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 재판> 관람기(7)
최근 우리 영화의 폭발적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실미도>는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국가의 주도 속에서 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평양에 침투하여 김일성의
목을 따오라”는 북파간첩의 훈련단원들은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의 평화분위기 속에서 그 존재적 가치를 잃어버리고 서울로
침투하는 무장괴한이 된다. 서울로 잠입하기 위하여 탈취한 버스
속에서 한 노인은 “당신들이 무장공비가 아니면 도대체
누구이냐”고 묻는다. 일반적인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무장을 한
북파간첩이나 무장을 한 남파간첩은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동일한 무장괴한들일 뿐이다. 그들 중에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른가에 대한 판단은 불가능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기 위하여
어제의 동지를 죽이고 옛날의 적과 친구가 된다. 영화를 함께 본
학생들은 하나같이 영화 <실미도>가 정말로 우리의 역사 속에
존재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글픈 우리의
역사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것이 어지 지나간 역사로만
존재하는가?
영화 <실미도>는 과거 독재시대의 역사만이 아니다. 지난
12월부터 시울지방법원 311호 법정은 한국사회 지식인 사회의
<실미도>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실미도>가 한반도의 남과
북이라는 정권의 군사적 대립이 만든 수많은 개인들의 폭력적
이중성을 보여준다면, <송두율 교수 재판>의 과정은 한반도의 남과
북이라는 정권의 지식체계가 만든 수많은 개인들의 지식적 폭력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그 동안 검찰 측 중인으로 나온 거의
정신분열증적 증세를 보여준 오길남씨나 최창동씨, 그리고
김광동씨나 황장엽씨는 스스로 무기를 들고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지식은 수많은 시민과 국민을 죽이고 살해하는
공안검찰의 사상적 무기를 대여하고 있다. 한 개인과 시민, 그리고
국민과 민족을 살리는 지식이 아니라 그들을 분열시키고
대립하도록 만들어서 서로서로 적이 되어 스스로 파괴하도록
만드는 지식, 그러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실미도>처럼 한반도를 우리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둘로 갈라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나 북이 서로서로 한반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지식적 편협성에 있다.
근대국가의 폭력적이고 독재적인 편협성에서 벗어나고자
시도하는 학문이 문화학, 혹은 문화연구이다. 오늘날의 한반도에
존재하고 있는 남과 북은 모두 UN에 가입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근거를 가진 근대의 국민국가이고,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개별 국가이다. 이러한 판단은 사회과학, 즉
정치학적이고 경제학적인 판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다”라는
남과 북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올림픽의 구호처럼 두 개의 국가가
존재하는 한반도는 국민이나 시민을 구성하는 부부나 형제와 자매,
그리고 친구와 연인이 헤어져서 서로 다른 국가의 구성원이 된
불완전한 하나이다. 동일한 언어와 동일한 역사를 지닌 남과 북의
오늘날은 그 구성원들 개개인의 삶의 방식만이 동일할 뿐, 정치와
경제는 서로 다른 체제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방식은 서로 다른 체제를 인정하는 사회과학의
엄밀성과 “삶의 방식”을 우선시하는 인문과학의 입장이 상호
결합되어 바라보아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의 모든 글에서 하나같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한반도의 남과 북이 지니고 있는 민중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의 힘과 한반도와 세계를 바라보는 문화학의
입장이다.
검찰 측의 마지막 증인으로 출두한 홍진표씨는 “삶의 방식”에
대한 고민이 없는 근대 국가주도의 지식인이 지니고 있는 폭력성과
기회주의적 이중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광주민중항생”을 직접 목격하고,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당시의 이념 써클이었던 <흥사단 아카데미>에 스스로
들어가 운동권이 된 82학번의 운동권 출신 지식인이다. 그는
1983년에 강제징집되기도 하였고, 전민련과 범민련 활동도
하였으며,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씨와 함께
<반제청년동맹>이라는 지하조직의 세포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세
번의 감옥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그는 1986년
주사파가 강세였던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북의
“주체사상”에 매료되어 북한이 “인간이 중심이 된 자주적인
사회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북한의 체제를 맹신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그는 송두율 교수에 대한 그 어떤
“동료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재의 그는
1994년 다시 복학한 서울대학교를 자퇴하고 대학교 졸업장도 없이
황장엽씨의 책을 모두 출판한 <시대정신>의 편집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영화 <실미도>에서 북파간첩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무장공비가 된 스스로를 발견하고 버스와 함께 스스로
자폭한다. 수류탄과 총칼로 무장한 그들이 살 수 있는 장소는
한반도의 그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나 수류탄과 총칼이 없는
지식인은 다르다. 북의 체제와 권력에 봉사하던 지식을 남의
체제와 권력에 봉사하는 지식으로 바꾸면 살 수 있다. 이러한
방식이 바로 남과 북을 영원한 대립과 투쟁으로 이끌고자 하는
독재정권의 권력집단이 행사하는 <사상 전향서>이다. 송두율
교수는 <사상 전향서>를 거부했다. 송두율 교수는 지식 그 자체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지식인이지 남과 북의 어느 국가체제에 의하여
감시를 받고 그 국가에만 봉사하는 지식인이 아니다. 그러나
김영환씨와 홍진표씨는 <사상 전향서>를 쓰고, 자신의 주인을
북에서 남의 체제와 권력자로 바꾸었다.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그 길인데 어쩔 수 있었으랴... 홍진표씨는 송두율
교수의 글이 주사파 학생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끼쳤고, 송두율
교수가 이야기하는 제 3의 접근이니 내재적 접근이니 하는 말은
북한에 대한 비판이 없기 때문에 학자적 입장이 아니라 북한의
당파적 입장을 지닌 것이라고 말한다.
홍진표씨가 이야기하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주사파는 김영환의
『강철서신』이 쓰여진 80년대 초반에 형성되어 80년대 중반에
NL계열의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래서 사회학자들은 대부분 이들을
흔히 전두환 군사독재가 만든 남한의 “자생적 주사파”라고
부른다. 그런데 88년에 처음으로 한길사에서 월간지로 출판한
『사회와 사상』에 글을 실은 송두율 교수가 “주사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맹주라니... “송두율 교수의 어느 책이 주사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홍진표씨는
“『역사는 끝났는가』아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1995년에
출판된 책이 아니냐?”는 질문에 홍진표씨는 대답이 없다.
방청객들은 킥킥거리며 웃는다. 오늘은 재판장도 “웃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재판장은 아마도 불쌍하고 가엽기 그지없는
검찰 측 증인을 보고 스스로 웃고 싶었을 것이다. 영화 <실미도>를
보고 웃으면서 울고, 울면서 웃어야만 하는 것처럼... 홍진표씨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지금은 “북한 민주화 운동”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가 운영하는 <시대정신>이 “국정원의
자금 지원을 받고 싶지만 국정원이 지원하지 않는다”고 아주
거만하게 이야기한다. 그가 80년대 운동권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운동”은 북한 민주화 운동이었을까, 남한 민주화
운동이었을까?
미국 대통령 부시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의 편은
선, 미국을 반대하는 편은 악”이라고 말한 것처럼 근대
국가주의의 지식은 이 세상을 적군과 아군으로만 구분한다.
홍진표씨는 송두율 교수의 글에 “북한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이유로 북한의 당파적 입장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북한에 대한
비판과 남한에 대한 칭송이 없으면 모두가 주사파이다. “미국에
대한 비판이 없으면 친미파이고, 일본에 대한 비판이 없으면
친일파다.” 수많은 다양한 사람과 세계를 오직 적과 아군으로만
판단하는 그의 기형적 지식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80년대에
풍미했던 “자생적 주사파”가 전두환 군사독재의 산물이듯이,
그의 지식은 박정희 군사독재와 전두환 파시즘이 만든 기형적
지식이다. 홍진표씨는 87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북한 바로알기 운동>을 주체사상의 전파라고 말하면서, 남과 북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초석이라고 말하는 <6.15 남북 공동선언>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송두율 교수가 이야기하는 내재적 접근은
세상을 둘로 나누어 보지 말고 각각의 사회가 지니는 내재적
특성으로 보자는 것이다.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구성된 둘이면서
하나이듯이, 이 세상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구성된 둘이면서
하나이고, 백인과 유색인,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등등으로
구성된 둘이면서 하나인 세계이다.
재판이 끝나고 재판정을 나오는 씁쓸함은 영화 <실미도>를 보고
가슴 속에 응어리진 우울함보다 더한 것이다. 그 언젠가
<서울지방법원 311호>라는 영화가 나왔을 때, 저 앞 자리에
앉아있는 검사들과 판사들은 무슨 역할을 하고 있을까? 그 때에도
“저런 일이 정말로 우리의 역사 속에 있었습니까?”하고 묻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나는 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기만 해야 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