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빛 형형하고 웃음 맑으셨던 우리 선생님
[홍성태 상지대 교수] 김진균 선생님 영전에
오마이뉴스(news)
고 김진균 서울대 명예교수의 부음을 접한 고인의 제자 홍성태
상지대 교수가 스승을 회억하는 조사를 <오마이뉴스>에보내와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김진균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날이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선생님께서는 적어도
여든은 쉽게 넘기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순
여섯번째 생신을 넘겼을 뿐인데, 우리를 남겨두고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본래 김진균 선생님께서는 아주 건강하신 편이셨습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으셔서 누가 보더라도 호남아셨습니다. 때로 눈매가 몹시
날카롭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얼굴이 크면서도 아주 멋있게 생긴
사나이 모습이셨습니다.
네 해 전 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시고도 섭생과 운동에 힘을
기울이셔서 평소의 건강하신 모습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런데 지난 해 11월에 갑자기 황달이 시작되더니
암과의 싸움에서 그만 밀리고 말았습니다. 얼굴이며 온몸이
그야말로 반쪽이 되시더니 이윽고 깡마른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습니다.
눈빛 형형하고 웃음 맑으셨던 우리 선생님
설을 쇠고 두 친구와 함께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몸이
나빠지신 뒤에 두번째 찾아뵈는 자리였습니다. 다른 두 친구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처음 뵙는 자리였습니다. 두 친구는 너무
놀라 눈길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했습니다.
그러나 깡마르고 목소리는 변하셨지만 선생님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고 웃음은 여전히 맑았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선생님은 제자들을 즐겁게 맞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즐겁게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마음 속으로 희망을 키우며 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희망의 빛살이 시나브로 잦아들다가 문득
꺼지고 말았습니다.
김진균 선생님께서는 1980년에 전두환 일파에 의해 해직되셨다가
1984년 가을에 복직되셨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선생님이 복직되신
뒤에 입학했습니다. 선생님의 강의를 꼭 들어야 한다거나 선생님의
삶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으며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4학년 봄에 떠난 졸업여행. 갑작스런 폭설을 만나기도 했던
지리산 산행을 선생님께서는 자유롭게 잘 이끌어주셨습니다. 저는
이 여행에서 꽤 큰 사고를 쳤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이와 관련해
한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이 일로 저를 책하거나
놀리지 않도록 다른 선배에게 주의를 주셨더군요.
지리산처럼 넓은 풍모의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지리산을 가 본 사람은 누구나 선생님 하면
지리산을 떠올리고, 거꾸로 지리산 하면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그만큼 선생님께서는 지리산을 닮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선 넓으셨습니다. 1989년 초의 어느날인가,
상도연구실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민중사회학을 주제로 세미나를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쓰신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이에 대해
누군가 대단히 직설적이고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선생님, 참
무식하십니다'는 말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막 학부를 졸업한 학생이었던 저는 그 비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선생님의
태도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계급론에 입각한 그 비판을 잘
들으시더니 오히려 '아주 고맙다'고 답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생님께서는 후학들의 옳은 소리를 잘 들으셨습니다.
이 때문에 선생님께서는 여러 이론을 두루 섭렵하실 수 있었고,
또한 사회의 여러 분야에 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실 수
있었습니다. 학문의 넓이가 인품의 넓이와 비례할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께서는 잘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또한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변화무쌍한 시대에,
변화는 무조건 좋은 것으로 치부되는 이 부박한 시대에,
선생님께서는 변화는 필요한 것이고 늘 일어나는 것이지만 그러나
모든 변화가 참으로 옳은 변화는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계절이 변하듯이 이론이 바뀌던 1980년대 말-1990년 초 사이에도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현실에서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을 올바로
볼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론의 변화는 언제나 현실의 변화를
바탕에 두고 이루어져야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변화무쌍한 시대에 '옳은 변화'를 가르쳐 주신 스승
선생님의 학문과 실천은 실학에 뿌리를 두고 맑스주의를
받아들여서 민족과 계급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이었다고 줄일 수
있습니다. 혼란에 혼란이 꼬리를 물던 시절에도 이런 선생님의
학문과 실천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지리산이셨습니다.
작년 1월에 선생님과 함께 서울사회과학연구소를 꾸렸던 후학들이
선생님을 모시고 양수리로 놀러갔습니다. 누군가 해마다 이런
모임을 가지자고 했지만, 이제는 다시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자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선생님의 건강 때문에 아주 조심스러운 자리였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리를 대하고 여러 말씀을
하셨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부터 각자의 살림살이 얘기까지
온갖 얘기들을 정답게 나누었습니다. 물론 노래도 실컷들
불렀지요.
선생님의 '백치 아다다'를 오랜만에 들었습니다. 북한강가에서
아침을 맞고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커다란
체크무늬 목도리를 두르고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빙긋이 웃고
계십니다. 이 모습을 다시 뵐 수 없다니, 왈칵 눈물이 쏟아집니다.
선생님께서는 제자들을 깊이 존중해 주셨습니다. 김진균 선생님은
주례를 많이 선 선생님으로 유명합니다만, 그 까닭은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존중했기 때문이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제자들을 존중하고
아껴주셨기에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는 그 노래 '불나비'
그러나 선생님의 건강에 유념한 제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정말로 선생님의 건강에 유념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래서 선생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서 정기적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라면, 대장암을 훨씬 전에 발견했을 것이고 저는
지금 이 글을 쓰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후회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학문과 실천의 삶을 사시다가 건강을 크게
해치셨습니다. 평소 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병이
커지는 것을 늦게 알았습니다. 우리의 잘못이 너무 큽니다.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늘 우리의 잘못도 떠올리게 되겠지요.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를 달래시겠지요. 그렇게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품어주시겠지요. 저희는 내일 또
'불나비'를 부르겠습니다.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외치는 그 노래,
그래서 선생님께서 좋아하셨던 그 호쾌한 노래.
2004/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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