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 저서 독후감 공모전
  제목    [송두율교수와의 특별대담] 통일의 길 상생의 길 (둘숨날숨 2003년 11월호)
  글쓴이 freesong 글쓴날 2003-11-23 23:25:55 조회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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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숨날숨 2003년 11월호





《들숨날숨》의 관심은 그의 귀국을 둘러싼 소용돌이 가운데 사람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져버린 이야기들이다. 남과 북을 객관적으로, ‘내재적으로

접근해서’ 볼 때 무엇이 통일에 도움이 되는가,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변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거시적인 견해를 들어보고

싶었다.
어느 사회 ‘안’에 사는 사람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 대한 판단이 편협해지기 쉽고, 바깥에서 그 사회를 관찰하는 사람은 그
사회의
실상에 대해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이런 한계를 넘으려는 그의 노력은 저서 《경계인의 사색》과 다큐멘터리
영화
<경계도시>(홍형숙, 2002)에 잘 그려져 있다. 오랜 세월에 걸친 객관적인 관찰자로서 그는 지금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한 여정
어디쯤 와 있다고 생각할까? 남과 북은 계속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어느새 일정한 접점이 생긴
것인가?



과정 없는 통일은 없다
“통일이라면 김승훈 신부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분은 하느님만이 어떻게 통일이 될지 아시고, 또

그분만이 통일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남북한의 관계는 단순히 어느 한쪽이 스스로를 향해 말을 거는 일인칭이나 둘만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이인칭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일인칭, 이인칭의 관계를 다시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고, 그런 관찰자를 포함한 관계를
다시 더 큰
맥락에서 관찰하는 식으로 간다면 결국에는 신의 섭리가 모든 것을 결정하겠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 문제에 대해서 결과를
예측하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과정’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통일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던 독일은 통일이 되었고,
통일을 외치는 한반도는
막상 분단되어 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니 통일 이야기를 아예 안 하는 쪽이 통일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람들은 인과론적인
전개보다는 원인·결과가 혼재하면서 새로운 세계가 느닷없이 열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독일의 갑작스런
통일을 두고 말입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는 엄청난 과정이 있었죠.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물자가
오가고 정신이 만나고 사회·문화적인
여러가지 갈등이 일어나고 해소되는 긴 과정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통일로 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과정 없이 남과 북이
‘하나 더하기 하나’라는 식으로 어느 순간에 통일이 된다면 그 또한 곤란한 일입니다. 독일
어린이들이 수학을 배우는 과정을 관찰하면, 하나의
상자에 여러가지 도형을 넣으면서 집합을 배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라는
개념 속에 얼마나 많은 요소가 들어가는지 배우면서 사물의
이치가 단순한 것이 아님을 체득합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하나면 하나, 하는
식으로 어떤 것을 단순명료하게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배제하는,
중간의 가능성을 열어놓지 않는 사고를 하도록 배웠습니다. 통일은 그런 선택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짚어나가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송두율 선생은 지난 70년대 독일에서 빌리 브란트의 사회당 정권이 추진했던 동방화해정책 (‘오스트폴리틱’), 인적인 왕래와 매체 개방 등을

골자로 하는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1970) 등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기본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동서독의 분단은 국제 문제에서
민족 내부
문제로 바뀌었다. 그런 과정이 나중에 지칠 대로 지친 동독으로 하여금 스스로 체제 유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북한의 경우,
그런 체제의
피로현상이 경제적인 면에서는 분명히 심해졌지만, 사회 내적으로 스스로를 포기할 만큼 피로감을 느끼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들이
체제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일까?



공통의 정체성을 찾자
“자기정체성, 아이덴티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동서독과는 달랐던 남북한의 정체성을 구별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동독은 나치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슈테판 하임이나 안나 제거스 같은 작가를 필두로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동독을 이상적인 조국으로 택했습니다. 그런 정체성은 역사적인 죄책감에 바탕을 둔 ‘부정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북한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그들이 가진 정체성의 뿌리는 항일투쟁과 민족해방이라는 긍정적인 정체성입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두 나라 사회주의의
모습도 달랐습니다.
서독과 남한의 정체성은 동독이나 북한과는 또 다른 것이죠. 서독은 정치적인 정체성보다는
‘라인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부흥을 통해서 먼저 경제적인 정체성을 얻고, 나중에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정체성까지 얻었습니다.
남한도 그렇습니다. 전쟁을 겪은 뒤
극단적인 반공정책과 유신을 정점으로 하는 정치탄압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정치적인 정체성을 얻기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보다는 제3세계
국가로는 보기 드문 경제성장을 거두면서 경제적인 정체성이 먼저 확립되었죠.
그러나
서독은 정체성 문제에서 남한과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어요. 정치·사회적인 분단에도 불구하고 동서독이 문화적으로는 분리되지 않은 채
같은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동서독 어디에
속하든 괴테, 실러, 베토벤의 정신적인 자산 안에서 모두가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남북한은 그런 정신적, 문화적인 공통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실패했죠. 70년대에는 민중운동 세력이 그런 정체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지만, 남북한의 첨예한 이데올로기 대립에 막혀서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6·15 남북공동성명은 민족경제를 균형 있게
발전시켜 일종의 경제적 정체성을 확보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남북한의
사회·문화적인 정체성을 확보하는 노력이
통일로 가는 중요한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일전에 독일에서, 역사상 독일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은
누구인가, 하는 설문조사가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답은 칼 마르크스였습니다. 자기 문화에 대한 그런 정체성이
남북한에는 없습니다.
김옥균을 예로 들어도 그렇죠. 그에 대한 평가는 부르주아 혁명가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까지 다양하게 갈립니다. 동학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이런 가운데 남북한이 어떻게든 사회·문화적인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통일을 위해 해야 할 가장 긴급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 오래 된 일은 아니지만, 통일논의는 우리나라에서 정권이나 특정집단의 독점을 벗어나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논의가

어떻게든 통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계층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독일 통일의 명암을

진지하게 반성하려는 노력은 적은 것이 현실이다. 지난날에는 남한의 민주화운동이 일면 공통의 정체성을 향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 이름이 상징하듯 과거의 일이 되었다. 그렇다면, 남한도 새로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북한도 내적인
피로에 지치기
전에 참여하게 될 그런 정체성 확립을 위한 노력은 무엇으로 시작되어야 할까?



촌스러운 것과 세련된 것의 ‘동시성’
“남한처럼 경제적인 근대화를 통해서 세계 속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세계화된 지평에서

지적 노력이 이루어지는 것 등도 정체성 확보에는 의미가 있겠죠. 그런데 그런 세계화된 모델을 따르게 되면 우리 쪽에서 나서서 세계를
규정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끌어내는 데 어려움이 생깁니다. 문제는 남과 북이 현재와 미래의 세계를 보는 눈, 즉 세계상이 상당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계상이 다를 경우에는 공존을 생각할 수 없거나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흡수하는 것으로 결말이 날 것입니다. 남한은
세계에 편입되어 세계와
동시적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된 반면, 북한은 비동시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언어만 해도 그렇잖아요. 우리가 듣기에
사투리같이 낯선 언어체계가 있는
한, 서로를 이해하기란 불가능해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촌스러운’ 언어를 세련된 표준어로 바꾸어야
통일도 이루어지고 세계에 편입되는 일도
수월해질 것같이 생각하게 되겠죠. 하지만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북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그런 비동시성을 남한의 동시성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하는 새로운 모델, 그러니까 동시성과 비동시성을 동시화하는 한 단계 높은
독자모델을 마련해야 이 급변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스스로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철학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정신을
지배하는 언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남북한은 공통의 언어를
개발하는 노력을 소홀히 했어요. 북한은 북한대로 언어 문제를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다루어왔고요.
공통의 그 무엇을 개발해낸다는 점에서
나는 개성공단과 같은 남북한 공동사업에 희망을 둡니다. 경제적으로
함께 얽혀 살면서 인간과 인간이 서로를 느끼다 보면, 서로의 모습을 바꾸어 갈
수 있을 겁니다. 같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다르지도 않은
남북한의 생활 패턴을 서로 배우면서 경제 공동체를 통한 제3의 가능성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실현가능성이 높은 길이
아니겠습니까? 선발된 사람들 몇몇이 평양에 가고 서울로 오는 것과는 다른 일입니다. 관리자와
노동자로 만나 함께 생산활동을 하고 경영을
논의하는 가운데 새로운 형태를 가진 공동의 삶이 만들어질 것이고, 그런 삶의 형식이 한반도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리면 그 자체가 동서독이
만들지 못한 새로운 모델, 미래에 대한 새로운 지향점이 될 것입니다.”



동시성, 비동시성을 같은 차원에서 보려면 그가 말하듯 북한에 대해 ‘내재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개성공단 이야기는 예상

밖이었다. 통일로 가는 과정이라면 경제적인 공동작업에서 생기는 남북한의 ‘수직분업’, 즉 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산업의
종속,
저임금 착취 등도 바람직하다는 것인가?



상생相生이 답이다
“그렇죠. 일단은 그런 과정 속에서 서로를 알아 가는 가운데 단순한 수직관계가 수평관계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죠. 제가 생각하는 통일의 제1원칙은 ‘상생相生의 철학’입니다. 상생은 불교만의 용어가 아닙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도
상생이라는 말을
씁니다. 독일 사람들이 통일 과정에서 되뇌었던 말이, 원래 하나였으니 다시 하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운
최제우 선생의
‘동귀일체同歸一體’도 같은 뜻이겠습니다. 우리도 남북한이 같이 살 수 있다는 사고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서로를 대상으로만
대하고 말 것입니다.
상생이라면 저는 언제나 대나무 밭을 예로 듭니다. 겉으로 보기에 대나무는 하나 하나가 따로 서 있는 듯하지만, 땅
속에서는 그 뿌리가 모두
이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나무 하나가 죽으면 언젠가는 대나무 밭 전체가 죽고 맙니다. 이것이 상생의
원리입니다. 개성공단을 비롯한
남북협력사업에 말들이 많습니다. 다 굶어죽어 가는 나라, 가만히 두면 자연히 손을 들 상대에게, 무엇
때문에 돈을 들여가며 그런 사업을 하느냐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같이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사상체계 안에도 그런 상생의
철학이 깊이 있었지만, 성과에 쫓기고 속도를 섬기는
근대화의 와중에서 함께 산다는 생각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송두율 선생이 인용하는 화이트헤드의 ‘상생’은 보통 ‘합생合生’으로 번역한다. 둘이 합쳐져 성질이 달라지는 ‘합성合成’과는 달리, 합생은

각자의 성질을 유지하면서도 서로 하나로 얽혀 살아감을 말한다.
그런데, 생산과 분배의 일정한 부분을 시장경제에 맡기고 다른 나라와
협력하는
가운데 정치적인 골격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그것은 중국 모델이다. 중국 모델이 통일로 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인가?



변해야 산다
“무엇보다 변화가 중요합니다. 북한이 과연 중국식의 개혁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능성이

있겠습니다만, 지금 가장 중요한 과제는 남한과 북한이 모두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쪽만 변해야 한다는 생각, 상대방이 변하기를 원하는

태도로는 같이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비유해볼까요. 이번에 서울에 와서 말로만 듣던 교통지옥을 겪었습니다. 그래도 차가 많아 길이
막힌다고
북한처럼 차가 거의 없이 사는 것을 대안으로 삼을 수는 없죠. 한쪽은 너무 많아서 탈이고 다른 쪽은 너무 없어서 탈입니다.
남한은 차가 많아
정체를 겪고 북한은 차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정체되어 있습니다. 양쪽이 다 변해야 합니다.
유럽도 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독일 사회에서
논의 중인 ‘2010년 의제’가 그것입니다. 연령구조가 바뀌고 경제상황이 달라지니까, 연금과 건강보험을 비롯해서
사회정책 전반을 기본부터 바꾸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여러 대안을 연구하고 정책을 세워 법제화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스웨덴
모델이다, 네덜란드 모델이다 하고 사회발전 방향에 대해 논의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서, 한국도 무엇인가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쓰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력하는 가운데 범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모든 논의가 휴전선 이남만을
상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웨덴도 좋고 네덜란드도 좋지만, 통일된 한반도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모델을 생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죠.
한반도는 지구상에서 유일한 분단지역입니다. 게다가 두 사회는 아주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두 사회가 공존, 공영할 모델을 만드는
데는 엄청난 지적 노력과 실천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더구나 우리
주위에는 이런 통일 모델이 성공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역학관계가 있어요.
동아시아를 영향권 안에 두려는 중국이 있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반도를 보는 일본이 있는가 하면,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계산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주인이 되어 통일의 모델을
구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남한에서는 민족이란 번거롭고 낭만적인
개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유럽연합이라는 통합체 안에서도 민족국가들 사이에는 격차가 있고 식민지적 분화가 생깁니다.
폴란드 농민과 스웨덴 노동자가 같은
인식지평을 가지게 되어야 유럽의 진정한 통합이 이루어질 텐데, 그런 통합의 중심역할을 하려는 것도 독일이라는
민족국가입니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엄청난 속도로 한국을 추격하고 있는 중국을 생각해도, 남북한이 서로 아무런 소득이 없는 제로 섬
게임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틀 안에서 플러스 섬 게임을 하는 사고체계로 전진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막상 와보니 생각했던 것하고는 격차가

많았습니다. 저 개인의 문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지금은 무슨 큰일이 난 듯이 야단이지만, 제 문제를 10년이 지난 뒤에 돌이켜 보면
정말
우스운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통일된 베를린에 가보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곳에서 싸우고 장벽을 쌓고 했는지 우스운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니 통일을 얻기 위해 먼저 공존하는 삶의 형식을 개발하는 데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자주 만나고 서로 다른 점을
확인하는
작업입니다.”



송두율 선생을 둘러싼 일들이 10년 뒤에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가 될 때, 지금의 희극을 연출한 책임은 남북한 모두에게 있을 것이다. 선생도

이제껏 해온 고민을 정리하고 남북이 함께하는 삶을 일궈내는 작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영구귀국을 계획한 것일 터이다.



“원래는 영구귀국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의치 않군요. 오디세이는 고향에 돌아오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13년 망명생활 끝에 고향에

돌아와 명작 《겨울 동화》를 쓰고는 다시 추방당해 파리에서 죽은 하인리히 하이네도 있죠. 저는 일제강점기보다 긴 37년을 방랑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추방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이방인으로 떠돌게 될 것입니다. 기자회견에서도 가장 받기 싫은 처벌이 추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고 법이라면 어쩌겠습니까?”
선생은, 영구귀국이 좌절되고 추방이나 형사처벌 같은 원치 않은 사태가
벌어진다고 해도 억울해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히려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국내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우리 사회의 미래가 통일에 있고,
그 통일은 상생의 철학에서 시작된다는 송두율 선생의 이야기는 여러모로 뜻깊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느끼는 또 하나의 갈등, 영성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영성이 없는 사회, 몸의 문화만이 판치는 사회에 살고 있고,
정의, 사랑, 평등, 자유처럼 인류가 오랫동안 피까지
흘리면서 쟁취한 가치들은 모호한 개념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런 개념이 모호해지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영성이 없는 문화에 영성을 심어주고 모호해진 개념들을 다시 살리는 길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은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기도 하다.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사회
“이번에 서울에서 열리는 철학자 대회에 슬라브예 지젝이라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저명한 철학자가

옵니다. 지젝은 현대를 종교의 슈퍼마켓이라고 표현합니다. 누구든지 종교를 빌미로 뭔가를 팔아먹는 시대라는 것이죠.
요새는 지식과
신앙의
구분이 모호했던 중세로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종교 문제가 단순히 종교 문제에 머물지 않고 자칫 정치 문제로, 가치관의 문제로
비화합니다.
9·11사건에서도 보듯 종교를 내세운 가치관이 충돌합니다. 우리도 가치관의 혼란을 겪습니다. 서울에서 저를 놀라게 한 광경은
도시를 뒤덮은 빨간
십자가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영성의 회복은 아닌 것 같아요. 지금은 하나의 가치관으로 지식과 믿음의 질서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죠.
탈근대를 지향하는 현대는 다양성을 받아들입니다.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는 파괴와 증오의 현장으로
변합니다. 세계를 적과 동조자로 나누고
그 중간에 아무것도 인정하지 않는 조지 부시의 미국이 그렇습니다. 종교까지 나서서 그런 파괴와
증오를 부추깁니다. 유럽에서는 미국의 문화가
세계문화를 선도할 정신적인 능력과 도덕성을 잃었다고 판단합니다. 그렇다면 동양은 어떻습니까?
동양은 세계문화를 이끌 다양성과 도덕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하면 도덕이 값어치를 잃는다. 그런 곳에 평화로운 공생이란 설자리가 없다. 미국은, 서양문명은 그렇다고 치고, 과연

동양은 그런 도덕성과 관용을 가지고 있을까? 그의 반문이 긴 여운을 남긴다.



몹시 지친 상태였지만, 선생은 《들숨날숨》과의 만남을 몹시 반겼다. 균형을 유지하려 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행적은 북에

편향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길 없다. 그러나 사회철학자로서 그의 관점은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고, 따라서 통일은 그에게

현실이자 이상의 문제다. 그의 견해가 의미를 가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를 두고 벌어지는 일들의 본질은 실정법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를
빌미로 벌이는 권력투쟁에 가깝다. 그렇다면 한 가지 사실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을 떠돌게 만들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으로 내몬 원죄는 우리에게 있다. 이제 우리 사회의 성숙은 그들을 다시 고국의 품 안으로 오도록 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파문은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루어내기 위해 치러야 할 성인례일는지 모른다.




대담 및 정리 / 여상훈(본지 편집위원)
사진 / 백맹종(서울대교구 가톨릭사진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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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마이뉴스 기사] 송두율 교수가 보낸 '감옥으로부터의 첫 편지'(2003.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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