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 저서 독후감 공모전
  제목    제7차공판(2004.2.10.) 녹취록
  글쓴이 freesong 글쓴날 2004-02-13 17:30:09 조회 1834

송두율 교수 7차 공판. 
(검찰 측 증인, 홍진표, 시대정신 편집위원.) 

1. 검찰 측 증인심문. 

* 증인은 운동권을 상대로 강철서신이라는 필명으로 주체사상을
전파하였던 김영환과 함께 1998년부터 시대정신이라는 출판물을
발간하고 2000년부터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운영하면서
북한인권운동을 하고 있죠? - 네.  

증인은 시대정신 2001년도 5,6월호에서 송두율 교수의 북한
인식이라는 글을 게재한 적 있죠? - 네. 

당시 황장엽과 피고인 송두율 사이에 정치국 후보위원 여부를 놓고
법정 분쟁을 벌이는 등 논란이 있었고, 증인이 한 때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활동을 하던 중 피고인과 2회에 걸쳐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었으며, 한때 증인이 주체사상을 신봉하면서
학생 운동을 할 무렵 피고인의 글들은 대부분 읽어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피고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고, 그러한
내용을 우리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취지에서 이 글을
게재하게 된 것이죠? -네. 

위 글은 피고인에 대한 본건 사건이 발생하기 약 2년 전에 작성된
것으로 그 당시 증인의 경험과 피고인의 저술 등을 종합 분석하여
게재한 것이죠? - 맞습니다.  

* 증인은 1982년 서울대학교 사회 2계열에 입학한 후 사회주의
이념 서클인 흥사단 아카데미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학사 경고를
받아 제적위기에 처하자 휴학한 다음, 다시 입시 준비를 하여
정치학과에 재입학 하였죠? -네. 

그 이후 증인은 군부 독재 반대 등 각종 학내 시위에 참여한
전력으로 인하여 83년 5월 소위 강제징집을 당하여 근무하다가
85년에 병장으로 만기 제대하였죠? -네. 

복학 후 86년 경 노동운동을 위하여 위장취업을 준비하면서 친구의
권유로 북한 구국의 소리 방송을 청취하고 주체사상을 신봉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적발되어 86년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인천 지방 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후, 87년 만기 출소하였죠? -네. 

만기 출소 후 87년 9월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1학년에 복학한
증인은 당시 전대협 소속이던 서울대학교 총학생회의
사무국장으로써 각종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하였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어 88년 1월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하였죠?
-네. 

그 이후에도 증인은 학생 운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88년 9월부터
89년 12월까지 한겨레 사회 연구소의 민족국가 연구원으로써 통일
문제, 북한 문제 등을 연구하여 그 내용들을 기간지인 한겨레
평론, 서울대 등 각 대학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죠? -네. 

그 당시 증인이 기고한 내용은 남북 관계는 정치, 군사 문제를
선행해야 하는데 남한 정부는 교류 협력에 치중하여 통일 문제
해결을 지체하고 있다, 팀 스피리트 훈련 중지와 대미 의존에서
벗어나 자주적 입장에서 남북 대화에 임하여야 한다, 남북 공동
올림픽을 추진하자, 한국은 심각하게 미국에 예속되어 있다,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이 현실적이다, 북한 정권은 항일 무장
투쟁을 통하여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사람들이 주도한 정통성 있는
정권으로 친일파 청산, 토지개혁을 철저하게 진행하였으며,
주체사상이라는 새로운 인간 중심의 철학을 제기한 반면 남한
사회는 미, 일 등 강대국에 의존적이며 빈부격차의 심화 등 특권
세력 중심의 사회라고 판단되고, 전반적으로 선진화되어 있는
북한을 중심으로 통일이 실현되는 것이 발전적이고 합리적이다
등이었는데, 이는 주로 주체사상의 입장에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내용들이었죠? -네. 

증인은 90년 1월에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에 가입하여 조국
통일 위원회 간사로써 전민련의 남북 통일 사업 실무를
담당하였고, 90년 11월에는 전민련을 모체로 결성된 조국통일
범민족 연합에 가입하여 범민련 남측 본부 준비위원회 간사로써
범민련 남측 본부 준비 위원회 결성식에 참가하는 등 93년까지
8․15 범민족 대회 추진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죠? 범민련은
남측 본부, 북측 본부, 해외 본부로 나뉘어 지는데, 북측 본부는
물론 해외 본부도 북한의 주도 하에 있었고, 남측 본부의 구성원도
증인처럼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범민련 활동은 북한 및 주체사상의 영향 하에 있는 것이어서
대법원에서도 일찌감치 위법 단체로 판결하였죠? -네. 

위와 같이 대법원으로부터 이적단체로 판결 받는 바람에 그 활동에
제약이 많아, 증인은 93년 문익환 목사, 이창복 현 열린 우리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범민련을 탈퇴한 후 자주평화 민족회의를
결성한 다음 96년까지 남북통일 사업을 주도하면서 북한과
815통일행사 등을 주관하기도 하였죠? -네. 

한편 증인은 91년 6월 강철서신의 저자 김영환의 권유로
지하조직인 반제 청년 동맹에 가입하였고 93년 1월에는 그 후신인
민족 민주 혁명당에도 97년까지 재야통일 운동을 담당하여 반제
청년 동맹이나 민혁당의 노선을 당시 증인이 몸담고 있던 자주평화
민족회의 등 재야 단체에 관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지요? -네. 

지하조직인 반제 청년 동맹은 김일성 장군님과 한국 민족 민주
전선에 따라 나아가는 김일성 주의 청년 혁명 조직이다, 동맹은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그 앞잡이들을 몰아내고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고, 민족 민주 혁명당은 인간
중심의 주체사상을 지도 사상으로 한다, 우리는 당면하여 민족
자주권을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한다 등 주체사상을 정면으로 받아들여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삼았던 단체들이죠? -네. 

증인은 99년 12월경 민혁당 활동 사실이 적발되어 김영환 등과
함께 국가 보안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당신은 그간의 활동에
회의를 느껴 이미 민혁당을 탈퇴하였고 북한 인권 운동을 하고
있었던 점 등이 참작 되어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었죠?
-네. 증인은 대학 입학 시절부터 민혁당을 탈퇴할 때까지 약
15년간 사회주의 이념과 주체사상 신봉하면서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3번이나 구속되었으며, 서울대학교에 2번이나
입학하였으나 위와 같은 활동 때문에 자퇴, 휴학, 재입학 등을
반복하다가 94년 자퇴함으로써 결국 졸업은 하지 못하였죠? -네. 

* 이상의 증인의 활동을 살펴보면 증인은 어느 누구보다도
사회주의 이념과 주체사상 신봉하고 그에 따라 남한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그 주체사상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 우선 통일운동 과정에서 북한과 접촉하고 같이 연대하는 활동을
전개를 했었는데, 결정적으로 범민련 활동에 제약을 느껴서
민족회의라고 하는 보다 남쪽에서 대중들에게 접근하기 용이한,
온건한 조직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 기대와 달리
북한에서 사사건건 민족회의 결성을 방해를 했습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서 북한은 남한운동을 북한정권의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남한 운동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런 과정에서
북한 정권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느꼈습니다. 또 한편, 그 당시
95년 96년 사이에 북한 식량난의 실상이 남한을 비롯해서 전
세계에 알려졌고, 탈북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서 그 동안 몰랐던
북한실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식량난의 실상이나, 정치범
수용소에서 탈출했던 탈북자들의 증언을 통해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느끼게 되면서, 그 동안에 제가 생각했던 북한과 실제의
북한과 알고 있는 북한과의 심각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친북활동에 심각한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주체사상 활동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 증인은 한 때 주체사상을 신봉하였는데, 활동하는 그 당시
주체사상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 맑스 레닌주의는 물질에 대해 강조하는 반면에, 주체사상은
인간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활동과 의지를 강조한다는 것에서
상당한 매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주체사상이야말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결함을 극복하고 뛰어넘는 새로운 위대한 사상이
아닌가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북한 사회도 이러한
주체사상의 내용에 따라서 운영되고 유지되고 발전되어오지
않았을까, 그래서 북한사회 자체도 어느 사회보다 인간이 중심이
되는 그런 자주적인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 증인은 주체사상이 정치적 혜택을 통해서 변질되었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무엇입니까?
- 사실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 생각에는 황장엽씨를 중심으로
해서 북한에서 처음에 제기된 주체사상은 나름대로 물질 중심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극복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북한 정권에 의해서 상당 정도 왜곡되고 변질되지
않았는가, 즉 핵심적으로는 1인 독재 통치에 이용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었다고 봅니다. 예컨대, 수령론은 수령, 당,
대중이 하나의 통일체인데 그 중에 수령은 인간으로 말하면 일종의
뇌에 해당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체사상의 원래
문제의식과는 전혀 상관이 없고 유럽에서 한 때 있었던
사회유기체설 이런 것을 이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여하튼 수령이
인간으로 보면 뇌에 해당된다고 하면은 사실 인민 대중들은 뇌에
움직임에 따라 지시되고 명령되는 것에 따른 부속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것은 원래 주체사상의 문제의식인 인간이
중심이고 인민 대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것과 결코 양립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이런 것처럼 특히 북한 통치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수령론 같은 경우에는 본래 인간 중심과는 전혀 상관없이 상당히
왜곡되고 변질된 일종의 정치적인 통치 이데올로기라고
보여집니다.  

* 증인은 여러 조직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연구하고 범민련 북측
관계자들을 접촉하면서 어느 누구보다도 북한을 잘 알게 되었고,
원래 증인이 상상하던 북한 사회의 모습은 주체사상이 제대로
구현된 인간 중심의 사회였지만, 그 실상이 달라서 그간의 활동을
모두 그만두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증인이 깨닫게 된 북한의
구체적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 앞서도 잠깐 말씀드렸지만, 제가 알고 있던 바와 다른 매우
충격적인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지금까지 꾸준히 북한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알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그 일환으로
지금 북한 인권운동도 하고 있습니다만은, 현재 제가 판단하는
북한이라는 사회는 사실 단순한 1인 독재체제, 스탈린주의적 국가,
이렇게만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즉, 정상적 국가인가
의문이 들 요인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면은 국가주도로
마약을 재배해서 밀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러를 위조해서
위조달러를 국가 주도로 외화벌이의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민간인들을 무려 13명이나 납치를 해서 남한에
보내기 위한 스파이 교육에 이용을 했단 말입니다. 이 사실이
김정일 위원장과 고이즈미 총리 사이의 정상회담 중에
시인함으로써 일본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
어떻게 국가가 민간인들을 납치를 해서 스파이 교육에 쓸 수가
있는가, 이런 여러 가지 행태들을 보았을 때 이게 어떤 정상적인
국가인가, 오히려 마피아 집단에 대단히 가까운 여러 가지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하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것을 다 떠나서 북한 주민에 대한 심각한 인권유린이라고
보여집니다. 예컨대, 정치범 수용소를 예로 들면은, 아주 사소한,
남한 노래를 들었다거나 김일성 사진을 걸레로 닦았다거나 그런
사소한 이유로, 그것도 연좌제가 실행되기 때문에 3대까지 일생을
보내게 되는 그런 정치범 수용소에 20만 이상 수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이러한 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 증인은 사회주의 내지 주체사상에 따른 활동을 하였으므로 잘
알고 있으므로, 국내 주체사상의 연구 움직임이 태동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입니까? 
- 저하고 꾸준히 같이 활동했던 일명 강철서신의 김영환씨가
서울대 재학시절에, 아마 84년부터 스스로 주체사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서울대 운동권 내에서 이것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주체사상 운동권이 한국 내에서 자생하기 시작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북한 바로알기 운동은 언제 누구에 의해서 어떤 목적으로 전개된
것인가요? 
- 제 기억으로는 1987년, 당시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부터 조금씩
시작되어서 88년에 보다 활성화 되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만은,
일단 주체사상을 신봉하게 되었던 당시 학생 운동권의 사람들이
이걸 어떻게 하면 보다 대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나 하는 고민
속에서, 일단 주체사상에 대해서 좀 더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게
하려면, 북한에 대한 좀 더 우호적인 생각, 즉 기존의 어떤
반공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호감을 갖게 할
것인가, 이런 것이 시작일 수밖에 없다라고 하는 문제의식 하에서,
아주 초보적으로 북한에 대한 보다 우호적인 생각,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라는 그런 목적에서 시작됐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당시에 주로 그 재미동포들을 중심으로 해서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고자 하는 방북자들이 생겨났었고 그들이 쓴 기행문들이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그 기행문들을 주로 저학년
학생들에게 읽히면서 북한도 과거 반공교육에서 배웠듯이 인간
생지옥만이 아니라 사람이 살 만한 데구나 이런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데 초점을 두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그 이후에 상당히 활성화된 통일 운동에 이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주체사상 전파 활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뚜렷한 그런 목적을 가지고,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라는 일종의 대중적인 방식을 채택을 한 것이죠. 

* 피고인은 월간지 사회와 사상 1988년 12월 호에 내재적 접근법이
담긴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는 글을 게재하면서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 맞습니까? -네. 증인도 그 때
처음 피고인을 알게 된 것인가요? - 네. 

증인은 그 때부터 사회와 사상 이외에 단행본이나 언론에 기고된
피고인의 글들을 대부분 읽어본 것이 맞습니까? - 네. 

증인이 피고인 글 읽어보게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일단 처음에 송교수님의 글을 접하면서부터 상당히 동료의식을
느꼈구요. 동료의식이라 함은 여하튼 생각이 비슷하고, 저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NL운동권에서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래도 저는 배운다는 입장에서 많이 읽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일종의 필독서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빠짐없이 그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증인 이외에 당시 주체사상을 추종하던 NL계열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도 피고인의 글을 추천하고 소개하는 등 피고인의 글들이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것이 맞습니까? -네.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피고인의 글이 맨 처음에 소개된 사회와 사상이라는
월간지는 당시 NL 계열 운동권 학생들이  많이 읽어보던
잡지였습니까? - 네, 물론 그랬구요, 뿐만 아니라 운동권 전반이
널리 읽었던 잡지로 기억됩니다. 

결국 내재적 접근법을 비롯한 피고인의 글들이 NL계열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약간 멈칫)

* 피고인이 주장한 내재적 접근법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입니까, 좀
간략하게?
- 제가 이해하기로는, 여하튼, 북한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체제가 다른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잣대로 보려고 하지 말고,
어떤 북한 내부에 어떤 내부적인 근거를 갖고, 그런 입장을 갖고
북한 사회를 이해해야 된다, 간단히 이야기 하면 그렇게
보여지는데요. 

* 그러면 결국 그러한 내재적 접근법이 주사파가 전개하기 시작한
북한 바로알기 운동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 북한 바로알기 운동이라는 건, 북한 방문기, 일종의 기행문,
이런 것을 통해서 북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상당히 어떤 정서적 접근법이라고 보여지는데요. 이런 것에 비해서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런 표현 자체는 송두율
교수님이 썼겠지만은, 사실 그 이전부터 사람들에게 뭔가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런 류의 논리를 썼던
것은 사실입니다. 즉, 왜 남한의 입장에서만 볼려고 하냐, 당연히
북한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해보면 안 되냐, 당연히 뭐 그렇게
접근을 했었죠. 그런데 이것에다가 내재적 접근법이라고 하는
이름을 붙이고, 뭔가 좀 학술적인 내용을 갖는, 혹은 포장이 되는
그런 이론화를 한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됨으로써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라는 것이 정서적인 차원을 떠나서, 이론적인 무기를
획득했다, 이런 의미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송두율
교수님이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 학자라는 위치를 가지고서 한국에
알려졌기 때문에 권위라는 것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 바로알기 운동에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보다 더 확산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집니다.

내재적 접근법은 김영환으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주체사상 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 앞서 말씀드린 내용과 거의 비슷하다고
봅니다. 어차피 북한 바로알기 운동의 최종 목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북한 사회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버리는 것을 떠나서, 더
나아가서, 북한의 주체사상에 자체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 있어서 내재적인
접근이라는 이론적 토대는 주체사상 전파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한
수단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 증인이 보기에, 현재 피고인을 부당한 권력, 또는 냉전의
희생물로 보고 피고인의 주장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것은, 피고인의 학자적 양심을 신뢰하여 피고인이 북한에 대하여
공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나요? 
- 상당수의 사람들은 학자적 양심에 따라서 객관적인 접근을 하기
때문에 신뢰하는 측면이 있겠고, 그렇지만 비단 이것만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제 경험을 비추어 보더라도 친북적인
주사파 학생운동권이나 사회운동권 사람들도 송교수에 대해서
대단히 우호적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비단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 때문만이 아니라,
송교수가 북한에 대해서 대단히 친북적이고 또 좋게 이야기 하고,
비판하지 않고, 뭔가 이런 거 자체가 마음에 들어서 송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피고인의 내재적 접근법에 의한 북한 평가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보이던가요? - 일단, 내재적 접근법이라는 자체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내재적 접근법을
어떻게 쓸 것이냐, 어떤 식으로 사용하느냐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재적이라고 하는 것은 북한의 입장인데, 제가
지금까지 쭉 접해본 글을 볼 때는, 북한의 입장이라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북한 주민의 입장, 북한 정권의 입장,
체제적인 요구가 있을 수 있구요. 그런데 아주 일관되게 북한 정권
내지 체제적 요구만을 기준으로 해서 북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결코 공정할 수 없죠. 예컨대 탈북자의 이야기도
내재적인 거죠. 북한에 살고 있던 사람인데 왜 외부적인 겁니까,
탈북자의 이야기, 북한 주민의 입장, 이런 것도 분명히 존재할 수
있거든요.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해서 북한 현실에 접근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북한 체제나 정권적인 요구, 이런 것만
가지고 접근하기 때문에 북한 사회에 대해 비판한 내용을 아무리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코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피고인의 글을 보면 남한의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엄청난 관심을
갖고 남한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는데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 이 대목, 북한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해서 문제 삼는 부분은
제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 증인의 송두율 교수의 북한 인식이라는 글에서 피고인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를 보게 되면 피고인의 북한 체제에 대한
평가를 보다 극명히 알 수 있다고 했는데 피고인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정확히 외우지는 못하지만, 쩨쩨하지 않고, 영리하고, 그런
이야기들은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 북한 식량난
이후에 고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서 김정일 위원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내용이 있거든요, 그리고 오죽 했으면 사람들이
김정일 위원장만을 믿고 따른다는 구호를 내세웠겠느냐 이런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 대목에 가서는 제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데요. 왜냐하면 김정일 위원장만 믿고 따른다든지 이런 거는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북한 정권에서 내 놓은 구호란
말입니다. 고난행군을 김정일 위원장의 지도력에 의해서 극복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지금 극복된 게 없거든요. 자연재해가
없었는데도 식량난이 10년 이상 계속되고 있거든요. 사실 국제적인
지원, 남한에서의 지원이 끊겼다고 그러면, 엄청난 아사자가
생기는 90년대 중반 상황이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실제 주민들이 김정일 위원장을
믿고 따른다고 억측을 하는 건지, 역시 이런 것을 볼 때 어떤
객관적인 접근을 통해서, 뭔가 북한 사회의 정권에 대해서
평가한다기보다는 어떤 정해진 구도에 따라서 평가한 것이 아닌가
이렇게 보여집니다. 

또한 이 글에서, 김일성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묘지를 조성하고
성역화하면서 8억 9천만불을 들였다는 내용이죠? 이 정도의 돈이면
3년 동안의 아사자들을 어느 정도 구제할 수 있는 돈
아니었습니까? - 사실 그것이 가장 충격적인 대목이 그것이라고
봅니다. 실제 국제시장에서 달러만 있으면 얼마든지 식량을 살 수
있습니다. 금수산 기념궁전을 통째로 묘지를 조성하면서 든 돈이
8억 9천만이었는데, 그거는 아사자가 대규모로 발생했을 때에
부족했던 3년간의 식량을 옥수수 기준으로 살 수 있는 돈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기아를 방치한 것이고, 이는 범죄
행위입니다. 

증인은 위 글에서 결론적으로 피고인이 북한 정권에 대해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을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당파성은 진리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기 당파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모든 문제에 접근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원래 맑스 레닌주의에서 나오는 개념인데요. 송교수의
책을 보면서 왜 북한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요. 스스로 경계인이네, 객관적이네 이렇게 하지 않고 나는
북한의 정권에 대해서 일체감을 느끼는 사람이다, 이렇게 해버리면
북한에 대해 좋게만 쓰는 것에 대해서 쉽게 이해가 되죠. 다만 그
논조에 대해서 옳고 그름에 대해서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이해는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묘하게 제 3의 접근이니, 중간적인 접근이니,
객관적인 접근이니 항상 이런 포장을 하고 접근을 하거든요. 원래
학술적인 접근을 하면 그렇게 비판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근데도
안 한다, 그 미스테리를 풀고자 생각을 해 봤는데 결국에는
당파성을 가지고 있다, 본인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지만, 결국
북한 정권에 일체감을 갖고, 소속감을 갖고, 그에 따른 명백한
가이드라인을 자기 내부에 갖고 북한에 대한 제반 저술이나 입장
발표에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명백히 학자적 입장이 아니라 어떤
당파성을 갖고, 북한 정권에 대한 당파성을 갖고 지금까지 활동을
했다, 그렇게 판단을 합니다. 

2. 변호사측 반대심문. 

* 증인, 하용옥, 윤철호를 아십니까? - 네

*과거에 학생운동 하실 때 다 같이 했던 동료이고 선배니까, 다들
잘 보고 있으니까 진지하게 답변을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송두율 교수의 철학에 대해서 지적을 하시는데, 철학
전공자입니까?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학위를 받은 것이
있습니까? 북한의 식량문제에 대해서 지적을 하시는데, 경제
전문가입니까? 농업경제나 이런 것에 대해서 공부를 하신 적
있습니까? 질문. -아니오. 

* 주체사상에 대해서는 독학을 하시거나 운동권으로 활동하시면서
학습하셨습니까? -네. 

* 북한의 실상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탈북자 증언
문제, 마약문제 등)?
- 일반 신문을 통해서도 보도되고 있고, 탈북자들의 수기, 유엔
인권위원회의 자료 등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마약 위조달러는
신문에서 본 것이라고 주장.)

* 증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광주사태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에
주사파로 활동하시게 되었는데,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경위는 어떻게
됩니까?  - 당시 민주화 문제에 대한 대학생들의 관심이 높았고,
저는 특별히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자발적으로 관련된 이념
서클에 가입했습니다.

* 1985년에는 학생운동권이 민족, 민주, 민중이라는 3민을
내세우는 3민투로 발전을 해서 자민투, 민민투로 분화가 되었고,
85년말부터 민민투는 맑스주의에 충실하려고 하는 PD로, 자민투는
주사파가 주도하는 NL파로 되었고, 그러다가 학생 운동 진영에는
86년에 접어들면서 주사파가 대세를 장악을 했고, 전국의 절대다수
대학교 학생회는 주사파가 주도를 하게 되었다 이거죠? -네.  

* 강철서신의 저자인 김영환은, 1980년대 중반에 우리 사회에
주체사상을 확산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영환은 북한의 공작원으로부터 주체사상을 교육받은
것이 아니고 혼자서 독학을 하면서 자생적으로 학습을 한 거죠? -
네, 맞습니다. 

김영환은 모 잡지에서 주체사상을 통일원과 극동문제연구소
자료에서 처음으로 접했고, 그 후에 평양방송의 방송대학 강좌를
들으면서 체계적으로 학습을 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는데
맞습니까? -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 학생운동권 내에는 주사파 학생들에게 단파 라디오를
구입해서 북한의 한민전 방송을 들으면서 학습하는 것이 일반적인
교육방식이었죠? - 뭐 일반적이었다고 보기는 어렵겠네요. 

주사파 학생들에게는 일반적인 것 아니었나요? - 네, 상당수
라디오를 들었습니다. 

증인은 북한 방송을 들은 적이 있나요? - 86년 초부터 들었고,
그것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증인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책자를 알고 있습니까? - 이
책자는 1986년에 김정일이 작성한 걸로 되어 있고, 주체사상의
이념체계를 가장 완결적으로 정립한 주체사상의 바이블이라고
알려져 있는 팜플렛이라고, 당시 주사파 학생들은 이 주체사상에
대하여와 더불어서 북한 방송 녹취록인 항일무장투쟁사 등을
읽으면서 주체사상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게 되었죠? -네. 

증인도 이 책자를 읽어보았나요? - 86년경에 읽어보았습니다. 

86년에는 이 북한 책자들과 김영환의 강철서신이 학생운동권 내에
널리 퍼지면서 주사파가 급속도로 세를 확장하게 되는 그런
시기였죠? -네. 

증인이 87년 사무총장으로 있던 서울대 총학생회도 주사파
학생회였고요? -네.  

결국 이 학생운동권 내에 주체사상파는 1980년대 중반에
자생적으로 발생해서 1987년에 와서는 학생운동권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었고 이후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등의 구호를 내걸고 통일운동과 반미운동을
주도했던 것이지요? -네. 

* 증인은 사회와 사상이라는 잡지에 실린 송교수의 글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습니까? -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영향을 안 받았나요? - 아니, 많이 받지는 않았지요. 언제
받았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많이 받았다고....  

이 글에서 증인이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이 글이 잡지에 나오고
바로 봤고, 여하튼 북한인식을 위한 방법론을 이렇게 이론적으로
체계화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놀랍게 생각을 했습니다.


이 글로 인해서 학생운동의 양상이 변화된 그런게 있습니까? - 네,
그렇죠. 북한 바로알기 운동 등이 상당히 이론적인 바탕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죠. 

* 송교수 글이 88년 12월 달입니다. 이것은 결국 한국의 주사파사
형성되어서 대세를 이루게 되고 난 이후에야 이 글이 발표되었다는
거죠? - 무슨 이야기인지.. 

주사파가 학생운동권 내에서 대세를 이루게 된 것은 86년, 87년 그
시기였고, 이 글이 나온 것은 88년 12월이구요. 그래서 결국은 이
주사파가 형성된 학생운동권 내에서 어느 정도 세를 형성된 이후에
이 글이 발표되었다는 겁니다. - 네, 맞습니다. 

아까 검사심문에서 내재적 접근이라는 표현은 송교수의 글이
나오기 이전에도 운동권 내에도 있었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아,
그렇죠. 물론 그런 표현을 쓰지는 않았지만은 그런 방법론적
접근을 했다 이거죠. 그런 접근을 했던 것을 자생적으로
학생운동권 내에서 그런 논의가 진행이 되어 왔고, 어느 정도
형성이 되어 왔던 것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글이 나왔고, 그래서
반가웠다 이런 거죠? 네. 

* 내재적 접근이라는 것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고 있습니까? 
- 일종의 문화적 상대주의 이런 쪽에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화인류학이나.. 그러니까 뭐 문명에 있어서 특별히
서양 문명이 우월하고 다른 문명은 열등하다, 이런 접근에 대해서
경계를 하면서 문화 상대주의라고 할까요, 이런 차원에서 각각의
문화에 대해서 내재적으로 접근하자, 이게 시초로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 사회와 사상 이후에 기고된 송교수님의 글에 대해서는 거의 다
읽어보았다, 이렇게 말씀하셨죠? -네.  

송교수가 발표한 글이 양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습니까? -
(송교수님 대답) 우리말로 된 것은 10권 정도이고 독일말까지
포함하여 한 200편정도 됩니다. 

그걸 모두 보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88년 사회와 사상에 실린 글 외에 91년까지 글을 보신 게
있습니까? - 그 시점에는 대해서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납니다. 

송교수 글은 88년에 처음 나오고 91년부터 신문에 기고를 하는데,
신문에 처음 기고되었던 글이 어떤 글인지 아십니까? - 잘
모르겠습니다. 

그게 아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평양방문기라고 하는, 세
번에 연재가 되었던 그 글인데요? / (검사질문) 88년 사회와 사상
이후에 거의 매월 게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은, 그러니까
거의 매월 피고인의 고정 칼럼란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송교수님 대답) 사회와 사상은 월간지로 시작할 때 몇 번 나한테
내 칼럼을 특별히 마련하겠다, 그렇게 해서 매달 써달라고 했지만
내가 김원호 사장에게 되물었습니다. 한국에 그런 수준의 잡지를
매달 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겨우 한 1년 나오고 나면 집필진에 딸려서 못 나올 것이다 그렇게
경고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을 따로 만들어서,
송두율의 현대사상 강좌라고 해서 시리지로 만들겠다, 했지만
그러고 나서 결국은 매달 쓸 수는 없었고, 결국 그래서 두 달,
또는 하다가 전혀 안 쓸 때도 있고 결국 그러다가 그 잡지가 문을
닫았습니다. 필진이 없어서가지고. (판사질문) 몇 년까지 그렇게
부정기적으로 쓰셨습니까? (송교수님 대답) 뭐, 89년정도, 그러나
매달 썼던 것은 아닙니다. -변호사측 전제 정정- 

* 87년에 시작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87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실패한 후 전대협 중심의 주사파들이 향후 운동방향을
고민하는 가운데,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를 남북의 분단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북한에 대한 이해를 높여 통일운동으로 나아가자, 이런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것이죠? -네. 

83년에 서울대 총학생회 회장 후보로 나온 김중기가 작성한
김일성대학 청년학생에게 드리는 공개서한을 알고 있습니까? -네.

그 내용은 남북학생들이 광복절을 맞아서 각자 한라산과
백두산에서 출발해서 판문점에서 만나 대동제를 열자, 이런
내용이었죠? -네. 

그 이후에 전국 주요 대학에 이를 지지하는 대자보가 붙고,
전대협이 주도한 통일운동과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입니까? - 네. 

그리하여 88년 대학 축제 기간 동안에는 거의 대부분의 대학들이
북한 관련 행사들을 대대적으로 하기 시작했죠? -네.

* 증인은 송교수가 2000년, 2001년에 서울대와 고려대 총학생회의
요청으로 영상강연을 한 것과 그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 내용은
모르지만 강연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 그 강연에서
송교수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의
의미를 해석하고 통일을 위해서 노력하자는, 그런 아주 상식적인
취지의 발언이었고, 거기에는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 송교수 글에서 처음 국내에 알려진 것이 88년 12월이고 그
내용도 기존의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서 객관적 시각으로
북한을 이해하자는 것이고, 시간적 선후관계나 글의 내용으로 봐서
이 송교수의 글이 학생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과도하고 주관적인 해석일 수는 없는 건가요? - 아니죠. 왜냐하면
당시 운동권이라는 게 행동이 앞서거든요,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고, 사회적으로 어떤 정당성을
갖고 있는지, 이런 것을 학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떨어지구요. 그런 면에 있어서 무언가 이론적으로 근거를 마련해
주었다는 건 상당히 큰 의미가 있죠. 그래야만 많은 사람을 설득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까 영향이라고 하는 건 아까 말한 대로 송교수의 글이
나오기 전부터도 그런 논의들은 계속 진행이 되었는데 접근방법을
내재적 접근론이라고 하는 것으로 송교수가 글을 내 가지고, 그런
정도의 영향을 미친 거다, 이게 뭐 지대한 영향이라고 할 지, 이런
건 주관적인 평가이구요? - 아니, 이론적인 근거를 제기했다는
것은 상당히 큰 의미가 있죠. 

아무튼 그거는 증인이 보기에 그렇다는 거죠? - 네, 그렇죠. 

* 증인은 작년 10월 25일에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에 ‘송두율
교수의 탐욕’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지요? -네. 

증인은 이 글에서 송교수가 후보위원이라고 전제하면서 북한에
대한 어떤 비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가, 사회민주주의적 경향
때문에 북한 체제를 정상적으로 보지 않았고 북한 측 관리와
갈등이 있었다고 하는 등의, 이런 것을 보면 이 짧은 글에서도
앞뒤가 맞지 않은 논리를 펴고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어떻습니까?
- 아니, 실제로는 내적으로는 당연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져야 할
사람인데, 원래 제가 알기로 중국이나 소련 등의 사회주의를
연구하면서 사회 민주주의적인, 유럽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면 당연히 북한을 정상적으로 보일 리가
없는데, 왜 비판을 안 할까? 그거는 정치국 후보위원이니까, 이게
왜 앞뒤가 안 맞습니까? 

증인이 이 글에서 김용순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쓰고 있잖아요.
어떠한 비판도 허용을 안 하는데 어떻게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까?
- 그건 대외적으로 글을 쓸 때 그런 거구요. 내적으로는
자기들끼리 갈등이 있을 수 있겠죠. 그거하고 대외적으로, 특히
남한에서 출판할 때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 것과 그것이 왜 합치될
수 없습니까?

그러니까, 증인은 송교수와 북한이 철저한 복종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송교수가 그렇게 안하겠다고 했다는 거 아닙니까,
송교수가 북한 측 입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겁니까? -
지금 제가 말하는 비판은 내적으로 비판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와는 별개로, 지금 남한에 출판되어 있는, 그 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럼 그것과는 별개로, 송교수가 북한에 대해 비판을 한 것은
인정을 합니까? - 황장엽씨 증언을 보니까, 김용순이야 대남공작을
하는 사람인데 당연히 지시 복종하는 걸 요구하고, 뭔가 자기
의견을 이야기 하려고 하고, 그러니까 당연히 갈등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추측을 한 거죠. 

증인은 이 글의 내용은 전부 황장엽의 글이나 증언을 통해서 듣고
안 것을 가지고 쓴 거죠? - 글 전체의 내용은 아니구요. 김용순과
관련된 것은 그렇구요. 그건 널리 알려진 것 아닙니까. 

* 식량난과 관련해서 북한을 비판하지 않는다고 증인은
말했는데요. 경제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으로는, 북한의
식량난을 야기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90년대 초반에 소련이
붕괴하고 옐친 정부가 들어서면서 북한에 대한 식량공급을 일체
중단되었고, 100년 만에 찾아온 홍수와 가뭄 때문이다, 이렇게
되어있는데, 증인의 이야기에서는 이런 평가는 전혀 없네요? -네,
그렇죠. 

증인은 내 주장 과 다르면 일방적으로 다 틀리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증인의 논리가 완벽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 세상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게 어디 있습니까. 

* 증인이 친북인사에서 반북 인사로 돌변한 것은 언제입니까? -
제가 주체사상에 대해서, 북한 정권에 대해서 입장을 바꾼 것은
96년도입니다. 자주평화통일 민족회의 조직국장을 할 때였습니다.


*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보수잡지인 월간 조선에는 99년 6월에,
증인과 증인의 동료들이 만드는 시대정신이라는 잡지가 실렸고, 그
잡지를 만드는 80년대 주사파 활동가들의 대전환이라는 대제목과,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 끝에 이제는 강철 그룹이 김정일 정권의
심장에 비수를 들이대기 시작했다는 부제목 하에 시대정신을
특집으로 다뤄 홍보하면서, 증인의 전형 사실을 대대적으로
기사화한 적 있죠? - 네.  

증인은 99년 잡지에서 우리는 틀렸다는 것을, 즉 실패를
인정하는데서 출발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철학, 새로운
방법을 찾자 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떠나
현실을 제대로 보면 우익의 논리와 일치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 머물 생각은 없다고 했는데, 그 수준에서 머물 생각은
없다는 것은 북한 민주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야 된다는
취지를 포함하고 있는 건가요? - 뭐 그것뿐만 아니라, 철학적인
측면에서도 있습니다.

증인과 달리 북한 민주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친북을 의미하는
건가요? - 뭐, 그렇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송교수가
북한에 대해 비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친북이라고 하는 것은
곤란한 거 아닌가요? - 그건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민주화 운동은 무엇을 말하는 건가요? - 북한의 1인 독재
체제를 종식시키고 민주적인 질서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것은 내용이고, 어떤 식으로 무슨 활동을 한다는 겁니까? - 주로
선전활동을 하는 겁니다. 시대정신과 북한민주화 네트워크라고
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운영하는 겁니까? -네.   

시대정신 1998년 말의 창간호부터 99년 6월까지 4권이 발행이
되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과 평가,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지지, 이렇게 되어 있던데, 이게 북한의
민주화 운동과 어떤 연관이 있습니까? - 한국 사회의 이슈에
대해서 입장을 표명하는 겁니다. 

김영환씨는 인터뷰에서 북한의 민주화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시대정신에서 김영환씨가 편집위원 아닙니까? -
편집위원 중에 한 명입니다. 시대정신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이슈화되는 문제들을 다루는 잡지입니다. 북한 민주화에 관해서만
다루는 북한 민주화 네트워크에서 키즈라는 잡지를 내고 있습니다.


* 시대정신 운영자금이나 생활비 같은 걸 어디서 마련합니까?
증언의 신빙성을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판사) 시대정신 발간
운영자금에 대해서는 진술하실 수 있잖아요.
- 판매수익으로 합니다. 1200권정도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대정신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잡지를 발행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제목은 사이트에 가서 보시죠. 그리고 국정원에서 전혀
지원을 받고 있지 않습니다. 지원을 좀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 송교수의 김정일에 대한 평가에서, 통이 크고 세계정세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이다, 이렇게 평가를 한 것이죠?
-네. 

그런데 그런 평가는 임동원 전 통일원장관이나 보수주의자로 손에
꼽히는 미국의 윌리엄 케리도 그런 평가를 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도 다 친북인사이가요? - 근데, 저는 김정일에 대한 능력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다라고 했어요. 제가 문제 삼은
것은 그 부분이 아닙니다.  

* 아까 피고인이 범민련에 참여하셨다고 했는데요? - 피고인은
베를린 3자 회담이라고 범민련 결성하는 3자 회담에 참여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송교수님) 제가 회원으로 참가한 것은 아닙니다.
황석영씨하고 이민식 다 내 친구들이니까 거기서 회의 하는데
끝나고 술 한 잔 한 겁니다. (변호사) 그 사실을 증인은 알고
있습니까? (증인) 모릅니다. (송교수님) 범민련 결성시기에는
회원이 아니었습니다.   

* 증인은 북한 체제에 실망을 했다고만 말씀하셨는데, 주체사상
자체는 그대로 옳다고 생각하고 있나요? - 주체사상의 인간 중심
철학의 문제 의식에 대해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사상이 인간 중심이고 역사 발전의 주체가 인민 대중이다,
이런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동의를 하고 있습니까? -네. 

* 내재적 접근법에 대해서 증인이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
북한만을 국한시켜서 이야기 한다면, 남한과 같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준으로 접근하지 말고, 북한 내부의 논리로 봐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학문적 방법론에 대해서는 증인은 생각은 어떻습니까? -
부분적으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북한
문화에 대해서 접근할 때요. 정치 같은 경우에는 내재적 접근법이
한계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보편적인 민주주의, 인권,
삼권분립, 주권재민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으로 접근해야지, 특별히
북한이라고 해서 다른 기준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 전혀 다른 두 사회가 있다고 했을 때, 그거를 한
쪽 사회의 삼권분립과 같은 기준으로 전혀 다른 체제에 똑같이
적용을 할 수 있습니까? - 과거 고대 사회나, 시점이 일치한다면,
회교국가도 있고, 자본주의 국가도 있고, 사회주의 국가, 그거는
접근할 수 있죠. 당연히 접근해서 평가할 수 있죠.  

아까 증인이 이야기하시기를 탈북자도 내재자인데 탈북자 이야기도
들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셨는데 거기 체계가 자기가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나온 사람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체제와는 전혀 다른 접근방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재적 접근 방법에서 북한을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북한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을 통해서 북한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 애초에 그런 가치 판단이 있는 건
아니에요. 북한 정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빼고, 이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전제가 어디 있습니까. 

내재적 접근이라는 것은 그 사회의 시스템 자체로 보자는 것
아닙니까? 북한에 살더라도 자본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어서 사회주의 시스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탈북자들은 그 시스템이 싫어서 나온 것 아닙니까? -
내재적이라는 의미가 내부에 있다는 것, 그것만 보자는 거죠.
동의하냐 동의하지 않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로. (변호사) 그게
논리적으로 내재적 접근법을 이해한 것이 아니다라고 내가 이야기
하는 겁니다. - 그건 의견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 주체사상을 북한 쪽에서 직접 쓴 글, 방송 이런 것을 보고서
학생들이 공부한 거라고 하셨죠? -네. 

그러면 아까 이런 시스템이 없는데 송교수가 이론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줬다, 아주 오리지널한 이론은 북한 쪽에서 직접 쓰고 했던
책과 방송 팜플렛 등이었는데요? - 주체사상 자체에 대해서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접근하는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증인이 송교수가 이론적으로 뒷받침 해 줬다고 계속 말씀하셨는데,
이론 자체가 북쪽에서 정리된 완결된 체계로 나온 것 아닙니까? -
주체사상에 대하여, 이런 걸 아무리 봐도 남한 사회에서 북한에
대해 거부 반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주체사상을
접근시킬까 이런 방법론에 대한 것입니다. 

*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북한에 대해서 우호적인 생각을 전파하기
위한 생각으로 아주 의도적인 것이었다라고 하셨는데, 모름지기
어떤 현상이라는 게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에서 활성화될 수
있는 토대가 있지 않으면 그런 거 앞에서 아무리 떠들고 해도
활성화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6,7,80년대 군부 독재가 끝나고
87년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 사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기저에는 반북 이데올로기와
분단체제가 있고, 이제는 우리 사회의 다른 한 쪽인 북한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들이 실제로 운동권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광범하게 국민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 아닙니까?  
- 당시 PD파는 북한 바로 알기 운동 안 했어요. 예컨대 북한
기행문이나 영화상영도 운동권 선배들이 권유해서 본 것이지, 그냥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상당한 주도성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에요. 

운동권에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몰라도, 우리 사회에서 그
당시에 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난 주사파니까 북한 바로 알기
운동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되고 난 후에 북한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국민들과 민중들의 생각과 기본적 열망들이 있었던
것 아닙니까? - 그런 열망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증명할 수 없는
겁니다. 지금 명확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건, 당시 그걸
주도적으로 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움직였다는 것 이외에는 증명할
수가 없다니까요.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글이 피고인이 생각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에 대한 피고인의 개인적인 학문적 견해라는 것을
증인이 인정합니까? (검사의 질문 설명: 북한 당국과 아무 연계
없이 순수한 학문적 입장에서 그 글을 발표한 것이라는 것을
증인이 인정하느냐는 말입니다) -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피고인의 글은 당시 남한 사회에 광범위하게 있었던 인식의 또
다른 하나의 표현 아니냐 이거죠? 이것을 친북적인 반국가
활동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 이것이죠? - 법률적인 것은 제게 묻지
마십시오. 

615남북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이후에 발생하는 남북 교류도 부정적으로 보십니까? -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시대정신 2002년 5-6월호에 보면 송두율 교수의 북한 인식이라는
글에서, 이 문제에서 유력한 증인이라 할 수 있는 국정원이 황장엽
씨의 주장을 인정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결론이 내려져 있다,
이것을 근거로 이야기하고 계시는 거죠? -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그 글에서 보면 또, 송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활동을
했다고 밝혀졌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데, 지금 그거 밝히려고
우리가 재판을 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 그건 지금 모르겠고. 이
재판에 어떤 대목이 쟁점이 되고 있는지 제가 모른다니까요. 

증인이 예전에는 송교수의 글이 학문적인 견지에서 쓴 거라고
봤는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그것이 아니더라, 이렇게 확인을 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확인을 한 것이, 그 근거가 결국은 국정원이
송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이라고 발표한 것 아니냐구요? -
그것만은 아닙니다. 예컨대, 사회와 사상에 처음에 송교수님 글이
소개 됐을 때와 그 이후와는 다르죠. 북에도 여러 번 왔다갔다
하고, 김일성 대학에서도 강의도 하고, 상당한 특수 관계, 단순히
정치국 후보위원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굉장한 특수관계가
있다라는... 

그러면 그게 밝혀졌다, 이렇게 단정을 하면 안 된다 이 말입니다.
- 그건 제 자유죠. 글 쓰는 건 제 자유죠. 

3. 송두율 교수의 증인에 대한 질문. 

* 내가 37 년만에 들어와서 피고인 자리에 앉아 있는데, 국가
보안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습니다 - 저는
개인적으로 국가보안법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제 7조
고무 찬양은 이미 상당히 사문화 되어 있고, 그것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상의 자유를 법으로, 특히 형사적인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것은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만, 북한이 현실적인
위협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형법상에 있는
간첩죄라는지, 이런 것과 현재 국가 보안법을 어떻게 조정할
필요는 있겠다, 이런 필요는 인정합니다.  

4. 판사의 질문. 

* 증인이 내재적 접근법에서 피고인이 북을 바라보는 것이 정권의
요구에서만 바라본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 피고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 (송교수님 대답) 내재적 접근법은 기본적으로
첫째는 내가 방법론을 사용할 때, 그것은 경험적이어야 한다,
데이터를 써야 한다, 두 번째 비교 사회주의 연구하라, 이 두 가지
메시지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북을 연구할 때, 가급적이면 그
작동하는 원리, 그것이 내재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
그들의 사고에 남쪽하고 다른 것은 뭔가, 이것을 그들의 내적인
논리를 경험적으로 연구하라, 이런 것과, 두 번째 중요한 것은
북한도 사회주의이다, 따라서 중국, 소련, 쿠바, 모든 기존의
사회주의 체제와 항상 대비하여 연구하여 북한의 특수성은 어디
있는가, 보편성은 또 어디 있는가, 그래서 북한 연구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를 항상 이야기 해 왔는데, 그것은 지난번에
박순성 교수가 와서 충분히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한꺼번에
하겠습니다.

* 판사가 <역사는 끝났는가> 책을 제출해 줄 것을 요구. 

* 대부분 대학의 학생회는 NL계가 장악을 했습니까? - 주요대학
학생회는 그랬습니다.  

사회와 사상이 88년 이 무렵에 운동권에서 많이 읽던 잡지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피고인의 글이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당시에 사회와 사상에 몇
차례에 기고한 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 특히 내재적 접근법에
관한 그 글을 말합니다. 다른 글들도 그렇습니다. (정확한 그 글의
제목이나 내용에 대해서는 현재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88년, 89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그 글을 의미하는 겁니까?
-네. 

그 잡지를 돌려가며 본다든지, 독회를 한다든지 그런
분위기였습니까? - 아무래도 권유하고 그랬습니다. 

단행본 같은 것은 구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렇게 권유해도 되는데,
잘 접하기 어려운 사상에 관한 월간지 같은 것은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복사본을 돌리고 그랬습니까? - 복사본을 돌렸던 기억은
없구요. 하지만 당시에 <사회와 사상>은 이론적인 글들을 학술적인
차원에서 많이 다루었기 때문에 상당히 널리 읽혔다고 봅니다.
(송교수님) 원래 그 잡지를 기획해서 김은호 사장이 독일에
왔습니다. 제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죠. 일본의 사상이라는
잡지를 모델로 해서 내는 것인데, 그 사상은 굉장히 수준 높은
잡지입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필진 양이 있는가,
이런 면에서 경고를 했는데, 결국 필진이 고갈되다 보니까, 물론
그 사람들은 나를 위해 칼럼을 만들었고 강제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지만, 결국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한국의 학계
실정이었구요. 

증인이 아시기로 <사회와 사상>이 언제 창간되어서 언제 폐간된
걸로 알고 있습니까? - 한 1년, 2년 가까이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슬그머니 없어진 것 같은데요. 

증인이 피고인의 글이 운동권에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것은
<사회와 사상>에 실린 글 외에 다른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까? -
<사회와 사상> 글뿐만 아니라, 보다 본격적으로는 단행본들이
나왔거든요. <역사는 끝났는가> 라든지. (판사: 그건 상당히 88년,
89보다 뒤의 일이죠.) 그건 왜 그랬냐면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소련 동구의 붕괴되면서 국내의 운동권 내에 상당한 동요들이
있었죠. 그런 와중에 관심은 북한은 과연 건재할 것인가가 초점이
있었고, 그런 것에 대한 뭔가 시원한 글들이 없을까, 이런
욕구들이 많이 있었는데, 단행본으로 나온, 특히 역사는 끝났는가
이런 글들이 그런 욕구를 채워주는데 대단히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역사는 끝났는가는 발간이 95년으로 되어서 88년 89년부터
5-6년 갭이 있는데 그 사이에 피고인의 어떤 글들이 영향을
미쳤습니까? - 단행본 나오기 전에는 신문에 기고된 글들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구요. <역사는 끝났는가>는 대표적인 단행본으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입니다. (송교수님) 그러나
역사는 끝났는가가 북에 대해서만 쓴게 아니라 그 내용을 보면
자연과학, 기술, 예술에 대한 논의도 있는데, 물론 북에 대한
논의는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까, 내용적으로는. 

주체사상을 신봉하던 입장에서 생각을 바꾼 것을 이야기했는데,
증인의 경력으로 봐서 그 이유가 조금 약하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이 되거든요? - 사실 제가 1년 가까이 활동을 그만둔 채로
상당히 많은 갈등을 했습니다. 어차피 제가 15년 가까이 활동을 해
왔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 자체가 쉽게 허용이 안 됐고,
다른 일도 못 하는 상태에서 갈등과정을 겪었고. 제가 젊은 시절에
맑스주의나 주체사상에 심취했다는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어쨌든 북한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을 접했을 때 그것을 부정할 수
없었고, 그런 갈등과정에서 결국에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사건은, 제가 당시에 제 나름대로 북한에 새롭게 느끼게
된 내용을, 당시 말지라고 하는 운동권들이 많이 보는 잡지에
인터뷰 형식으로 기고했는데, 저는 그거에 대해서 내부에서 토론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거든요, 제 문제의식이. 그런데
대다수 사람들이 배척하고, 북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고자 하지
않는 내부 분위기도 저한테는 상당히 운동권을 정리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사회와 사상>이 운동권 말고 일반 문과대, 인문계 대학생들이
많이 보는 잡지라고 할 수 있습니까? - 그렇게 많이 보았다고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운동권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일반 대학생들이나 혹은 대학원생들이 많이
보았을 거라고 보이지는 않습니다.  

*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하고 피고인의 글하고 운동권이나
일반에게 미치는 영향이나 의미가 증인이 생각하기에는
어떻습니까? - 영향 정도로는 상당히 같이 비교할 만 할 것
같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가 저희 같은 80년대 초반 세대,
학생운동을 하게 되는데 있어서 상당히 큰 인식 상의 영향을
미쳤거든요. 마찬가지로 주로 주사파 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에 비견될 만한 영향이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비견하다고 그러는데, <전환시대의 논리>는 단행본이고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접근성 이런 것은 차이가
나는 것 아닙니까? - 저는 단순히 <사회와 사상 >기고문만 갖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국내에 소개되어 있던
단행본과 간간히 신문에 기고되었던 그 전체적인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신문도 91년에 가야 잡지나 신문에 글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시기까지는 <전환시대의 논리>와 영향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접근성의 입장에서.. - 접근성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고 봅니다. 

단행본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신문에도 그 때까지는 실리지도
않았을 것이고, 운동권에 국한해서 이야기 하면 할 말이 없는데,
일반 학생들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으로 보면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닌지, 한겨레 신문에 실리기 전까지는 그런 면이 있겠죠? -네. 

국정원 측에 도움을 받는 것은 아닌지?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까?
- 저는 솔직하게, 도움을 좀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어차피 한국의
NGO들이 이래저래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요. 당연히 저희가
하는 일도 받아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까지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 (변호사 측 추가질문) 시대정신과 단행본을 파는 수익으로
수지가 맞는지를 질문.  
증인은 주체사상이 지금도 유효하고 맞다고 생각한다는 글을
시대정신에 쓸 계획은 없습니까? - 시대정신 창간호에 썼습니다.
지금도 쓸 용의가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돕는다는 것은 함께 비를 맞는 것"(문화제 기사)
[오마이뉴스] "우리 삶 속의 모든 경계를 넘어보자" (200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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