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 저서 독후감 공모전
  제목    "우리에게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글쓴이 freesong 글쓴날 2003-11-24 03:09:30 조회 2181

"우리에게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68년 봄부터 독일대학은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빠졌지만 내가 처음 적을 둔 하이델베르크대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다. 가다머 교수의 강의에도 들어가 보았지만, 당시 나의 지적 관심밖에 있었던 '해석학'이 주를 이루었다. 때문에 대학을 옮길까 생각하던 내게 이미 은퇴한 뢰비트 교수의 조교 브라운 박사가 마침 프랑크푸르트대의 하버마스 교수를 추천했다.

동서냉전의 또다른 길목, 한반도 베트남전쟁 반대의 열기 속에서 좌파가 반공보수의 두꺼운 벽을 허무는 엄청난 작업이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중에 그 중심에 서 있었던 것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하버마스였지만, 그의 이름은 그때까지 사실 나에게 생소했다. 반공의 최전선에 서 있는 한반도에서 온 20대 철학도에게는 분명히 모든 것이 새로웠고, 또 그 때문에 지적 욕구도 엄청나게 컸다. 1968년 가을 프랑크푸르트대로 옮겨 하버마스 교수의 지도 밑에서 본격적으로 논문을 쓰기 시작해서 1971년 여름에는 마칠 수 있었다. '헤겔, 맑스 그리고 막스 베버에 있어서 동양세계의 의미'라는 주제의 학위논문은, 해적판이 나돌 정도로 관심을 끌었고 1987년에는 '추고'를 덧붙인 새로운 판도 나왔다. 1968년은 나의 학문적인 인식관심이 현실과 직접 만나면서 방향정립을 시작했다는 의미에서 나에게 중요한 해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가을, 어느 누구도 그때까지 예견치 못했던 동서냉전의 상징, 베를린장벽이 무너졌다. 1982년 1월에 통과된 '교수자격'논문도 소련과 중국에 대한 비교연구를 내용으로 했고, 그해 6월에 있었던 취임강연 제목도 '현실사회주의의 한계 문제에 대해서'였기 때문에 나름대로 사회주의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나에게, 1989년 가을의 변혁은 단순한 학문적 관심의 대상일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동서냉전의 또다른 길목인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해야만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1991년 봄학기부터 일년동안 초빙교수로서 서울대의 초청을 받았지만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같은 해 5월, 북한 사회과학원의 초청에 응해 평양을 방문, 그 곳 학계의 중진은 물론 김주석과도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해서 많은 의견을 나눌 수 있었던 쉽지 않은 경험도, 실은 이러한 1989년 가을의 세계사적인 변혁을 내가 현장에서 직접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몇 번인가 주저앉고 싶었던 갈등들 비록 몸은 이국 땅에 있어도 두고온 조국의 현실은 항상 외국생활을 직간접으로 제약했다. 부모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기 때문이었다. 1972년 가을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모든 것이 숨죽이고 있을 때, 요행히 김지하 시인의 '五賊'이 나의 손에 닿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사형이 줄줄이 선고되고 있는 심각한 국내 정치적 상황속에서 책상 앞에만 앉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유학생들과 독일교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었던 간호사와 광부들 가운데 정치적 의식을 가졌던 사람들 55명 모두가, 1974년 3월 1일 본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를 발족시켰다.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던 내가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유신정권과의 갈등은 심각해졌다. 대학과의 계약에 유효기간이 긴 여권이 필요한데 6개월, 심지어는 3개월 정도 밖에 여권유효기간을 연장해주지 않아 애도 많이 먹었고, 서울에 있는 부모형제들은 그들대로 시달려야 했다. 1979년 10월 궁정동 안가의 총성으로 '유신'의 막은 일단 내렸다고 생각했으나, 우리 현대사에 보기 드문 야만과 광기의 역사를 1980년 5월의 광주는 보여주었다. 한국전쟁 후 부친이 전남대 물리학과에서 교편을 잡았기 때문에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광주에서 다녀 서류상의 고향은 제주도이지만, 진짜 고향은 광주인 셈이다. 신문, 라디오 그리고 TV에서 나는, 전두환 정권과 이를 비롯한 미국에 대해서 많은 비판을 했다. 1987년 6월 투쟁에서 힘들게 쟁취한 성과물이 양김의 분열로 어이없게 풍비박산되고나서부터 나의 현실 참여의 열기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낙담하고 주저앉은 것은 아니지만, 남쪽의 민주화 좌절의 요인과 분단문제를 하나의 관계체제 안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더욱 확인하는 계기로 삼았다. 철학과 사회학의 경계선에서 철학과 사회과학의 관계가 일반적으로 소원했던 서울의 학문풍토를 벗어난 이후, 나는 줄곧 철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 위에서 살아왔다. 학위논문도 그렇지만 지금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현대의 명암'(Schattierungen der Morderne)도 극히 사변적인 철학적 주제를 구체적인 사회현실문제 속에서 설명하고, 구체적인 사회문제도 거시적이고 종합적인 맥락에서 자리매김해 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강의나 세미나도 철학과 사회과학을 연결시켜주는 문제를 주제로 삼는다. 물론 저학년 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접근방법이 힘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학생들은 이야기 한다. 물론 학부와 대학원의 기능이 구별된 한국에서는 실시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나는 '표준화'된 강의나 세미나는 싫어한다. 문학작품 또는 예술에서 자주 논의되는 문제는 물론, 심지어 이와는 정반대인 무미건조한 통계학적인 문제까지도 강의나 세미나의 주제로 삼는다. 우리의 사고 지평을 넓히는 데에 있어서 경계표시나 '일단정지'라는 신호 표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모든 것을 제쳐놓고 학문에만 정진해도 힘든데, 그것도 외국 땅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사는 것 자체가 사실 심신을 극도로 피로하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극히 배타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독일 학계의 분위기와 그것도 강대국 일본이나 중국도 아닌 갈라진 한반도에서 왔기 때문에 생기는 자격지심이 묘하게 결합된 분위기가, 항상 나의 내면을 누르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오랫동안 막강한 국가권력에 저항하다 보니 늘 당하기만 했던 쓰라린 경험까지 가지고 있다. 국내 상황이 좋아지면 외국에 있는 사람은 이래저래 잊혀지게 마련이니 외로움까지 더해진다.

해외학자의 변명 '역사는 끝났는가'와 '통일의 논리를 찾아서'에 대한 어떤 잡지의 서평은 아예 '통일의 논리는 우리와 함께 있다'라는 제목으로 자신만만하게 시작한다. 현재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통일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밖에서 헛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나도 정말 그렇게 됐으면 하고 바란다. 남북간의 모든 대화의 통로가 막힌 상황속에서, 나는 1995년부터 남북해외학자들의 만남을 주선해왔다. 물론 만남의 장소가 한반도 안은 아니지만 매년 만남을 통해 통일에 대한 입장을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이를 바탕으로 전문적 통일담론을 남북이 공통으로 개발할 수 있는 '학문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해외학자의 몫을 배제하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나의 학문적 관심을 자극하는 문제들은 우선 내가 몸담고 있는 서유럽적인 문맥 속에서 만나게 된다. '사회주의'문제도 그렇고 '탈현대'문제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서유럽적인 문맥이 보편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세계의 상황에서도, 항상 제3세계, 동양, 한국 등 특수자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왔다. '역사는 끝났다'라는 주장은 제3세계에서도 유용한가, '지구화'는 우리의 민족통일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달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바로 보편과 특수의 긴장된 관계를 드러내 보려는 나의 화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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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일본에 바라는 것 " (2003.6.4.)
[송두율교수와의 특별대담] 통일의 길 상생의 길 (둘숨날숨 2003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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