠한 방식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가 없어 황장엽의 진술만으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정식으로 선임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황장엽은 김철수가 피고인이라는 것을 당의 농업담당비서조차 모른다고 하고 있습니다(2003. 9. 28. 국정원 진술조서). 그러나  정치국이 비공개조직이 아닌 한 후보위원이라는 주요 간부를 당 비서가 모른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황장엽은 “후보위원이 아니라면 김일성을 단독 면담하고 면담후 수일 동안 송두율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문과 방송에 보도되겠습니까. 송두율이 부인하고 있다면 어떻게 입증하겠어요”라고 하고 있는 바(검찰 진술조서 7쪽, 3090쪽), 황장엽이 피고인을 후보위원이라고 생각하는 주된 이유중의 하나가 김일성을 면담하고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김일성을 단독 면담하고 북한언론에 보도된 해외동포는 수십명이나 됩니다.


황장엽은 심지어는 잘 알지도 못하는 김경필의 이야기를 자기 근거로 들기까지(2000. 7. 3. 국정원 진술조서) 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이 피고인을 만나 일본에서 하였다는 대화나 말지 기고 관련 원고에 대한 주장은 실제 내용과 너무 다릅니다. 황장엽은 피고인의 진술과 사건의 경위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황장엽은 한길사에서 발간하는 한국사 관련 주체사상 원고에 대하여 “원고의 방향과 검토를 지원해 주었다”(수사기록 904쪽)고 했다가 피고인이 “이미 완성한 원고를 황장엽에게 보여주었다”고 했다가(민사소송 반대신문), “황장엽이 쓴 원고를 피고인에게 주었다”(민사소송 주신문)고 하는 등 그 상황에 대하여 엇갈리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황장엽은 민사소송에서 한길사에서 발간된 글이 자신이 검토해준 내용과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습니다. 이처럼 황장엽은 피고인과 만났던 상황을 과장하여 자기 주장에 맞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황장엽은 1998년 손해배상소송에서 “김철수는 사진을 절대 찍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조문과 장례식때 여러 장의 사진이 찍혀 TV나 노동신문, 중앙연감에 공표되었습니다. 황장엽은 “대남사업하는 사람들은 가명을 쓰지 않는다,”라고 하여 피고인이 김철수라는 가명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대남사업을 한 것이 아님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기도 하였습니다(1998년 민사소송 피고본인신문조서).


4) 소 결


황장엽의 진술 중 김용순, 림동옥의 진술을 전해들었다는 부분은 전문진술로서 특신상태를 인정하기 어려워 증거능력이 없고, 증거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김용순, 림동옥의 진술만으로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인정할 수 없습니다. 황장엽 본인의 진술은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점에 대한 추측일 뿐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한 것이 아니고, 상당히 많은 모순 및 의문점이 존재하여 역시 믿을 수 없습니다. 


(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서


1)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부분의 증거능력


가) 디스켓 저장문서의 증거능력.


우리 형사소송법 제310조의 2는 “제311조 내지 제316에 규정된 외에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 대신하여 진술을 기재한 서류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 외에서의 타인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은 이를 증거로 할 수 없다.”고 규정하여 전문법칙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전문증거에 대하여는 제311조 내지 제316조에 규정된 요건을 충족시키는 이외에는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피고인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는 그 작성자의 자필이거나 그 서명 또는 날인이 있는 것은 공판준비나 공판기일에서의 작성자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된 때에는 증거로 할 수 있습니다(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


판례는 컴퓨터 디스켓에 들어 있는 문건이 증거로 사용되는 경우 그 컴퓨터 디스켓은 그 기재의 매체가 다를 뿐 실질에 있어서는 피고인 또는 피고인 아닌 자의 진술을 기재한 서류와 크게 다를 바 없고, 압수 후의 보관 및 출력과정에 조작의 가능성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반대신문의 기회가 보장되지 않는 점 등에 비추어 그 기재내용의 진실성에 관하여는 전문법칙이 적용된다고 할 것이고, 따라서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에 의하여 그 작성자 또는 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된 때에 한하여 이를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1999. 9. 3. 선고 99도2317 판결).


나)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특수성 : 자필과 서명, 날인이 없는 서류로서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한 전문법칙의 예외규정이 적용될 사안이 아님.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에 증거능력이 부여되려면 디스켓 저장문서가 김경필의 자필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거나 서명, 날인이 있어야 합니다. 피고인이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에 자필이나 서명, 날인을 요구하는 이유는 작성자나 진술자를 분명하게 특정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하여 전문법칙의 예외를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필이나 서명, 날인에 의하여 작성자를 확정할 수 없는 진술서에 대하여는 전문법칙에 대한 예외 규정인 제313조 내지 제314조 자체가 적용될 여지가 없습니다.


자필로 작성된 경우 그 필적을 확인하여 작성자를 특정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나 컴퓨터 워드 작업을 통하여 출력된 문서는 이러한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디스켓 저장문서를 제313조가 적용되는 문서라고 본 위 대법원 판례는 형사소송법의 규정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볼 여지가 있습니다.


컴퓨터 워드프로그램에 의하여 작성된 피고인이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는 출력된 문서에 작성자의 서명, 날인이 있거나 디스켓 자체에 작성자를 특정할 만한 표시가 있는 경우에만 제313조 제1항 소정의 전문법칙의 예외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김경필의 자필로 작성된 것이 아니고, 한글 워드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문서가 디스켓에 저장되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출력문서에는 김경필의 서명, 날인이 없습니다.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 없어 그 작성이 특별히 신빙할만한 상태하에서 행하여진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판단함으로써 증거능력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위와 같은 형식적 요건이 충족되고 난 다음 단계의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제313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예외가 적용되는 서류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서 제314조에 의하여 특신상태를 판단할 필요도 없이 증거능력이 없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예외 해당여부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중 이 사건 요증사실과 관련이 있는 서류가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여 제313조 제1항이 적용된다고 하더라도, 김경필이 이법정에서 증언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김경필이 법정에서 진술할 수 없는 사정이 밝혀지고 문서의 작성이 특별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졌을 때에 한하여 증거로 할 수 있습니다(형사소송법 제314조).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진술할 수 없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확인된 바 없어 다툼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점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면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서에 대하여 제314조의 예외가 적용될 여지가 없습니다.   


형사소송법 제314조에서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행하여진 때라 함은 그 진술내용이나 조서 또는 서류의 작성에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고 그 진술내용의 신빙성이나 임의성을 담보할 구체적이고 외부적인 정황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고 할 것입니다(1997. 4. 11. 선고 96도2865 판결, 1999. 11. 26. 선고 99도3786 판결). 이와 같은 특신상태는 원진술자의 진술에 의하여 공판기일 등에 성립의 진정이 인정된 것과 동일한 정도의 신용성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할 것인데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가 김경필이 작성한 것과 동일한 내용이 아닌 것으로 볼만한 정황이 너무나 뚜렷하여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검사는 김경필이 해외에 거주하여 공판기일에 문서의 진정정립 여부를 진술할 수 없지만, 북한 조평통에서 발표한 성명서, 피고인의 진술 내용 등으로 보아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가 김경필이 작성한 것이 분명하고 작성일자 및 내용의 변조가능성이 전혀 없어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듯이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그 내용의 기술적, 사실적 변조가능성이 너무도 명백하여 문서의 작성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졌다고 할 수 없어 증거능력이 없습니다. 

    

① 기술적인 변조가능성


한글프로그램으로 작성된 문서를 플로피 디스켓에 저장하면서 새로운 내용의 문서를 원래부터 있던 문서인양 작성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최창동이나 김경필이 사용한 한글 프로그램은 국내 회사인 한글과컴퓨터에서 개발한 것으로서 작성일자를 설정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기능이 있으며, 작성일자를 김경필이 해당 컴퓨터를 사용한 시점으로 설정하고 원하는 내용의 문서를 작성한 후 새로 작성한 문서를 삭제하면 임의로 작성일자가 설정된 변경된 문서의 bak.파일만이 남게 되고 이를 플로피디스켓에 복사명령어를 사용하여 그대로 복사하면 플로피디스켓에는 내용은 원래 문서와 다르지만 작성일자는 동일한 문서가 저장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작업은 최창동이 김경필의 컴퓨터에서 자료를 입수하였다는 시점이후에 언제든지 가능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입력하거나 수정한 날짜가 그대로 디스켓에 남아 있다고 한 검사의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증거능력에 대한 의견서 기재 내용은 실재 한글워드프로그램의 기능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디스켓에 표시된 입력날짜는 문서의 작성 시기 및 진정성에 대하여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는 최창동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충분히 변조가 가능한 것입니다(감정인 양왕성이 작성한 감정서의 기재도 같은 취지임).      


② 최창동이 김경필이 사용하는 언어를 모방하였을 가능성


최창동은 자신과 김경필은 언어 사용방법이 다르다고 강변하나, 김경필과 컴퓨터를 바꾸어 사용할 정도로 친분이 있었다면 최창동이 김경필이 사용하는 북한의 언어를 표나지 않게 구사하여 서류를 재작성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③ 디스켓안에는 최창동 자신이 작성한 문서가 상당수 저장되어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에 대하여 최창동은 여러 가지로 변명하고 있지만 그 변명 내용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고, 이 사건 디스켓을 최창동이 여러 차례 이용하여 필요한 문서를 저장하고 삭제(수사기록 1195쪽)하기도 한 이상 최창동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를 직접  변조하였을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할 것입니다.   


④ 김경필 외에 다른 사람이 문서를 작성하였을 가능성


디스켓안에는 최창동이 작성한 것도 아니고 김경필이 작성한 것도 아닌 것이 분명한 서류가 상당수 들어 있습니다. 이는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김경필 외에 또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특히나 피고인과 관련된 내용 역시 김경필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작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1999년 당시 베를린 주재 북한이익대표부에는 10명의 직원이 있었고, 최창동의 진술대로 북한이익대표부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1997년 무렵이라면 이 컴퓨터를 이익대표부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용하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독일어를 번역한 문서(최창동은 이 법정에서 김경필이 독일어 사용능력이 없다고 진술한 바 있음)나 일상적인 경제거래업무와 관련된 내용의 글, 리영빈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 있는 글 등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피고인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내용도 다른 누군가가 작성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김경필만이 해외동포 관련 사업을 하였고 다른 이익대표부 직원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을 보장할만한 뚜렷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주재성원이 김경필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불분명합니다. 여러 문서에는 “주재성원”을 “김형필”이라고 기재하고 있습니다. “베를린 김선생” 명의의 여러 문서가 김경필이 작성한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최창동은 김경필이 김형필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을 본 적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최창동의 증인진술).   


문서 작성자가 독일주재실이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독일주재실이 김경필을 지칭하는 것인지도 불명확합니다.

 

⑤ 최창동, 김경필 및 정보기관의 디스켓 변개가능성


최창동은 해직교수라는 미명하에 범민련 유럽본부에 접근하여 일을 하다가 범민련 관련 자료와 이른바 ‘김경필 파일’을 가지고 귀국하여 공안당국에 자수한 자로서 피고인과 관련된 내용을 공소유지에 유리하게 변개하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최창동으로서는 범민련 유럽본부에서 제적당한 후 귀국하는 마당에 정보당국에 그럴듯한 “선물”을 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고, “김경필 파일”에 담긴 피고인 관련 내용은 그 중에서도 아주 정보가치가 높은 것이어서 최창동 스스로 혹은 정보기관과의 협력하에 내용의 일부를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일 수 있도록 내용을 수정, 추가하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망명을 하게 된 김경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창동이 자수 당시인 1998. 10.경 1998. 6. 발간된 황정엽의 “진실과 허위”에서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지칭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점도 최창동이 피고인을 타겟으로 삼아 문서 내용을 변조하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게 합니다(최창동의 법정 증인 진술).   


⑥ 같은 보고서안에 “상층통일전선대상”이라는 용어와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모순된 용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도 변조 의혹을 가지게 합니다. 


⑦ 김경필이 망명을 하고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김경필 컴퓨터 저장내용을 최창동이 절취하여 김경필을 납치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고 하여, 김경필이 작성한 것으로 주장되고 있는 문서들이 전부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습니다. 이는 김경필의 망명이 자신이 관리하는 정보가 유출되어 북한 당국으로부터 책임추궁을 면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정황은 될지언정 그 자체로 피고인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문서가 김경필에 의하여 작성된 것이라는 점 및 그 내용의 진실성까지 직접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은 아닙니다1).   

⑧ 디스켓 1(김경필이 빌려주었다는 팬티엄급 컴퓨터에서 복사, 저장한 디스켓) 저장문서의 한글프로그램 버젼이 상이하고, 디스켓 1.의 저장문서 최종 수정일자가 특정일자에 집중되어 있는 점에 대한 의문. 


감정인 양왕성의 감정서 기재에 의하면, 디스켓 1에 저장된 문서중 수정일자가 96-01-31인 문서들의 경우 작성 버전이 모두 한글 3.0으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96-02-01 및 기타 문서들은 모두 2.0버전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디스켓 2.에 저장된 문서들의 작성일자, 작성방식으로 유추하건대 이 사건 디스켓에 저장된 문서들이 위와 같은 방식으로 집중적으로 작성, 저장되는 경우는 아주 이례적인 일입니다. 위와 같은 형태의 작성일자나 작성버전으로 보아 96-01-31에 최창동에 의해서든 디스켓 저장문서 작성자에 의해서든 정상적인 문서 작성이 아닌 어떠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였음을 추측하여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정황을 종합하면 이 사건 디스켓 저장 문서가 김경필이 작성한 것이라는 점 및 공판기일에서 진술로 진정성립을 인정한 것과 동일한 정도의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하에서 작성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2)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중 피고인의 진술을 기재한 부분의 증거능력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가 전문법칙의 예외를 적용하는 대상이 되는 김경필 작성의 진술서임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의 진술이 기재된 부분에 대하여는 형사소송법 제313조 제1항 단서에 의하여 김경필의 진술에 의하여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성립의 진정이 증명되고, 피고인의 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때에 한하여 피고인의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서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증거로 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이 법정에서나 수사과정에서 김경필의 대북보고서 내용이 실제로 있었던 상황과 많이 다르고 김경필에 의하여 과장, 왜곡되었음을 지적하여 왔습니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보고서에 사용된 용어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피고인이 김경필과 만났다는 것을 인정한 경우에도 그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여 대화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김경필이 인용하고 있는 피고인의 진술은 피고인이 실제로 한 적도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비슷한 내용의 대화를 하였더라도 피고인의 진의와 다르게 해석하여 북한에 보고함으로써 김경필 자신의 사업성과를 과장하거나 자기 생각을 타인의 입을 빌어서 전달하고 있습니다.    

3)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내용의 신빙성.


가) 가사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의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디스켓 저장문서의 기재 내용만으로는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는 점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합니다. 


나) 황장엽 망명후 피고인이 김경필과 만나 대화한 것으로 기재된 내용에 관하여


① 피고인은 황장엽이 망명한 1997년경에 김경필과 만나 가명 사용문제, 황장엽이 피고인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 등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앞으로 가명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피고인이 황장엽 망명 직후에 김경필을 찾아간 것은 북에서 두 번 정도 황장엽과 장시간 토론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황장엽이 남쪽에서 피고인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도대체 황장엽이 왜 망명을 한 것인지, 이를 북에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묻기 위하여 찾아간 것이었지 황장엽이 피고인이 후보위원인지를 알고 있는지 여부나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찾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② 피고인에 대한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는 “황이 내가 우리 당의 지도기관성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라는 보고서 기재 내용에 대하여 “지도기관성원이라는 것은 북의 언어인데 제가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당간부라는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라고 되어 있는데(검찰 3회 피의자신문조서, 수사기록 2153쪽), 검사는 이를 피고인이 스스로를 당간부로 호칭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이란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당 간부”라고 자신을 지칭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용어를 “당간부”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검사에게 설명하여 준 것입니다. 같은 조서에서 피고인이 검사의 “피의자가 당간부라는 말을 하니 김경필이 자신들의 언어인 ‘지도기관성원이라고 표현하였겠군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제가 어떤 말을 하였기에 김경필이 지도기관성원이라고 옮겼는지는 모르겠습니다”라고 하고 있는 바, 위에서 말한 “당 간부”라는 표현이 피고인이 직접 김경필에게 한 말이 아님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③ 피고인의 진술중 검사가 김경필 보고문을 제시한 것에 대하여 “대체로 맞다, 전체적인 취지는 맞다”는 등의 내용은 검사가 그때그때 제시한 해당 부분 보고문 내용에 국한하여, 피고인이 답변한 전후 취지를 종합하여 그 의미를 판단하여야 합니다. 피고인은 대부분 그 내용 중에 사실인 부분도 있고 과장된 부분도 있지만 만난 사실 및 대화의 주제 등이 비슷하면 위와 같은 표현으로 답변하였던 것인데 이를 마치 피고인이 김경필이 작성한 내용을 모두 사실로 인정한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됩니다. 위와 같은 피고인의 진술은 피고인이 수사기관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자신의 진술이 가지는 법률적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여 실제 사실에 대하여 부정확하게 기술되더라도 자기가 진술한 취지와 다르지 않겠거니 생각한 부분들이 실상은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해석될 수 있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입니다.


피고인의 진술 중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후의 문맥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입니다”(3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2155쪽)라는 부분은 위와 같이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을 자신이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보고문 기재 내용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음을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진술 중 검사가 대북보고문 1104면 이하를 제시하고 “보고문에 기재된 내용이 모두 사실이지요”라고 한 것에 대하여 “예 맞습니다.”라고 한 것은(검찰 3회 피의자신문조서, 수사기록 2160쪽) 해당 1104면에 기재된 뮌스터대학 강의문제, 훔볼트대학 취직문제, 미국에 가는 문제 등의 사실관계를 인정하고 있는 내용으로서 보고문의 내용전체에 대하여 사실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④ 김경필이 사용한 당중앙지도기관성원이란 용어가 직접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칭하는 것인지 여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김경필은 보고문에서 한 번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김경필과의 대화시에 황장엽 망명 직후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스스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지칭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김경필도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호칭하거나 후보위원이라고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피고인은 당시 김경필에게 ‘피고인이 북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인사로 대접받고 있는 것을 황장엽도 알고 있느냐’라는 정도의 의미로 이야기 하였지 ‘황장엽이 피고인이 후보위원인 것을 알고 있느냐’라고 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다) 오히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문서를 보면 김경필은 일관되게 피고인을  통일전선대상으로 보고 지도, 교양 대상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김경필의 보고서에서 피고인을 지칭하는 직접적이고 공식적인 용어는 “상층통일전선대상”이라는 말입니다. 상층통일전선대상으로는 윤이상의 처 이수자등 독일 동포사회의 운동단체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피고인은 이들 해외동포들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공식적인 호칭이 북에서 인식하고 있는 피고인의 지위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김경필이 피고인의 말인 것처럼 인용하고 있는 “당 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은 일회적으로 사용된 비공식적인 언어로서 “상층통일전선”이라는 공식적인 언술에 비하면 피고인의 지위를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당지도기관성원”이라는 말은 김경필이 북에 보고하면서 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한 것으로서 피고인은 김경필과의 대화에서 사용한 적이 없는 용례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단어를 김경필이 직접 사용하였는지 최창동이 가필하여 넣은 것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문서의 내용을 보면 피고인은 일관되게 “당지도기관성원”이 아닌 “통일전선대상”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통일전선대상과 당지도기관성원은 양립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닙니다. 일개 해외공관 주재원으로부터도 통일전선대상으로서 지도, 교화할 자로 폄하되고 있는 피고인이 당의 최고지도부의 성원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황장엽에 의하면(98년 민사소송 피고본인신문조서), 북측은 이선실이 더 이상 대남사업을 하기 힘들어지자 김철수를 후보위원(전국적으로 1명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한다고 하였음)으로 선임하여 대남사업을 관장하게 하였다는 것인데, 김경필이 피고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대남사업을 관장하는 당의 후보위원에 대하여 해외공관의 일개 주재원으로서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김경필은 오로지 피고인을 해외동포중에 중요하게 관리하여야 하는 대상, 이른바 “통일전선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경필은 피고인을 “적들의 조국에 대한 비방중상에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면서...”, “그는 순수한 부르죠아인테리인데, ...특히 구라파교포사회와 운동권에서 아무러한 권위도 없고, 그가 남과 북에 대하여 명백한 립장을 취하지 않고 있는데 대하여 모두다 의심을 품고 있는 조건에서...”, “그는 조국의 일군들과 학자들이 남조선의 사정을 너무도 모른다느니, 주관주의가 많다느니 하면서 비꼬는 소리를 하고는 하는데... 주재성원은 그에게 한 번 짭짤하게 말해주려고 하다가도..”(이상 1996년도 독일주재실 사업총화보고서), “수령님 서거 3돐과 관련하여 조국방문을 하지 않은 것은 괘씸하기는 하지만 정세 변화와 기분 상태에 따라서 이렇게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통전 대상이 라는 점을 고려하여....”(97. 7. 14.자 독일주재실 상반기 사업총화보고서)라고 하는 등 주요 보고서에서 피고인을 분명하게 동요하는 통일전선대상으로 서술,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김경필은 여러 곳에서 피고인을 동요하는 나약한 지식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재 내용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일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지도기관성원 운운하는 부분은 전체 문맥에 어긋나고 믿기 어렵고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심을 가지게 합니다.     


라) 대북보고문 내용을 믿을 수 없는 다른 이유들.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문을 보면 북한 통일전선사업부 구성원으로서의 자기 업적을 포장하거나 보고내용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하여 자기 생각을 피고인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빌어 북에 보고한 것이 많습니다. 김경필 보고서의 기재 내용은 사실관계가 부정확하고 과장되어 있으며, 언어 사용이나 사실 묘사에 있어서도 왜곡되고 과장된 부분이 곳곳에 있습니다.


① 김경필의 보고 내용중 이미 언급한 부분 이외에도 사실 왜곡 사례로 들수 있는 것으로 ‘피고인이 1996년경 중앙일보로부터 공작금을 받는 문제로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충고를 듣고 이를 거절하였다’는 내용을 들 수 있는데 이것도 실은 당시 피고인의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때 중앙일보사가 조의금으로 보내온 돈을 다른 언론사와의 관계를 감안하여 거부하였던 것으로 김경필 보고서의 내용과 실제 사정과는 아주 다릅니다. 


② 피고인의 집에 방문한 김경필이 피고인이 살림이 어려워 난방도 하지 않았다고 한 부분은 실제 피고인이 실내공기가 건조하면 천식발작을 일으켜 겨울에도 스팀을 약하게 가동한 사정이 있는 것인데 김경필은 이를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보고서에 왜곡 기재하였던 것입니다. 


③ 재독 동포 사업가인 임희길을 통하여 북한에서 독일 전화번호부를 생산하여 독일로 들여오는 문제를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한 것처럼 기재하고 있는 내용도 기실은 김경필이 외화벌이 사업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피고인의 집에 수시로 찾아와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소개하여준 임희길을 만나게 해달라고 자기가 애달아했으면서도 이를 북에 보고할 때에는 자신의 체면이나 편의를 위하여 마치 피고인이 적극적으로 제기한 것처럼 하여 실제 내용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④ 김경필의 보고서중 피고인이 북과 ‘30년간 연계’하였다는 말이나 ‘지난 시기 비공개활동을 하였다’는 등의 말도 사실과 다릅니다.


보고서에는 “연계”, “비공개활동”등의 용어가 사용됨으로써 마치 피고인이 비공개로 북의 지시를 받으며 비밀활동하였다고 오해될 소지를 주고 있으나 피고인은 1970년대, 80년대에 간헐적, 일회적으로 학술연구를 위해 북에 가거나 독일에서 합법 공개활동을 한 것에 불과하며, 독일에서 북한과 연계한 어떠한 비밀활동이나 조직활동을 한 바가 없습니다.


⑤ 피고인은 김경필에게 학술회의를 북한 통일정책의 선전장으로 이용하자고 말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경필은 그와 같은 취지로 북에 보고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생각일 뿐입니다. 한편 김경필은 그와 같이 보고함으로써 피고인의 편을 들어 통일학술회의 성사에 협조하려고 한 것로 보이기도 합니다.      


⑥ 가명사용문제에 대한 서술 : 피고인은 황장엽의 망명을 계기로 가명 사용 문제를 분명하게 해둘 요량으로 김경필에게 그 시정을 촉구한 것이지 후보위원이라는 것을 숨기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은 황장엽 망명전에도 1995. 8.과 1996. 3. 방북시에 김철수라는 이름 대신에 송두율 본명을 사용할 것을 북측에 요구하였습니다. 피고인으로서는 북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해준 이름으로 자신을 호칭하는 것에 대하여 기분이 좋지 않았고 껄그럽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황장엽 망명을 계기로 하여 문제가 될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보고문 내용중에는 마치 피고인이 비공개활동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가명을 사용하여 온 것처럼 기재된 부분이 있는데 피고인이 가명을 사용한 것은 1970, 80년대에 입북상 편의를 위하여 사용한 것과 1994년 이후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북에서 호칭된 것이 전부 입니다. 가명은 북에서 일방적으로 피고인에게 붙여준 것이지 피고인이 김철수 등의 가명을 사용하여 어떠한 행위를 한 것은 없습니다.  


마) 김경필과 피고인의 관계의 실질


김경필은 북한 통일전선부 직원으로서 해외동포 조직 및 독일 교포사회와의 연결 창구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김경필은 피고인을 비롯한 다수의 해외동포들을 통일전선대상으로 생각하고서 관리하였습니다. 사실상은 김경필이 대남 공작을 전담한 직원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한 해외동포 관리업무를 한 자인지도 불분명합니다. 


피고인은 지금까지 북한 당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독자적인 입지를 가지고 활동해왔습니다. 피고인은 해외에서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남쪽에 입국하지 못하게 되자 학문적인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북에 수 차례 다녀오기도 한 바 있지만 북의 지시를 받거나 조직적으로 연계하여 활동한 적은 없습니다. 이는 김경필이 피고인을 “동요하는 통일전선대상”으로 지속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김경필은 통일전선부 직원으로서 피고인이 북한과 연락을 하는데 있어서 실무를 담당한 자이지 피고인을 조직적의 일원으로서 관리한 자는 아닙니다. 보고서에 의하더라도 유럽지역에서 북한과 직접 연계한 자들은 “7인 소조”, “4인 소조”등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피고인은 이와 같은 비밀조직에 속하였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김경필은 통일전선대상인 피고인을 접촉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고, 피고인은 북측과 조직적으로 일체가 되지 않고 독자적인 지위에서 김경필을 오로지 남북해외 통일학술행사를 위한 대북한 접촉 통로로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1997. 2. 1996년 독일 주재실 사업총화보고서에는 ”그러면서 그가 앞으로도 자기가 시작한 북과 남, 해외 학자 토론회를 남조선 것들의 요구도 있으므로 계속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때 그때의 형편을 보아서 우리에게 이롭게 이용하는 방향에서 처리해 나갔으면 합니다.“라고 하여 학술회의가 피고인이 직접 시작한 사업으로서 북한 역시 피고인에게는 남측과 마찬가지로 상대방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습니다. 북측에서 피고인을 어떻게 생각하였든지간에 피고인은 자기 나름대로 통일학술회의가 우리 민족의 화합과 통일에 있어서 가지는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북한 당국을 설득하여 대화의 장으로 나오도록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접촉창구로서 김경필을 이용하였던 것입니다.


김경필의 보고서 곳곳에는 학술회의에 대하여 북한측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는 피고인이 북측의 지령을 받아 학술회의를 중재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자기 판단에 의하여 활동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997. 6. 24.자 ‘송두율의 면담정형과 대책적의견’에서는 “그가 제기한 학술토론회를 조직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있어서 별로 큰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이를 통해 남조선 것들과 서방반동들의 악선전에 타격을 주는 활동을 벌리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은 없으므로...”라고 하고 있는 바, 피고인이 북과 일체가 되어 북의 방침에 따라 학술 토론회를 조직한 것이 아니라 피고인 자신의 독자적인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김경필은 학술회의의 성사를 위하여 피고인이 북과 접촉하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송교수의 부탁을 받고 북에 학술회의의 성사를 자기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부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경필은 보고서에서 위와 같은 학술회의 개최 이유를 마치 피고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데, 김경필이 피고인의 말이라고 전언한 부분이 사실은 김경필 자신의 생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 소  결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최창동이 저장하였다는 디스켓에 담긴 대북보고문은 작성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특정하기 어렵고, 형사소송법 조문상 예상하고 있지 않은 전문증거로서 기술적, 현실적으로 변조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경필이 법정에 출석하여 진정성립을 인정할 수도 없어 실제 김경필이 작성한 것인지 여부 및 그 내용의 진실성을 공판기일에서 법관의 면전에서 진정성립을 확인하고 피고인의 반대신문이 이루어진 경우와 동일하게 볼 수 없는 등 보고문의 작성이 허위개입의 여지가 거의 없는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행하여진 것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 디스켓 저장문서는 형사소송법이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하고 있는 전문법칙의 예외에 해당하지 아니하여 증거능력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가사, 증거능력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의 주된 취지는 피고인이 “통일전선대상”일뿐이라는 것이어서 피고인이 북체제의 일원인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점을 증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 책자.


1) 검사는 피고인이 1995년 8월에 출간한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라는 책의 132-133쪽에서 김철수를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및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표시한 것을 가지고 피고인이 저술 당시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김철수를 후보위원으로 표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이것만 가지고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는지 여부가 객관적이고 직접적으로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2) 피고인이 사용한 분석 방법론의 문제점 : 장의위원 서열을 당 권력서열로 등치시킬 수 있는지 여부


지도자 사후 장의위원 서열로 사회주의 사회의 권력 구조를 분석하는 방법이 과거에 정치학 분야의 동구 사회주의 국가 연구에서 사용된 적이 있었지만, 이러한 방법론에 대하여는 학문적으로나 실제 사실 여부에 대하여 그 타당성이 입증된 바 없습니다. 이 책이 출간된 후 중앙일보 북한 문제 전문기자였던 유영구는 피고인에게 직접 위와 같은 점을 지적하며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해당 부분이 실제 북한 권력서열과 불일치할 수 있다는 문제제기를 한 적이 있고, 피고인도 그러한 주장에 대하여 수긍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 대하여는 이 법정에서 한 증인 유영구의 진술에 의하여도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장의위원 명단에는 조선노동당원이 아닌 김병식이나 유미영 등이 50위권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피고인이 과연 장의위원 명단 23번째에 올라 있는 김철수인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음은 물론(관련 부분에서 상술),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라고 하더라도 곧바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의위원 명단은 조선노동당 서열과 관계없는 의전적인 성격이 짙고, 김철수는 조선노동당 간부가 아니지만 장례식 의전을 위하여 명단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통일부의 사실조회 회신(2004. 1. 12.자)에 의하면 북한 당국이 장의위원 김철수를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통상 북한에서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호칭을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김철수는 한 번도 공식적으로 후보위원으로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검사가 제출한 증제23호증 긴일성 주석 장례식 조문 관련 비디오 테이프를 재생하여 보면 정치국 후보위원은 모두 공식적으로 '정치국 후보위원OOO' 하는 식으로 호칭되고 있음). 또한 김일성, 오진우 장례식때 이외에는 김철수라는 이름이 북한 언론에서 언급된 적조차 없습니다.   


3) 분석자료의 빈약함 : 피고인이 장의위원 명단을 분석 자료로 삼은 것은 당시 북한 권력구조에 대한 별다른 자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북한 권력층의 변화에 관한 내용은 특별한 자료가 없어 워싱턴에서 출간된 북한학 개설서(Area handbook North Korea, 1989)에서 인용한 것이고,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의 해당 부분은 위 개설서에서 인용한 도표의 분류체계에 맞춰 장의위원 명단을 분류, 정리한 것으로 위 개설서의 체계를 따른 이외에 정리를 위한 일관된 무슨 다른 원칙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는 피고인이 북한 권력 내부의 사정을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또 다른 반증입니다.    


4) 피고인은 김기남이 비서라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었고 비서 앞은 후보위원이라는 당연한 상식에 따라 비서 김기남 앞에 적혀 있는 김철수까지를 정치국위원으로 분류한 것입니다.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을 표시하는 부호 “2. k"로 표시된 것은 분석틀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재된 것일 뿐 피고인이 스스로 후보위원이라고 자백한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5) 피고인은 1994. 7.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대받아 장례식에 참석한 후 김철수의 장의위원 서열로 보아 자신이 후보위원급으로 대우받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주관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있지만, 당 기구와 절차를 통하여 어떠한 공식, 비공식 통보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북에서 실제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였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피고인이 후보위원급 대우를 받는다고 주관적으로 짐작하게 된 것 역시 피고인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6) 한편, 피고인은 위 책의 문제되는 부분에서 북한의 파워엘리트중 항일빨치산 출신, 외국 유학경험이 있는 사람, 외교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분석함으로써 북한 권력체제의 연속성과 변화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 부분의 서술에 있어서 노동당 고위 당직자들의 직책이나 김철수가 후보위원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는 독일 통일에 비추어 한반도 통일의 방향을 모색하면서 통일 문제를 바라보는 철학, 원칙 등을 서술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북한 내부의 권력구조에 대한 전문 연구서적이 아닐 뿐만아니라 피고인이 북한권력구조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 내용에 부정확한 부분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입니다.


7) 박순성의 지적 : 이 법정에서 감정증인으로 진술하였던 박순성이 제출한 증제10호증 “김철수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다라는 주장에 대하여”라는 글에서는 피고인의 분석 방법론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분석의 오류를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 정치국 후보위원과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되어야 하는데 1993. 12. 이후 당중앙위원회가 열리지 않고 있다.

○ 일차적으로 송두율의 분석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회와 정치국이 1993년 12월 이후 재구축되지 않았으며, 재구축을 위해서는 최소한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되어야 함을 무시하고 있다.

○ 6차 전당대회(1980. 12) 정치국 구성과 관련하여 후보위원 중 정경희와 최영림을 누락하고 있다.

○ 국가장의위원회(1994. 7. 9) 명단에서 윤기복(1980년 6차 당대회)과 박남기(1984년 9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 표기하지 않고 있다.

○ 송두율의 분석은 제한된 자료로 북한 조선로동당 권력구조의 연속성과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였다고 판단된다.”


8) 이상과 같은 점을 종합할 때, 피고인이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에서 장의위원 명단을 기초로 북한 권력 구조를 분석하면서 김철수를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표시한 것은 분석상 오류이며, 분석자료의 부족함 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있어, 위 책자의 해당 부분에서 피고인이 자신이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 증인 오길남의 진술


오길남의 진술은 대부분 피고인에 대한 어떠한 정확한 근거 자료도 없이 그 나름의 주관적인 추측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하는 점과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습니다. 

 

(바) 증인 최창동, 홍진표의 진술


이들은 피고인에 대한 수사과정이나 황장엽의 진술 등에 의존하여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바, 이들의 진술은 자신들의 직접적인 경험에 의하여 알게 된 것이 아니어서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인지 여부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사) 소  결


이상 검토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피고인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이 사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직접적인 증거가 되지 못하고, 이 모든 증거를 종합한다고 하더라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할 것입니다.


이하에서는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 F수 없다는 점을 몇 가지 쟁점으로 정리하여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3) 장의위원 김철수가 피고인과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 


(가) 김철수가 북한 내부 인물일 가능성


장의위원 김철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한국에서 발간된 인명정보를 보면, 장의위원 김철수를 북한 내부 인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울신문사, 1997, ꡔ북한인명사전 1998년 개정·증보판ꡕ(351쪽)(증제11-3호증)에서는 1945생, 인민군 상장, 강건 종합군관학교 교육국장, 총참모부 교육국 국장인 김철수를, 사단법인 북한연구소, 1996, ꡔ최신 북한인명사전ꡕ(269쪽)(증제11-1호증)에서는 1946년~50년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과 1기 졸업생 김철수를 장의위원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지금까지 장의위원 김철수가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위와 같은 자료로 보아 김일성 장례식 장의위원 김철수가 북한 내부 인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나) 피고인은 1994년 김일성 장례식 조문차 입북할 당시 재독이익대표부 직원인 송룡옥으로부터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장의위원에 선임되었다”는 말을 들은 이외에 장례식 과정에서 한 번도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호칭되거나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습니다. 피고인은 행사 내내 송두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어떠한 특별대우도 받지 않고 해외동포 조문단의 일원으로서 해외동포들과 함께 행사에 참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건대, 장의위원 김철수가 어느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조문온 해외동포들중 북한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의전차원에서 초청시 김철수라고 호칭하고 그 사실을 초청된 본인만 알고 있게 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 북한은 과거 송 교수뿐 아니고 수많은 사건에서 ‘김철수’라는 이름을 필요에 따라 사용하여 왔습니다.


    1) 주서독 한국대사관 영사증명서에 따르면 1989. 9. 7. 송치한 홍성담 사건과 관련하여 국정원은 위 영사증명서를 유죄의 증거로 제출했던 바 동 증명서에는 ‘김성수가 김철수’라고 확인되었고


    2) 국정원의 서경원 간첩사건 사건수사 발표문(증제24호증 36, 37쪽)에도 “서경원은 88. 8. 16. … 북한공작지도원 40대 이모 등을 접선하고 그들이 제공한 김철수 명의의 북한 공무여권을 이용하여 체코프라하 공항에 도착하여 … 평양으로 출발하였”다고 되어 있어 피고인과 유사한 방식으로 입북한 사례가 드러나고 있으며,


    3) 민족민주혁명당 간첩사건의 국정원 발표문에도(증제25호증 5쪽), “89. 7.초 한겨레사회연구소 연구원 '김철수‘로 위장한 남파간첩 윤택림(56세, 현 북한대외연락부 5과장)에게 포섭되어 노동당에 현지 입당”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라) 박순성은 국가장의위원회 속에 들어가 있는 김철수는 북한 지도부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만든 실체가 없는 가공의 인물이거나 북한 내부의 실제적 권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증제10호증, 11쪽)


(마) 소결


이러한 점을 종합하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가 아니거나 장의위원 김철수라고 하여도 북측의 필요에 의하여 장의위원으로 거명된 다수의 김철수가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현 단계에서 북한 내부의 인물정보를 남쪽에서 소상하게 알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검찰에서 제출한 여러 증거들만으로는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소시킬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4)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의 위상, 역할, 선출절차, 공개과정 등에 비추어 볼 때 김철수를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가)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의 위상, 역할, 선출절차, 정치국 후보위원 명단 공개 방법(2004. 1. 12.자 통일부 사실조회 회신)


1) 북한 통치구조에서 정치국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와 전원회의 사이에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는 기관으로 정위원 및 후보위원으로 구성되며(당규약 제25조), 통상 정치국에서 마련한 지침을 비서국에서 정책화하고 산하 당전문 부서와 하급당 조직을 통해 정책적으로 지도합니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위원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선거로 선출합니다(당규약 제24조).


2) 북한는 정치국 후보위원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제6차 당대회(‘80)이후 제6기 제1차 전원회의(’80. 10. 14.)에서 선출된 정치국 후보위원 15명의 명단을 노동신문(1980. 10. 15.)에 공개하였고, 이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2차-21차)에서 후보위원 선출, 해임사항을 노동신문에 게재하였습니다.


3) 1994년 1월 이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사실과 이에 따른 정치국 후보위원 변동사실을 노동신문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밝힌 바가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김일성 사후 ⌜선군정치⌟를 실시하면서 군부 등 이른바 “혁명의 수뇌부”가 북한 통치구조를 주도함으로써 정치국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합니다{증인 유영구의 진술, 증제10호증 박순성 작성의 글, 증제12-3호증 2000년 북한개요(통일부)}


4) 당중앙위원회는 1980. 10. 제6차 당대회에서 구성된 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하여 보충되었는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1993. 12. 8. 21차 전원회의이후 열리지 않고 있습니다. 정치국 정위원 및 후보위원은 1993. 12. 8. 당중앙위원회 21차 전원회의를 끝으로 승격, 선출, 소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사망으로 인한 결원을 보충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증제10호증 박순성 작성 글, 증 제11-2호증 북한총람(1998)}.  


(나) 1993년 12월 제6기 21차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된 이후 현재까지 당중앙위원회가 개최되지 않고 있으므로 김철수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는 주장은 불가능합니다.


1993년 12월 이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개최되지 않아 당 정치국 정위원, 후보위원이 재구축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연합뉴스는 2002 북한연감에서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추정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증제11-4호증).


(다)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임을 밝히고 있는 북한 내부의 공식, 비공식 자료는 없습니다.

피고인이 황장엽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에서의 국정원의 사실조회 답변자료(2001. 1.)나 통일부의 사실조회 통보(1999. 8. 30.자), 이 사건에서의 통일부에 대한 사실조회 회신(2004. 1.) 등에서 보듯이 관련 기관에서 파악하고 있는 바에 의하면, 김철수에 대하여는 장의위원으로 발표된 이외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볼 수 있는 자료가 없습니다. 검찰이 핵심 증거로 들고 있는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보고서에 조차도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라)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의 비밀후보위원이라는 검찰 주장의 문제점


1) 검찰 주장대로라면(주로 황장엽의 진술에 의존하고 있음) 피고인은 1991. 5.에서 1992년 초 사이에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것인데, 황장엽이 김용순으로부터 피고인의 후보위원 선임 사실을 들었다는 시점(1991. 5. -1992.초)과 김용순이 대남비서를 맡기 시작한 시점(1992. 10. 그 이전에는 윤기복이었음)이 불일치하여 실제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시기에 대하여는 특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검찰이 이처럼 피고인의 후보위원 선임 시기를 특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피고인이 비밀리에 후보위원으로 선임되고도 대남공작의 필요성때문에 그 이름이 공개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당중앙원원회 전원회의 후 정치국 후보위원의 선임, 해임을 노동신문을 통하여 공식적로 밝혀왔다는 점에서 북한이 김철수를 비밀리에 후보위원으로 임명하고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실제 북한에서의 후보위원 선임절차 및 선임 여부를 공개해온 방식과 부합하지 않습니다. 김철수는 단지 장의위원이었을 뿐 정치국 후보위원은 아닐 가능성이 아주 높은 것입니다.  


2) 검찰은 황장엽의 전문진술외에는 조선노동당 정치국에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한다는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장엽 진술만으로는 구체적인 선임 시기, 절차, 방법을 알 수 없습니다. 정보기관도 아닌 당의 공식기구에 가명을 쓰는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한다는 발상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제 아무리 북한이 1인 독재체제여서 김일성 부자 혹은 상무위원회에서 후보위원을 일방적으로 임명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선임 후에라도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식적인 인준 절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설령 김일성이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지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당중앙위원회의 공식적인 인준을 거치지 않았다면 노동당 “정식”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런 절차도 밟지 않고 명목상으로만 후보위원이라고 부르고 대우해준 것이라면 “간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어떠한 통보도 받은 바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이유도 결국은 조선노동당에서 정식으로 피고인을 후보위원으로 선임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명목상으로 어떠한 지위를 부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공식적인 지위와 선임근거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이러한 정체불명의 자를 조선노동당 간부라고 인정하여 단기 5년이상의 중형에 처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을 적용하여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규정은 변화된 한반도 정세, 그 법정형의 과중함 등을 감안할 때 엄격하고 제한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검찰은 피고인이 당중앙위원회에 참석하였는지, 당중앙위원회 몇 차 전원회의에서 인준되었는지 여부에 대하여 어떠한 자료도 제출하지 않고 있으면서 다만 황장엽의 전문진술에만 의존하여 피고인이 당의 공식적 기구의 선거를 거치지 않은 비밀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고만 하고 있습니다.


개념상 반국가단체인 조선노동당의 핵심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하려면 노동당 규약에 정해져 있는 선임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노동당 규약에 규정된 선임 절차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노동당 간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북한 사회가 특수하여 김일성이 일방적으로 임명하여 후보위원이 될 수 있다면 김일성의 지명에 의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임될 수 있다는 당규약 내지는 그 근거자료가 존재하여야 할 것입니다. 현행 노동당 당 규약으로 보건대, 정치국은 공식적인 기구로서 비밀리에 공개되지 않는 후보위원을 선임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조선노동당 정치국에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당규약이나 다른 구체적인 자료가 없는데도, 피고인이 당중앙위원회 선거를 거치지 않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의 “간부”의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4) 역대 정치국 위원중 당규약과 다른 절차에 의하여 선출된, 즉 김일성의 일방적인 지명으로 당규약에 정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선출된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김일성이 지명하여 정치국 위원이 된 예로 거론되는(증인 유영구의 진술, 유영구도 황장엽이 그렇다고 한다면 그럴 수 있다는 취지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조차도 1993. 12. 21차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이후 선임 사실이 공표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1999. 8. 30.자 통일부 사실조회 회신, 11쪽)


5) 1993. 12. 이후 김정일이 단독으로 또는 임의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한 경우는 현재까지 한 건도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증제10호증).


6) 황장엽은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된 후 임명을 위하여 김일성을 한 번 더 만났을 것이라고 하지만 황장엽 본인은 다시 만났는지 여부를 알지 못하고 있고, 검찰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입증도 하지 않았습니다.


7) 검찰이 공식적으로 공표된 자료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을 노동당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하려면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노동당 규약 등의 근거 및 어떠한 직책으로 언제 어떻게 선임되었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특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비밀후보위원이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검찰이 피고인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하려면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등 공식절차에 의하여 선출된 시기, 절차, 방법을 입증하여야 할 것입니다.


(마) 소  결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노동당의 규약, 정치국 후보위원의 선출방법, 공개방법 등에 비추어 볼 때 김철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라고 하더라도 피고인을 곧바로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5) 피고인과 북한 당국의 관계의 실질 및 관련된 피고인의 여러 행태.

 

피고인이 북한의 대남 공작조직을 주도적으로 총괄하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것은 피고인과 북한 당국간의 관계에서 피고인이 보인 행태를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가) 김철수라는 이름의 사용중단을 요구한 점.


피고인은 황장엽 망명 이전부터 가명을 사용하지 말 것을 북에 요청한 바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1996. 6. 22.자 김경필 대북보고문에도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피고인은 북측에서 제공한 약봉지에 김철수와 송두률을 혼용하고 있어 본명을 사용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1995. 8.과 1996. 3.에도 북측의 김관기 등에게 김철수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대남공작 책임자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비공개 활동을 하기 위하여 가명을 사용한 것이라면 피고인이 먼저 가명 사용을 중단할 것을 북측에 요구하였을 리가 없습니다. 가명은 북측에서 임의로 사용한 것일 뿐 피고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황장엽 망명시에 가명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한 것도 1995년부터 있었던 가명사용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 학술회의에 대한 북과의 입장 차이 및 갈등


피고인은 통일학술회의를 일관되게 지식인들간의 상호 이해증진이 민족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추진하였으나, 북에서는 정치적 목적이나 남북간 정세변화와 연관지어서 학술회의 개최여부를 바라보았습니다. 1997년 이후 피고인과 북측은 학술회의의 계속 여부를 놓고 상당한 실갱이를 하였으며, 북측을 설득하여 학술회의를 통한 남북해외학자간 교류의 장으로 나올 수 있도록 설득한 것은 피고인이었습니다. 피고인과 북한 당국은 학술회의의 의미, 개최여부 등을 놓고 상당한 시각 차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김경필이 작성하였다는 대북보고서에 어느 정도 나와 있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대남공작을 총괄하는 정치국 후보위원이었다고 한다면 북과 이와 같은 시각 차이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북에서 하기 싫어하는데 북한 당국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당 조직원인 후보위원이 이를 거부하고 지속적인 회의 개최 여부를 위해 북한 당국을 그렇게 설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피고인의 진술중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한다면 학술회의 하나 못하겠는가”하는 생각을 하였다는 부분은 하도 일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자 피고인이 생각해본 푸념으로, 피고인이 북으로부터 후보위원이라는 어떠한 통보나 언질을 받지도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검찰은 위 진술을 가지고 피고인이 1997년 이전까지는 자신을 후보위원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문을 제기하지만 이는 위와 같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피고인의 북한 비판


김경필의 보고서중에는 피고인이 김경필에게 북한의 학자들과 일군들이 남한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고 주관주의에 빠져있다고 비판하였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 부분 역시 피고인이 북한 당국에 대하여 독립적인 지위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면 위와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김경필이 이에 대하여 따끔하게 한 마디해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것을 김경필이 알고 있었다면 피고인에 대하여 이와 같은 언어로 묘사하지는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점으로 김경필의 인식내용을 추측건대, 김경필은 피고인을 통일전선대상으로 생각하였을 뿐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거나, 실제로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라) 주체사상에 무지한 정치국 후보위원?


황장엽은 자신이 피고인에게 주체사상 강의를 할 당시 “피고인이 주체사상에 대하여 거의 아무것도 몰랐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2003. 10. 7.자, 황장엽에 대한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이 법정에서의 황장엽의 증인 진술). 황장엽이 피고인에게 주체사상을 강의할 때는 황장엽의 진술대로라면 이미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되었어야 하는 때입니다. 주체사상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피고인이 과연 대남공작을 총괄하거나 남한 인텔리를 포섭하는 정치국 후보위원이 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마) ‘미치광이’?


황장엽은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라는 책자와 명예훼손 사건 법정에서의 진술을 통해, 북한의 통일전선부장 김용순이 자신에게 “송두율은 주겠다는 것인지 달라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미치광이여서 상대하기가 어렵소. 황비서께서 영향을 주어 그의 머리를 고쳐주시오”라고 이야기하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당의 최고기관인 정치국 후보위원에게 서열이 아래인 비서가 ‘미치광이’, ‘머리를 뜯어 고치다’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 발언 자체가 이미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 한낱 통일전선대상에 불과함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 미국 이주계획


피고인은 1997년 무렵 여러 가지 이유로 처가 식구들이 거주하고 있는 미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만약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면 미국으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을 리가 만무합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피고인에게는 북에서 자신을 상당하게 대우해준다고 생각한 적은 있으나 조선노동당의 핵심 간부라는 정체성을 가진 적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그야말로 ‘경계인’으로서 어느 한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생활의 근거지를 찾아 많은 노력을 하였던 것입니다. 피고인이 가진 내적 갈등의 일면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독일에서 은퇴하고 스페인에 가서 살려고 하는 계획도 있었다’는 피고인의 진술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주하는 문제는 생활의 근거지를 바꾸는 중차대한 문제로서 보통 사람이라면 이러한 문제에 닥치면 그 이전에 최소한 몇 년은 고민하였을 것입니다. 이처럼 정착할 곳을 찾으며 고민하는 사람이 가장 원칙에 철저하고 흔들림이 없어야할 대남혁명 사업과 관련이 있는 조선노동당 상층 간부라고 할 수 있겠는지 의문입니다.      


(사) 한시라도 한국에 돌아오고 싶어한 점.

1991년에 북한을 방문하게 된 경위도 서울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오는 계획이 안기부의 반대로 무산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1996년에 아버지가 위독할 때에도 한국에 들어오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000년에도 늦봄 통일상 수상을 위하여 귀국하려고 하였으나 무산되었습니다. 피고인의 마음속의 조국은 일단은 우리 민족 전체이지만 남과 북중에 선택하라고 한다면 피고인의 정체성의 근거는 남한입니다. 피고인은 늘 고향에 돌아와 학문활동을 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고 민족과 사회에 기여하며 여생을 살고 싶어하였습니다. 피고인이 늘 고향을 그리워하며 기회만 되면 귀국하고 싶어하였다는 점도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주장과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6) 기타 피고인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기 어려운 정황들.


(가) 외국인이 조선노동당 핵심간부가 될 수 있는가.


황장엽은 명예훼손 사건의 본인신문에서 외국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민사소송 본인신문조서 16쪽).


피고인은 남쪽 출신의 학자로서 1993년에는 이미 독일 국적을 취득하였는바, 만약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면 최소한 독일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자녀 병역 문제로 인하여 국적을 변경하였는바, 자녀 병역문제로 국적을 변경할 정도의 평범한 사람이 당의 핵심간부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나) 가명을 사용한 정치국 후보위원이 없는 점


황장엽은 정치국 후보위원중 가명을 사용한 사람이 없다고 하고 있고, 대남사업을 하는 사람은 가명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밝혔습니다(민사소송 본인신문). 대남사업을 총괄한 이선실은 1980년 이후 줄곧 실명으로 후보위원 명단으로 공개되어 왔습니다.


(다) 김일성을 단독면담하였다는 사실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근거로 들수 있는가?


황장엽은 “후보위원이 아니면 김일성을 단독면담하고 면담후 수일동안 송두율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과 방송에 보되되겠습니까”라고 하고 있지만(검찰 진술조서), 민사소송에서의 국정원 사실조회(2001. 1.) 3.항에 의하면 1988. 1. 1. 이후 1994. 7. 8.까지 김일성을 직접 면담한 해외동포 등은 약 30여명이나 됩니다(증제23호증). 이들 중에는 여러 번 김일성을 단독 면담한 사람도 있습니다. 김일성을 단독면담하였다는 것을 후보위원 선임의 근거로 들 정도이니 황장엽 진술의 근거가 얼마나 빈약한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7) 소 결 : 통일전선대상으로서의 피고인.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노동당 권력구조의 성격, 정치국 후보위원의 선임과정, 피고인이 북한당국과의 관계에서 보여온 태도 등으로 보아 도저히 피고인을 조선노동당 핵심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피고인은 민주화운동을 한 해외동포 인사로서 북한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관리한 통일전선대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피고인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표현인 것입니다.


통일전선이란 “정면 공격이 가능하지 않을 경우 상대편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이용하고 동맹 가능한 부동층과도 타협하거나 협조하는 것을 의미하며… 공산당이 일정한 혁명단계에서 주적을 타도하는데 공산당 세력만으로는 불가능할 때 필요한 동조세력을 획득하고자 그들과 잠정적인 동맹체를 형성하여 투쟁하는 기법”을 말합니다. “북한이 이 전술을 적용함에 있어서 강조하는 원칙으로서는 하층 통일전선을 기본으로 삼아 상층 통일전선을 유기적으로 결합할 것”이 제시되고 있습니다(증제26호증 육군사관학교 북한학 385쪽).

따라서 통일전선 대상이란 공산당 자신이 아닌 상대편 또는 그 중간에서 부유하는 부동층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는 결국 피고인이 통일전선의 주체로서의 북한의 핵심권력기구인 정치국 후보위원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북한의 통일전선의 대상 즉, 혁명의 대상인 상대편 또는 부동층의 위치임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이 사건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듯한 증거들은 증거능력이 없거나 믿을 수 없어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기에 불충분합니다. 오히려 이 사건 공소사실에 대하여는 그 사실 여부에 대하여 의심을 가질만한 합리적인 사유들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이러한 의심들을 배제할만큼 충분한 입증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부분의 공소사실은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마. 피고인의 1991년 5월(검찰 주장 후보위원 선임 일시) 이전 행적과 후보위  원 선임의 관련성 여부 


검찰은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을 통한 주체사상 확산과 북한체제의 유지, 강화 및 유럽에서의 친북활동을 인정받아 김일성 주석 단독 면담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의 유럽에서의 활동은 유신체제 및 군부독재치하에서의 국내 민주화에 기여한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이지 친북활동이 아닙니다. 이러한 피고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여 민주화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정식으로 인정하고 보상하여도 부족한 판에 친북활동으로 매도하는 것은 피고인의 인생 역정에 대한 모욕이며 메카시적 색깔몰이에 다름 아닙니다.


피고인이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 주체사상 확산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5월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점에 대하여는 1991년 이전에 피고인의 학문적 입장이 어떻게 주체사상 확산에 기여하였다는 것인지 인과관계도 입증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나 1988년 <월간 사회와 사상>에 기고한 “내재적 방법론”을 소개한 글은 개론적이고 매우 아카데믹한 글이어서 북한 연구학계에 학문적 영향을 준 것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 운동권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91년 이전의 현실 운동권의 흐름과 피고인의 기고문을 연결시켜 후보위원 선임의 이유로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이러한 검찰의 견해는 결과론적인 끼워맞추기이며 사후 약방문격의 억지주장입니다. 


(1) 피고인의 유학 및 학문적 성과


피고인은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자마자 독일 하이델베르그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1972년 28세의 젊은 나이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곧이어 뮌스터 대학의 조교수를 거쳐 1982년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독일의 정교수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뮌스터 대학의 사회학과 정교수 자격을 취득한 후, 1994년 훔볼트 대학 한국학 교수, 1998년부터 지금까지 뮌스터 대학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피고인은 오랜 외국생활과 학문활동의 필요에 따라 1993년 8월 독일국적을 취득하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취득한 정교수의 자격은 철학 및 사회학 분야에서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서 나아가 박사학위 신청자의 논문을 심사하고, 학위의 수여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다는 의미이며, 이는 학자로써 취득할 수 있는 절정의 수준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1960년대에 대학과정을 거친 철학도입니다. 피고인은 당시의 국내 철학적·학문적 수준이 낮고, 연구할 정보와 자료가 부족하므로 국내에서 계속 연구활동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1967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해외유학을 결행하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독일 프랑크프르트 대학의 세계적인 석학인 하버마스 교수의 밑에서 철학을 주전공으로, 사회학과 한국학을 부전공으로 학문활동을 하였습니다. 하버마스 교수는 1968년 당시 전 세계에 보수주의와 냉전체제의 벽이 허물어지고, 화해와 공존의 운동이 일어나던 시기에 정신적·이론적 지주로서 역할을 한 세계적인 학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버마스로부터 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피고인은 여러 대학과 연구기관으로부터 초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피고인은 뮌스터 대학을 선택하여 30여년 동안 사회철학, 사회학, 문학을 연구·강의하였고, 그 후 후진국 사회학, 비교철학 부분으로 학문의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1968년은 냉전체제의 종말로 인한 엄청난 변화와 새로운 시도가 들불처럼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특히 학문적인 차원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은 철학적·사회과학적 연구의 가장 중심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유럽학계에서는 냉전종식이 정치·경제·사회적 궁핍과 차별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였고, 이후 어떤 유형의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그런 가운데 사회주의는 주요한 모델 중 하나로 인식된 것입니다. 그 결과 학계에서는 소련을 이상적인 모델로 파악하는 견해와 이를 반대하여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이나 알바니아, 북한, 쿠바 등을 대안적인 모델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나타났고, 이러한 경향은 일정한 학파를 형성하면서 치열한  논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 가운데 피고인은 ‘헤겔, 맑스, 막스 베버에서 동양세계의 의미’라는 제목의 유물론과 사회주의 철학을 동양세계에 비교 접목시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피고인의 학문영역 중에서 ‘사회주의 비교사’는 주된 연구 영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피고인은 1975년부터 경험적 데이터를 수집하여 왔으며, 사회주의 비교사 분야를 더욱 발전시킨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비교연구’라는 글을 발표하여 1981년 뮌스터 대학으로부터 교수자격을 부여받는 논문으로 인정받기도 하였습니다.


(2) 방북 및 노동당 가입 경위


피고인이 독일로 유학을 떠나던 1970년대 초반에 한반도의 사정은 지금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현재와 달리 경제적으로도 북한은 남한을 능가할 정도의 수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피고인 역시 북한 사회에 대해 깊은 학문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의 1973년 방북은 이러한 학문적 관심에서 출발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방북 당시 피고인은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된 후였으며 학문적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북한에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때 당시 피고인의 관심은 사회주의 가치론, 상품생산에 대한 비교연구였으며, 1970년대에 미국에 간 것도 비교 사회주의 연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남북 분단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관심에 따라 과감하게 북에 들어가 노동당에까지 가입한 것만 보더라도 피고인이 반공이데올로기의 영행을 받지 않고 당시부터 남북문제에 대하여 아주 자유롭게 생각한 용기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80년대의 방북은 사회주의 세계의 양대 중심국인 중국과 소련의 체제를 비교 연구한 논문으로 교수자격시험 통과한 후 북한에 대하여 추가로 비교 연구를 하기 위한 목적에서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의 방북을 사회주의에 대한 학문적 연구와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은 피고인의 방북 경위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노동당 가입은 1970년대 초반 북한이 유럽 유학생들에게 호의적이었고 방북을 하면 통과의례처럼 노동당에 가입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학문적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노동당에 가입하였던 것이며 노동당원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황장엽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 유럽 유학생의 노동당 가입은 그리 특별한 공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 조선노동당 규약과 오길남의 진술에 따르면 정식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가입신청서를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일정한 교육을 받고, 당원후보로서 상당기간이 경과하여야만 하는바, 피고인과 같이 단순 방문하는 사람들의 경우는 이러한 절차를 생략하고, 형식적인 통관절차례로서 입당신청서만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은 노동당 입당신청서를 작성한 이래 지금까지 스스로를 노동당 당원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으며, 당원으로 활동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은 이번에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을 때까지 자신이 노동당 당원이었음을 밝혀 본 적도 없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귀국후 문제가 되자 2003. 10. 노동당 탈당을 정식으로 밝혔습니다. 이 또한 피고인에게 노동당 가입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따르더라도 피고인이 당원으로서 역할하였음을 입증할 만한 사항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3) 민주사회건설협의회 결성


민주사회건설협의회(이하 ‘민건’이라 함)는 박정희 군사독재체재를 정착시키려는 유신체제에 반대하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독일에서 활동할 목적으로 1974. 3. 1.만든 단체입니다.


피고인의 대학 3년 선배인 이삼열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민건은 한국의 군사독재를 경험하다가 독일에 온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는데, 1973년 유신헌법이 제정되고, 유신헌법을 비판하기만 해도 징역15년의 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되어있는 긴급조치 제1호가 발령되고, 실재 장준하, 백기완 선생 등이 긴급조치위반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사실이 유럽에 알려지면서, 한국의 독재체제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위한 제반 지원활동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민건이 창립당시 단체의 설립취지로 첫째 독재철폐, 둘째 자유민주주의 질서 회복, 셋째 자립경제 확립, 넷째 생존권 보장과 실질적 복지향상, 다섯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내세우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민건은 순수한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지원활동을 하는 단체였지 결코 친북단체는 아니었습니다(위 이삼열이 법정에서 제출한 민건의 창립선언서와 규약은 국가기관인 국립 국사편찬위원회에 역사적 사료로서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민건은 한국민주화 지원사업으로 당시 유럽인에게는 낯선 한국을 소개하고, 동시에 한국의 반인권적인 상황을 고발하는 등 신문발행활동과 김지하의 시집과 같은 한국서적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주로 하였으며, 독일법에 의한 정식 사단법인으로 매년 독일법원에 재정보고와 회의록을 제출하면서 활동한 합법적인 단체였습니다.


민건은 당시 독일에서 ‘주체’라는 친북잡지를 발간하던 정철제, 오석근에 대해 친북성향이 강하다는 이유로 회원가입을 거부하였고, 초기에 민건을 함께 만든 일부 노동위원회 사람들은 민건이 친북을 하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이란 이유로 탈퇴는 등 민건활동 경위에 비춰 도저히 친북단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민건은 엄혹한 유신과 군사독재 시절에 국내의 민주화운동 세력을 격려, 지원하고 국제적 지원을 이끌어내는 등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민건 회원들은 현재 우리나라 학계와 사회의 지도적 인사로 활동하면서 우리 사회가 민주적으로 발전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민건을 통한 민주화운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4) 재외한국인연합(한민련) 결성


한민련은 1977. 8. 11. 일본 동경의 한 호텔에서 일본의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의 주도로 윤이상 등 해외원로 10여명이 참석하여 결성되었습니다. 당시 피고인은 나이도 어리고 학문활동 이외의 활동에 소극적이었으므로 한민련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한민련은 남한의 반민주적 군사독재체제를 반대하고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주화를 모색하는 해외단체들의 연대를 위해 만든 것이며, 결코 친북활동을 목적으로 하거나 직접 친북활동을 하는 등 북한 편향적인 단체가 아닙니다. 게다가 한민련은 1977년에 결성된 이후 제대로 활동을 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자연도태 되었으므로 특별히 친북활동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5) 한국학술연구원 설립, 운영


한국학술연구원은 윤이상 선생의 제안에 따라 김길순이 원장을 맡아 프랑크푸르트 근교 오펜바흐에서 1982. 2. 설립된 것입니다. 그 설립취지는 당시 중국·일본과 달리 경시되었던 한국을 유럽인에게 소개하고, 한국의 민주화와 발전을 위해 해외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추구하는 순수학술연구단체입니다.


위 학술연구원은 주로 한국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김길순의 사망으로 위 연구원을 피고인이 관리하게 된 1992년경에는 수집한 서적과 자료가 15,0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 되었고, 독일법에 의한 비영리공익재단이므로, 세금감면 해택까지 받으며 운영되었던 것입니다. 위 자료 15,000여권은 대부분 한국어, 영어, 일어, 독일어, 중국어로 된 한국사회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것이고, 그 중 북한에 관한 자료는 비율적으로 남한에 관한 자려의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증인 양정옥의 법정 진술 및 증제 호증 독일 아시아 재단 코레아 협의회 총무 최현덕 박사의 도서현황 사실확인서 참조).


피고인은 위 학술연구원의 초기에 연구이사라는 직책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한국의 발전모델을 연구하는데 주력했을 뿐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학술연구원이 존속하는 동안 단 2회 한국의 발전모델에 대한 강의를 했을 뿐 입니다. 그런데 연구원 운영을 맡은 김길순이 중병에 걸리자 연구원은 1987년에 사실상 문을 닫았고, 1991년 김길순이 사망하자 연구원의 자료수집활동은 거의 중단되어 중요한 자료들이 사장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은 위 자료들을 아깝게 여겨 1992년말부터 자료들을 베를린으로 옮겨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연구원의 운영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연구원 운영자금을 북한으로부터 지원받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처음에는 미국 유럽 등지의 지인들로부터 모금하였습니다. 그러나 모금실적이 저조하여 연구원을 폐쇄할 지경에 이르자 그동안 수집한 자료의 소중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북한측에 자금지원 요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에서 받은 지원자금은 1992년에서 1994년까지 연간 2만불(원화로 월200만원) 정도였고, 이 정도 되는 금액으로 ⅓은 연구원 운영비로, 나머지 ⅔는 새로운 자료를 수집하는 데 사용하였으며, 연구원을 운영·관리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으로 피고인이 더 이상 연구원을 혼자 운영하기 어려웠고, 게다가 1994년 7월에 훔볼트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어 결국 1994년말 에센시 소재 아시아재단 한국문제연구소에 모든 자료와 서적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자료들은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중요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으며, 한국 유학생들 뿐만 아니라 유럽의 학자들도 활발하게 이용하는 중요한 한국관련 정보가 되었습니다.


(6) 오길남 입북권유


피고인은 1970년대 초 독일의 민건 활동을 하면서 오길남을 알게 되었으나 거주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다지 친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오길남은 경제학 전공자로 독일에서 1984년 ‘맑스 수리경제학’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였으나 독일은 물론 한국에서도 대학에 취직하기가 어려워지자 1985년 북한으로 입북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증인 오길남은 이 법정 진술에서 입북에 대한 결심을 1985년 8월경에 하였다고 진술하면서, 그 당시 킬의 해안가에서 피고인을 만났으나 ‘내 귀국문제에 대해서 무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피고인)는 딱 부러지게 조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집에 가서 우리는 얘기를 나누고 술을 마시고 독재를 욕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렇다 할 얘기는 없었다. 피고인은 이튿날 떠났다.’ 라고 진술하여 입북을 결심한 시기에 피고인으로부터 입북을 권유받은 적이 없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 다음 오길남은 한국의 대학교에 취직하는 것을 포기하고, 1985년 8월말 베를린으로 가서 자신의 학위논문 출판비용 1,500마르크를 빌렸던 김종한을 만났고, 그 때 한국대학교에서의 취직이 좌절되었음을 토로하는 가운데 김종한으로부터 ‘오형 북쪽에서 온 사람 한번 만나보지. 무슨 구멍이 뚫릴지도 모르니까’라는 말을 들은 후 이를 받아들여 베를린의 공원 숲 속에서 북한 대사관의 백서기관과 김참사를 만나 구체적인 입북권유를 받게 되었다고 법정진술 하였습니다.


그 후 오길남은 이 법정진술에서 1985년 10월 중순 김종한과 전화연락을 한 뒤 북경에서 북한대사관의 백서기관을 만나 그로부터 ‘북조선에 언제 들어올거요?’라는 질문을 받고, 스스로 ‘12월 초가 좋겠다’라고 말했으며, 그후 1985년 12월 29일에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길남이 안기부에서 작성한 1992년 5월 24일자 자술서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것입니다. 위 자술서에서도 오길남은 위 김종한으로부터 입북을 권유받은 것으로 씌여졌으며, 피고인으로부터 권유를 받았다는 진술은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는 증인 양정옥과 오길남의 법정진술에서도 확인되는 것인 바, 오길남은 1986년 다시 독일로 탈북한 직후인 1987년 초 평소 친하게 지내던 박대원의 집으로 찾아와 양정옥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고, 그 자리에서 오길남은 가족들을 북한에 두고 혼자 탈출한 것 때문에 심한 죄책감에 시달렸다며, 북한에서의 생활과 탈북과정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오길남은 위 박대원, 양정옥 앞에서 ‘남쪽으로 가서 자리잡고 살기가 참 힘든 상황인 것 같고, 부인도 아프고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북쪽으로 가려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며 입북결심을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재독 교포인 김종한을 통해 소개받은 북한측 공작원을 베를린 소재 공원 숲속에서 은밀히 만나 입북하게 되었다며 입북과정을 아주 상세히 말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길남은 피고인이 자신의 입북을 권유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은 없으며, 자신이 당시 어려운 사정을 김종한에게 털어 놓으니 김종한이 입북을 권유하였다고 진술하였습니다.


이 법정에서 증인신문을 통해 오길남이 피고인을 북한 공작조직의 거물급인사라고 주장한 부분이나 입북을 권유하였다는 부분이 모두 사실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7) 재유럽민주한인협의회(유럽민협) 결성


유럽민협은 1987. 9. 26. 정규명, 이종현, 어수갑 등이 한국의 6월 민주화운동에 고무되어 만든 재유럽 한국민주화를 위한 지원단체입니다. 유럽민협은 한국의 6월 민주화 운동의 성과를 해외에 알리고, 한국에서의 진정한 민주주의 정착을 위해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는 신문, 잡지를 발행하는 등 활동을 하였으며, 그 활동 중에 북한을 찬양하거나 친북적인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시는 피고인이 한국에서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대통령선거과정에서 민주단체들이 분열되고 사분오열되는 것을 보면서 민주화운동단체활동의 한계를 절감하던 때였습니다. 그리하여 피고인은 유럽민협의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은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고, 위 단체의 관계자들과 교류도 거의 없이 지냈습니다. 다만 단체 관계자의 요구로 단체의 기관지 ‘민주조국’에 한 두차례 글을 기고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민주조국의 편집장은 어수갑이란 사람이 맡았으며, 공소사실에서 피고인이 맡았다고 주장하는 편집고문이란 직책은 실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8) ‘평화로운 경기에 부적합한 나라, 남한’(이른바 ‘4인 공저’)


이 책자는 1987년 말경. 독일 아시아재단의 한국연구소 소장인 라이너 베르닝 박사가 제안하여 미하일 데니스, 에스터 디쉬라이트, 피고인 4인이 참여하여 만든 한국관련 보고서인데, 책자의 기획·제목결정과 내용 그 모두를 베르닝 박사와 당시 독일 최대 출판사였던 로볼트 출판사가 정한 것입니다.


위 책자는 1987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뉴스로 된 한국의 6월 민주화 운동이 계기가 되어 한국알기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벌어졌고, 그 캠페인의 일환으로 제작된 것이지 한국에서의 올림픽을 반대하는 내용이나 목적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한국의 올림픽 개최를 환영하면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노력으로 발간된 것입니다.


위 책자는 총 250쪽인데, 이 중 피고인은 두 편의 논문(분량 21쪽)만을 기고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한국사회의 변화상황을 산업과 농업부분 중심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소사실과 같이 한국의 88올림픽개최를 반대한다는 등의 내용은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위 책 출판과 함께 피고인이 행한 강연 역시 독일의 재계와 체육계 인사들의 요청에 따라 1987년 민주화운동을 전후한 한국상황에 대한 내용이었으며, 한국에서의 올림픽을 반대하는 강연을 한 적은 없습니다.


결국 검찰은 위 책자를 전혀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위 책자는 독일어로 되어있고, 한글로 번역된 것이 없습니다)에서 제목만 보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피고인이 작성한 부분에 대한 검찰제출 번역물의 조잡한 번역수준에서도 확인되는 바입니다.


검찰제출 번역문은 위 글의 제목부터 ‘희망이 없는 땅-농촌’이라고 오역을 하였으나, 실은 ‘희망없는 농촌 - 농민’이라고 번역하여야 합니다. 언뜻 별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그 뉘앙스의 차이는 크다고 하겠습니다. 검찰 제출 번역물의 번역과 교정된 번역을 좀 더 자세히 비교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검찰 번역문 --> 교정된 번역’으로 비교표시 함)


‘도시화의 결정적 요인은 60년대초부터 수출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의 산업화 속에서 농촌인구의 재빠른 공상(자만)(-->편입)이었다.’


‘평균 소작료 수준은 젖은 평야(--> 농지)에서는 연소득의 43%, 매마른 평야(--> 전답)에는 18.6%이었다.’


‘홍영표 농부는 악마와 같은 굴레(--> 이러한 악순환)를 이렇게 말했다’


‘남한정부가 총7천7백만(-->77억) 달러를 들여 농업증명서(-->농산물)도입(-->수입)했는데’


‘새마을운동의 회장인 전경환은 전두환 대통령의 이전 경호원이자 친동생이었는데 양 당간의 중재에 있어서(-->한·미 정부간의 중개상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은 오역은 피고인의 논문의 의미를 완전히 다르게 왜곡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게다가 검찰측 제출번역물을 보더라도 피고인의 글에는 88올림픽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습니다.


(9) 1988년 12월 <월간 사회와 사상> 기고문


검찰은 피고인이 1088년 12월 국내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기고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제목으로 내재적 방법론을 주창함으로써 ‘북한바로알기’라는 명목으로 주체사상과 북한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위 글은 피고인의 1970년대 이래 학문적 성과를 요약한 학술논문입니다. 이를 가지고 남한 주사파 운동권에 영향을 주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색깔몰이에 다름아니며 사실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학문의 영역에 해당하는 것을 국가보안법의 논리로 재단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학문,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검찰은 피고인이 1988년 사회와 사상이란 잡지에 북한에 대한 글을 실으면서 국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고 하나 이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피고인이 국내에 알려져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사회주의권이 몰락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우왕좌왕하는 진보세력에 대하여 현실에 입각하여 균형잡힌 시각으로 세계사적인 변화의 물결에 대응할 것을 조언하는 내용의 글을 보내오면서부터입니다.


1988년만 해도 피고인은 다수의 해외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일부 학자들 외에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고 현실 운동권과 별다른 관계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의 피고인의 지적인 영향력도 ‘친북적 글쓰기’가 아닌 ‘친북적 사고’나 기존의 ‘맑스-레닌주의’로부터 거리를 두고 성찰적 글쓰기를 한다는 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지식인 사회를 넘어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대표적인 해외학자로 대우받게 된 것은 한겨레신문사 등에서 피고인의 책을 출판하여 대중적으로 판매되던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부터입니다.  


1988년 당시 <사회와 사상>은 기본적으로 지식인 잡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고, 주된 독자층도 학계의 교수와 연구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부 지적인 욕구가 강한 자들 외에 현실 운동권의 핵심에 있는 자들이 <사회와 사상>을 탐독하였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주사파 운동권이 <사회와 사상>에 기고된 피고인을 비롯한 학자들의 학술적인 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취지의 주장은 실제 현실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당시에는 <사회와 사상>과 같은 지식인 위주 잡지 외에 주체사상 총서나 민족해방노선에 입각하여 쓰여진 보다 친북적이고, ‘적나라한 글’들이 책이나 논문으로 무수히 발행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와 사상>은 판매가 급감하여 1991년 출판이 중단되고 이후 <월간 사회평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월간 사회평론>에 이르기까지 잡지의 발간 주체는 거의 대부분 교수들이었습니다. <사회와 사상>은 이처럼 기본적으로 지식인 세계에 기반을 두었던 잡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와 사상>을 직접적으로 운동권과 연결되어 있는 잡지 혹은 실천 운동권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크게 갖고 있는 잡지라고 보는 것은 실제 사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월간<사회와 사상> 편집기획주간이었던 조희연 교수의 진술서).      

오히려 <사회와 사상>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북한 바로알기’등의 현상을 설명하고, 편향적 시각을 경계하면서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기 위하여 전문가와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하여 게재하였던 것입니다. <사회와 사상>이, 특히나 당시에 국내 독자들에게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도 않았던 피고인의 글이 ‘북한바로알기 운동’ 및 1989년 이후의 방북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자 지나친 인과관계의 확장입니다.


마치 북한바로알기 운동이나 방북운동이 피고인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증인 홍진표의 법정 진술은 이와 같은 1988년 당시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는 것입니다. 증인 홍진표는 주사파 운동권에서 북한 민주화운동가로 변신한 자신의 편력을 정당화하다보니 피고인에 대하여 전혀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 주관적인 평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북한바로알기운동이나 통일운동은 어떠한 특정 운동권이 주도하여 발생, 전개되어 나간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운동은 해방 이후 우리 민족과 사회에 내재된 모순이 1987년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분출, 해결점을 찾아가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현실적 기반이 없었다면 일부 운동권이 아무리 주장을 하더라도 사회 구성원들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1987년 이후 시작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성과가 작금의 남북관계에까지 이어져 내려와 남북화해와 평화적 통일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가 된 성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피고인의 <사회와 사상> 기고문은 이러한 시대상황하에서 비교사회주의를 연구한 학자로서 북한 연구 방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며, 주체사상이나 북한체제를 옹호하기 위하여 저술된 것이 아닙니다.


(10) 소 결


이와 같이 피고인의 1991년 이전 유럽에서의 행적은 개인적인 학문활동 내지 해외 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평가될망정 친북활동으로 치부될 수는 없고, 피고인의 1988년 <사회와 사상> 기고문은 학술적인 글로써 주체사상 확산에 기여하였다는 주장은 당시 현실상황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1991년 이전의 피고인의 국내에서의 영향력은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위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른 무리한 주장입니다.

바. 피고인의 저술활동이 조선노동당 간부로서의 주도적 임무인가?


(1) 피고인의 저술활동에 대한 시각

   

검사는 피고인이 1988. 12. 국내 월간지 <사회와 사상>에 기고한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글에서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하여, 국내․외 친북세력들 사이에 ‘북한 바로알기’라는 미명 하에 주체사상 학습 분위기가 급격히 확산되도록 하는 등 각종 저작을 남한 내에서 출간하여 주체사상과 북한 체제를 찬양하고, 남한 사회를 비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검사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없는 비방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결코 북한을 편파적으로 옹호하고, 남한을 비난하는 식의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주체사상이나 북한 체제의 현실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왜곡된 시각을 바르게 하고, 근거없는 편향된 북한관을 교정하여 남북이 서로 화해하고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기초를 만드는 노력을 하였을 뿐입니다. 피고인은 결코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이나, 남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를 설파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 대한 몰이해의 배격, 남한 내에서 횡행하는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무정견을 비판하고, 그 비판을 통한 정상적 견해의 확립, 그러한 견해에 기초한 남북 상호 이해의 도모 등을 바랐던 것이고 그러한 남북화해․단합의 염원에 기초하여 활동하였을 뿐입니다. 특히 남한 체제의 전복이나, 무질서의 선동, 합법 정부에 대한 전복 활동을 지지하거나 유포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행정부 등 국가기관이 국민의 요구를 배반하여 독재적인 통치를 하는 경우, 이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거나, 국가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너진 민주질서와 국헌을 바로 일으켜 세우는, 국가의 주인으로서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이 북한 사회의 올바른 이해에 대해 그토록 강조하였던 것은 독재정권과 일부 수구냉전세력이 북한에 대한 오해를 조장한 뒤 ‘국가안보와 사회안정’이란 그럴듯한 논리로 국민을 기만하면서 자신들의 독재와 부패정치를 옹호하고, 비판세력을 좌경․용공세력으로 비난하며 탄압하는 데 악용하는 현상을 시정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피고인은 누가 북한에 대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데 있어 정당한 인식론과 방법론적 정합성을 가지고 있느냐를 문제시한 것이고, 북한에 대한 확인되지 않거나 왜곡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비방과 모략 수준의 입장이 마치 정상적 입장인 것처럼 유포되고, 그러한 왜곡된 입장을 기초로 하여 남북 어느 쪽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민족자해적인 태도가 횡행하는 것을 비판하고자 한 것일 뿐입니다. 피고인은 독재 정권의 실정과 폭압을 비판하고, 역대 독재정권의 반민주적 정책, 분단고착적 정책, 예속적 정책 등에 따른 각종 폐해를 지적하고, 국민들의 생존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노력했을 뿐인데, 그것을 반국가적 활동으로 몰아치는 검사와 수구냉전세력들의 비난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은 헌법질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쿠데타에 의해 집권한 군부독재정권으로서 재야, 학생운동, 민주노조운동 등 민주화 운동세력과 광범한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혀 몰락하였고, 심지어 전․노 일당은 재판에 붙여져 결국 내란, 군사반란, 내란목적살인 등의 죄과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사실이 있는데, 이들이 민주․통일운동세력과 민주와 자유, 생존권을 요구하는 국민들에 대해 하던 공격과 똑같은 형태와 내용의 공격을 피고인에게 그대로 자행하는 검사와 수구냉전세력들의 태도는 용인되어서는 안 됩니다. 검사의 논리를 따르면, 남한은 언제까지나 북한과는 교섭도, 접촉도, 화해도 하지 말아야 하며, 언제까지나 대결과 전쟁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는 특히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이후에는 국민들 중 수구냉전세력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논리에 불과하게 되었고, 허구적 선전에 불과한 것으로 냉엄한 국민적 심판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검사는 왜 국민 대다수의 합리적 입장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아무런 정당성 없는 수구냉전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검찰은 더 이상 수구냉전세력의 대변인 역할을 그만두고, 이제는 국민들 절대다수의 논리와 지향으로 정착된 민주화와 민족자주, 민족화해와 통일의 논리를 자기 활동의 논리와 이념으로, 정책적 지침으로 받아들이고, 국민의 참다운 공복으로서 제 위치를 찾아야 하며, 비참한 종막을 앞두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수구냉전세력이 이제나 저제나 매달려온 최후의 지탱점인 국가보안법의 폐지에 앞장섬으로써 그야말로 제 역할을 하는 검찰, 시대 조류와 호흡하는 검찰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2) 내재적 방법론에 관하여


(가) 내재적 방법론의 정의


내재적 방법론은 어떤 사회를 연구할 때 그 사회의 실증적인 또는 경험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그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서 흔히 제도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그 사회의 작동원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론 내지는 연구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회든지 그 사회 나름대로의 질서와 제도가 있고 그 사회 나름대로의 가치체계가 있기 때문에 그러한 가치체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사회과학자가 다른 사회를 연구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선험적 질서나 제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해서 다른 사회를 이해할 때 발생하기 쉬운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 내재적 방법론이 제기된 배경


내재적 방법론이 제기된 배경은 첫째, 동유럽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했을 때 서구사회에 있던 많은 사회주의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던 이론으로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를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 때문에 많은 당혹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기존 사회주의 연구방법론의 한계를 뼈저리게 절감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찾게 되고 내재적 방법론의 우월성을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이론적으로도 북한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방법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존의 북한사회에 대한 연구가 대체적으로 서구사회를 연구하는 기준에 의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그 결과 북한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러한 부족한 이해에 근거한 북한사회의 변화에 대한 전망도 당연히 오류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이론적 차원에서도 북한사회에 대한 새로운 연구방법론의 필요를 느끼고 있던 상황에서 새로운 방법론이 필연적으로 모색될 수 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피고인이 제기한 내재적 방법론이 많은 연구자들에게 적극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입니다.


(다) 내재적 방법론의 의의


피고인의 ‘내재적 방법론’은 과거 '김일성 가짜설', '금강산댐 수공설', '북한 체제 조기붕괴설' 등 사실과 동떨어진 허구적 주장들이 '학설'로 위장되어 유포되고, 그에 관한 학문적 비판 일체가 이른바 색깔론으로 봉쇄되었던 시대에 가짜 ‘학문’의 허구성을 극복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객관적 인식을 얻고자 하였던 방법론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파급력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북한 사회를 올바르게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북한의 실질적인 경험적 자료에 기초해서 그들의 논리를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라) 내재적 방법론에 대한 평가


1) 내재적 방법론은 결코 북한이 선전하는 고유한 내재논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자는 이념체계를 전파하고, 북한에 대한 비판은 외면한 채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친북일변도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기존 북한 연구의 문제점이었던 ‘선험적’, ‘비경험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학문적으로 엄밀한 객관적 이해를 얻고자 하는 과학적인 방법론인 것입니다. 내재적 방법론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다른 사회의 가치를 수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위해서 다른 사회의 가치와 질서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에 기초해서 그 사회작동원리를 파악을 하는 방법론입니다. 사실에 대한 파악과 사실로부터 도출된 가치를 수용한다는 것을 혼동함으로 해서 기존의 내재적 방법론을 사용하지 않던 연구자들이 가지고 있던 단점, 즉 자기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다른 사회를 재단하려고 하는 그런 한계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내재적 방법론 자체는 사실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다른 사회를 재단하지 않고 그 다른 사회의 경험을 가지고 그 사회가 갖는 원리를 발견해 내는 것입니다. 내재적 방법론을 사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북한사회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는 것은 마치 A라고 하는 연구방법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α라는 연구결과를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2) 검사는 내재적 방법론이 우리 사회에 친북세력을 확장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했다고 비난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로 우리 사회가 ‘광신적 반공주의’, ‘맹목적 반북주의’라는 냉전적 대결논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몽적 역할을 하고, 남북의 화해와 단합, 평화 정착, 자주적 통일을 추구하는 ‘평화세력․통일진영’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는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내재적 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북한의 모습을 올바르게 이해시키려고 하는 노력을 한국정부가, 우리 사회가 1960년대, 1970년대부터  시도했다면 우리 사회는 진작에 훨씬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북한사회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북한 원 자료를 직접 본 연구자들은 북한사회에 대해서 좀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북한사회에 대해서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내재적 방법론이 북한사회를 잘 이해하는 계몽적 역할을 하고 그 계몽적 역할은 오히려 우리 사회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또한 북한사회를 잘 이해하게 됨으로서 남북이 어떻게 평화롭게 현재의 갈등을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그런 방향을 모색하도록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3) 북한 연구자 중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되는 유호열 교수조차 피고인의 내재적 방법론에 대해 “북한에 대한 접근이 어렵고 시각이 고정되어 있을 때는, 내재적 접근법이 선입견 제거에 나름대로 기여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는 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내재적 방법론은 학계에서는 정착된 학설로서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연구학계에서 하나의 유망한 연구패러다임으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내재적 방법론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이라고 까지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일상화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연구시각으로 수용하면서 그리고 개별적인 연구방법은 다양하게 채용하는 기초적인 시각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제는 명실상부하게 내재적 접근론이 연구시각으로서  학계에서 시민권을 얻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시민권 차원을 넘어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할 것입니다.


(3) 주체사상에 대한 견해와 관련하여


검사는 피고인이 주체사상을 일방적으로 찬양함으로써 북한체제를 옹호하고 강화시키는 친북활동을 하였다고 비난하고 있는데, 결코 피고인의 주체사상에 대한 학문적 분석과 평가 등이 학문적 방법론을 일탈한 선전활동의 일환으로서 북한에 대한 일방적 옹호에 기울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어떤 연구결과를 선입견을 통해서 평가하고 그러한 이념적 평가에 기초해서 연구결과가지도 재단해 버린다면 학문의 세계는 발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재적 접근론을 가지고 연구를 한 연구자에게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북한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국내에서 보수적 진영에 속해 있다고 평가받는 연구자들조차 주체사상을 연구할 때에만 진정으로 북한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친북과 반북을 넘어서서 주체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북한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연구의 대상이자 북한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이므로, 주체사상에 대한 연구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철학자인 피고인으로서 북한 체제의 형성과정에서 주체사상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연구를 하거나, 주체사상이 북한 체제의 유지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하나의 이론적 경향으로서 극히 자연스러우며, 당연히 인정될 수 있는 주장인 것입니다. 


북한 연구 방법론 중에 크게 두 가지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는 주체사상을 강조하고 정치이념을 강조한 경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연구 경향입니다. 주체사상이 갖는 의미를 부각시키는 연구방법은 우리 사회에서 지배적인,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어서 지배적인 연구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고인 외에도 주체사상이나 북한의 특수성에 대해 피고인과 같은 궤도의 학문적 경향성을 가지고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주체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분석하여 내놓은 북한의 특수성에 대한 연구업적의 내용은 다기합니다. 결국 피고인이 북한 사회에 미치는 주체사상의 영향이나 역할에 대해 깊이 분석하고, 강조하는 것은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북한연구에서 하나의 시각 및 논리체계(예를 들면 황장엽의 주장과 같은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4) 남북사회 분석․평가 작업과 관련하여


(가) 검사는 피고인이 북한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고, 남한을 무근거하게 비난하는 식의 편향적인 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것도 선입견에 기초한 그릇된 판단입니다. 피고인의 많은 저작들은 오히려 남과 북의 편향적인 입장들을 교정하기 위한 그러한 노력인 것이며, 그러한 노력이 남한과 북한의 과거 편향된 입장을 가지고 있던 분들에게는 왜곡된 것으로 보이겠지만, 오히려 현재 입장에서 보면 균형잡힌 연구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 검사는 한편 피고인이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비판한 것을 예로 들며, 그것이야말로 친북반남의 증거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사회에 대한 비판적 학문활동에 대한 이러한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며 바람직스럽지도 못한 것입니다. 피고인의 글을 1980년대 말이나 1990년대의 같은 시기에  발표되었던 한국의 다른 많은 경제학자들이나 정치학자들이 쓴 글과 비교해 보면 오히려 피고인이 쓴 글이 한국사회를 너무 온건하게 비판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정도이며, 검사의 우려와는 달리 당시의 정황으로 보았을 때 한국정부에 필요하게 보이는 적절한 비판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자라면 비판적 학문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비판적 학문활동이 없다면 한 사회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이어서, 그런 점에서 비판적 학문활동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피고인이 남한의 역대 독재 정권의 폭정을 비판하고, 반민주․반인권적 정책, 예속적․분단고착적 정책 등에 의한 남한 내의 각종 폐해를 지적하고, 국민들의 생존권과 민주주의, 자유와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론을 제시하고자 학문적 노력을 했던 것은 양식있는 학자에게는 당연한 행위인 것입니다.


반대로 피고인이 한국사회의 성취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린 예도 종종 발견되는데, 가령 피고인은 자신의 저술에서 민주세력의 성장과 민주주의의 진전, 6.15공동선언 이후 눈에 띄는 남북화해의 진전, 현실적 전망을 가지게 된 통일노력 등에 관해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바, 이러한 예들을 놓고 볼 때 검사의 주장은 객관적 근거를 가진 주장이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사상에 대해서 공정한 평가를 내리려면 포괄적이고 그리고 가장 일관성 있는 방법으로 그 연구자를 대해야 합니다. 검찰 측 주장은 이러저러한 일부분을 가지고 확대 해석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피고인이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담은 학문적 노력을 해 온 것에 대해 국가의 안위나 질서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정도의 반국가적 활동이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유민주적 국가라는 것은 국가에 대한 혹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수용함으로 해서 거기로부터 발전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사회입니다. 독재국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을 거부함으로 해서 변화의 가능성을 없애는 사회입니다. 자유민주적 국가의 전문에는 ‘나에게 찬성하는 사람만 들어오라’ 이런 문구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여 어서 오라’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많은 비판을 수용해낼 수 있는 힘이 그 사회에 있는가 없는가가 그 사회의 발전의 향배를 좌우하는 것으로서, 비판적 성찰은 반국가적 활동이 아니라 국가사회의 발전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국민들의 치열한 투쟁에 의해 정치, 경제,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남한 사회가 피고인이 지적했던 그러한 문제점을 극복해 가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피고인의 그러한 노력은 지극히 정당한 문제제기였다고 평가되어야 합니다. 피고인의 문제제기는 따라서 국가의 안전과 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는 작업이었던 것이며, 경제 발전과 높은 질의 삶의 보장, 사회문화적 발전을 확고히 하였다는 점에서 국가의 발전, 국민 지위의 향상에 이바지하였던 참으로 바람직한 학문적 행위였다고 평가받아야 합니다.


(다) 피고인이 수행한 북한사회에 대한 분석작업에서 특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내재적 접근법을 통해서 우리 사회에서 지배하고 있던 북한에 대한 편향된 시각을 교정하고 계몽함으로 해서 연구자들이 새로운 관점에서 북한사회를 바라볼 수 있게끔 한 것, 둘째, 철학자로서 우리 사회의 평화와 통일의 진전에 독자적 기여를 한 점, 셋째, 막스베버의 카리스마 이론을 통한 북한 체제의 유지 동인에 대한 설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피고인이 행한 북한 사회에 대한 저술활동의 주안점은 주체사상이나 북한 체제의 현실에 관하여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여 올바르게 파악하도록 함으로써 근거 없이 유포되어 있는 북한에 대한 왜곡되고 편향된 시각, 견해를 교정하려고 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된 남북분단으로 남북한의 두 사회구조는 독일과 결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변화를 겪었고, 두 사회의 사회구조적인 변화의 방향은 서로 다른 형태와 기능을 갖는 근대적인 사회구조를 이룩하게 하였습니다. 남한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고, 사회주의적 발전전략을 추구한 북한의 발전 속도도 결코 완만했다고 할 수 없었던 결과, 남북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전면적으로 개편된 두 사회로서 이질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남북 모두 하나의 민족이었고, 앞으로도 하나의 민족으로밖에 남을 수 없다는 의식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 남북이 같지도,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인바, 상대방이 자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전제하면, 대립과 대결의 파괴적 논리만이 남게 되고, 상대방이 자기와 전적으로 같다는 점에서만 출발하면 쉽게 기대에 이은 실망에 빠지거나, 더 나아가 무관심으로까지 귀착하게 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정확한 상호이해가 근본 중의 근본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상대방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인바, 진보적 지성으로 자처하는 사람들도 페레스토로이카나 중국의 현대화 문제는 진보적 지성의 표징인 양 격력한 논쟁의 대상으로 삼으면서도, 정작 통일의 대상인 북한의 이념이나 현실에 대해서는 흡사 학문의 대상이나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유치한 것’ 또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 언급을 생략하거나 회피하기가 일쑤이고, 북한 사회주의 이념과 현실을 모두 안다는 전제 위에서 끌어낸 논의의 결론이 실은 많은 경우 논리적으로도 또 실증적으로도 전혀 뒷받침되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통일의 상대방에 대한 논의의 기본조차 갖추지 못한 반이성적 태도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예가 됩니다. 즉 객관적 근거 없이 북한에 대한 혐오감이 마치 현실이며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객관적 수용방법인 것처럼 오인되는 현실을 만드는 데 일조한 기존의 북한 연구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객관적 사실에 기초하지 않고, 오로지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감만 부추기고, 남북 화해와 협력을 방해하는 역할만을 하는 북한 연구는 학문적으로 인정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악폐를 끼치는 것이었기에, 학문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사이비 논리를 배격하고, 객관적이면서도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무한한 열정이 녹아들어 있는 방법론을 통하여 북한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5) 피고인의 통일 문제에 대한 견해


피고인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면 검사의 비난이 전혀 근거 없는 것임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의 모든 저술활동의 기저에는 무엇보다도 통일을 이룩함으로써 남한이나 북한 어느 한 쪽이 아니라 민족구성원 전체의 권리를 회복하고 복리를 향상시켜야 한다는 지상의 목표가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통일이 민족발전의 요구의 측면이나 시대의 요청이란 견지에서 필연적으로 달성될 과제로 파악하고, 분단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면 남북한이 다같이 패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통일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세대의 희망이고, 한반도에서 미래의 세대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조건을 준비하는 것이며, 통일은 관용과 연대 속에서 새로운 삶의 원형을 창출하는 거대한 의의를 가진 작업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통일의 주체가 남한이나 북한 일방이 되고 상대방은 그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쌍방 공동주체임을 강조하고 있으며, 통일의 목적은 남이나 북, 어느 한 쪽의 이익을 위한 일방적 작업이 아니라 남북에게 모두 이익이 되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걸린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통일문제에 대한 기본관점으로서는 상호이해와 화합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통일 문제의 해결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문제라고 보고, 통일이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붕괴시켜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상 서로 이해하며, 화해하고 단합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아울러 통일은 대화와 교류를 통한 상호 이해와 공동의 협력에 기초해 이룩되어야 함을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과 대결이 극에 달해 있는 현재의 조건에서의 통일은 무력을 사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반드시 평화적 방법에 의해 이룩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피고인은 통일문제에서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공정하고 불편부당한 입장에 서서 남북이 상호 이해의 기초 위에서 공동으로 힘을 합쳐 공동의 숙원인 통일을 평화적으로 이룩하여 공존공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막고, 불신의 강을 건너 화합과 단결, 평화와 통일의 새 시대를 활짝 열어 민족사의 대 비약을 도모하는 피고인의 절절한 호소에 대하여, 친북반남책동이니, 적화통일전략의 수행이니 하는 비난을 하는 것이얼마나 어리석은 어불성설의 비방인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할 것입니다. 


(6) 피고인의 저술 활동 전반에 대한 평가


전체적으로 보아 피고인의 학문적 활동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 위해가 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사상에 대한 억압이 나타나는 이유는 사상에 문제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러한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학문적 활동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장점이 우리 사회가 올바로 나아가는 데 비판의 기능을 함으로 해서 우리 남한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고인의 학문적 활동에 대하여 학문적 비판을 넘어 실정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체제를 비판하는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얼마나 수용할 수 있는가, 이것이 자유민주적 사회의 발전 정도를 평가하는 기준이며, 학문세계에서는 그 세계 자체에서 저절로 이러저러한 정화작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유민주적 질서가 잘 유지되는 사회일수록 자유민주적 질서에 가장 적합한, 자유민주적 질서를 가장 잘 옹호해 주는 학문적인, 사상적인 경향들이 많이 발전하게 됩니다. 실정법을 적용해 처벌하는 것은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7) 소결


피고인의 학문방법론 및 저서내용을 비판하고 있는 증인 김광동, 증인 홍진표는 피고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할만한 전문성을 가진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의 주장은 피고인의 학문활동을 극우적 이념의 잣대로 단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의 중요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펴본 바와 같이 학문의 영역에 속하는 피고인의 저술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평가하는 것은 헌법상 기본권인 학문 사상의 자유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피고인의 저술들은 피고인의 학문적 탁월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북한 체제를 일반적으로 옹호하고 주체사상을 전파하고 있다는 등의 논리로 폄하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피고인의 학문활동은 조선조동당의 핵심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의 임무로 포함되기에는 너무나 미약합니다. 저술활동을 ‘주도적 임무에 종사’한 것으로 보는 검사의 시각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피고인의 저술활동만으로 ‘주도적 임무를 수행’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피고인의 저서에는 학문적인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는 어떠한 이적성도 없습니다. 학문활동에 대하여 ‘이적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사. 남․북․해외 통일학술회의 중재활동이 조선노동당 간부로서의 주도적임무인가?


(1) 개 요


검찰은 마치 피고인이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함으로써 반국가단체인 북한공산집단의 지도조직인 조선노동당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양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역사적 의의 및 그 과정에서 피고인이 수행한 중재자적 역할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아직도 구태의연한 형식적 논리에 얽매여 사실과 전혀 다른 주장을 함으로써 평화통일을 향한 민족적 염원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피고인은 오직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미력하게나마 기여할 수 있기만을 염원하며 이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성공적 개최를 위하여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던 것입니다.  


(2) 통일학술회의의 추진경위


우선, 검찰 스스로 인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관하여 최초로 구상하고 이를 제안한 사람은 피고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정치학자로서 서울대학교에서 수십년간 학생들을 가르쳐온 길승흠 교수가 먼저 제안하였던 것입니다. 위 길승흠은 이 사건 법정에 나와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구상하게 된 배경과 관련하여 1989년에 동서독이 통일된 이후 남한 전체에 통일의 열기가 확산되어 종교, 고고학, 문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남북한간 학술회의가 북경에서 열렸고, 당시 한국정치학회와 일본정치학회의 회장이었던 터라 그렇다면 남북한간의 정치학자 회의도 한 번 가져 보는 것이 어떤가라는 생각을 계속 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1994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세계정치학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들른 ‘김치식당’이라는 상호의 음식점에서 피고인의 존재에 대하여 알게 되었으며 수소문끝에 만나서 피고인에게 ‘당신 그것 할 수 있느냐, 남한학자와 공동학술회의를 해보자’라고 물었고, 이에 피고인이 ‘할 수 있다’고 답변하였고, ‘그러면 우리 1년 걸려서 내년에 한번 해보자’라고 합의하면서 처음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관한 구상이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증인 길승흠의 신문조서).


피고인 역시 독일에서 살면서 독일이 통일되어가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이 동서독 학자들의 학술공동체 형성과 그 활동이었음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였으므로 한국의 분단상황에서 통일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학술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하여 나름의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마침 위 길승흠으로부터 주체적으로 남과 북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바쁜 개인일정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통일사업에서, 전반적인 민족화해사업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마다하지 않고 큰 역사의 흐름에 동참하였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제1, 2차 공판조서에 첨부된 각 속기록).


이렇듯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는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이 아니라 위 길승흠과 피고인의 학자로서 평화통일을 위한 다양한 모색 끝에 시작된 순수한 민간교류의 한 방편입니다.  


(3) 통일학술회의의 진행경과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는 1994. 8.경 처음으로 위 길승흠과 피고인 사이에 논의가 이루어진 이후 제1차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가 1995. 7. 31.부터 같은해 8. 1.까지 북경에서 열렸고, 마지막으로 제6차 회의가 2003. 3. 26.부터 같은달 27.까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1차부터 6차 회의까지 모두 참석하였던 권만학 교수는 이 사건 법정에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전 과정에 대하여 충분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가) 북한주민접촉승인절차 이행


먼저 남북한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른 북한주민접촉을 위한 승인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즉 먼저 북한주민접촉신청을 해서 승인을 받아야 하고, 북한주민을 만난 이후에는 결과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절차를 6차에 걸쳐 모두 이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학술회의의 성격상 일정이 미리 정하여지지 않고 언제 만나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8개월 경우에 따라서는 3년 가까이도 주민접촉신청을 미리 받고서 항상 회의개최를 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 학술회의의 참석자 모두 이러한 승인절차를 거쳤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위 길승흠은 당시 통일부와 안기부 모두 접촉하였고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관한 전반적인 사전보고를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참석하고자 아는 남한측 학자들 중 일부에 관하여 진보적이라는 이유로 안기부측에서 제외시키라는 요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설득이 안되어 위 길승흠은 당시 이홍구 국무총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그 외에 김기섭 기조실장이나, 엄익준등과도 사전에 만나서 조율작업을 거쳤던 것입니다. 그 와중에 결국 김세균, 이삼성교수등은 참석하지 못하였고, 최장집교수는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비회의가 끝난 후에는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였고, 본회의가 끝난 후에도 회의에 관한 모든 자료와 함께 결과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더욱이 남측학자들이 이 사건 학술회의 과정에서 북측학자들에게서 들은 이야기 중에 정부정책에 도움이 되겠다 하는 것들이 있으면 공식적인 결과보고서 외에도 여러 관계기관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곤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사건 학술회의가 6차에 걸쳐 개최되는 동안 매번 통일원이나 국가정보원등 정부 관계기관등과 사전논의과정을 거쳤는데 그 과정에서 단 한번도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와 같이 피고인이 북한의 간부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지도적인 임무수행의 일환으로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주도하는 것이니 문제가 있다라는 지적 혹은 피고인과는 만나서는 안된다던가 다른 경로를 알아보라던가라는 요구는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통일부로부터 3차례에 걸쳐서 이 사건 회의개최에 필요한 자금까지 지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정부에서는 이 사건 학술회의의 남북한간 민간교류의 교두보로서 그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것입니다.


(나) 주최자, 주관사, 협찬사의 선정


1995년 제1차 학술회의 이후 이 사건 학술회의의 남한측 주최는 한국통일학술포럼이었는데 이는 당시 학술회의에 참석하였던 학자들이 다시 모여 이 사건 학술회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개최할 필요성이 있다는데 의견을 같이하고 주최가 될 단체를 학자들이 모여 만든다면 단체의 중립성이나 독립성 명에서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여 1996년 4월경 위 단체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한편, 이 사건 학술회의를 개최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하여 길승흠교수와 백영철교수등이 주로 노력해왔습니다. 당시 기업중에서도 북한과 통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고, 이 사건 학술회의등과 같은 민간교류를 위한 후원사업을 하고 있는 기업이 많이 있었으므로 SK, 대우, 삼성, LG  등 굴지의 기업들이 이 사건 학술회의를 후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주관사를 언론사로 정하고, 또 여러 언론사가 돌아가면서 주관하도록 하였던 이유는 이 사건 학술회의를 개최할 당시 남북한 주변정세가 매우 경직되어있었던 관계로  어떤 오해를 받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언론의 공개적 보도아래 회의를 개최하고자 하였던 것이고, 객관성과 균형을 이루기 위하여 언론사도 한국사회에서 유수한 언론이면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며 주관사로 섭외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주관사인 언론사들은 회의때마다 매번 특집으로 회의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1995년 제1차 학술회의 당시 한국일보는 1면 톱으로 이 사건 학술회의를 보도했고 약 4면 정도에 걸쳐 상세하게 보도하였습니다.


1996년 제2차, 1997년 제3차 학술회의의 주관사였던 중앙일보는 각 자료집을 내면서 서문에 이 사건 학술회의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2차 학술회의와 관련하여 “... 학술회의는 통일과 민족화합을 위한 또 하나의 발자취를 남겼다. 남북한과 해외에서 모인 62명의 학자들이 사흘 동안 함께 토론하고, 웃고 울며 통일문제를 고민한 이 행사는 더 이상 통일이 먼 훗날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케 했다. 물론 논의 과정에서는 서로의 견해와 입장이 팽팽히 맞서 얼굴을 붉혀야 하는 상황도 있었지만 그를 통해 더욱 통일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는 계기가 됐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자료집 825면).


다음으로 제3차 학술회의와 관련하여 “...특히 1998년 신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펼쳐질 남북교류 시대의 본격 도래에 대비하여 하나의 주춧돌을 놓는 자리로 마련됐다는 점에서 통일회의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번 회의는 지난 8월 29일, 30일 양일간 남측 17명, 북측 11명, 해외 3명 등 모두 31명의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심도 있는 주제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학계뿐 아니라 경제실무에 종사하는 업계 전문가들까지 참여함으로써 한층 더 현실적이고 구체성을 띤 교류협력 논의가 가능했던 점은 96년 회의에 비해 상당한 진전으로 평가된다...”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자료집 555면) 


이 사건 학술회의에 자금을 지원하고, 회의일정 및 회의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여러 기업과 언론사들이 이 사건 학술회의가 검찰의 주장대로 북한의 남한통일전선사업의 일환이었다면 그리고 이러한 북한의 책략에 놀아나는 학술회의였다면 그렇듯 전폭적인 지원과 대대적인 보도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후원기업과 주관한 언론사들은 모두 이 사건 학술회의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너무나 명백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검찰이 이 사건 학술회의를 피고인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기소한 행위는 이러한 후원기업과 언론사의 노력을 일거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오히려 이적행위에 해당한다고할 것입니다. 


(다) 사전지뢰제거작업


이 사건 학술회의는 남북한 사이의 현안이자 매우 민감한 사안인 통일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상대방의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게 되면 회의 자체가 어려워지고, 그냥 상대방 이야기만을 듣고만 있자니 이른바 북한의 통일전선전술에 놀아난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어서 결국 사전에 발표의 수위를 조절하는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그러한 작업을 이른바 사전지뢰제거작업이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 사건 학술회의는 먼저 남한과 북한 양측 조직위원 각 약 3내지 4명이 회의 개최일 약 한달전에 미리 예비회담이라는 명목으로 만나서 구체적인 주제와 날짜, 장소등을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주제가 정해지면 남북한 양측이 각자 발표자와 토론자를 정하고 본회의 2내지3주전에 피고인을 통하여 각 참석자 명단을 교환하였습니다. 위 명단에 따라 남북한 양측이 서로 각 참석자의 참석여부에 대하여 이의가 있는지 여부를 판단하고 양측에서 서로 요청하면 조정하였습니다. 또한 참석여부와 별개로 논문이 수정되기도 하고 심지어 발표를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작업에 의하여 논문이 수정되거나 발표를 못하게 된 학자의 수는 북한측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남한측 참석자의 수가 북한보다 언제나 더 많았다는 점에서 그 비율은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


모든 학술회의가 그러하듯이 이 사건 학술회의 역시 각자의 입장에 따른 논문발표와 토론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 사건 학술회의 내내 북측의 일방적인 주장이 선전되었을 뿐이고 남한쪽이나 해외 학자들이 자기 주장, 반박, 토론을 하지 않고 이러한 북측의 주장만을 듣고만 있었냐는 변호인의 신문에 길승흠교수는 ‘...우리 남한학자들은 핫바지입니까...’라고 반문하면서 강력하게 부인하였습니다. 이 사건 법정에 제출된 자료집을 살펴보면 이러한 의문은 간단히 해결될 수 있습니다.


(라) 북한의 수세적 태도

이 사건 학술회의에 관하여 당시 참석한 학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북한의 태도는 처음부터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남한측 학자들은 남북학자들간 대화가 진전되어 어느정도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연례화가 기본 목표였는데 반하여 북한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남한측 학자들이 항상 먼저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고 재촉하였습니다. 당시 세계정세 역시 북한이 의지하고 있던 러시아를 비롯하여 동구사회권국가들의 체제가 붕괴되고 중국 역시 개방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악화되는 경제상황등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었던 상황이어서 오히려  이 사건 학술회의등으로 북한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까 하는 우려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북한의 태도에 비추어보더라도 검찰의 주장이 얼마나 사실과 다른지 알 수 있습니다. 검찰 주장대로 이 사건 학술회의가 북한의 대남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북한이 소극적으로 임할 이유가 전혀 없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먼저 제안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먼저 북한측에서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못해 응할 뿐이었습니다. 


(4)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역사적 의의


1990. 10.경 독일의 통일과 구소련연방의 해체, 동구권국가들의 체제변화 등에 따른 동서냉전의 종식은 동서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필요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정세의 변화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한국정부는 1990. 9.경 구소련(러시아)과, 1992. 8.경 중국과 각각 국교를 정상화하였습니다. 또한, 1991. 9. 17. 북한과 UN 동시가입을 실현함으로써 대북방정책과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근 20년만인 1991. 12. 13.에는 역사적인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이하‘남북기본합의서’라 함)’가 채택되었고, 한국정부는 또한 1990년 8월 남북교류협력을 촉진시키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의 일환으로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과 ‘남북협력기금법’을 마련하였습니다.


이러한 법적․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면서까지 남북한교류협력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이유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 동안 단절되었던 민족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회복하여 사회․문화․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의 인적․물적 교류협력을 촉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고 평화통일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 학술회의가 처음으로 개최될 당시에는 세계가 탈냉전화된 것과는 달리 남북관계만 신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서로 첨예하게 대치되어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선언(1993. 3. 12.) 및 핵사찰수용거부, 팀스피리트 훈련중지문제, 남한 조선노동당 간첩사건,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한 남북정상회담의 무산 등으로 남북관계는 교착상태에 빠졌으며 남북교류협력 또한 사실상 거의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하에 이 사건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는 사실은 그 당시 거의 유일하게 남북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민간교류의 교두보 역할을 충실히 해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 당시 어려운 시기에 그나마 남북관계를 개선하는데 이바지하였다고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하여 남북한 교류의 폭이 점차 확대되면서 오히려 이 사건 학술회의의 역사적 의의도 점차 퇴색해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만, 여전히 남한의 대북정책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서 여실히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남북대치상황은 끊임없이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남북한간 평화적 통일은 민족적 숙원사업으로 아무도 그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순된 상황에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정부의 대 북한 정책은 수시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이후 일관되게 추진되고 있는 대북정책은 다름아닌 남북한교류협력의 활성화입니다. 이 사건 학술회의는 그러한 남북한교류의 대표적인 모범적 사례입니다. 6차에 걸친 회의과정에서 남북한간 서로 많은 부분에서 이해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기 이전에도 남북교류협력이 간헐적으로 추진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일관성있게 추진된 것은 아니었으며, 그나마 어렵게 합의된 교류협력사업마저 쌍방 또는 일방의 정치적인 이유로 무산되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어려움속에서도 이 사건 학술회의는 무려 6차에 걸쳐 개최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얼마나 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필요했을지는 충분히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에 대하여 포상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평가만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이 검찰을 포함한 정부의 의무일 것입니다.



(5) 피고인의 역할 및 그 평가


피고인은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가 개최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중재자입니다. 피고인이 없었다면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는 개최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피고인은 주제, 일시 등 남과 북이 회의를 하기 위하여 필요한 여러 논의사항에 관하여 합의를 도출해내야 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중재적 역할을 해왔습니다. 권만학 교수는 이 사건 법정에서 오히려 피고인이 남측에 기울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까지 진술하고 있습니다.


1997년 제3차 통일학술회의 당시 남측 참가자중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실장이었던 박명림 역시 회의 직후 작성한 참관기를 통하여 “... 이 경험은 남북관계에 대한 다른 어떤 자료와 연구보다도 큰 지식과 배움을 가져다 주고 있다...기실 올해의 회의는 매우 날카롭고 긴장된 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관례가 된 상호 지뢰제거작업을 통해 예민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전에 수정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북한측의 논문이 동일한 견해를 역할분담과 주제분할을 통해서 집필되는 데 반해 우리의 논문은 각자의 독자적 견해를 일정한 시각과 분석틀을 갖고 집필된다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송두율 교수의 남북한 학자 사회 양측과 언술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민족애에서 나오는 상호 양보의 요구....는 미묘한 문제를 넘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요소이다... 철학적 깊이를 갖고 ‘타자는 나의 인질’, ‘체험공간’, ‘관찰자와 참여자의 긴장’을 강조한 송두율 교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케 해주었다... ”라고 피고인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자료집 814, 815, 816, 820쪽). 


피고인이 북한에 편향되는 등 문제가 없었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길승흠 교수는 ‘...뭐가 문제점이... 고맙기만 했는데...’라며 단호하게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증언은 피고인의 역할에 대하여 우리는 어떠한 평가를 하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한마디로 고마워해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마워하기는커녕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6)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적용 및 국가보안법의 배제


(가)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제정배경


한국 정부는 1988. 7. 7.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7.7 특별선언」을 발표하여 반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해 앞으로 남한이 모든 부문에 걸쳐 북한과의 교류를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동 선언의 후속조치로서 1990. 8. 1.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제정되었는데 당시 정부안에 따르면 “남북간 인적․물적 교류의 제반 분야의 협력이 통일을 추진하고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기본요소라 인식하고 대결의 역사와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관계개선을 통한 교류협력의 길을 트기 시작하는 것이 시대적 과업”이며, “이를 추진하고 원할히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일관된 절차를 정하고 현행법규에 대한 각종 특례를 정하는 것”이 동법의 제정이유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법적 성격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은 ‘남북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에 관하여는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범위 안에서 다른 법률에 우선하여 이 법을 적용한다’라는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동법제3조). 이와 관련하여 동법이 특별법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 제정배경을 보더라도 남북교류협력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본법이라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남북교류협력에 대해서는 남북교류협력법이 우선적용되고 단지 그러한 행위가 이적목적을 가진 경우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해할 정을 알면서 행한 반국가적 활동에 해당될 경우에는 국가보안법의 적용을 받는다고 할 것입니다.

‘남북교류협력’이란 남북한간의 인적 교류협력과 물적 교류협력을 총칭하는 것으로 경제․사회․문화 등의 영역에 있어 남북한이 교류와 협력을 도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교류란 인 또는 물의 장소적 이동을 의미하고, 협력은 동일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과 그 활동을 의미합니다.


(다)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의 적용 및 국가보안법의 배제


위 정의에 따르면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는 학술분야에서의 남북교류협력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아니라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동법에 따라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준비과정에서 북한주민접촉승인절차를 거치고 회의를 마치면 결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통일부는 남북협력사업기금법에 입각하여 3차례에 걸쳐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자금을 지원해왔습니다.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개최경위나 진행경과등을 살펴보면 그 어디에도 이적목적이나 자유민주적기본질서를 해할 수 있는 요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매년 열린 통일학술회의에서 민족의 화해협력과 공존, 평화와 통일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가졌고, 학술회의를 통하여 민족적 동질성을 확인하는 한편, 적지않은 부분에서 서로의 이견과 차이를 발견, 이를 논의하고 극복해야 할 필요성에 공감을 표시하였다는 평가에 비추어보면 남북교류협력의 궁극적 목적에 너무나 부합되는 행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북교류협력의 궁극적인 목적은 남북한간에 우호협력관계를 촉진하고 남북한간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동질성을 증대시킴으로써 평화통일의 여건을 조성하고 통일에 따른 제비용을 최소화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정분야에서의 교류협력 경험은 타분야에서 보다 큰 교류협력관계를 유발할 수 있는 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전면적인 개방에 따른 체제위협을 제거해주는 효과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최근 독일의 통일과 구소련의 해체이후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몰락하고, 한국이 러시아 및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경제적 협력관계를 강화시킨 이후 북한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으며, 경제침체에 따른 사회적 불안을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실정이므로 남북교류협력이 독일식의 흡수통일로 발전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계심을 완화시키고 평화통일이라는 목적지에 다가갈 수 있기 위한 움직임의 하나로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존재감은 크다 할 것입니다.


남북한관계는 더 이상 적대관계가 아니며 공존공영과 민족복리차원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관계인 것입니다. 서로의 공존을 모색하여야 하는 상황임에도 여전히 국가보안법이 존재하는 한 정부의 자의적인 해석에 의하여 남북교류협력이 순식간에 이적행위로 돌변하는 우를 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보여준 검사의 논리구성 역시 국가보안법의 형식적 적용의 맹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는 매년 수십명의 남북한 및 해외학자들이 참여하여 한국기업의 후원아래 한국 언론사의 집중조명을 받으며 민족의 화해협력과 공존, 평화와 통일이라는 서로 공통된 관심사에 대하여 진지한 논의를 거쳐 이해의 폭을 넓혀왔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사전과 사후에 걸쳐 모두 위 남북교류협력에관한법률에 의거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피고인이 1995년 이후 수차례에 걸쳐 북한에 왕래하게 된 것도 오로지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권만학 교수가 이 사건 법정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남한측 학자들은 남북학자간 대화가 진전되어 어느 정도성과를 얻어내기 위하여 어떻게든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매년 개최하여 연례화시키는 것이 기본 목표였는데 비해 북한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어서 남측에서 항상 먼저 보채는 편이었다는 것입니다. 남한측에서 오히려 피고인에게 북한에 들어가 북한의 입장이 어떤 것인지 알아봐 달라고 여러차례 요청을 하였기 때문에 피고인이 북한을 왕래하였던 것이고, 그 때마다 남한측에 연락을 취해왔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남북한교류는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어서 언제 어느때 무산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교섭을 해서 북한의 이사건 학술회의 개최의사를 확인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검찰은 이 중 유일하게 중재자 역할을 수행했던 피고인만을 분리하여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개최하는데 기여한 부분을 마치 북한의 남한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수행하였다고 하여 그 처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입니다.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다른 모든 관계자는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교류협력행위를 한 것인데 유독 피고인만 남한통일전선사업의 일환으로 수행하였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주장입니다. 


(7) 소결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가 처음 개최될 당시에는 남북한정세에 급격한 냉각기류가 흘러 모든 대화의 창구가 닫힌 채 위기감만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속에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가 개최됨으로써 민간학술차원에서 남북한교류의 창구를 마련하였던 것입니다. 그 동안은 비정치적 수준에서 종교․문화․체육등의 교류에 국한되었으나 남북한의 대표적 정치학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가 최초로 마련된 것입니다. 여기서 참석자들은 남북간의 통일방안에 대한 공통성과 상이점, 그리고 이와 관련한 학자들간의 상이한 입장과 시각을 직접 확인하였으며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고 접점을 모색하려 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피고인에게 ‘북한이 조선중앙년감이나 노동신문을 통하여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에 관한 왜곡된 내용을 기재한 사실에 비추어 북한 주민들을 상대로 한 김일성․김정일 체제의 정당성 홍보, 해외나 국내의 친북세력들을 상대로 한 동조세력 확대 및 통일정책 등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 방편으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이용한 것은 아닌가요’라고 재주신문을 하였습니다. 피고인은 당해 신문사항에 대하여 답변을 거부하였습니다만 위 질문내용에서 검찰의 인식수준을 가늠해볼 수 있습니다. 


남북한교류협력에관한법률이 전제하고 있는 남북한관계는 더 이상 적대관계가 아니며 공존공영과 민족복리차원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자관계입니다. 교류란 일방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즉 교류가 성립하기 위하여는 양측 모두 교류로 인하여 얻는 이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통하여 남한측이나 북한측 모두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검찰은 이러한 기본적인 관계조차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구태의연한 인식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입니다. 남한측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얻는 교류만이 남북한교류협력에 해당한다면 처음부터 남북한교류협력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다면 남북한교류협력의 활성화를 추구하겠다는 7.7선언 역시 말장난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를 이적행위나 민주적기본질서를 해하는 행위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남북의 협력관계를 증진시키고 화해무드를 조성하여 평화통일에 기여한 애국적 행위인 것입니다. 만일 그런 식으로 이 사건 통일학술회의의 역사적 가치를 폄하한다면 그러한 행위야말로 진정한 이적행위로서 처벌받아 마땅하다 할 것입니다.


아. 소결(공소사실 제1항에 대한 결론)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피고인은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된 적이 없으며 검찰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피고인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는지 여부 및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는지 여부가 증명된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이 주체사상을 남한에 전파한 공로로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주장이나 1970년대 이후 해외에서의 활동이 높이 평가되어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는 주장은 모두 근거없는 비약이나 추측에 불과합니다.


피고인이 한 저술활동이나 남북해외 통일학술회의 주선활동은 피고인이 해외동포 학자의 지위에서 한 것으로 북으로부터 그 어떠한 지시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술활동이나 학술회의 내용에 어떠한 이적성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검찰 주장의 후보위원 선임시기인 1991년 5월 이후 피고인이 한 일이라고는 저술활동과 학술회의 주선 활동이 활동내용의 전부입니다. 피고인은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바 없고 저서와 학술회의의 내용에 별도의 이적성이 없다고 할 것이므로 피고인이 그 어떠한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볼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가사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어떠한 조직적인 활동도 없이 책 몇권 출판하고 학자들간의 회의를 주선한 정도를 가지고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저술활동에 별도의 이적성이 있다면 모르되 단순한 저술활동을 주도적 임무종사로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가보안법 제3조 제1항 제2호 자체가 형벌의 명확성의 원칙, 처벌에 있어서의 비례의 원칙 등에 반하는 위헌, 무효인 법률조항으로 이 사건에 적용될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간부 기타 주도적임무에 종사’하였다는 공소사실은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으므로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4. 특수탈출 및 회합통신의 점에 대하여(공소사실 제2, 3, 4,항). 


   가. 특수탈출의 점


검찰은 피고인이 1991년 5월 이래 2003년 3월까지 20회에 걸쳐 지령을 받고 반국가단체의 지배영역인 북한지역에 방문하였다는 이유로, 피고인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의 특수탈출죄로 기소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1993년 8월을 기준으로 그 이전까지 방북의 점은 피고인이 노동당 후보위원이 아니므로 공소시효가 이미 소멸하여 공소기각 판결을 하거나 지령을 받은 바가 없으므로 무죄이며, 그 이후의 방북은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이 외국인의 자격으로 입북한 것으로서 ‘탈출’에 해당하지 않고, 가사 탈출에 해당하더라도 외국인의 국외범이며, 또한 지령을 받은 바가 없으므로 모두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1)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 해석


국가보안법 제6조 [잠입․탈출]는 ②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는 사형․무기 또는 5년이상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는 바,


본조의 규정은 일반적으로 “정당한 사유없이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과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간을 왕래하거나 반국가적 활동에 관한 지령의 수수 또는 의사연락을 위해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을 출입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통치권(영토고권 및 대인고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처벌하기 위한 조항”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즉 그 보호법익이 대한민국의 통치권, 즉 영토고권 및 대인고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한민국의 출입국으로 인한 영토고권 침해에 대해서는 현행 출입국관리법과 여권법, 밀항단속법에 의해 규율되고 있습니다. 위 법률들은 이미 사전에 규정된 절차에 따르지 않는 출입국 행위에 대해 처벌규정을 두고 있는 만큼 영토고권과 대인고권을 지키기 위해 별도로 다시 국가보안법에서 이를 규율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 제6조의 진정한 보호법익은 ‘국가안보’에 맞춰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안보에 관해서는 이미 형법에서 내란죄와 외환죄 등으로 이미 충분히 보호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위해 다시 국가보안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한편 구국가보안법 중 제6조 3항이 삭제된 경위를 보더라도 탈출에 관한 위 규정은 폐지될 수 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제6조 3항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이익이 된다는 정을 알면서 국외공산계열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 수행을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자로 제2항의 형과 같다”라고 규정되었으나 1991년 공산권과의 교류확대를 위하여 삭제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국회에서 제6조 3항이 사회주의 권과의 교류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며, 그렇다면 제6조 전체가 북한과의 교류를 가로막아온 기능을 하여왔고, 북한과 교류가 활성화된다면 제6조 3항과 마찬가지로 제1항과 2항도 폐지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건에 대하여 법제6조 2항을 규율하지 않는 것이 법률을 생동하는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가사 위 규정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문리해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 적용범위를 최소화하는 것이 제대로 된 법률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본조의 입법취지와 성질에 비춰 그 적용범위를 최소화하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본건 공소사실에 대해 살펴보면, 아래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고인의 방북은 북한의 지령수수 또는 목적수행 협의를 위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 피고인이 독일국적을 취득한 1993년 8월 이후 방북은 본조의 ‘탈출’에 해당하지 않고,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한다는 점으로 인해 모두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2) 피고인에게는 지령수수 또는 목적수행 협의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 1991년 5월 이래 2003년 3월 까지의 방북 또는 재독 북한 이익대표부 방문


일반적으로 지령이란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며, 그 어의상  지령수수자 사이에 상하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지령의 의미를 파악함에 있어서 이러한 상하관계가 필요없는 것으로 봐서, 지령의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어 무제한적으로 확장시켜 지령의 수단․방법․내용에 아무런 제한이 없고 또 상명하복관계도 필요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중복 지령까지도 인정하게 되면, 지령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는 완전히 퇴색되어 버리고 의사의 전달과 동의어가 되어 문리해석의 한계를 벗어나게 되고, 처벌의 범위는 무한정 넓어져 법적 안정성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실제 과거 일부 대법원 판결은 지령의 의미를 위와 같이 무분별하게 확장해석 하였으며, 그 결과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1989년도 신년사에서 남한의 노태우 대통령과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야당 총재들, 김수환 추기경, 문익환 목사 등을 북한으로 초대한다고 한 일방적인 발언까지도 잠입죄의 지령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고, 또 범민족대회 추진을 위해 북측이 남측의 대한적십자사를 통하여 전달한 서신도 지령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대법원 1999. 12. 28. 선고 99도4027판결).


사정이 이 정도가 되면 북한에서의 남측과 관계되는 언동은 모두 지령으로 해석되고 나아가 북한이 일방적으로 언급한 모든 남한 구성원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북한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해석됩니다. 심지어 북한의 대화제의 조차도 지령으로 해석하고 이를 받아들이는 모든 남한 구성원을 지령 수수자, 즉 범죄자로 만들어 버리는 지경이니 위와 같은 지령의 해석은 결국 남북한의 자유로운 교류․협력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는 문리해석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법률해석의 기본원칙에 반하는 것이며, 명백히 죄형법정주의를 위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대법원 99도4027사건의 1심법원은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 소정의 특수 잠입․탈출죄에 있어서 지령이라 함은 지시와 명령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반드시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가 있을 것을 요하지 아니하고 그 지령의 형식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다 할 것이나 일방이 지령을 내리고 다른 일방이 지령을 받는다는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지시’와 ‘명령’의 문리해석상 지령을 하는 자와 받는 자 사이에 반드시 상명하복의 지배관계가 있을 것을 요하지는 아니한다 하더라도 지령을 하는 자가 지령을 받는 자에 대하여 그 지령의 수행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정도로 우월적인 지위에 있고 지령을 받는 자가 지령을 하는 자에 대하여 상대적으로 종속적인 지위에 있을 것이 요구된다 할 것이고 또한 그들 사이에 수수된 지령의 형식에는 제한이 없는 것이지만 그 지령에 따라 어떠한 행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특정되어야 한다고 해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같은 사안에 대하여 “범청학련 북측본부가 북한의 대남혁명부서인 통일전선부의 지시에 따라 북한의 대남통일정책을 수립하는 조평통의 지휘를 받고 범청학련이 북측본부의 주도로 운영되고 있어 남측본부는 북측본부의 지시나 명령에 따라 활동하는 종속적인 지위에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하여 특수 잠입․탈출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습니다.


본건 공소사실은, 피고인이 1991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수회에 걸쳐 북한 사회과학원이나 북한 사회과학자협회 부위원장 등으로부터 북한의 ‘주체철학 토론회’에 참석하라는 등의 지령을 받고 방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사회과학원이나 사회과학자협회와 피고인이 상하관계에 있었다거나 종속관계에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검찰의 주장처럼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면 오히려 피고인이 지령을 하달할 위치에 있는 것인바, 공소사실은 그 자체로 논리적으로 모순된 것입니다.


한편, 본조 제2항의 ‘목적 협의’ 역시도 반국가단체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남한의 국가전복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협의라는 의미로 그 목적의 내용이 특정되어야 할 것인 바, 피고인의 방북의 목적인 ‘주체철학 토론회’나 ‘김일성 주석 장례식’ 또는 ‘통일학술회의’참석 등을 국가전복의 목적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모로 보더라도 피고인에게 본조 특수탈출의 죄를 적용하는 것은 위법한 법적용이라고 하겠습니다.


(3) 본조는 외국인의 국외범에 대해서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1993. 8. 이후 방북의 점에 대해)


위 제(2)항의 이유에 더하여 피고인에게 본조를 적용할 수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갖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법제6조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지주의 원칙에 속인주의와 보호주의를 가미하고 있는 우리 형법은 외국인의 국외범에 대해서 형법 제5조에 열거된 것(내란, 외환, 국기, 통화, 유가증권, 우표 인지, 문서와 인장에 관한 죄 중 일부죄)이외의 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는바, 여기에 국가보안법은 포함되지 아니하였고 또 국가보안법 자체나 그 밖의 법률에 이와 같은 외국인의 국외범에 대하여 처벌할 근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건 피고인의 공소사실인 외국인의 대한민국 영역이외에서의 탈출행위에 대해 국가보안법을 적용할 수는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는 1974년 이래 대법원의 일관된 입장이기도 합니다. 즉 대법원은 “외국인이 일본에서 소련을 거쳐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고 일본 기타 제3국에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통신 기타 연락을 하거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한 행위는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여 반공법을 적용하여 처벌할 근거가 없다(대법원1976. 5. 11. 선고 76도720)”, “국가보안법 제6조 소정의 탈출죄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제로 행사되는 지역으로부터 직접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한 경우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인 이상 제3국으로 통하거나 또는 제3국에 거주하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한 경우에도 설립한다(대법원1983. 4. 18.선고 83도383)”라고 밝히고 있으며, 이러한 입장은 1997년까지 일관된 태도였습니다.


그러던 대법원은 1997년에 들어와서 마땅한 이유 설명도 없이 수 십년간 유지해오던 태도를 갑자기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변경된 대법원 판결의 태도는 다음 항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법제6조의 ‘탈출’개념과 외국인의 국외범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비판받고 있습니다.


(4) 피고인의 경우는 본조의 ‘탈출’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본조에서의 탈출이란 반국가단체의 사실상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법은 본죄의 구성요건으로 단지 ‘탈출’이라고만 표현하고 있지 그 출발지와 도착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출발과 도착지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이에 대해 1997년에 변경된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의견은 본조의 탈출에 대해 휴전선을 통하여 입북하는 경우와 같이 대한민국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직접 북한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물론, 제3국을 경유하거나 혹은 외국에 거주하다가 북한을 방문하는 경우도 포함되며, 그 주체가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모두 적용된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대법원1997. 11. 20.선고 97도2021).


그러나 이러한 판단은 법문의 문리해석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법한 것입니다. 이 점은 위 대법원 판결당시 4명의 대법관들의 반대의견에서도 분명히 확인되는 것입니다.


본건 적용법조인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은 '…탈출한 자'라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 '어느 지역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는 물론 '어느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인지에 대하여도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탈출'의 사전적 의미는 ‘어느 지역으로부터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탈출의 통상적인 의미에는 당연히 어느 지역으로부터 이탈하여 다른 지역으로 들어가는 것, 즉 출발지와 도착지가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본조의 보호법익인 영토고권, 국가안보에 비춰볼 때, '탈출'은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는 지역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탈출에 해당하려면 원칙적으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는 지역으로부터의 이탈행위가 있어야만 합니다.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지 아니하는 지역인 외국으로부터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는 우리나라의 영토고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탈출행위가 국가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은 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탈출의 엄밀한 개념정의와는 상충되나, 처벌의 필요성과 형사정책적인 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 국민이 외국에서 북한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행위에 대해 위 법조의 탈출죄를 적용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탈출'의 개념에 출발지를 외국으로 하는 것이 포함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 국민이 그러한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지 아니하는 지역인 외국에 거주하고 있다가 그 곳에서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때에는 그가 비록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는 지역 내에 거주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형법의 속인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그에 대하여 대한민국의 추상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위와 같은 행위를 '탈출'의 개념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기 때문입니다.


종래 대법원이 본조의 특수탈출죄를 규율하면서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 외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경우라도 본조의 탈출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을 역으로 해석하면,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닌,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제3국에서 곧바로 반국가단체의 지배지역으로 자의로 들어가는 행위는 애초부터 국가보안법 제6조 제1항, 제2항에 정한 '탈출'의 개념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해석해 왔다고 이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현실적으로 미치지 아니하는 제3국에 거주하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는 경우에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 정한 '탈출'의 개념에 포함되어 처벌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은 종전 대법원 판례가 '대한민국 국민인 이상'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해석은 건전한 상식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탈출'이라는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를 벗어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가보안법이 '탈출'의 의미에 관하여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탈출'의 통상적인 의미를 벗어나서 외국인이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아니하는 제3국에 있다가 반국가단체의 지배지역으로 자의로 들어가는 행위에 대하여도 국가보안법 제6조 제2항에서 규정한 '탈출'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으로 이는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허용되는 법률해석의 한계까지 일탈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소사실 중 1993년 이후 피고인의 특수탈출위 행위는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이 부분 탈출죄에 대하여는 무죄가 선고되어야 할 것입니다.


(5) 소결


이상과 같이 피고인의 방북활동은 본건 적용법조의 해석상 결코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의 지령을 받거나 받기 위하여 또는 그 목적 수행을 위하여 협의하거나 협의하기 위하여 잠입하거나 탈출’한 것으로 평가될 수 없습니다.

  

또한 피고인이 1991년부터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이전까지의 시기에 방북한 것은 북한의 공식적인 초청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그 주된 목적은 반국가단체의 목적인 국가전복이 아니라 남과 북의 교량역할을 위한 북한사회연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특히 1991년의 방북은, 당시 서울대학교가 피고인을 초빙교수로 초청하려다가 무산된 차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역시 북한 사회과학원의 공식초청에 따른 것이었고, 공개적 · 공식적인 것이므로 피고인은 방북기행문을 한겨레신문에 기고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당시 피고인은 방북하여 내노라는 북한의 주체철학자들과 토론을 하였고, 패쇄된 사회체제인 북한에 서구사회의 학문적 경향과 철학 및 페레스트로이카 등 서구사회의 변화실상을 소개하고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북한의 노동신문은 피고인의 방북을 기사화하면서 피고인이 하지도 않은 내용을 피고인의 발언인 것처럼 보도하여 독자로 하여금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91년과 1992년에는 피고인이 관여한 한국학술연구원의 운영을 위한 지원금을 요청하고, 독일에서 북한 관련책을 써달라는 요구를 받고, 북한의 나진 선봉지구와 중국의 개혁, 개방을 비교 연구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방북하였던 것입니다. 


   나. 회합 · 통신의 점(공소사실 제4항)


검찰은, 피고인이 1996. 12.과 1997. 2. 및 1997. 4. 북한에 설명절 축하, 생일 축하 축전을 보낸 것을 국가보안법 제8조 (회합 ⁃ 통신등) 위반으로 기소하였습니다.


본조 제1항은 “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1) 외국인의 국외범 문제이므로 무죄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피고인은 1993. 8.경에 독일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검찰이 기소한 본건 연락죄는 피고인이 대한민국의 국적을 상실한 이후에 행해진 것임이 공소장 그 자체로 명확한 것이므로 아래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이 부분 공소사실은 무죄라 하겠습니다.


만약 외국인의 북한과의 연락을 모두 국가보안법으로 규율한다면 북한과 수교를 맺거나 북한과 거래를 하는 모든 외국인들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국내에서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적 모순이 생기게 됩니다.


위 1997년의 97도2021판결이 외국인에 대해서도 국가보안법 제6조의 탈출죄를 적용할 수 있다고 태도를 변경하였으나 위 판결에서 외국인에 대해 법제8조의 연락죄도 적용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본조에 대해서는 종래 대법원의 판례가 그대로 적용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반국가단체나 국외의 공산계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통신 기타 연락을 한 자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실지로 미치는 영역에서 한 자임은 물론 우리나라 국민인 이상 제3국에서 그와 같은 행위를 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것이므로 원심이 이 사건에 있어서 피고인이 외국인으로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행사되는 지역이 아닌 일본에서 소련을 거쳐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고 일본 기타 제3국에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과 총신 기타 연락을 하거나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것인 즉 이는 외국인의 국외범에 해당하여 반공법을 적용하여 처벌한 근거가 없다(대법원 1976.5. 11.선고 76도720, 1983. 2. 8. 선고 82도2672판결)”

(2) 축전을 보낸 것은 본조의 ‘연락’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무죄


본조의 연락이란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로부터 의사를 전달받거나 그에게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본죄의 본질에 비추어 외형상 의사의 전달만 있으면 본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고, 전달한 의사의 내용이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임무수행과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단순한 친척간의 정이나 친우간의 친분으로 안부를 물으며 연락하거나 하는 경우는 물론 임무수행과 전혀 관련이 없는 연락은 본죄에 해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떠한 연락이 반국가단체 구성원 등의 ‘임무수행에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 내용면에서 보면 본조 제1항의 주관적 인식요소와 관련하여 결국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본조 연락죄가 성립하려면 결국 그 내용이 반국가단체 구성원 등의 임무수행과 관련하여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지 여부’는 일반인의 상식을 가진 사람을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할 것입니다.


일반적 상식을 가졌다면, 피고인이 북한의 설명절과 김일성 주석 등 생일에 의례적 축전을 보낸 것을 가지고 그 내용에 있어서 ‘국가의 존립·안전 또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법원도 조총련 간부로 있는 자에게 단순한 신년인사와 안부편지를 보낸 경우에 반국가단체의 목적수행활동과 관련이 없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할 수 없다고 판시하고 있습니다(1993. 9. 29.선고93도1730판결).


따라서 피고인에 대한 본조 회합·통신의 점은 무죄라고 할 것입니다.


5. 소송사기미수의 점에 대하여


가. 개 요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은 황장엽이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기재된  “북한의 진실과 허위”라는 책자를 발간, 배포하자 조선노동당에 가입한 후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된 사실이 있고, ‘김철수’라는 가명을 사용한 사실이 있으며, 김일성 장례식 장의위원 서열 23위의 ‘김철수’가 피고인이면서도 1998. 10. 13. 서울지방법원에 황장엽을 피고로 하여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함으로써 법원을 속여 청구금액 상당의 금원을 편취하려고 하였으나 패소판결이 선고되어 미수에 그쳤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피고인은 ’98년 민사소송 제기는 명예회복을 위한 것이었지 금전 취득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편취의 고의와 불법영득의사가 없고, 자신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므로 법원을 기망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범죄가 되지 아니하여 무죄라고 변소하고 있습니다.   


나. 편취의 범의 및 불법영득의사의 부존재


사기죄는 재산죄이므로 재물이나 재산상 이익을 취득하고자 하는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피고인에게는 황장엽으로부터 돈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1998년 민사소송 제기 당시 피고인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주장하는 “진실과 허위”의 해당 부분 내용이 명백히 사실과 다른 것었기 때문에 즉,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닌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명예를 회복하고자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피고인이 소송을 제기한 목적은 황장엽으로부터 금전을 편취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로지 피고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이 편취의 의사나 불법영득의사가 없었다는 점은 피고인이 1심 패소후 판결 내용중에 피고인을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볼 증거가 없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자 항소를 포기한 것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한편 피고인이 민사소송을 제기하게 된 동기를 보더라도 홍성담 사건에서 유럽에 거주하는 김성수가 김철수라고 기재되어 있는 영사증명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김철수가 보통명사라고 생각될만한 자료들이 발견되자 국내의 피고인의 지인들이(특히 이 법정에서 증인으로 진술한 박호성 교수가 적극적이었음) 황장엽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명예를 회복할 것으로 권유하고, 이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에서 기획소송으로 맡아 처리한 것이었는 바, 애초부터 황장엽을 상대로 금전을 편취하겠다는 의사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피고인은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보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소송을 시작하였고, 소송과정에서 김주석의 장례식 때 해외에서 유일하게 초대된 사람이 피고인이라고 하여 오랫동안 소송이 진행된 것이고,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남쪽의 자료를 보았을 때 김철수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일수 있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황장엽이 다른 김철수를 피고인으로 지목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제3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계속하여 피고인은 ‘피의자는 소송제기 당시 본인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서열 23위로서 김철수로 행세하고 있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요’라는 검사의 질문에 대하여 ‘그렇지 않습니다. 황장엽씨의 주장은 송두율=김철수=정치국 후보위원=유럽의 대남공작책’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 조건에서 80년대말 김성수가 김철수라는 영사증명을 발견하여 나 이외에도 김철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서경원은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입북하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스스로 구주공잭책으로 지하공작을 한 번도 해 본 사실이 없고,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활동한 사실도 없기 때문에 황장엽의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한국에서 온 박호성 교수에게 위임하여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정치국원으로서의 김철수, 구주총책으로서의 김철수는 내가 아니기 때문에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1997년 이후에는 북과 저의 갈등이 고조되었기 때문에 정치국원 송두율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라고 진술하고 있습니다(16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


피고인은 이어 ‘처음부터 김철수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김철수가 본인임을 시인하는 순간 황장엽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시인할 수 없었다.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장의위원 명단에 올랐지만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나 조선노동당 구주총책이라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민사소송이 시작된 1998년에는 피고인과 북과의 관계가 소원해졌기 때문에 그럴 필요도 없었다’(검찰 18회 피의자신문조서)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민사소송을 통해 황자엽으로부터 돈을 편취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이 법정에서의 증인 박호성의 진술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박호성은 ‘1심 판결후 민변 변호사들과 나는 항소하자고 하였으나, 피고인은 일단 진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고 항소를 포기하였다. 자신은 송두율 교수에게 화가 나 1년간이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라는 취지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 기망행위의 부존재


피고인이 당시 재판에서 주장한 중요 부분인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점이 허위사실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법원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은 결코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임된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이미 충분히 밝힌 바 있어 자세한 논의는 생략하겠습니다.


당시 피고인이 스스로 노동당 가입 사실과 김일성 장례식 장의위원 김철수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피고인은 최근까지도 장의위원 김철수가 본인이라는 점에 대하여는 의심하지 않았지만 앞서 검토한바와 같이 피고인이 장의위원 김철수인지에 대하여도 의문이 있습니다) 김철수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바로 인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송의 쟁점은 피고인이 정치국 후보위원인가에 맞추어져 있어서 이는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피고인은 민사소송 재판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이 장의위원 김철수라는 점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후보위원”이 아닌 마당에 위와 같은 사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던 점을 감안할 때 이를 가지고 법원에 대한 기망행위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라. 소  결


피고인은 민사사송 제기 당시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도외에 황장엽으로부터 금전을 편취하겠다는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이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아니라는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으며 이는 허위사실이 아니므로 피고인이 법원을 기망하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소송사기미수의 점은 구성요건해당성이 없어 범죄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하므로 피고인에게 무죄판결을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6. 결  론


지금까지 검토한 바와 같이 피고인에 대한 이 사건 각 공소사실은 모두 무죄입니다. 범죄의 성립 여부 및 양형을 판단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감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가. 피의사실 공표 및 언론의 선정적 보도로 인한 여론재판의 문제점


헌법 제27조 제4항은 “형사 피고인은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고 무죄추정의 원칙을 밝히고, 형법 제126조는 “검찰·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전에 공표”한 경우에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벌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는 검사가 기소하기도 전에 피의사실공표 범죄행위가 대대적으로 자행되었습니다. 재판을 거치기도 전에 수사기관이 먼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거나,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가 아니라 노동당 고위 간부로서 남한을 적화통일하기 위한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책을 저술하며 북한을 드나들었다는 등의 피의사실 내용을 공표하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하고, 정치권은 이를 정쟁과 색깔론 유포의 수단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아직도 6.25. 전쟁의 기억이 남아 있는 우리 사회 현실에서 피고인은 제대로 항변조차 하기 전에 이미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여론재판을 받고, 일반인들은 피의사실이 유죄인 양 인식하게 되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피고인의 귀국 직후부터 수사를 담당한 국가정보원 담당자는 국정원 조사가 끝나고, 검찰에 송치하기 직전인 2003. 9. 30. 서울의 모처에서 비밀스럽게 국회 정보위원회 국회의원에게 국정원의 수사내용을 말하고 수사과정에 입수하거나 작성한 관련 자료를 제시하여,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수행 중에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하였고, 이를 들은 국회의원은 바로 다음날 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발표하였습니다(이러한 내용을 적시하여 관련자들을 형사고발한 바 있음).


이들의 피의사실공표행위가 있자 언론은 지면을 가득 채워 이를 그대로 받아쓰며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피의사실을 대서특필, 반복적으로 보도하였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피고인의 학문적 성과는 아무런 학문적 소양과 자격이 없는 수사기관에 의해 주체사상을 남한에 전파하기 위한 것으로 매도되었고, 독일통일을 지켜보며 남북의 화해를 갈구한 해외동포학자로서 남북학술대회를 준비하고 개최해왔던 피고인의 열정 또한 노동당 간부의 공작활동으로 치부되었습니다. 피의사실공표행위로 비롯된 여론재판과 색깔론 시비로 인하여, 피고인은 수사과정에서 방어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수사기관과 언론에 의하여 이렇듯 공공연히 인권침해가 일어나는 것은 이제 국제적 비난의 대상까지 되었습니다. 


피고인은 이 법정에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노력하였습니다. 피고인은 법원이 지금까지 수사기관, 언론, 정치권에 의하여 자행된 여론재판으로부터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고 진실에 입각하여 엄격하게 판단하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나. 피고인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가족을 동반한 채 귀국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과정 및 남북화해의 진전 과정을 외국에서 지켜보았으며 이제는 조국이 자신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2003. 9. 귀국하였습니다.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청운의 꿈을 가지고 유학을 갔던 피고인이 60세의 초로가 되어서야 고국에 돌아왔습니다. 피고인은 과거의 행적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우리사회에서 포용되어 궁극적으로는 말년의 삶을 통해 민족의 화해와 통합을 위하여 학문적, 실천적으로 기여하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고 여러 가지를 모색하기 위하여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피고인을 조국은 국가보안법이라는 구시대의 유물을 가지고 맞이하였습니다.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피고인은 반국가단체의 주도적 임무에 종사하는 자로 낙인이 찍혔고, 피고인의 진보적이고 독일 학계에서도 높이 평가받고 있는 학문세계 및 피고인이 필생의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한 남북해외 통일학술회의 등이 모두 그 진정한 취지와는 무관하게 냉전시대의 유물인 흑백논리로써 재단되어 버렸습니다.

     

다. 피고인은 대한민국 헌법 및 법체제를 준수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밝힌 바 있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합니다.


피고인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선택하였으며 고향이 있는 남쪽에 들어와 정착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습니다.


라. 한 해에도 수만명이 북을 오고가고, 북한의 고위 당국자들이 수시로 남한측 인사들과 만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북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고위 당직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민간교류에 대하여 북한 당국은 통일전선적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족 통일이라는 과제와 시대적 추세에 반하는 것입니다. 한반도 정세의 변화와 평화정착은 꾸준한 교류와 심지어 이용당하는 것 같을 경우에도 신뢰의 끈을 놓지 않는 인내심을 통하여 진행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칸 전쟁, 이라크 전쟁 등과 같이 미국과 북한 사이에도 전쟁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한반도에서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활발해진 남북교류 덕분에 전쟁 발발이 억지되고 평화가 유지되고 있는 면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고인이 남은 여생의 화두로 잡은 것이 남과 북의 지식인간의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 증진 및 이를 통한 화해의 진전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피고인의 활동은 변화하고 있는 남북관계 및 한반도 정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변화에도 부합하는 것입니다. 피고인처럼 30년이 넘게 해외에서 남과 북 모두를 겪어 본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민족의 화해와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은 우리 민족과 사회를 위해서도 큰 이익이 되는 것입니다. 피고인과 같은 실천적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입니다.

마. 국가보안법과 학문,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피고인의 학문적 저술이나 활동에 이적성이 없음은 이미 밝힌 바와 같습니다. 학문활동에 대하여 이적성이라는 이념적, 법률적 기준을 들이대는 것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와 개념상으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학문, 사상의 자유가 헌법상 기본권으로 보장되고 있는 것은 학문, 사상 영역은 자유로운 의견개진과 상호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될 때라야 발전이 가능하고, 자유로운 학문, 사상, 표현의 자유가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민주적인 사회로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피고인이 작성한 글은 분류하자면 합리적 진보에 가까우며 이적성을 논위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 것도 아닙니다. 피고인이 1990년대 중반 이후 국내 학계에서 광범하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피고인의 합리성과 진보성 때문입니다. 피고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이미 피고인의 학문적 결과물과 활동을 수용할 정도의 다원성 및 포용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 사건을 통하여 명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학문적 활동은 학계에서 논의되어 학술적 검증을 받아야 할 사안이지 법률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진행하여온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을 고려할 때 한 학자의 이적성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로 특정한 글이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시대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하여는 국내, 외 학계와 각급 사회단체 모두 이구동성으로 공감하고 탄원서등을 통하여 법원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의 스승인 하버마스, 노벨상 수상자인 귄터그라스 등 세계 각국의 양심적인 학자, 지도자들이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현재 이 재판의 결과는 국제적인 관심사이기도 합니다.


국내 학계와 사회단체 역시 피고인의 학문활동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에 대하여 우려를 나타내면서 구명운동을 전개하고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바. 피고인의 인생 역정과 이 번 사건은 우리 민족 및 사회의 역사적, 구조적 모순이 반영된 상징적 사건입니다. 피고인의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의 현단계 성숙정도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피고인의 문제를 전향적으로 해결하였을 경우 우리 사회의 이념적 성숙과 사회구성원간의 통합수준은 분명 한단계 질적인 도약을 이루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피고인이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 들어오지 못한 것이나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인’으로서 살아온 것은 피고인의 삶 그 자체가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체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국 사회가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진전에 힘입어 오늘날과 같이 성장, 발전하여 온 데에는 피고인과 같은 숨은 공로자들의 노력과 희생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아직 고국에 완전하게 돌아와 정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고인과 같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노력해온 해외동포들이 고향에서 정착하도록 보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아쉽게도 피고인의 귀국 이후 우리 사회가 보여준 모습은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새로운 비젼을 협의해 나가는 발전적인 방향이 아니었습니다. 피고인의 귀국 이후 우리 사회가 겪은 극심한 이념대립, 냉전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론몰이, 피고인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의 구태의연한 모습들은 피고인을 비롯하여 남북관계의 성숙과 발전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법원의 판결 결과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변화한 현실을 반영하고 현실을 전향적으로 선도하는 법원의 사법적극주의적인 판단을 기대해봅니다. 현단계 남북관계와 시대적 추세는 국가보안법위반죄의 성립을 엄격하게 제한, 최소화할 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을 포용하고 우리 사회에서 자유롭게 학문활동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부둥켜안고 씨름하고 있는 민족적 아픔을 치유하고 우리 민족과 사회가 민주주의와 학문 사상의 자유, 화합과 통일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피고인이 자유의 몸으로 학문활동을 전개할 수 있을 때에야 우리 사회는 국제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훌륭한 학자를 떳떳하게 우리의 학자로 보유하게 되는 것이며, 민주화된 우리 사회의 역량을 국제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 피고인은 40녀년간의 타향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피고인의 인생은 이국 땅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민족의 통일을 고민하며 살아온 줏대있지만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피고인의 인생 역정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영욕과 궤적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사상과 양심에 따라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한 길로 한 생을 정직하고 올곧게 살아왔습니다. 피고인이 지금에 겪고 있는 어려움은 피고인의 삶의 결과이자 우리 민족과 사회가 지고 있는 십자가이기도 합니다. 우리 민족이 가슴속에 켜켜이 쌓아두고 있는 한과 고통이 지금 피고인이 처한 상황속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이제는 지나간 세월의 곤난함과 아픔을 뒤로 하고 새로운 미래를 향하여 도약해야 할 때입니다. 어렵게 한 걸음 한 걸음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내딛고 있는 지금의 우리들에게 피고인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할 중대한 숙제입니다. 누가 피고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피고인의 사상과 양심을 법률의 이름으로 단죄한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질병이자 아픔입니다.


피고인으로 하여금 고국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지나간 역사에 대한 참회이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작은 첫출발이 될 것입니다. 피고인은 한평생 고국에 돌아와 살기를 간절히 소원하여왔습니다. 젊은 시절에 피고인을 좌절하게 하고 한평생 이국땅에서 살 수밖에 없도록 한 조국이지만 피고인은 조국을 사랑하였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하였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의 학문적인 능력이 조국을 위하여 긴요하게 사용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길에 올랐던 청년 송두율이 어느새 60세의 노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에게는 지금의 나이가 많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피고인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고 앞으로 더 많이 우리 사회와 민족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러한 열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지금 가지고 있는 소박한 소망은  고국에 돌아와 뜻있고 노력하는 후배를 양성하고 지식인으로서 우리 사회의 아직도 깨이지 못한 부분을 개화하는 일에 노년을 헌신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피고인과 같은 세계적인 석학이 평생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마음껏 자기 능력을 펼치고 봉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시오. 피고인과 같은 지적 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큰 손실입니다. 피고인이 평생 갈고 닦은 지적 능력을 말년에 마음껏 조국에서 꽃피울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은 조국이 굴곡많은 한평생을 중심을 지키며 살아온 노학자에게 줄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선물이 될 것입니다.   


아. 마지막으로 송두율 교수의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원로 인사들의 성명서 한 구절을 인용하며 변론을 맺고자 합니다.


“이제 고국에서 살기를 간절히 원해온 사람을 고국에서 편안히 살게 하라. 이제 고국에서 동포들과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랑을 나누게 하라. 송두율 교수에게 고향의 흙냄새를 맡으며 자유롭게 숨쉴 자유를 주라.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눕힌다고 한다. 송교수로 하여금 사랑하는 조국에서 시름많았던 생애를 뜻있게 마무리하게 하라. 송교수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고국’의 모습을 보여주라. .... 송두율 교수를 자유의 몸으로 풀어줌으로써 우리도 남북분단의 역사가 던져준 무거운 굴레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2004.  3.  9. 


                                                피고인의 변호인

                                                법무법인 덕수

                                                담당변호사  김   형   태


                                                    변호사  진   선   미


                                                    변호사  이   정   희


                                                    변호사  송   호   창


                                                    변호사  윤   영   환


                                                법무법인 정평

                                                담당변호사  박   연   철


                                                    변호사  심   재   환


                                                변  호  사  안   영   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제24부   귀중.


1) 김경필의 망명 이유도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