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는 이제 무죄 석방되어야 한다!
- 송두율 교수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에 즈음한 사회 원로 성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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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교수가 가족과 함께 37년 만에 고국을 찾아온 이후 송두율
교수 사건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만이 남아 있게 된 지금까지
어느덧 9개월이라는 기간이 흘렀다. 그 9개월은 송 교수 본인과 그
가족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잘 아는 지인들과 남북간
화해협력과 인권향상을 염원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길고
고통스런 기간이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자들이 그러하듯 송 교수도 그 동안 겪을 수
있는 모든 고초들을 겪어야만 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바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고, 또 얼마 안 있어 구속 수감되어 재판정에
서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검찰에서의 조사 과정에서
변호인 입회가 불허되었으며, 그에 대한 혐의사실이 언론에 사전
유출되어 재판도 받아보기 전에 그는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으로 낙인찍혀야 했다.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 지병이
도졌는데에도 적절한 진료조치가 허용되지도 않았다.
집중적 심리가 이루어졌던 1심 재판부는 결국 송 교수에게 7년
실형이라는 중형을 선고했다. 재판부의 판결내용은 검찰의
공소장의 핵심 내용을 대부분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그가 북한
노동당 정치국 서열 23위 후보위원으로 선임된 적이 있으며
후보위원으로서의 자의식에 기초하여 저술행위 등을 통해 북한을
이롭게 하고 남한을 해롭게 하는, 반국가단체의 지도적 임무에
종사한 사실이 인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판결은 참으로
무리하고 시대착오적인 판결이었다.
송 교수에게 중형을 내린 핵심 사안인 후보위원 선임 문제는
주로 귀순인사인 황장엽씨가 북한에 있을 당시 김용순 등 북한의
고위간부에게 그런 사실을 들은 바 있다는 전언(傳言)진술과,
이른바 ‘김경필 파일’의 내용에 근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장엽씨는 남한에 귀순하여 국정원의 보호를 받고 있으므로
증언의 객관성을 신뢰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증언이라는 것도 본인이 직접 확인한 것이 아니라 남에게 들었다는
내용이므로 그것을 이렇게 중대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한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또 당사자인 김경필에 대한
증언 채취가 불가능한 데에다가 파일이 조작될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김경필 파일을 핵심 증거자료로 인정한 것도
상식에서 벗어난다. 근대 사법원리의 핵심적 요소의 하나가 유죄를
선고할 경우에는 막연한 심증이 아니라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
물증에 기초해야 한다는 ‘증거주의’라는 점에 비춰볼 때 이 핵심
원칙을 훼손한 1심 판결은 앞으로 오래도록 한국의 사법사에
오명을 남긴 판결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항소심이 이런 우를
거듭 반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희구한다. 또한 재판부가 자신의
오랜 연구경험에 비춰 공개되지 않는 비밀 정치국 후보위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김연철 교수의 증언에 귀를 기울려줄 것을
당부해 마지않는다.
검찰은 공소장 및 재판과정에서 송 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활동한 핵심 내용으로 그가 여러 차례 주선한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와 그의 저술활동을 거론하였다. 이 두 활동이 모두
북한을 이롭게 하고 남한을 해롭게 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후보위원으로서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1심 재판부는
남·북·해외학자 통일학술회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하는 자가당착적인 판결을 내렸다.
통일학술회의의 경우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아 이루어진 행사인
데다 남북교류에 기여한 바가 인정되어 무죄이나 저술활동은
친북·이적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유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는 통일학술회의나 송 교수의 저술활동은 근본적으로
동질적인 활동에 속한다. 둘 다 남북간 상호이해를 증진하고
화해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활동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일학술회의 중재활동이 무죄라면 저술활동
역시 당연히 무죄로 판결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나아가 저술활동의 이적성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일인가! 오죽하면 송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을
정면으로 비판한 대표적 학자인 강정인 교수까지 미국에서 급거
귀국하여 송 교수의 저술활동을 사법적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법정에서 역설했겠는가? 강 교수의 말대로 도대체 무엇이
이적행위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무엇인가? 그리고
강 교수가 통렬히 지적한 바와 같이 남한의 국가안보를 진정으로
위협하고 남한 체제에 대한 불만을 고조시킨 것은 송 교수와 같은
일개 학자의 저술내용이 아니라 과거 군부정권의 무자비한
강권통치가 아니었는가?
이제 상식과 이성적 양식으로 돌아가야 한다. 확고한 객관적
증거가 없는 사건에 대해서는 무죄로 판결해야 하며, 송 교수
저술의 균형성 여부는 학계의 토론에 붙여야 한다. 우리가
재판과정이나 면회를 통해 보아온 송 교수는 소탈하고 진솔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해 재외
동포학자로서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일을 했을 따름이다.
대문에 이 시점에 와서 그의 행적의 이적성 여부를 따진다는 것은
구시대의 망령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송 교수는 귀국의 자유를 얻기 위해 국외추방만은 결단코
피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 구속 수감과 재판이라는 고초를
겪었다. 때문에 그가 만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무죄 석방된다면
그는 고국의 학자들과 함께 토론하며 한국의 민주화와 남북한의
화해-협력에 기여하는 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런
그에게 중형을 내려 감옥에 가두어두는 것이 어떻게 국익과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는 일이겠는가? 오히려 오랜 기간 해외에서
빼어난 학자로 활동해온 송 교수로 하여금 자유로운 몸으로 학문
활동에 정진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에 도움을 주는 일이
되지 않겠는가?
송 교수에 대한 구속 수감 조치와 무리한 유죄 판결은 국내 양식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지탄과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오죽하면 세계적 석학이자 이 시대의 대표적 양심으로
손꼽히는 위르겐 하버마스나 노암 촘스키 교수, 그리고 독일 전
대통령인 바이츠체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까지 송
교수의 무죄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겠는가?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양심적 석학들에게 계속 비난받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국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게다가 법리적으로나 인권적으로나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국가보안법의 개폐 문제가 심지어 보수적 정치인들 사이에서조차
논의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국가보안법의 자구에 얽매어, 그리고
그것도 무리하게 적용하여 송 교수를 유죄 판결하는 것은 결코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일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물론 실정법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재판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송 교수 사건은
국가보안법의 틀 내에서도 유죄 판결하기가 어려운 사건임을
강조하고 싶다. 항소심 재판부가 다른 것은 차치하더라도 엄격한
증거주의에 입각하여 판단한다면 송 교수를 별다른 법률적 무리
없이 무죄 석방할 수 있을 것이다.
법률의 진화와 발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시대에 뒤떨어진
법률의 변화는 법조계 외부의 사회운동과 입법부의 결정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법률과 현실의 괴리를 인식한 현명한 사법부의
사례 깊은 판결의 축적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아무쪼록 항소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같이 무리한 유죄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법사에 더 이상 오명을 남겨서는 안 된다. 증거주의라는 근대
사법원리에 확고하게 입각하고 남북화해와 인권증진이라는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전향적인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 판결이
인권을 신장시킨 명예로운 판결로 후대에 기억될 수 있기를 우리는
고대해 마지않는다.
2004. 7. 1.
송두율 교수의 무죄 석방을 촉구하는 사회 인사 일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