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만에 밟은 광주의 뜨거운 대지의 기운을 베를린에서도 아직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에 들어섰지만 망월동의 맥박은 마냥 뜨겁게 느껴집니다. 저의 소년기의 꿈을 키워주웠던 그 땅의 비극에 분노하면서도 또 자랑스럽게 늘 생각하였기에 지난 8월 2일의 감격을 저는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예견치 못한 고초를 겪은 저와 저의 처를 따뜻하게 반겨준 빛고을의 여러분들을 한분 한분 기억하는 것 만으로도 저와 저의 처에게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8월 5일 저녁, 일년 가까이 비운 집을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무엇인가를 빼았긴 그러한 심정입니다만 겨울학기강의준비와 함께 이 곳 생활에 다시 적응하고 있습니다. 긴장이 풀리면 병이 난다는 말도 있고 또 서울에 자주들러 옥바라지도하면서도 6월부터는 뉴요크대학에서 레지던시생활을 시작한 둘째아들 린이도 볼겸 8월 17일부터 일주일간 뉴욕에도 다녀왔습니다. 그 곳에서 그간 저의 구출을 위해 애쓰셨던 문동환목사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과도 감격적인 해후를 하였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날로 응축되고 있는 이 <지구화>의 시대에 베를린, 서울, 뉴욕이 점점 닮아가고 있지만 그래도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광주>의 뜨거운 대지의 의미는 강인하게 남아 바른 역사의 의미를 우리 모두에게 전달해줄 것입니다. 정말 오랬동안 기다렸던, 그러나 너무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용기와 힘을 재충전할 수 있었던 더없이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만남의 깊이를 더 할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을 믿으며 그때까지 모두 건강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