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설레게 마련이다. 칼바람 부는 설에도 대다수 한국인이 고향을 다녀왔다. 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이웃들이 '마당'을 이루며 '설 한
파'의 뜻을 새기거나, 다가올 총선을 가늠해 보았을 성싶다.
더러는 메마른 가슴 깊숙이 웅숭 깊은 사랑을 적시는 '호사'도 누렸을 터이다. 그래서다. 37년 만에 꿈에도 그리운 고향을 찾은 한 60대의
설날이 새삼 서글픈 까닭은.
그의 귀향은 참으로 뜻깊었다. 고향의 내로라 하는 '지식인'들까지 '환영대회'를 약속하며 귀향을 독촉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가족과 귀향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철창에 가뒀다.
그 뿐인가. 철학자인 그를 '위선자'로 훌닦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배신일까. 아니, 차라리 야만이 더 적실하
지 않을까.
보라. 송두율. 독일 대학의 철학교수인 그는 37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서 설날을 차디찬 철창 속에 보냈다. 38년 만에 조국 땅을 밟은 그의
아내는 영하 15도의 혹한에 맞서며 홀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시위조차 대다수 언론은 모르쇠 했다.
그렇다. 야만, 그것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세계적 석학 위르겐 하버마스가 대한민국을 일러 단언했다. "야만의 나라."
감히 대한민국을 야만국으로 부른다고 수염 떨 일이 아니다. 어느 헛똑똑이처럼 '제국주의자의 오만'이라고 가당찮게 도끼눈 뜰 일은 더더
욱 아니다. 하버마스가 대한민국을 오늘 '야만의 나라'로 부른 이유는, 경제가 독일보다 뒤떨어져서가 결코 아니다. 경제는 성장했는데 사
회 풍경화는 걸맞지 않게 을씨년스러워서다.
굳이 하버마스를 빌릴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 땅의 언론이 말끝마다 독자들 앞에 내세우는 공론장, 그 개념의 창안자가 하버마스 아닌가.
하버마스는 자신이 박사학위 논문을 지도한 송두율에게 간곡히 권했다. "할 일이 많은데 하루빨리 야만의 나라에서 벗어나 돌아 오라." 하
버마스만이 아니다. 독일의 문호 귄터 그라스도 송 교수의 석방을 요구했다.
두루 알다시피 송 교수는 독일국적을 접었다. 감옥에 갇혀 담담하게 말했다. "한국사회를 배우고 있다." 문제는 그가 지금 이 순간 지병 악
화로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언제나 그랬듯이 윤똑똑이들은 편리하게도 자신의 무심을 합리화했다. 조선노동당 가입을 곧장 '간첩'으로 등식화해 언구럭 부린다. 더러
는 송 교수를 겨냥해 민주화운동의 '순수성'을 훼손시켰다며 모들뜬다.
그래서일까. 민주시민들도, 심지어 젊은 세대들도 송 교수 문제에, 아니 그 야만에 모닥모닥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다. 송 교수를 '해방 이
후 최대 거물간첩'으로 어루꾄 저 수구언론과 수구논객 따위에겐 묻고싶지 않다. 다만 '순수한 민주운동론자'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만일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는 사실만으로 한 지성인을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면, 게다가 공개적으로 탈당을 밝혔고, 더하여 앞으로 대한
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밝힌 학자조차 '용인'할 수 없다면, 과연 우리 겨레에게 평화 통일은 가능한가. 정직하게 답하기 바란다.불가능
하지 않은가.
그래서다. 남과 북, 북과 남, 두루 공존의 미덕을 익혀야 한다. 송 교수는 첫 공판 '모두진술'에서 "존경하는 국민여러분"에게 호소했다. "역
사 속으로 이미 사라져야만 했을 것들이 아직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다." 이어 날카롭게 오늘을 규정했다. "낡은 것과 새 것이 충돌하
고 있는 긴장된 상황"이다.
조국을 찾아 되레 가혹한 설을 보내는 송 교수의 아내는 위로의 말을 전하자 잔잔한 미소로 답했다. "한국사회에선 싸우지 않고선 살 수 없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편이 감옥에 갇힐 때, 천식이 발작한 긴급 상황을 알려도 다음날에나 검진을 받게 할 때, 병원으로 옮겨진 송 교수에게 사전 동의도 없이
마취를 할 때, 마취에서 갓 깨어나 비틀거리는 송 교수의 엷은 환자복 위로 다시 포승줄을 꽁꽁 묶을 때, 참담하게 내린 결론이란다.
대한민국에서 올곧게 살아가는 방법은 '싸움'이다―그것은, 유럽에서 37년을 더불어 보낸 송두율 부부가 야만의 땅에 귀향한 슬픔으로 빚
어낸 슬기가 아닐까.
하여, 6차 공판을 앞둔 오늘, 이 땅을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감히 묻고자 한다. 이 야만의 땅에서 싸워야 할 사람은 정녕 누구인
가. 마땅히 싸워야 할 사람들 대다수가 혹 그 야만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
보라. 오늘 참으로 '철창'에 갇힌 자 누구인가를. 대한민국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송두율 교수인가. 그를 가둔 대한민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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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소개>
손석춘씨는 1988년 평론 '분단시대 민족언론의 길'을 시작으로 줄기차게 언론비평을 해온 언론비평가입니다. 언론개혁시민
연대 창립공동대표를 지냈으며, 현재 한겨레신문 논설위원입니다. <신문읽기의 혁명>을 비롯한 언론비평서들과 함께 장편
소설 <아름다운 집>과 <유령의 사랑>을 쓴 작가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