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희 의혹규명 때가 왔다”
=[사람 속으로]KAL기 폭파사건 다룬 소설 ‘배후’ 저자
서현우=
불교의 구사론(俱舍論)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 그 영혼은 다음의
생(生)을 받기까지 49일 동안 허공을 떠도는데 그것을 중음(中陰)
또는 중음신(中陰身)이라고 한다. 49재(齋)는 망자(亡者)의 영혼이
그 기간 동안 괴로움을 벗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이고득락(離苦得樂)’의 상태로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무려 16년 동안을 중음신으로 떠돌아다니는 115위(位)의 원귀들이
있다. 87년 11월29일 미얀마 서쪽 벵골만 상공에서 북한
테러리스트 김현희에 의해 폭파된 KAL 858기의 승객과 승무원이
바로 그들이다. 유품 한 점, 비행기 잔해 한 조각 건지지 못한 채
수많은 의혹을 남긴 뒤 당시 정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사망처리된
이들의 영혼이 좋은 곳으로 갔을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의문투성 “소설로 공개수사”-
천주교 신부 200여명이 사건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여러 시민사회단체들도 이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KAL
858사건을 다룬 소설 ‘배후’가 발간되면서 더욱 국민적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국가정보원 현직직원 5명이 ‘배후’가 사실을
왜곡하고 자신들의 명예를 손상시켰다며 저자인 서현우(41)에 대해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4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열렸던 KAL 858기 폭파사건 진상규명위원회의 사회단체
초청 간담회를 마치고 나온 서현우를 만났다. 인터뷰는 경향신문
편집국 접견실에서 있었다.
서현우는 ‘배후’의 집필 동기에 대해 “학생운동했을 때의
열정과 민주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사명감 때문”이라고 말했다.
부산 동의대 정외과 재학시절 학생운동에 참여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그는 볼링장 주인이라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 87년 6월 항쟁에 몸을 던졌다. 서현우는 “KAL 858기
폭파는 16년 만의 대통령직선제 쟁취에 대한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은 실로 중대한 사건이었다”면서 사건 직후부터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평소 글쓰기를 좋아하는 서현우는 국내 신문기사와 외신자료 등을
모으면서 ‘초동수사’에 착수했지만 이때만 하더라도 소설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가 이 사건을 소재로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2001년 수지김 사건이 안기부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됐음이 검찰에 의해 확인되면서부터였다. 서현우는 “KAL기
사건이 수지김 사건처럼 조작됐다고는 단언할 수 없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의혹투성이인 만큼 이를 대중들에게 널리 알리려면 소설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 2권으로 된 ‘배후’는 주인공인 안기부 해외공작원
조용훈(암호명 해모수)이 안기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꾸며낸 KAL기
폭파사건(암호명 H-017작전)에 참여한다는 내용이다. 성공적으로
공작을 끝낸 안기부는 비밀유지를 위해 조용훈을 제거하려 하고
주인공은 이에 맞서 역공작을 시도한다. 남산의 테러위협에 쫓기던
조용훈은 그동안 자신의 공작대상이었던 해외 민주화운동의 본질을
깨닫는 등 정치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미국 CIA와
구소련의 KGB 등 각국의 정보기관이 서로 얽히고 설키며,
율곡사업의 이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소설의 무대도 방콕,
아부다비, 바그다드, 워싱턴, 니스 등 세계 여러 도시가
등장하는데 이는 여행을 ‘몹시 좋아하는’ 서현우가 직접 가본
곳들이다.
지난 5월 출간된 ‘배후’는 최근 2판을 찍을 만큼 독자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서현우는 “내 책이 진상규명운동에 의미있는
촉매역할을 했다는 데 적지 않은 보람을 느낀다”면서 “특히
희생자 가족들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반갑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16주기 추도식에 참석했을 때
가족들이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는 것을 보고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현우는 이들이 아직도
스스로를 ‘유족’이 아닌 ‘가족’으로 부르고 있는 데 대해
“납득할 만한 진상규명작업 없이 일방적으로 당시 정권에 의해
‘사망처리’된 것에 대한 항거의 뜻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국정원직원 소송제기로 관심 증폭-
서현우는 희생자 가족들이야말로 어느날 졸지에 가장을 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보살핌과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인데도 사회적
무관심과 당국의 냉대 속에서 가슴에 피멍이 들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2년 전 희생자들의 14주기 추도식에 참석했던 그는
참으로 웃지못할 코미디를 목격했다. 극우단체 회원들이 “사건이
조작됐다는 등 빨갱이 같은 소리를 하느냐”며 식장에 들어와
난동을 피웠던 것이다. 이에 가족들은 “우리는 빨갱이에 의해
가장을 잃은 사람들이다. 그 빨갱이를 처벌하기는커녕 영웅대접을
한 게 도대체 누구냐”며 격렬하게 대들었다고 한다.
서현우는 국정원 직원들이 자신과 출판사측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데 대해 “피소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이상 법정을 진실규명의 공간으로 삼겠다”며 결의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사회적 고비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천주교 사제들이 대거 진실규명 작업에
뛰어든 데다 민변을 비롯한 주요한 사회단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이제 KAL 858기
사건의 실체를 드러내보이는 일은 ‘거스를 수 없는 큰 파도’가
됐다는 것이다.
-진상 밝혀진뒤 ‘美 세계지배’ 작품 쓸것-
실제로 천주교회는 오래 전부터 진상규명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소설이 출간된 지 3개월 뒤인 지난 8월 서현우는 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천주교 청주교구 신성국 신부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다. 그는 전국의 여러 천주교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미사 중간에 자신이 추적한 내용을 중심으로 강연을 하면서
신자들을 상대로 여론화 작업을 했다.
KAL기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질문에 서현우는 “100% 실체적
진실이야 앞으로 규명해봐야 알겠지만 안기부의 수사발표와
처리과정을 놓고 보면 거짓과 허위로 점철됐으며, 이성과 상식이
전도된 세계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사건”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빠른 속도로 담배를 빨아들였으며 목소리는 더욱
격앙됐다. 그는 안기부 수사발표에서 드러난 갖가지 의혹은 더이상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면서 “고귀한 인명이 115명이나 희생된 대형
항공기 참사에 대한 조사를 고작 10일 만에 종료한 것은 세계
항공기 사고 중 유일한 것”라고 말했다.
수사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보상절차가 끝났고, 김현희에 대한
재판도 하기 전에 사면설이 흘러나왔으며 대법원 사형확정판결
15일 만에 사면이 된 것은 도대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그는
흥분했다. 한국물정 잘 모르는 ‘어수룩한’ 송두율 교수는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고,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김현희는
미모다 뭐다 해서 마치 영웅취급을 받은 이 현실이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서현우는 울산에서만 17대째 살고 있는 토박이다. 울산의
지역특성상 외지인이 80%가 넘지만 적어도 울산토박이들에
대해서는 집에 숟가락 젓가락이 몇 개 있는지까지 훤하게 꿰고
있다. 볼링장, 영어학원도 운영했고 신용협동조합도 설립했으며,
울산 지역월간지 ‘울산아침’의 발행인과 편집인도 지내는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습작을 통해 키워온 작가에의 꿈을
마침내 ‘배후’로 일궈냈다. 그는 진상규명위원회 조사팀장의
일이 일단락되면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쓸
계획이다.
진상규명위의 활동이 급물살을 타면서 서현우는 요즘 1주일 가운데
6일을 서울에서 보내고 단 하루만 울산 집에서 머물고 있다.
서울에서는 천주교 신부들의 사제관이나 출판사 관계자들의 집에서
동가식 서가숙 하지만 고생스럽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그는 “이제 (진실이 규명될) 때가 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몇 번씩이나 끊어졌다. 진상규명위 및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휴대폰으로 끊임없이 서현우를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편집국에 들어설 때 여행용 가방을 들고 있었던 그는 “자료수집을
위해 날이 밝자마자 일본으로 떠난다”고 말했다.
〈손동우기자 sdw@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