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새 한 마리가 있다. 짙푸른 밤바다에 흰 구름 두둥실 떠가는
화안한 창공을 열고 있는, 두 날개 활짝 편 새 한
마리가······. 밤과 낮의 경계에서, 자연과 초자연의
경계에서, 생물종과 초생물의 경계에서 혹은 암흑과 계몽의
경계에서 긴 세월을 잊은 듯 정지된 시간을 보내는 새 한 마리가
늠름하고 꿋꿋한(凜然)한 모양으로 허공을 채우고 있다.
경계인의 사색을 여는 그림이, 밤의 허공에 낮의 새를 그려놓은,
르네 마그리트의 <입장(入場)>이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마당에 들어선다는 것(入場)은 바로 그 자리에 서는(立場) 것을
의미한다. 하여, 작가 스스로 남과 북의, 근대와 탈근대의, 민족과
탈민족의 경계에선 경계인이라는 외로운 입장에 처해 있음을
고백하는 저자의 자화상이다. 하긴 근 이십년을 감옥에서 살아오신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지 않았던가, 관계의 최고 형태는
입장의 동일함이라고. 하여 이 그림은 책을 펴고 작가의
사색마당에 들어서는(入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정치적
입장은? 사상적, 철학적 입장은 무엇인가? 하고······
1. 둘이서 투쟁하는 것은 언제나 연극이다(미셀 세르)
역사적인 6·15 남북 공동선언이 남북·해외 동포의 가슴을 설레게
한 지도 어언 4년의 세월이 흘렀다. 송두율 교수님께서 그 절반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서 먼 이국땅 베를린에서 쓴 글들을 모아 낸
『경계인의 사색』을, 출간 직후 읽었을 때 눈에 가장 크게 들어온
대목은 대립은 연극이며 극은 통한다는 양극의 조화와 중요을
이야기한 ‘통일철학’ 부분이었다.
당시, 폭력의 근원적 구조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종교체제,
정치제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서구의 선악 이분법이 가져오는
분열의 논리가 우리 사회의 통일 지향 사상을 어떻게 왜곡시키고
억압하는가에 주목하고 있었다.(이 논리는 지금도 북을 비롯해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등 7개국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하여 자유와 해방을 빙자한 전쟁을 끝없이
벌이려는 부시 정권의 사상적 근거가 되고 있다)
끝없는 식민과 제국이라는 야만의 20세기를 추동해온 끝없는 힘은
분열과 파괴의지였다. 이념과 체제의 분단(分斷)은 분열의지의
극을 이루었고 한국전쟁은 파괴의 극단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큰 분단과 대립이 체제 속에서 대립해온 남북의 권력
주체는, 세르의 말대로라면 끝없는 연극을 해온 셈이다. 침략의
위협과 공포를 조장하고 왜곡하면서 투쟁을 이끌어온 분열주체의
연극 속에서 한반도 우리 겨레가 겪은 고통과 수모를 어찌 다 말로
할 수 있으랴!
신자유주의와 평등주의, 수구와 진보, 반김과 반전 등 끝없는
분별지(分別智)에 의한 분열은 반동세력 대 진보세력 구도로만
나타난 게 아니라 속에서만 소위 진보진영과 운동진영 속에서도
끝없이 지속되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소리가 나올만큼 민족해방과 민중민주 등에서 소위 주사파에
이르기까지 그 실체도 제대로 모르면서 우리 사회는 끝없는 분열의
가속페달을 밟아왔다.
그 분열의 악마성을 물리치고 화합의 상징성을 드러낸 역사적
사건이 바로 작은 촛불의 힘을 모아낸 촛불 시위였다. 그 바탕을
이루기까지 남한 사회가 추구해온 변화의 과정과 변화의 흐름을
거부해온 긴 역사와 현실이 있다. 그 현실의 풍경을 담아낸 것이
『경계인의 사색』1부 ‘동/서/남/북/의 만화경’에서이다.
이 글에서 작가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로부터 일본과 미국을
가로지르며 6·15시대의 국제정세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를
묻는다. 『하얀 가면의 제국』에서 체제와 공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박노자가 노란피부로서 흰 가면을 쓴 우리들의 허위적
서구추종주의(오리엔탈리즘)를 다시금 일깨운 바 있듯이
이스라엘과 미국을 선민(選民, 善民)으로, 선진(先進)으로 섬기는
보수우익과 탈역사적 기독교 틀에 빠져 있는 우리의 거짓 살갗을
벗겨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단절을 기정사실화 하고 인도적 사랑에 기반한
나눔조차 이적행위로 몰아가는 광기를 자주 목도한 바 있다.
겉으로는 지구화와 탈역사, 탈근대의 정보사회를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바로 옆의 한핏줄과 대화와 신뢰에 기반한 만남을
통해서 이룰 수 있는 정의와 평등과 통일의 연대를 꿈꾸지 못하는
빈곤한 상상력의 외눈박이들에게 ‘한 면에는 백두산을, 다른 한
면에는 한라산을 양각한 통일주화 1‘원’을 상상‘을
공유(79쪽)하자는 제안이 가슴에 와 박힌다. 지금도 여전히
동/서/남/북으로 갈라진 이 세상이기에······
2. 우리 모두 통일의 피뢰침이 되자
룡천 사고 직후, 남측 노동자를 대표하여 5·1절 대회 참가 차
평양을 방문하고 난 이후 경계인의 삶 그자체가 나에겐 더 이상
낯선 타자의 얼굴로 다가오거나 길 모르는 이방인의 발걸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3박 4일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또
다른 조국의 한 모퉁이에 서 보았을 때, 사고의 분단 만이 아닌
몸과 삶의 분단이 내 안에 얼마나 뿌리 깊게 내려져 있는가를
절감했다. (나는 전형적인 반공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고 자라난
세대이다) 적어도 지금은 한국전쟁과 전후처럼 열전과 극한의
시대는 아닌 21세기여서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이 겪은 양체제에
대한 환멸과 수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양체제에 대한 비교와
혼돈 속에서 내 안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내전(內戰)과 방황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산가족과 장기수로 재일동포로 타자화된 그들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때 관념적으로 느꼈던 심회가 바로 하나의 민족으로
두개의 분단 조국을 경험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은 데서
오는 감격과 고통이 나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뒤로 남북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무당들이 올라서는 작두날 같이
살벌하고 아슬아슬한 경계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경계인의 사색』2부 통일시대를 위한 성찰이 하나의 사색이고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몸소 남북을 오가며 몸으로
겪은 분단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치열한 몸부림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이 글을 처음 접할 때가 아닌 2004년 방북 이후였다.
모두가 느끼듯이 6·15공동선언 이후 한반도 정세는 냉전에서
화해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2002년 서해에서 벌어진 총격도
(월드컵의 참여 열기가 워낙 뜨거웠던 까닭도 있겠지만) 남한의
사람들에게 그리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만큼 전쟁의
공포로부터 벗어난 것이 사실이다.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자는 대 원칙 아래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일말의
교집합을 이루는 부분이 있다는 공통점을 인정한 것도 획기적인
진전이다. 아직도 통일을 (매우 순진무지한 발상으로) 구체적인
협상이나 연대의 과정없이 베를린 장벽 무너지는 듯한 하나의
합(사건)으로만 생각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통일과정의
징검다리를 차분히 놓기로 양측이 합의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작가는 남북의 경계에 선 사람이 바라보는 통일은 자주와
통일방안에 대한, 아직은 동상이몽(同床異夢)의 처지에서 현실을
해석하려는 두 체제에 대한 접점을 제시한다. 분단 체제나 구조가
확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심정으로 서로가
서로를 껴안고 이해하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분단시대라는
인식이 그 근거를 뒷받침한다. 이산의 아픔을 겪은 분단세대
못지않게 세 세대의 남북 교류를 강조하는 점이나 당부정국의
만남보다는 민간교류를 활성화하자는 제안은 그 동안의 분단체제가
키우고 길러온 증오와 분열을 뛰어넘는 화해와 평화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계몽’의 과제로서 통일을 제시한 것도 탈근대,
탈역사를 서둘러 외쳐되며 민족의 문제를 외면하려는 사람들에게
역사의식과 통일철학에 기반한 스스로 깨어나라는 의미 있는
제안이다.
하지만 그 길에서 스스로 나서 분단의 장벽을 가로질러 온 본인은
정작 차가운 감옥에 갇혀 분단체제의 굴레를 몸으로 웅변한다.
어쩌면 아직 한겨레가 통일의 물결로 한반도를 덮지 못하고
있기에, 소수의 선구자를 피뢰침으로 희생양으로 요구하는 이
분단의 질곡을 끊어버리는 일이야말로 통일시대를 성찰하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실천과제일 것이다.
작가가 애써 강조하듯 걸출한 몇몇 민족통일 운동가들만이 소수로
통일의 피뢰침 역할을 하는 시대를 넘어서서 온 겨레 큰 민중이
다함께 부르는 통일 노래가 한반도를 덮을 때 통일은 현실이 된다.
부족하나마 감옥에 갇혀 스스로 분단의 불벼락을 외면하지 않은 채
의연한 통일의 피뢰침 역할을 하는 분들에게만 십자가를 지게 하지
않고 부족하나마 우리 스스로 주체적으로 나섬으로써, ‘역사’와
‘민족’의 의미를 상실해가는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 내재적으로 본 북한, 내재적으로 본 송두율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하고 싸울 때, 피흘려 땀흘려 몸부림칠 때
비로소 자유’라고 외치는 김남주의 시를 읽을 때 우리는 괴롭다.
그리도 염원하던 분단조국의 저 너머 조차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전사로서 시인으로서 온몸을 바친 삶의 끝에 췌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고인의 넋을 두고 그 치열함과 처절함이 서려있는
시를 읽는 일은 어쩌면 차라리 피하고 싶은 잔인지도 모른다.
독일에 계실 때도 실향이나 망향보다 경계의 삶에 괴로워하시던
독일 생활 시절도 그러했겠지만, 열린 사회를 기대하며 남한 땅을
밟은 뒤 반민족-반인권의 국가보안법의 사슬에 묶여 영어(囹圄)의
몸이 되신 지금의 송두율 교수님을 두고 글을 읽는 행위 또한
김남주를 읽으면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나 불편함고 다르지 않다.
진정으로 내재(內在)화된 입장(立場)을 지니지 못한 채, 그저 흘려
읽거나 관념의 테두리 밖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지 못할 때
‘사색’(思索)은 ‘실천’(實踐)을 요구하는 비수가 되어 가슴을
찌른다. 내재화된 세계의 공유자로 혼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공판과정에서 크게 문제가 된 내재(內在)라는 말은 진심으로 북을
이해하려는 의도와 노력을 의미하는 바,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억압은 ‘바로 있는 그대로(如來)’의 북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불온시하는 것이다.
대학입학 수능시험에도 자주 나오고,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면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문학 작품에 대한 내재적 감상법과 외재적
감상법을 배우고 익힌다. 작품(대상)의 외적 현실 - 즉 작가나
시대, 독자와의 연관성 속에서 작품의 이해를 넓히고자 하는 것이
외재적 감상법이라면,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구조나 체제, 운율
등은 그 작품의 내적 연관성 속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것이 내재적
접근에 의한 감상법이다. 하지만 그 감상법이 어디 문학작품에만
속하랴! 그것이 문자든 영상이든 아니면 발 디디고 살아가는
현실이든 결국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온갖 텍스트에 다
적용되는 일이 아닌가.
그 대상이 단지, 과거 오랜 세월 동안 주적(主敵))으로 명시되어온
북이라는 이유 때문에 항상 외부에서 만들어낸 조작된
반공이데올로기와 냉전적 틀 속에서만 외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논리는 6·15공동선언의 평화와 자주의 정신에 지극히 반통일적인
것이다.
통일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과 북이 외세의 간섭 없이
상호존중과 이해 속에서 공존과 공생의 길을 만들어가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면, 당연히 북에 대한 북 자체로서의 내재적
접근법에 대한 이해는 남측 국민 모두에게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내게 그런 핑계 대지만 입장 바꿔 생각을 해봐’라는 노래가
대중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가는 것도 껍데기로만 이해하는 척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북 스스로의 눈으로 바라보는 북의 논리는 남측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통일에 대한 생각은 물론 고난의 행군이나 경제 개방
심지어 선군정치에 대한 이해도 남과 달리 항상 전쟁의 공포와
긴장 속에서 살아온 북측 동포들로서는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6·15 정상회담 이후 북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북
스스로에 대한 내재적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것이고(이는
통일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작은 진통이며 혼돈일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궁극적이거나 분열적일 수 없는······) 북에서 남을
다녀가는 사람들 또한 따로 그러나 같이 비동시적 동시성을 경험할
것이다. 이런 만남과 석임과 어울림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것이 상대방에 대한 이해를 한껏 높여주는 내재적
접근법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2002년 가을부터 불거진 북한의 핵문제를 이해하고 주도적으로
풀어나가기 위해서도, 양자회담을 거부해온 미국이 6자 회담을
통해서라도 기어이 한반도에서의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의도와
그것을 막아내려는 북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주체적인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북한에 대한 내재적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민간인 학살과 포로 학대로 미국이 이라크 침공에 대항 명분조차
잃어가는 상황 속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중국을 방문하고
고이즈미가 평양을 방문하면서, 북핵으로 인해 고조된 긴장이
전쟁보다는 평화적 해결로 매듭지어질 가능성이 높아만 가는 지금,
우리는 다시 북핵의 중심에 선 북을 내재적으로 그리고 동시에
외재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자세와 노력이 필요하다.
정치공작을 위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란 오명을 받아온 과거의
이미지를 불식하고 통일을 위한 작은 디딤돌로 거듭나기 위해서
공안의 잣대로 송두율 교수님을 가두고 있는 자들은 올곧은 양심과
화합의 정신으로 북을 바라보려는 송두율 교수님의 내심(內心)을
진정 내재적으로 접근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들이 지켜주려는 이 조국, 직장, 가정, 벗들을 바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소중한 첫걸음일지니.
4. 통일조선의 훌륭한 기둥감들을 위하여
통일철학에 근거한 새로운 문명론이나 한겨레 신문 등에 연재한
단상은, 수구세력의 끝없는 헐뜯기에도 불구하고 체제, 정치, 사상
등의 문제를 넘어서는 큰 시야가 얼마나 그리고 왜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경계를 넘나드는 자의 사색은 언제나 새로운 경계 -
그것은 늘 소수자와 성(姓)과 인종, 혹은 자연과 종교와 문명-의
다양성을 넘나들며 화합과 상생의 문화를 꿈꾸기 때문이다.
몽골과 만주를 말달리던 과거의 복고적이고 침략적인 향수에
빠져있는 도착증 환자들과 달리 21세기형 탈근대문화에 앞서
근대적 역사의식을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는 경계인은 동서
문명과 남북체제를 가로지르는 탈주의 선봉에서도 통일과 화합의,
그 정신을 잃지 않는다.
아직 냉전의 찌꺼기가 사라지지 않은 까닭에 긴 구속과 재판으로
고통을 받고 계시지만 이제 민중의 통일역량 강화와 수구의 쇠퇴가
가져오는 정치지형의 변화는 멀지 않은 시간 내에 지금의 재판
과정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다시 내릴 것이다. 자주와 애국의
심정을 담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우리 국민들은 이미 ‘법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대통령 탄핵’이라는 망동이 얼마나
반역사적이고 퇴행적인가를 두 눈 부릅뜨고 충분히 목도하였으니,
법의 이름으로 정의를 단죄하려는 자들에게는 언젠가 화 있을진저!
하루 속히 진실과 양심의 거울 앞에서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야 할
것이다.
나는 『역사는 끝났는가』와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를
거치면서 경계인의 자리에까지 온 한 지식의 초상 속에서 김수영과
문익환, 김남주를 잇는 또 하나의 거대한 뿌리를 본다.
사실 우리는 모두 경계인이다. 남과 여의 경계에서, 민족과
탈민족의 경계에서, 한국어와 외래어의 경계에서 그리고 나와 너의
경계에서 우리는 끝없이 만나고 이해하고 싸우고 헤어진다.
어쩌랴! 경계(境界) 그것을 수 없이 넘나들어야 하는 우리의 실존
그 자체가 우리의 운명인 것을. 그런 의미에서 내와 너가 만나고
남과 북이 만나는 통일의 철학은 바로 경계인의 철학이고 사색일
수밖에 없다. 송두율 교수님은 맹신과 권력을 다툼하는 유대와
로마의 경계에서 통일과 사랑의 십자가를 진 경계의 희생양 바로
예수 그 뒤를 잇는 수난자인 것이다.
과거의 다소 어려웟던 책들과 달리 상대에 대한 세심한
배려로 자상하게 곁들여주신 야러 그림 가운데 보여주신 고암
이응로님의 『군상(群像)』의 일부처럼 있는 곳은 다르지만
입장만은 같은 사람들끼리 어깨를 겯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이 속히 오리라 믿는다.
미래 아니 오늘의 통일꽃으로 자라나는 북의 어린이들을 키워내는
평양학생소년궁전 화술 선생 량혜경님이 써주신 그 글귀야말로
같음과 다름을 넘어서는 분단조국의 한 모퉁이를 살아가는 우리
경계인의 철학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통일조선의 훌륭한 기둥감들을 위하여
아낌없이 바칩시다.
저는 평양에서
선생님은 서울에서
2004.4.30 량혜경
그리고 나 또한 속으로 외쳤으되,
자라나는 통일한국의 새싹들을 위해 아낌없이 바치리니,
선생님은 평양에서 저는 서울에서.
하여 언젠가는 다시 만납시다. 한라에서 백두에서 그리고 분단의
휴전선 철조망이 걷히고 통일의 열풍을 한겨레가 맞이하는 통일의
그날에·····
하루 속히
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민경우님, 송두율님을 비롯한 국보법의 희생양이 된 사람들의
석방을 위해 노력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