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T 시론] 청년같은 `어른`
2004년 02월 24일 (화)
강내희 중앙대 영문과교수.문화연대집행위원장. 객원논설위원
지난 14일 67세로 타계한 김진균 교수는 별칭이 많았던 분이다.
장례식 공식 명칭이 `민중의 스승 고 김진균 선생 민주사회장'으로
정해짐으로써 최종적으로 그의 이름은 `민중의 스승'이 되었지만,
그는 그 이전에 민중의 벗이었다. 서울대에서 36년 동안 사회학을
강의한 학자면서도 늘 민중의 삶과 투쟁의 현장에 서왔기
때문이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그밖에도 많다. `진보사회학계
거목' `진보학계의 맏형' `진보학문과 민주교수운동의 대부' `참
지식인' `행동하는 지성' `진보진영의 거목' `진보진영의 버팀목'
`진보의 느티나무' `느티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드리운 너른 마당'
등이 그의 타계를 전한 기사들이 사용한 말들이다. 나는 이
별칭들이 허사라고 보지 않는다. 김 교수는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민주노총, 사회진보연대,
진보네트워크센터, 전국민중연대 등 무수히 많은 단체의 대표,
고문, 지도위원을 역임하면서도 매사에 열과 성의를 다 바쳤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청년' 김진균이다. 연배로는 십
수년이 위였지만 그는 내가 부러울 만큼 마음이 젊었다. 평소에
즐겨 부르는 노래의 제목을 따서 `불나비'라는 인터넷 아이디로
사이버공간을 누비고 다닌 것이 단적인 예다. 그에게는 실로 많은
청년 친구가 있었다.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다행히도
우린 아직 젊은이라네"라는 가사의 <불나비>는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 학생들의 십팔번 곡이었고, 그의 인터넷홈페이지
`너른마당'은 "앞만 보고 걸어가는 불나비" 제자들과 후배들이
즐겨 찾는 사이버공간이었다. 아마 오프라인에서도 그는 지난 사반
세기 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를 꿈꾸는 청년들이 가장 자주 만난
어른이었을 게다. 그만큼 품이 넉넉했고, 청년들이 함께 나누고
싶은 활력을 지녔던 것이다.
언젠가 보안사가 민간인 사찰로 물의를 일으킨 정보파일에서 김
교수를 가리켜 `외골수'라고 한 적이 있다. 4.19세대에서도 드물게
꼿꼿한 비판적 자세를 지녀온 점이나, 처음 학문을 시작했을 때
보수적인 `근대화론'에서 갈수록 진보적 입장을 취해온 것을
생각하면 그의 삶은 외곬이다. 하지만 이 표현은 김 교수가 민중의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해왔다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김진균 교수가 진보진영의 큰 어른이 된 것은
사회의 복잡함만큼이나 어려움이 많은 진보의 길을 언제나 활기찬
청년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어느 한 순간인들 그가 몸과
마음을 나태하게 가지는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농성을 하는
자리이건, 회의장이건, 술자리이건 가리지 않고 그는 끊임없이 온
몸을 썼다. 잠자리 정리, 주변 청소, 산보도 누구보다 먼저였고,
식탁에서 수저 놓기, 양념 치기도 어느새 그의 몫이었으며, 공부나
논의 주제를 발굴하는 데도, 무슨 일이건 문제를 파악하는 데도
먼저였던 것이 그다. 활력의 상징, 김진균 교수는 청년이었다.
청년실업이 급증한 지금 우리 사회의 청년은 위기에 빠져 있다.
교육기간의 확대에 따른 아동기의 연장, 조기 퇴직 등으로 인한
장년기 시기의 앞당겨짐으로 청년의 시간도 줄어들었다. 위기에
빠진 오늘의 청년에게 꼭 필요한 사표가 김 교수와 같은 분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갈수록 스승 부재의 시대로 빠져들고
있다. 어른다운 어른, 선배다운 선배가 없는 것이다. 장례 기간에
고인을 잃은 가족보다 오히려 제자, 후배교수, 그를 모셨던 젊은
활동가들이 더 큰소리로 눈물을 흘렸던 것은 가장 친한 친구,
영원한 청년을 잃었다는 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김진균 교수 같은 이가 또 어디서 나올까? 불나비는
불만보고 날아간다. 일견 그 모습이 무모해 보일지 모르나,
불나비로서는 목숨을 건 비행이다. 몸을 불사르는 비행, 그것은
자신의 모든 정열과 활기를 바치는 헌신이다. 무슨 일에든 자신의
활력을 바칠 청년이, 청년 같은 어른이 그리운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