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의 구속과 재판에 대해 독일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주희 시민의신문
독일통신원이 지난 6일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된 '경계도시' 상영과 토론회에 다녀온 참관기를 보내왔다. 이날 행사에는 송 교수의 아들 송린
박사와 정당인, 학계, 해외교포 등이 참석, 구시대적 유물인 국가보안법 폐지와 송 교수의 석방을 요구했다. NGOTIMES는 시민의신문
532호(2월 16일자)에 실릴 이주희 통신원의 참관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경계도시였던
베를린. 냉전의 첩보전이 불꽃 튀던 곳.
이제는
경계도시가 된 서울. 베를린-서울. 지금 이 두 공간과 시간대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 이유는 독일수상 슈뢰더 때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송두율 교수 때문이다.
베를리날레(54차
베를린 국제영화제, 2004.2.5-15)가 열리는 베를린을 향해 필자는 오랫만에 발걸음을 옮겼다. 필자가 떠나있던 이곳 베를린은 어느새
건물들이 새 단장을 하였고, 특히 허허벌판, 한 광야의 구석같던 바로 포츠담거리에는 최신식 건물들이 차곡차곡 들어서 있다. 전차 역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소니(SONY)센터, 여러 극장 간판이 걸려있는 시네막스, 필림의 집 등. 네온사인간판들이 보이고, 분주히 자동차들이 지나고 있었다.
필림의 집을 디지탈카메라에 담으면서 필자의 일은 시작되었다.

송두율 교수를 주제로 한 '경계도시'가 상영된 '필림의 집' 극장. <이주희 통신원>
송두율교수를 주제로 한
“경계도시”(홍영숙 감독작, 2002년)가 상영될 필림의 집 지하로 들어섰다. 흔히 극장에서 보듯, 젊은이들이 앉아 있거나,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팜플렛이 널려있었다.
2004년
2월 6일, 오후 5시30분. 아르세날 극장앞
곧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고, 관객들이 천천히 몰려들었다. 여느 극장과 달리 흥분에 들떠있는 분위기를 느끼기 보다, 뭔가 차분하고, 기대가 넘친 듯,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송두율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팜플렛 등이 여기저기 걸려있었다. 내용들은 국가보안법의 부당성과 송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 등이 주를 이뤘다. 특히 필자의 눈에 띈 것은 한스-크리스챤 스트로벨레(녹색당 원내 부총무) 연방의회의원이 이대경 판사에게 보낸
탄원서였다.

"당신의 서명이 송두율 교수의 석방과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가져옵니다"라고 씌인
서명
대
<이주희 통신원>
베를린에
지역구를 갖고 있으며, 기초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했던 그. 이라크전쟁이 일어나기 전, 끝까지 전쟁반대, 참전반대를 외쳤던 그. 필자 자신은 원칙에
충실하고, “녹색정신”에 원뿌리를 복원하려는 그의 외로운 노력에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고, 기초지역구민의 열렬한 성원으로
다시 독일의회로 들어선 그. 반갑기 그지없었다. 지금은 죽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같은 녹색당의 창립멤버 패트라 켈리가 있었다면, 그녀도
분명히 송 교수의 석방을 위해 하인리히 벨(노벨문학상 수상자)과 함께 투쟁했었을 것이다. 잠깐의 상념은 조용히 움직이는 관객과 방문객들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송교수의
큰아들 송준 박사의 모습이 보였다. <송두율교수의 석방과 국가보안법폐지를 위한 유럽대책위>(이하 대책위) 분들의 소개로 송 박사,
그리고 송 교수의 친구인 라이너 베르닝(코리아협의회 회장)씨와 인사를 나누고, 잠깐 대화를 나누기를 청하고, 취재수첩을
꺼내들었다.
베르닝씨는
필자가 독일에 왔던 1981년부터 줄곧 글을 통해 익혀왔고, 언젠가 사귐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송 교수의 기소로 그와 만남이 이루어졌다.
하나 언급해 둘 것은, 베르닝 박사, 송두율 교수 두 분은 이곳 언론매체에 한국문제가 중심에 들어설 때, 꼭 만날 수 있는 이름이다. 이 두
분의 견해, 관찰, 입장, 다른 사고, 비판 등은 이곳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가장 정확한 분석을 하는 분들이다. 한국인으로 사회과학을 하던
유학생들은 결국 이 분들의 글을 접하게 된다.
필자가
베르닝씨를 향해 운을 떼었다. “그사이에 한국을 다녀오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국 분들의 마음이 그 사이에 변했던가요?” “아닙니다. 여전히
따듯하더군요” “제 후배한테 들었는데, 선생님의 통역을 맡았다고 하더군요.” “그분의 덕분으로 불편없이 아주 잘 지내다 왔습니다.” “송교수의
재판을 어떻게 예상하시는지요?” “글쎄요, 여러 가능성이 있겠지만, 정치재판이라 결론을 예상하기가 쉽지 않군요. 하지만 낙관적으로 봅니다. 검찰
측 증언은 물론 증거들이 혐의사실을 입증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냉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한국은 일본처럼 가해자도
아닌데 일본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이 분단이 되고, 이어 한국전쟁을 겪게 된 불행한 역사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늘 안타깝게
생각되었습니다.”
이분의
말이 옳다. 우리는 일본을 36년동안 지배하지 않았는데도, 그 분단의 고통을 한반도가 겪고 있다. 아시아를 잘 아는 이 분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베르닝 씨는 이곳에서 필리핀의 전문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음식을 잘 드셨습니까?” “네, 저는 한국음식을 아무런
문제없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베르닝 선생님! 서울에서 어떤 분위기를 느끼셨는지요?” “네, 서울에는 지금 투쟁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투쟁의 시대”가 지났는 줄 알았는데, 또 “투쟁의 시대”라면, 시대의 요구가 달라졌던지, 아니면 구시대의 목표를 아직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해석해 들었다.
예를들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생겨 민주화 투쟁시기를 역사적인 유산으로 정리하려는 지금 그 투쟁의 한 주역이 민주화가 달성된 서울로 오려던 순간,
송교수는 과거의 지배세력의 발악으로 “전후 최대의 거물간첩”으로 몰려버렸다. 송교수가 간첩일까? 국가보안법을 그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다 극복했다고 착각했던 순간, 구시대의 억압세력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구시대의 투사를 구시대의 법으로 감옥에 가두고
있다. 이 현실을 국내의 시민들이 허용한다면, 이는 역사의 시계를 분명히 1990년대, 80년대, 70년대로 되돌리는 행위일
것이다.
“검찰의
기소입증은 실패하고 있습니다”고 강조하는 베르닝 선생. 우리나라에 와서 유공훈장이라도 받아야 할 분이 또 과거의 전사들과 함께 지난 시기를
회고하며 회포를 풀어야 할 즈음, 그분은 또 서울의 한 법정의 증언대에 서야만 했었다. 부끄러울 따름이다. OECD 가입국으로 세계 경제
10위냐 11위냐를 다투는 우리. 국제화, 효율, 경쟁을 부르짖는 지금 우리가 구시대의 잔재와 마지막 “투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을 다녀갔던 송교수의 대학동료인 크리스만스키 교수가 이번 시사회 뒤를 이은 토론시간의 사회를 보기로
했었지만, 바쁜 일로 참가할 수가 없어 급히 쾰른에서 올라온 베르닝 선생. 이분의 낙관적인 믿음에 필자는 물론 대책위 분들도 기운을 얻었을
것이다. (오른쪽 사진 설명: 송두율 교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팜플렛들)
대화의
말문을 송준박사에게 옮겼다. 저 남쪽 뮌헨에서 늦은 밤 기차로 방금 올라왔다는 송교수의 큰아들. 필자는 연초에 둘째 아들 린의 글을 보고 눈물을
흘렸었다. 부끄러움의 눈물이었다. “장하다 그대들아! 아버지를 위해, 우리사회를 위해, 우리민족을 위해 애쓰는 당신들의 모습을 보니, 비록
한국어는 짧지만, 당신들은 이제 부모의 고향을 뼛속 깊이까지 느끼리라!”고 혼자서 되내어 보았다.
“한국을
다녀온 느낌은 어떤지요?” “여러 감정이 혼재된 상태입니다. 냉전이 지나고,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 희망을 품었었는데… 어쨌든 검찰은 아버지에
대한 혐의를 입증해야만 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증거제시들도, 또 증언들도 웃기는 정도까지였으니까요. 또 황장엽의 증언도 사실로
입증되지 못했습니다.” 송 박사는 어느새 변호사가 된 듯, 사건의 핵심들을 줄줄 꿰고 있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을 몽땅 바치어 조국을 위해 싸워왔다. 또 편안한 이곳 독일을 놔두고 지금은 차가운 감옥으로 투쟁의 장을 강요되듯 옮겨야만
했다. 필자의 생각과 맥을 같이하는 말씀을 했던 송교수는 지금 지난 시기의 힘과 새로운 힘이 긴장되게 맞서고 있다. 한편, 앞으로 전진하기 위한
긴장된 G음, 다른 한편에서는 천상으로 오르려는 용이 구름 위를 스치다 갑자기 낙하하는 ‘상처받은 용’의 영상으로 변하면서 필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윤이상
선생의 곡들이 필자의 왼쪽 귀와 오른쪽 귀로 다르게 들려오고 있다. 긴장되게 올라가는 첼로의 음, 점점 더 빨라진다. “선생님들! 투쟁을
계속해야 합니까?” 필자의 내면에서 질문이 쏟아진다. “윤이상 선생님, 송두율 선생님, 안석교 선생님! 계속 싸워야 합니까? 상처를 더 받아야
합니까? 류똥의 꿈입니까? 나비의 꿈입니까? 송교수가 그 낙하를 어찌 받아들일까요?” 민족으로부터 존경받는 한 인사로부터, 민족의 입에
오르내리는 ‘거물간첩’으로. ‘송두율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한 극우의 목소리… 여러 혼음이 필자의 머리를 괴롭힌다.
선배들이
쓰던 더럽혀진 이부자리를 받았다는 송 교수. 늦봄 통일상을 받기 전, 문익환목사님이 송교수의 꿈에 나타나 했다는 그 말씀은 무엇을 상징할까? 그
투쟁의 연속 속에서도 쉬어야 할 이부자리. 선배들이 누워있던, 휴식했던, 꿈꾸던 그 이부자리가 지금 송 교수의 감옥 속에는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영상 속에 펼쳐져 있을 것이다.
이주희(독일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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