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교수가 첫 공판에서 행한 모두진술
존경하는 판사님 그리고 국민여러분,
오늘을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지난 9월 22일, 37년 만에 가족과 함께 영종도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만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나날들을 지금까지 보내고 있습니다.
특히 재판정에 서서 한마디도 하기 전에 이루어진 여론몰이와 여론재판에 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할 수밖에 없는지를 절실히 경험했습니다. 이에 따른 절망감과 함께 사실 참을 수 없는 분노도 종종 느꼈습니다.
20대 초반에 유학을 떠나 학문의 길을 쫓아 나름대로 정진하면서도 민족의 현실이 제기하는 절박한 과제를 늘 긴장 속에서 응시하면서 살아온 저를 그토록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비민주적이고 반통일적인 구조를 고발하고 저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정말 오래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유신’과 ‘5월 광주’를, 그리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현장에서 경험하면서 민주와 통일을 화두로 삼아 살아온 저를 “해방이후 최대 간첩‘으로 둔갑시키는 현실 속에서 이 사회가 지니고 있는 핵심적 문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역사 속으로 이미 살아져야만 했을 것들이 아직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래도 당연히 와야 할 것들을 하루라도 빨리 찾기 위해서
쏟고 있는 엄청난 정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낡은 것과 새 것이 충돌하고 있는 긴장된 상황 속에서 열리는 이번 재판을 우리 국민은 물론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희랍 말에 전기(轉機)를 뜻하는 에포케(epoche)는 ‘일단정지’를 의미합니다. 새 것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동안 관성적으로 달려왔던 속도를 우선 멈추어야만합니다.
이런 뜻에서도 저는 이번 재판에 역사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도 현재 1평 공간에 갇혀있는 제가 새로운 비상을 준비하는 '일단정지‘로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2003년 12월 2일
송두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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