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경계인을 투사로 내몰다
"판사 한 사람이 나의 진실을 심판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의 방향을 느끼며 오늘 법정에서
일어난 일은 물방울 하나가 바위에 튀는 것으로 느낍니다."
지난 3월 30일 징역 7년이 선고된 송두율 교수가 서울구치소로
돌아간 후 충격을 가라앉히고 지인들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다.
신체적-심적으로 지칠 대로 지쳐 혹여 항소를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우려를 씻고 송 교수 본인이 항소의사를 밝힌 것이다.
국정원의 체포영장이 발부된 채 37년 만에 내디딘 고국땅에서
2개월간 국정원과 검찰을 오가며 조사받고 끝내 1평 공간에 갇힌
'경계인'은 이후 4개월에 걸친 재판에서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냈지만 결과는 7년이라는 중형이었다. 송 교수가 옳다고 믿고
했던 말들은 법률적 의미에서는 모두 '범행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음'으로 받아들여졌다.
"이중적 판결" 이번 판결에 대해 송 교수측과 검찰은 모두
'이중적 판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변호인측은 판결 선고 후
"재판부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최고위급)'과 '상층 통일전선
대상(포섭 대상)'이라는 배타적인 두 개념을 양립할 수 있다고
판시하면서도 타당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처음부터 유죄 예단을 갖고 판단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다.
변호인측은 "송 교수가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지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재판부가 판단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황장엽씨가 전해들은 말 등 송 교수가 후보위원임을
입증하는 증거들의 증명력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판결 부분도
이중적이라고 지적했다. 황장엽씨가 김용순 전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로부터 전해들었다고 하는 "송두율이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더니 건방지게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부분 등은 유죄 인정의
중요 증거여서 그 증명력 여부를 놓고 항소심에서도 다툼이
예상된다.
남북학술대회와 저술활동을 통해 주체사상을 전파하려 했다는 점에
대해 재판부가 전자를 무죄로, 후자를 유죄로 한 부분 역시
모순된다고 보았다. 재판부가 학술대회를 남북한 교류에 이바지한
점을 인정했다면 저술활동 역시 그렇게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검찰은 '이중적'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뿐 역시 판결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후보위원으로서의 저술활동을 지도적 임무
종사로 인정하면서도 같은 목적으로 행한 학술대회 부분을 무죄로
보아 형량이 7년밖에 안 나왔다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주체사상을 전파하기 위한 지도적 임무 종사인데 그렇다면 둘 다
유죄가 나와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 이대경 부장판사는 양측의 불만에 대해
"후보위원과 저술활동은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하지만 학술대회는
송 교수의 역할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며 고심한 흔적을 알아주지
않아 섭섭하다는 표정이다.
검찰과의 신경전, 거품 보지 못한 재판부 이번 사건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검찰과 송 교수 간의 불필요한
신경전으로 인해 문제가 다소 부풀려졌음에도 재판부가 이를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검찰은 수사 단계에서 송 교수를 소환해 차가운 구치감에
포승-수갑을 묶은 채 한 시간 가량 세워두곤 해 '공포감'을 맛보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송 교수처럼 현란한 수사(修辭)로
신문을 피해가는 까다로운 피의자와 의 '기싸움' 과정에서 쓰는
수사관행이지만 송 교수측은 '구치감에서의 계구 사용은
인권침해'라며 수사검사 등을 상대로 6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것으로 맞받았다. 검찰은 지금도 이에 대해
"왜 그렇게 많이 달라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며 몹시 불쾌해하고
있다고 한다.
검찰은 급기야 송 교수 구형 이후 과거에 무기징역이 선고된
'김낙중 사건', '깐수 사건' 등 다른 간첩 사건 판결문을 재판부에
보내며 막판 형량 올리기에 주력했다.
양측의 신경전이 극명하게 드러난 사례는 송 교수가 1998년
황장엽씨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낸 것을 검찰이 사기미수 혐의로
막판에 기소사실에 포함시킨 것. 형법 제5조에는 외국인이 외국
영토에서 범한 죄 중 형법의 적용을 받는 경우로 내란-외환 등 7개
범죄가 규정돼 있는데 사기범죄는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 잘못된
법률 적용으로 인한 기소를 재판부 역시 별 이의없이 유죄로
인정해버린 채 중형 사유에 포함시켜버린 것이다.
법관 재량으로 최저 징역 2년 6개월까지 선고할 수 있었던
상황에서 재판부의 중형 선고는 비록 유-무죄 확정에 있어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지만 검찰과 법원이 '한통속'이라는 일반의
오해를 키우고 말았다.
건재한 국가보안법 송 교수 입국으로 국민은 한 물 간 줄로만
알았던 국가보안법과 국가정보원의 대북 기능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점을 재확인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금강산 육로관광 등
남북한 화해 분위기 속에서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국가보안법은 폐지되든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변해야 한다는
견해가 주류였다.
그러나 이제는 '송두율의 행위와 같은 친북행위를 처벌하기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인식이 대중적으로
확산됐고 구시대 법률로 간주됐던 국가보안법이 다시 힘을 얻게
됐다. 이 사건이 지닌 최대의 부작용임에 틀림없다.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남북한 관계가 개선될수록 송 교수가 행한
것과 같은 행위가 무수히 생겨날 수 있으므로 그러한 행위를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왜 문제를 지니고 있는지 대중적으로
설득해나가는 것이 민주진보 세력의 올바른 대응책"이라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항소심부터는 법정공방과 함께 국가보안법에 대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하는 등 장외투쟁도 병행할 방침이다. 4월
7일에는 국가보안법 3조 1항의 간부 기타 지도적 임무종사에 관한
죄에 대해 헌법소원을 낼 예정이다. '기타 지도적 임무'의 범위가
모호해 죄형법정주의에 어긋나 위헌이라는 이유에서다. 이어서
국가보안법 6조 1-2항(잠입-탈출의 죄)과 8조 1항(회합-통신의
죄)은 '탈출'할 경우 자동적으로 '통신'의 죄를 범하게 되는데
가중처벌하는 것은 '이중처벌'에 해당돼 위헌이라는 헌법소원도 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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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계속된다
송 교수는 왜 귀국했을까. 일각에서는 '기획입국설'마저 제기된
상태이고 검찰 역시 조만간 이 부분을 수사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중앙지검 박만 1차장은 "추방은 법무부가 정책적으로 하는
일이므로 수사팀이 말할 문제가 아니고 입국배후설에 대해서는
1심선고가 났으니 슬슬 조사해보겠다"고 말했다.
변호인들은 송 교수의 귀국을 귀소본능과 흐려진 판단력 때문으로
보는 듯하다. 송호창 변호사는 "다른 측면도 있을 수 있지만
환갑을 앞두고 학자로서의 가동연한이 길어야 5년 남짓일 것이라는
생각과 다소 흐려진 판단력 때문에 앞뒤 재지 않고 결심한 것
같다. 게다가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며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가
거세어지는 등 한국 사회의 변화 분위기가 해외에는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현실인식이 다소 순진했다는
것이다.
또한 송 교수의 지인들이 한결같이 하는 얘기는 송 교수는 마음
약한 학자일 뿐, 결코 주도면밀한 공작원 혹은 선전이론가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호성 서강대 교수는 "송 교수가 차라리
판결문과 공소장에 묘사된 것처럼 주도면밀하고 신념에 찬
'투사'라면 좋겠다. 그러나 사실은 단지 유약한 학자일 뿐이어서
정말로 중도에 포기하자고 하지 않을까 걱정됐다"고 털어놨다.
송 교수가 노동당 입당 사실을 숨긴 것도 치밀한 계산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내재적 방법론에 따른 북한 연구를 위한 통과의례
정도로 여겼던 데다 이제는 30년이나 지난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것.
그런 송 교수가 이제는 점점 투사가 되어가는 느낌이다. 송 교수는
판결선고 후 쓴 옥중 편지 끝에 "Lotta Continua!(투쟁은
계속된다!)를 다시 외칩니다"라고 썼다.
손제민〈사회부 기자〉 jeje17@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