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관련해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에는 <분단구조>, <분단체제> 그리고 <분단시대>가 있다. <분단시대>는 역사적인 개념이어서 비교적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데 반하여, <분단 구조>나 <분단체제>는 사회학적인 의미를 강하게 전달하고 있고, 또 이해하기에도 용이치 않다. <역사학>과 <사회학>사이에 놓여 있는 방법론의 차이는 간단히 말해서 전자는 사회현상을 보다 발생적(genetisch), 또는 선형(線形)적으로 본다면, 후자는 구조적(strukturell)이거나 또는 비선형(非線型)적인 사고를 보다 더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서로가 지니는 약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양자를 통합하려는 방법론적인 시도도 물론 있다. <역사사회학> 또는<계량적 역사연구>등이 그러한 시도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양자를 조화시켜 보려는 접근보다는 - 알뛰쎄(L. Althusser)처럼 - 가령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역사주의>나 <인간주의>라는 내용을 아예 추방시키려는 분위기가 70년대부터 서유럽학계를 대체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알뛰쎄는 <통시적 通時的: diachronisch>에 대해서 <공시적 共時的: synchronisch>사고의 우위를 이야기하였다. 물론 이렇게 역사의 주체로서 가령 계급이나 민족과 같은 실체(實體)를 내 세우는 분위기가 사라지게된 직접적 동기의 하나는 1968 년 혁명의 좌절이었다. 이러한 좌절에 이은 1989년의 <현실사회주의>의 몰락은 또 한번의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사회주의 를 역사라는 고목(枯木)의 앙상한 가지에 걸린 열매에 비유한 보드리야르(J. Beaudrillard)처럼 역사를 장송(葬送)한 그 자리에 <탈역사>와 <탈현대>가 들어섰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자본주의>의 진정한 승리를 다시 확인하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냉소주의와 회의주의도 동시에 확산되었다.
<역사>가 사라진 그 자리에는 또 <정보사회>와 <지구화>가 들어섰다. <정보사회>는 무엇보다도 <그물망 network>처럼 서로 연결된 정보를 전제한 사고 없이는 성립 불가능한 개념이고, <지구화>는 지역이나 민족국가단위의 사고방식을 기초로부터 무너뜨려야 성립 가능한 개념이다. 이러한 일련의 세계파악 양식의 변화는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역사적>이기 보다는 <구조적>이거나 <체계적>인 사유가 오늘 지배적 조류임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역사>는 이러한 조류에 휩쓸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럽의 큰 도시 어디를 가나 박물관은 여전히 만원이다. 그러나 역사는 삶의 선생이다 (historia magistra vitae) 라든지 역사는 자기를 비추어 보는 거울 (通鑑)이라는 교훈(敎訓)적인 의미는 날로 퇴색되고 종종 탈현대적 인 건축미학이 보여주듯이 <역사>는 탈몽((脫夢)한 <현대>의 기능을 위한 장식물로 치부되고 있다.
이러한 정신사적 흐름은 우리의 민족현실을 보는 데에도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있다. 나름대로 민족분단에 천착(穿鑿)된 이론과 실천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인종주의>나 <파시즘>의 아류라고 여기는 분위기도 있고 심지어는 냉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분단문제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보려는 <분단시대>나 이러한 시대를 뒤로한다는 뜻에서의 <통일시대>라는 시각이 비록 목적의식은 뚜렷하더라도 맹동적이며 낭만적인 태도라는 비판도 받는다. <6.15 남북공동선언>과 같은 역사적 인 사건도 이내 실망과 냉소로 연결되는 이러한 분위기는 분단을 넘어 통일로 가는 길이 직선이 아니고 복잡한 미로(迷路)와 같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면서 <분단구조>나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분위기도 낳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필자는 받고 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통일문제에 대해서 강연하는 자리에서 나는 청중중의 한 사람이 통일은 아주 간단한데 <주한미군>만 나가면 된다고 역설한 것을 경험한 적이 있다. 또 다른 자리에서는 우리 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한반도 주변 강대국이 분단된 상태를 절대적으로 선호하고 있으나 남북의 기득권세력에게는 이에 저항해서 싸울 지혜도 역량도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동포도 보았다. 베트남의 통일은 전자의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독일의 통일은 유리한 국제정세를 주동적으로 끌고 나갈 수 있었던 콜 수상의 정치력을 예로 들어 후자의 주장을 밑받침하고 있다. 동시에 베트남의 통일은 부패한 <자유세계>의 말로를, 독일의 통일은 건강한 <자유세계>의 승리를 가져 온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또 베트남통일은 <역사>의 무게를 실은 <민족해방>과 같은 <큰 이야기>의 대단원을 이루었다면, 무너진 거대한 베를린 장벽이 해체되고 그 후에 땅바닥에 뒹굴었던 그 수많은 장벽의 조각들처럼 <역사의 종언>뒤에 많은 <작은 이야기>만을 남겼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래서 통일하면 조건반사처럼 베트남과 독일을 우선 떠올리게 되는데, 전자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악몽으로, 후자는 이와 다른 부류의 사람들에게 또 다른 악몽으로서 다가서고 있다. 한반도의 문제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식하지 못할 때는 우리의 분단문제는 묵시(默示)적인 예언내용을 담거나, 아니면 <귀납적> 추론의 지루한 고리에 연결된 또 하나의 고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전제들을 감안하면서 아래의 글은 분단구조와 민주화과정의 상호관련성을 통시적(通時的)이고 공시적(共時的)인 측면에서 추적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그러한 상호관련성이 남쪽사회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있고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에 이어 <분단극복>을 위한 생각을 짧은 결론으로 대신하려한다.
분단과 민주화의 <통시성>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온 통일조국건설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고 1948년 남과 북에 각각 정권이 수립되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정치상황은 결국 3년간에 걸친 동족간의 내전을 유발했다. 이 때문에 지구상의 그 어느 곳에서 보다 상호 적대적으로 된 남북의 정권은 권력의 정당성(Legitimit t)의 확보를 위한 심한 체제경쟁을 하였다. <항일 빨치산>의 민족해방과 반제투쟁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이라는 북의 전략에 대해서 남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과 <자유세계>의 보루로서 <친미반공>을 내세웠다. 비록 정당성에 있어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문제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반민족친일세력>이 <친미반공>을 내 세우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각 분야에 재 복귀함으로써 <정당성>의 경쟁에 있어서 남쪽은 많은 약점을 안게 되었다. <자유당>정권은 또 적법성(Legalit t)마저 <개헌파동>이나 부정선거로 확보하려고 시도했다. <4. 19>는 바로 이러한 정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분단> 15년, <휴전체제>의 성립 6 년만에 일어난 이러한 혁명적 사건은 무엇보다도 <분단>이라는 갈등이 사회의 <민주화>를 억누르는 정당한 논리로서 항상 작동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처럼 반독재 민주화의 요구는 곧 분단극복의 의지로 연결되었다. <반공>을 <국시>로 한 군부세력에 의한 이러한 변혁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5. 16>은 <조국근대화>라는 사회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코드를 우선 사용했다. 북이 당시 경제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기점으로 외자와 국내의 저렴한 노동력의 결합시킨 <개발독재>는 베트남전쟁이라는 국제환경 속에서 <유신>이라는 일종의 <국민총동원체제>를 수립, 이에 도전하는 세력을 <국가보안법>이라는 철퇴로 다스렸다. 그러나 이 암울한 시기에 역사의 동력에 대한 믿음도 상대적으로 커 갔다. <민중>이라는 담론의 출현이 바로 그 것이다. 이의 실체에 관한 논쟁은 80년대에 들어서 추상적인 수준의 <사회구성체논쟁>으로 나타났었지만 <민중>은 가령 무산계급 이나 노동계급 또는 통일전선 과 같은 기존개념으로 설명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를 지녔다. 또 <민중>은 <계몽>과 <해방>이라는 과제를 표명한 점에서는 분명히 <현대적>인 내용을 담았지만, 동시에 <근대화>의 어두움과 질곡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점에서는 <반(反)현대적>이었다. 이와 함께 <서구화>라는 <중심부>의 강요에 대한 <주변부>의 자기정체성을 명확히 전달한 측면에서는 철저하게 <민족>을 의식한 담론이었다.
1979년 11월의 <부마사태>는 <유신>을 내파(內波)시킨 뇌관구실을 했다. 그러나 바로 <유신>의 복합적인 구조를 무시한 야당 지도부의 분열은 1980년 <광주>라는 비극을 낳은 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광주>는 좌절된 민주혁명의 근본구조가 무엇이라는 것을 밝혀준 훌륭한 교사였다. 왜냐하면 <친미>, <반공>, 그리고 <지역주의>라는 지형도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게 끔 하였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열린 정치적 공간을 활용한 1987년 <6월 투쟁>은 이른바 <넥타이부대>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 군부에 의한 지배체제의 유지음모를 파탄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정치세력은 내부분열로 인해 또 다시 호기를 놓쳤다. 이로 인한 부정적인 후과(後果)는 1993년 <3당 연합>으로 집권한 최초의 <문민정부>도, 또 이에 이은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라는 김대중 정부에 있어서도 계속 업보로서 남게 되었다. 물론 이기간에 <민중>의 함성 대신에 이른바 <시민사회>의 다양한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지만 <탈(脫)정치> 분위기도 이에 비례해서 확산되었다.
<민주화>와 <분단극복>이 흡사 두 평행선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굴절해서 만나기도 하고 또 멀어지는 그러한 혼란스러운 관계라는 사실을 최근의 <서해안> 충돌사건도 보여주고 있다. 당장에 얼어붙을 것 같은 남북관계가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물살을 타는 듯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6. 15 남북공동선언>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남북관계의 <동적인 안정상태>를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햇볕정책>이 과거의 냉전형 <분단구조>는 분명히 약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정치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린 정치적 불신과 냉소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가하는 회의(懷疑)는 여전히 남아있다. <통일 쉽다>는 생각 대신에 <통일 어렵다>는 생각이 더 힘을 얻고 있는 것도 이러한 현실을 말하여 주고 있다.
<분단구조>와 <분단체제>의 <공시성>
주체-객체의 관계에서 설정된 <분단시대>라는 인식은 <민족>이나 <민중>이라는 <주체> 그리고 이들이 설정한 <객체>로서의 <분단극복>이라는 대상 - 이는 흔히 <반통일세력>이나 <외세>로서 규정되고 있다 - 을 전제하게 된다. 이에 반해서 <분단구조>나 <분단체제>는 <분단>을 규정하는 여러 요소들의 공시적인 상호관계를 설정한다. <구조 Struktur>와 <체제 System>는 원래 같은 개념은 아니다. 그러나 <구조>는 항상 어떤 <체제>의 <구조>이기 때문에 <구조>없는 <체제>는 없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자주 사용하는 견고한 <분단구조>나 <분단체제>라는 말처럼 구조나 체제는 변화를 모르는 상태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조는 항상 지속적인 <사건>들을 통해 항상 내적으로 변화면서 체제의 <동적인 안정성 dynamische Stabilit t>을 보장해준다. <분단구조>는 주로 남북을 내부적으로 규정하는 어떤 상태를 보다 강조한다면, <분단체제>는 이에 조응하는 복잡한 <환경>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단체제>와 <환경>사이의 구별은 <휴전선>이나 <경계선>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구별은 체제가 다가가면 결국 만나게되는 공간적 의미의 <국경선>이 아니라 다가가면 또다시 멀어지는 지평선(地平線)과 같은 것이다. 남과 북이 각각 <체제>로서 서로를 <환경>으로 설정하고, 또 이 남북이 다시 이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 등을 포함하는 동북아를 <환경>으로, 그리고 이 것이 다시 더 복잡한 <세계사회>라는 <환경>으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흡사 어떤 생명체가 복잡한 환경에 조응하면서 자기의 존재를 안정상태로 유지하는 것처럼 남과 북이 <세계사회>라는 <환경>에 대해서 각각의 체제 안에 통합할 수 있는 것만을 통합할 수 있는 자생력을 지니는 개체로 보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지리적으로 파악된 부분과 전체의 관계로서 남과 북을 <분단체제>의 하위 구성부분, 그리고 이것이 또 다시 동북아, 나아가 <세계사회>의 하위구성부분으로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러한 공간적 시각으로 <분단체제>를 보면 북이 남에 속하느냐, 아니면 남이 북에 속하느냐하는 사고로부터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다. 남과 북이 서로가 <체제>로서, 또 서로가 상대방을 <환경>으로서 설정하여 <동적 안정성>을 유지한다는 사고는 가령 <6.15 남북공동선언>의 경제공동체건설구상에서 엿보이고, 남의 <연합>과 북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사이의 공통점의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자주성>원칙에 있어서 북은 위에 지적한 주체-객체의 관계로서 해석하고, 남은 보다 체제-환경의 관계로서 보려는 차이는 있다. <주한미군>이 <외세>인가, 아니면 동북아 질서유지를 위한 <환경>인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입장의 차이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른 종족이 어떤 식인종마을에 들어가면 잡혀먹어 살아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식인종이 어떻게 생겼고 어떻게 생활하는 것을 밖의 세상에 이야기해줄 수 없다. 남과 북도 오랫동안 이러한 식인종마을에 대한 이야기처럼 오랫동안 서로를 자기 나름대로 상상해서 이야기해왔다. 같은 종족에 속할 때만 통합되고, 다른 종족에 속 할 때 철저히 배제되는 그러한 관계로부터 남북은 그 동안 현대사회의 필수적인 기능적 분화와 함께 서로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동시에 통합한다는 <구조적 연결 strukturelle Koppelung>을 점차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어났던 <북풍>이나 <총풍>은 물론, 최근 대통령선거를 앞둔 김국방위원장의 남측 답방의 시기에 관한 민감한 반응이 바로 그러한 <구조적 연결>을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문제가 비록 민주화나 분단극복의 노력과는 거리가 먼일들이지만 바로 그러한 연결고리들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서로가 배제하지만 동시에 통합한다는 인식은 배제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에게도, 또 서로 완전히 통합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모두 불충분한 인식틀로서 비추일 것이다.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 게임에 <단일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을 남쪽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기는 입장이 있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인공기>를 포기하는 것을 북쪽의 정통성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도 당연히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남북관계를 <공시적>으로 보는 입장은 남북이 서로 관찰하는 것을 또 관찰한다는 의미에서 자기비판의 안목도 키워 준다고 볼 수 있다. <태극기>인가 아니면 <인공기>인가라는 관점에서 <정체성>을 확인한 사람들에게 <단일기>는 분명히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양자택일<兩者擇一)은 우리의 사고를 오히려 더 혼란에 빠트린다는 물리학자 파울리(W. Pauli)의 주장이나 수학자이자 철학자 쎄르(M.Serres)가 현대의 <정보그물망>은 우리의 사고를 전통적인 <선형적>사고로부터 해방시키며 이에 따라 복합성(complexit )이 결코 우리 인식에 있어서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정체성(正體性)의 변화
가령 <태극기>대신에 <단일기>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복잡한 변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는 분명히 있다. 스스로의 체제에 대해서 이러한 여유는 다른 말로 바꾸면 사회성원들이 자기체제에 대하여 정체감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월드 컵>경기 때 <붉은 악마>들의 <대-한민국>이라는 합창에 대한 논의가운데는 그와 같은 현상이 잘못된 민족주의나 아니면 파시즘의 위험을 안고 있다는 지적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태극기>논의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 문제를 제기하는 논지는 주로 남과 북의 체제경쟁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위의 논의와는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아 분단국가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복잡한 성격을 띌 수밖에 없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내세운 월맹이 미국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월남을 무력으로 통일한 경우에도, 이와는 반대로 서독이 동독을 평화적으로 흡수통일한 경우에도 정체성의 구조는 체제경쟁과 직결된 문제였다.
패전이후 서독국민의 체제에 대한 정체성은 근대에 들어서서도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지만 독일국민은 하나의 문화권 속에 살아 왔다는 의미에서 <문화민족 Kulturnation>을 무엇보다 강조했다. 그러나 점차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경제적 성공을 정체성의 내용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나치독일과의 과거청산이 불충분하다는 동독의 공격으로부터 비껴나가면서 비정치적 분야에서부터 정체성을 다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복지국가모델은 경제와 정치분야에 있어서 정체성의 결합을 용이하게 했다. 물론 서독의 연방군대(Bundeswehr)의 설치와 나토(NATO)가입으로 국론이 갈렸고, 분단에 기인한 체제경쟁 때문에 시민적 자유는 제한할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도 <68년 혁명> 그리고 특히 70년대 초 <적군파>의 등장으로 힘을 얻었다. 그러나 나치의 쓰라린 악몽이 남긴 <기억의 문화 Erinnerungskultur>는 그러한 논거를 일방적으로 허용치 않았다.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제적 정체성보다는 오히려 서독의 정치적 체제표징들에 대한 자부심이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냉전구조의 와해와 함께 동독의 흡수통일로 연결되었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서 남한은 서독이고 북한은 동독이라는 추론이 대체적으로 지배하는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러한 서독의 정체성의 구조변화는 한반도의 분단구조와 남쪽의 민주화과정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다.
<조국근대화>가 <유신>으로 연결되면서 민주사회의 기본권은 철저히 유린되었는데 <선건설 후통일>이 의미한 것처럼 분단은 바로 그러한 상황을 정당화한 논거가 되었다. 이른바 <압축성장>이 지니는 심각한 사회적 모순의 폭발력에 대해서 국가권력도 엄청난 폭력으로 대처했으나 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위기관리방식은 파탄되었다. 80년 봄의 <광주>는 그러한 파탄의 대미(大尾)를 장식했다. 국민적 동의에 기초한 정치적 정체성의 구성에 결정적으로 실패했으나 80년대의 경제적 호황과 함께 서울올림픽유치는 이러한 결손을 상쇄시킬 수 있었다. 정치적 분야에서의 정체성 결손이 경제적인 분야에서의 정체성을 통해 보상(補償)되기 시작한 시점은 그러나 독일통일이후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진 소련의<붉은 광장>이나 중국의 <만리장성>도 직접 볼 수 있었고, 달러의 위력을 새삼 확인하는 과정 중에 그 동안 지녔던 정치적 정체성의 결손을 경제적 정체성을 통해서 많이 치유할 수 있었다. 이 것이 도가 지나쳐서 빈축을 사 <추악한 한국인>이라는 인상을 심어 준 것도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정체성은 결국 경제적인 영역으로부터 먼저 왔다. 물론 끈 즐긴 반독재 민주화투쟁이 긍정적인 의미에서 정치적인 자기 정체성 - 그러한 투쟁은 사실 여러 나라에서 민주화투쟁의 귀감(龜鑑)으로 받아 들여졌다 - 을 인각(印刻)시켜 주었지만, 없었더라면 더 좋았을 암울하고 부끄러운 역사였지 긍정적인 의미에서 정체성확인은 아니었다. 물론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식으로 이 암울한 역사의 장을 미화하는 세력이 적지 않게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러나 통일 전 서독의 정치적 정체성이 의회민주주의와 사회복지의 결합 속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 정치적 정체성뿐만 아니라 문화적 분야에서 정체성의 위기도 심각했는데 <민중문화>운동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지도 곱 씹어볼 필요가 있다.
주로 과정보다 결과론에 치중한 경제적 정체성이 로 또 한번 위기에 봉착했다. 북한의 체제위기가 독일식 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상당히 만연된 상황 속에서 맞은 이러한 위기는 그러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상징이었던 김대중씨를 중심으로 한 야당으로 정권이 이양된 헌정사상 초유의 사건을 낳았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친북>이니 <용공>이니 하는 시비의 대상이었던 그의 대북 및 통일정책도 빛을 보게 되었다. 경제적 성공에 근거한 정체성이 <민주화>라는 정치적 정체성과 연결되는 귀중한 계기는 그러나 곧 <신자유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덫에 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 바 <햇볕정책>은 그 동안 <민주화>운동의 발목을 잡아왔던 <분단문제>를 <남북정상회담>의 성사에까지 진척시켰다. 물론 뿌리깊은 <반공수구세력>의 저항과 <신자유주의>정책으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 <국제무역기구 WTO>가입으로 생활처지가 어렵게된 농민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으로 <햇볕정책>의 빛이 바래기도 했지만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특히 김 대통령의 <노벨평화상>수상은 그의 정책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러나 국내보다 국제사회에서 더 많이 얻는 정책지지는 그 자체로서 이미 많은 문제를 들어내고 있다.
<구조적 폭력>
1974년 <인혁당사건>이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날조된 사건이었다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9월 12일 발표했다. 그 동안 공권력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저질러진 사건들이 하나 둘씩 진상이 밝혀질 수 있는 상황이 온 것은 분명 <민주화>의 중요한 징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대부분의 사건이 <분단>상황을 빙자해서 벌어진 반인륜적 범죄였다. 어떤 의미에서 <분단>은 <구조적 폭력>의 기본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진상규명위원회>가 <민주화>의 계기가 올 때마다 설치되고 활동하였지만 이의 결과는 사회적으로 반성과 화합의 계기로 작용하기보다는 대부분 망각의 영역으로부터 잠깐 나타났다가 곧 사라지거나,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위해 어찌할 수 없었다는 가해자들의 변명이나 책임회피로 끝났다. 물론 <분단>을 내적으로 매개해서 성립된 이러한 폭력의 구조는 공권력의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푸꼬(M. Foucault)의 이론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우리가 눈을 돌려야 할 문제는 공적 영역의 폭력으로부터 사적 영역으로, 거시적 폭력으로부터 미시적 폭력의 분석으로 비판적 논의가 옮겨가는 분위기가 있는데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다. 오늘날 가정, 학교, 직장 등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폭력의 뿌리가 모두 <분단>에 내리고 있다는 식의 환원주의(還元主義)적 논리도 문제지만 <우리 안의 파시즘>과 같은 논리를 근거로 전개되는 또 다른 의미의 환원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