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 저서 독후감 공모전
  제목    <송두율 교수 재판> 관람기(6)
  글쓴이 장시기 글쓴날 2004-01-28 19:23:18 조회 1668

<송두율 교수 재판> 관람기(6)

   <조선일보>도 변하고 있다. 너무 낙관적인지는 모르지만 그
동안 “해방 이후 최대간첩 송두율” 운운하면서 존칭 한번
사용하지 않던 <조선일보>가 지난 재판 과정을 기사화 하면서
“송두율 씨”, 혹은 “송두율 교수”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조금이나마 변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시도한다. <조선일보>의
변화가 단지 송두율 교수에 대한 호칭만이 아니라 재판과정의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내용의 변화로 이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 더불어 사는 길일텐데... 지난 <송두율 교수
재판> 과정은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조차도 유지하기 힘든
“보수언론ㆍ공안검찰ㆍ한나라당 정치인”의 자작극이며
음모였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루라도 빨리
“조ㆍ중ㆍ동”의 보수언론이 우리 사회와 세계, 그리고 민중의
변화를 감지하고 송두율 교수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사과하고
“더불어 사는 신문”이 되었으면 하는 소원이 헛된 꿈이
아니었으면...

   그러나 2004년 1월 27일의 <서울지방법원> 311호 법정은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대로다. “자유총연맹” 표시가 있는 모자를 쓴
할아버지들이 졸리운 듯이 앉아있고,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지식인 재판”의 야만성을 목도하고자 하는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원회> 사람들과 <민가협> 어머니들, 그리고 이름모르는
대학생들은 담소를 나누면서 재판을 기다린다. 한 나라의 법률이
판사와 검사를 위한 법률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이 국민과
국가를 위한 법률이라면, 법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만 한다.
그런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도 할 줄 모르는
주임판사는 여전히 청중들을 위협하며 “웃지 마세요”라는 말을
반복하고, 검사들은 수많은 학자들이 앉아있는 곳에서 송두율
교수의 『역사는 끝났는가』(당대 1995)라는 저서에 등장하는
“역사”라는 단어가 “사회주의 역사”를 의미하지 않느냐고
우긴다. 주임판사가 웃지 말라고 위협을 했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웃음을 어찌하란 말인가?

   오늘의 변호사 측 증인은 제 2차에서 6차까지
<남북통일학술회의>를 주최했던 권만학(경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와 송두율 교수의 저서들에 대한 학문적 이적성을 식별하기
위한 박순성(동국대 북한학과) 교수였다. 권만학 교수는 지난 번에
증언했던 길승흠 교수와 마찬가지로 <남북통일학술회의>의
진행과정과 “6ㆍ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화해의
분위기를 설명한다. 지난 번에 등장했던 “사전 지뢰제거 작업”을
이야기하고 남한과 북한의 학자들이 서로 귀에 거슬리는 단어나
문장을 제 3의 표현으로 바꾸었던 작업을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송두율 교수가 남북 학자들의 화해와 합의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송두율 교수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북통일학술회의>를 대남통일전선의 선전ㆍ선동의 장으로
활용했다는 자신들의 언어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1995년부터
6회에 걸쳐 베이징, 베를린, 그리고 평양에서 남한과 북한의
학자들이 모여 상호화해와 제 3의 언어에 대한 합의를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지방법원> 311호 법정에 있는 검찰은
화해와 합의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

   화해와 합의, 그리고 평화와 통일은 “나”가 아닌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의의 기본은 타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도대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권만학 교수도 더
이상 객관적인 사실 전달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던지 “송두율
교수는 학술회의 과정에서 북측 편에 앉아있지 않고 우리 측 편에
앉아있었다”고 말한다. 청중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검찰은 한
동안 질문이 없다. 주임판사의 눈이 청중을 훑는다. 나는 순간
움찔했다. “웃지 마세요. 나는 지난 번에 퇴장당한 사람의 원인을
제공한 측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측이
어디라는 말인가? 궁극적인 원인은 국가의 대통령과 국민도
무시하는 <국가보안법>이지 않은가? 주임판사의 눈과 마주치자
소름이 오싹 끼친다. 그의 언어도 화해와 합의, 그리고 평화와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대립을 지향하고 있다. 그의
눈에는 대립과 투쟁만이 보이는 것 같다. 그에게 큰 소리로 말하고
싶다. “변하시오. 제발 변하시오. <국가보안법>의 장례식을
치루고, 통일의 나무가 싹트게 하시오. 우리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원회> 사람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한 지식인의 생명을
구하고 우리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 서로서로 친구들이 되어
웃음을 나누고 있습니다.”라고...

   판사의 법복이 강요하는 순간의 긴장이 풀어지자 졸음이 왔다.
박순성 교수의 목소리에 깨어나자, 갑자기 강의시간에 조는
학생들이 생각난다. 그렇다. 아버지나 판사, 혹은 교수의 권위는
웃음과 화해 속에서 상호이해하려는 “내재적 마음” 속에서
우러나는 것이지 외부에서 강요하는 아버지나 판사라는 이름, 혹은
강의실이나 법정이라는 외재적 권력의 환경이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박순성 교수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은
“실증적이고 경험적인 내재적 자료들에 기초하여, 그 사회의
작동원리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는 내재적 접근의
대표적인 예로 문화인류학자인 루이 뒤몽의 인도연구를 제시한다.
루이 뒤몽은 서구적 시각으로 인도를 보았던 관점에서 벗어나
인도사회의 내부적 시각에서 인도를 바라보는 연구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가 속해 있는 서구사회의 근대화와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분제도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변호사들과 여러 청중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을 한다.
박순성 교수는 북한에 대한 연구가 1950년대까지 “사회주의
연구”였는데, 1960년대 <국토통일원>이 생기면서 서구적인 “냉전
이데올로기”의 관점으로 바뀌었고, 1990년대 이후 송두율 교수의
영향으로 여러 학자들의 내재적 접근법의 연구성과가 나타났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결과로 서구의 학자들조차도 북한의
“주체사상”을 서구의 근대화와 자본주의화에 대항하는 강력한
“제 3세계 민족주의” 사상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체”라는 언어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
영어표기를 사용한다. 송두율 교수가 『역사는 끝났는가』에서
인용하는 후쿠야마의 “역사는 끝났다”라는 말과 더불어 미쉘
푸코의 “주체의 죽음”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전 지구적으로
서구화되어 있는 오늘날, 서구인의 관점에서 서구적 근대성의
핵심인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주의의 역사와 주체는 끝났고, 이미
죽었다. 그러나 비서구ㆍ유색인ㆍ여성의 역사와 그들의 주체도
더불어 끝나고 더불어 죽었는가? 아니다. 그들이 대립과 갈등,
그리고 폭력과 전쟁으로 일관되었던 서구적 근대의 역사나 주체와
다른 평화와 화해, 그리고 공존과 상생의 새로운 역사와 새로운
주체를 만들 것이다.

   우리 한반도에는 서구적인 시각의 남한과 비서구적인 시각의
북한, 영어를 공부하기 위하여 혀 수술까지 하는 백인의 시각과
유색인의 시각, 그리고 역사의 주인이었던 남성의 시각과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여성의 시각이 공존한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인데, 그러한 희망의 싹을 제공한 송두율 교수는
서구ㆍ백인ㆍ남성의 시각으로 무장한 검찰에 의하여 재판에
회부되어 있다. 이 고통이 지나면 희망의 미래가 있겠지...
    
   꿈을 깨게 만든 것은 또 검찰의 엉뚱한 질문이었다. 질문은
“내재적 접근법이 자족적인 연구방법이냐?”라는 것이며,
“그렇다면 왜, 송두율 교수는 30년 동안 북한을 연구하면서
완전한 연구 성과가 없느냐?”는 것이다. 박순성 교수는 “이
세상의 어떤 학문적 연구방법도 그 자체로 자족적인 연구방법은
존재하지 않고, 내재적 접근법은 연구방법론인 동사에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이라고 설명한다. 서구의 근대성에 의하여 이식된
냉전 이데올로기의 세계관이 아니라 화해와 상생의 관계를
추구하는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 완전한
연구성과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송두율 교수의 국내에 소개된
8권의 책은 연구성과가 아니고 무엇인가? 책을 읽지도 않고, 귀가
있으되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검찰들은 도대체 언제 변화와
새로움의 물결을 탈 수 있을까? 그 길은 너무나도 멀다. 수많은
정보가 넘쳐흐르는 세상에 새롭고 창의적인 연구는 없이 독점적인
국가정보로 국가의 안녕과 질서를 따지는 저들이 변화하는 길은
너무나도 아득하다. 검찰과 판사는 미친 듯이 횡설수설대는
오길남씨의 지난 번 비공개 증인심문과 마찬가지로 이중간첩
노릇을 한 최창동씨의 비공개 증인심문을 채택했다. 재판은 밤
10시 10분이 되어서야 끝났다.

   다음 재판은 2월 10일 오후 2시에 있다. 검찰이 너무 수세에
몰렸다고 판단했는지, 전혀 예정에 없던 새로운 증인 두 명이
출두한단다. 다음 재판에는 한번 크게 웃어보고 싶다. “평양성에
해 안뜬대도/ 웃은 죄밖에...” 더 있을라고...


[매일경제] 변호인 입회없이 작성 송두율씨 조서 증거불인정 (2004.1.28.)
[연합뉴스]변호인없이 작성한 宋교수 조서 `증거 불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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