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 재판> 관람기(8)
2004년 2월 24일 화요일 오후 2시. 그 동안 <송두율 교수
재판>이 진행되던 서울 지방법원 311호 법정이 417호 대법정으로
바뀌었다. 이미 마지막 재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법정의
좌석은 듬성듬성 비어있다. 방청객들도 지칠만도 하겠지... 언론도
마찬가지다. 검찰이 제기한 송두율 교수에 대한 죄목의 그 어떠한
물증도 제시되지 않은 그 동안의 재판과정에서 언론은 이제
<송두율 교수 재판>에 그 어떤 매력적인 기삿거리를 찾지 못하는
듯하다. 그 많던 기자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일당을 받고 동원된
듯한 할아버지와 아줌마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한나라당이
풍지박산되고, 조선일보마저 한나라당을 비판하는 상황에서 독재와
파쇼의 물을 먹고 자란 수구파들에게 나약한 지식인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송두율 교수가 그리 대수겠는가? 지식인을 권력의
노리개쯤으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송두율 교수가 감옥에서 보내는
몇 달 동안의 고통이 느껴지기나 하겠는가?
417호 대법정은 계단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판사석을 비롯한
법정 전체가 한 눈에 가득 들어오는 장점은 있지만 방음장치가 잘
처리되어 있지 않은지 판사를 비롯한 변호사와 검사의 마이크가
사방으로 울려서 정확한 발음을 들을 수가 없다. 2시가 조금
넘어서 헐레벌떡 법정에 들어서니 재판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대경 주임판사는 여전히 판사석 가운데 앉아있는데 그
양 옆으로 앉아있는 두 명의 배석판사가 바뀌었다. 이전의
배석판사는 20대 말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새로 바뀐 두
명의 배석판사는 이제 막 사법연수원에서 연수를 마친 20대 중반의
초보 판사들로 보인다. 주위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배석판사들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하자, 누군가가 “둘 다 90년대 학번의 초보
판사들입니다”라고 말한다. “허-어”하는 한숨소리가 절로
나온다.
오늘의 재판은 검찰 측이 제시한 증거물에 대한 변호사 측의
동의 여부, 그리고 변호사 측이 제시한 증거물에 대한 검찰 측의
동의 여부에 대한 판사의 심리조사로 일관되었다. 그런데 그
증거물이라는 것이 대부분 <역사는 끝났는가?>를 비롯한 송두율
교수의 저서와 논문, 그리고 독일에서 출판되거나 신문에 기고된
독일어 논문이나 에세이에 대한 번역물이다. 학문의 자유와
미래사회를 여는 지식, 우리 대학들의 세계화 운운하는 21세기에,
서울지방법원 417호 법정의 모든 사람들은 수 십 년 동안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머리가 하얀 노년의 학자를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패스한 나이 어린 판사들과 국가권력에
찌들대로 찌들은 공안 검찰의 무식하고 예의라곤 전혀 없는
마녀재판을 아무런 제지도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재판장은 마치 미안하기라도 한 듯, 각각의 증거물에 대한 동의
여부를 마친 후에 피고인 석에 앉아있는 송두율 교수에게 “검찰은
피고인이 북한에 대한 비판의 입장이 아니라 이해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라고 이야기한다. 학문적으로 비판이나
이해는 서로 같은 말이다. 송두율 교수는 북한을 비판하거나
이해하는 두 가지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는 북을
“악마적인 타자”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을 “천사적인
타자”로 보는 것이다. 우리가 미국이나 일본을 바라보는 입장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일본을 “악마적인 타자”로
인식하지만, 다른 사람은 똑 같은 미국이나 일본을 “천사적인
타자”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에서 우리는 흑인이나 아랍인을 “악마적인 타자”로
인식하거나 “천사적인 타자”로 인식하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한다. 대부분의 근대적 주체로 구성된 남성들이 여성을
바라보는 인식도 “악마적인 타자”나 “천사적인 타자”의
시각이다. 오늘날 전세계에 있는 근대성 비판의 학자들은 이러한
근대의 이분법이 지니는 파괴성과 폭력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제시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송두율 교수는 북을 “악마적 타자”로 인식하거나 “천사적인
타자”로 인식하는 근대적 이분법의 인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진정심을 가지고 북을 비판하거나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진정심”을 가지고 백인이나 흑인, 그리고 아랍인이나
여성, 심지어 동물이나 자연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송두율 교수는
“진정심을 갖추었을 때”, 북을 연구하는 학자는 근대의 선험적인
비판이나 이해에서 벗어나 “경험적” 비판이나 이해로 나아갈 수
있고, 군대적 학문체계가 만든 서구ㆍ백인ㆍ남성 중심주의의
근대적 주체가 자행하는 주관적 비판이나 이해에서 벗어나
“비교(사회)학적” 비판이나 이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경험적이고 비교학적인 접근이 근대화 과정에서 북의
사회체제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전지구적 보편성과 한반도의
특수성을 비판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송두율 교수는
자신이 주장하는 북에 대한 “내재적 연구방법론”이 경험적
연구와 비교사회학적 연구를 골자로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라고 첨가한다. 재판장은 아무런 말이 없다. 주위에 있는
배석판사들은 37년의 타국생활에서 노년의 학자가 한반도의 조국을
바라보는 “진정심”을 이해할 수 있을까?
2차 공판이었던가, 송두율 교수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딧세이의 귀환“을 예로 든 적이 있다. 그는 ”오딧세이가
항해하는 도중에 자신을 꼬드기는 요정 사이렌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배의 돛에 묶었다"고 이야기했다.
송두율 교수가 이야기하는 “배의 돛”은 무엇일까? 아마도
한반도, 혹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남과 북의 보통사람들일 것이다.
요정 사이렌의 유혹은? 근대화 과정의 풍랑에서 한 때는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해방 이후에는 미국 자본주의와 구소련의
사회주의로, 한국전쟁 이후에는 북한 중심주의이거나 남한
중심주의로 끊임없이 떠다니는 한반도라는 돛배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적 무의식으로 일본의 시각, 미국의 시각, 소련의 시각, 혹은
남한의 시각이거나 북한의 시각을 강요하거나 강요받는다. 일제
시대의 말년에 최남선과 이광수는 일본의 시각에 고착되어 있지
않았던가? 오늘날의 많은 지식인들은 미국이나 남한, 혹은 북한의
시각에 고착되어 있지 않은가? 이러한 근대의 사회적 무의식에서
벗어나는 일은 나의 근대적 인식이나 이성이 만든 이러저러한
입장을 버려야만 한다. 그리고 남이나 북을 몸으로 부대끼면서
삶으로 경험해야만 한다. 이러한 경험적 인식은 한반도의 남과
북만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도 그렇고, 남성과 여성이 그렇고,
아프리카와 아랍의 세계도 그렇고, 자연이나 동물도 그렇다.
재판은 유례없이 한 시간 만에 끝났다. 다음 공판은 3월 9일
오후 2시로 공고되었다. 다시 검찰 측 증인 1명과 변호사측 증인
1명이 추가로 법정에 나오기로 예정되었다. 3월이면, 대학이
개강을 하고 화요일에는 강의가 있다. 더 이상 재판을 관람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1월 말이나 2월 초에 끝날 것이라고
예정되었던 재판을 이렇게 질질 끌고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감옥에 있는 송두율 교수와 옆에서 옥바라지하는 정정희 여사,
그리고 법정에서 늘상 만나는 <송두율 교수 석방 대책위원회>
사람들만이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