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서>
국가보안법을 연내에 폐지하여
역사의 새로운 문을 활짝 열자
모름지기 세밑이란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축제가 아니면
조용한 성찰과 계획의 시간이다. 2004년 세밑 한국사회는 그러나
우리 교수들로 하여금 차가운 거리를 서성이게 만든다.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고, 없어져야 할 것이 없어지지 않은 채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 거리에 선 것은 60년 가까운 지난 세월 우리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고 사회적 공포를 조장해온 이 유령을 연내에
축출하려는 사회적 열망에 동참하기 위함이다.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수많은 통일 지향적 민족주의자들, 자유
시민들, 진보적 학생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사상과 자유를
탄압해온 악법 중의 악법이다. 우리의 사상과 상상력을 짓눌러온
이 유령을 그대로 두고서는 우리 사회의 온전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사회는 이 악법을 철폐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맞았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보안법의 연내 폐지를
요구하며 거리에 나서고 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 여부를 결정할
국회 앞에는 영하의 날씨를 무릅쓰고 무려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단식 농성을 벌이는 중이다. 서울 광화문에서는 주말마다 국보법
폐지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다. 국회에서도 다수세력이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한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은 아니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요구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건만 정작 국보법의 미래를
의결할 정치권에서는 이런 요구를 무시하려는 기류가 감지된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선 것은 국가보안법은 연내에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도 완전히 폐지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강력히
주장하기 위함이다.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를 천명하는
나라로서는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부끄러운 법이요, 우리 사회의
어떤 진정한 발전도 가능하지 않도록 만드는 법이다.
우선, 그것은 태어나서는 안될 악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은 일제가
조선인의 사상을 통제하고 민족해방투쟁을 탄압하는 데 사용한
'치안유지법'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1948년 제정 당시에도 극심한
반대에 직면했으며,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도 그 문제점을 인정하여
형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지난 60년 가까운 세월
한국사회가 독재, 군사 정권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면 국가보안법은
벌써 오래 전에 폐기되고 말았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지금껏
존속한다는 것이 이상한 기괴한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은 ‘냉전수구세력 보호 악법’이다. 이 법은
분단체제와 군부독재체제 하에서 민중의 자유를 짓밟아온
냉전수구세력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인 양 치장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일방적으로 강화해왔다. 지금도 냉전수구세력은 전쟁
위협을 빌미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을 볼모로 삼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없어지지 않는 한
냉전수구세력의 발호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진행을
거역하는 국가보안법은 이제는 더 이상 존속을 용납해서는 안될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반인권 악법’이다. 이 법은 민주주의의
근본원리이자,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양심, 사상의 자유 등 국민의
기본권과 대한민국이 가입한 제반 국제규약이 규정하는 보편적
권리로서의 인권에 본질적인 제약을 가한다. 국가보안법은 역대
독재권력의 농간에 따라 헌법 위에 군림하면서 사상의 자유를
유린했고, 표현의 자유를 유린했으며, 우리 국민의 기본적
권리들을 압살해왔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창달을
위해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반민주 악법’이다. 국가보안법은 존재 그
자체로써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왔다. 이 법은
명령과 동원, 위협의 형태로 사회구성원을 호출하며, 국민을
사회적 주체로 모시기보다는 통제하고 지배할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국가보안법이 존속하는 한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발전할 수 없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주권을 실질적으로 확보하고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반민족 악법’이다. 이 법은 민족의 일부인
북한을 적대시하고 반통일적 정서와 태도를 강요한다.
국가보안법은 그동안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남북대결을 조장하고
남북한의 화해·협력과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막아왔고, 민족의
유대를 차단해왔다. 국가보안법이 그 효력을 발휘하는 한 우리
민족은 온전한 민족공동체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관계를
원활하게 진전시키고 민족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은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반문화 악법’이다. 이 법은 양심과 사상의 자유,
자유로운 상상력에 따라서 표현할 수 있는 국민의 자유를
짓밟아왔다. 자신이 옳고, 바람직하고, 아름답다고 믿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은 문화적 주체의 기본권리이다. 우리
사회의 창조적 다양성과 상상력을 짓밟는 국가보안법을 그대로 둔
채로 우리 문화가 제대로 꽃필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세계가
이웃으로 소통하는 새로운 문명상황에서 인류문화에 기여하는
한국문화의 창달을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은 이제 폐지되어야 한다.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인권을 유린하는 일은 사라져야 하고, 북한의 위협을 내세워
남북한의 화해-협력관계를 방해해서도 안 된다. 안보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아서도 안 되고, 냉전수구세력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아서도 안 되며, 국가 안전을 내세워
자유로운 문화적 활동을 억압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국가보안법을 당장 연내에 폐지할 것을 주장한다.
국가보안법의 즉각적 폐지를 원하는 우리 교수들은 지금 이 법의
존폐를 둘러싸고 일부 정치권이 드러내는 작태를 주시하며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국보법 폐지를 당론으로 가진 열린우리당과
국보법 폐지를 반대해온 한나라당은 당대표, 원내대표가 참여하는
‘4인 회담’을 통한 정치적 협상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라는 국민적
요구를 외면해왔다. 이런 식의 협상을 통해 국가보안법의 미래를
결정하려는 것은 그동안 이 법이 역사적으로 자행해온 온갖
반-인권적,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민중적, 반-문화적 범죄
사실을 얼버무려 우리 국민을 계속 악법의 통제 아래 두려는
더러운 야합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
한나라당은 ‘개정’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을 존속시키려는 기도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언제까지 국가보안법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리려는 수구냉전세력의 입장을 지킬 것인가?
국가보안법의 유지를 획책하는 한 한나라당을 우리는 반인권,
반통일, 반민주, 반문화의 정치세력으로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이 진정 국민의 국정의 책임있는 동반자로서 국민의
신뢰를 받는 공당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21세기 새로운 삶이
요구하는 인권과 평화를 수호하고 민주주의와 문화를 구현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국가보안법 폐지에 동의하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폐지를 원하는 우리 교수들은
최근 열린우리당과 그 지도부가 보여주는 작태에 더 큰 분노를
느낀다. 열린우리당은 개혁세력임을 자임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당론으로 채택했으면서도 한나라당의 눈치를 보며 악법 폐지의
책임을 회피하려 들고 있다. 특히 당 지도부는 ‘4인 회담’을
통해 국가보안법 폐지를 시대적 사명이 아닌 정치적 협상의
대상으로 격하시켜 버렸다. 이는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 개혁지향에 힘을 실어준 국민의 기대를 철저히
외면하는 처사이며, 열린우리당이 과연 개혁의 의지를 지닌
정당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열린우리당은 정치적 자유주의 세력으로서 정치개혁을 구호로
내세워오긴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사회적 불평등을 강화하는 정책을 펼쳐 한나라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왔다.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을 포함한 4대
법안을 한나라당과의 타협을 통해 통과시키려는 것은 그만큼
한나라당과 닮아 있음을 고백하는 일이다. 열린우리당은 당장
명분없는 타협을 중단하여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신자유주의
불평등을 극복해나가는 정치적 개혁을 제대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은 기간 안에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기
위해서는 법안의 직권상정 권한을 지닌 국회의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김원기 국회의장은 자신에게 부여된 시대적 사명을
받아들여 국가보안법의 연내 철회를 위해 이 법안의 직권상정을
결행해야 한다. “국회의장으로서는 양대 정당의 협상을 존중해야
한다”는 형식적 중립의 입장을 고집할 경우 김원기 의장은
시대적, 민족적, 민중적, 민주적 열망을 배신하는 역사적 죄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둘러싼 정세는 냉혹하다. 냉전수구세력은
국가보안법 폐지는 곧 국가안보 위협이라는 등식을 내세워 국민의
막연한 불안감을 부추기며 분단체제와 군부독재체제에서 확보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총궐기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 국민이
피땀 흘려 이룩한 숭고한 민주화투쟁의 성과를 모두 무로 돌리고,
야만의 과거로의 회귀를 획책한다. 그러나 우리 교수 일동은
국가보안법 폐지가 우리 역사의 새로운 문을 여는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민주개혁과 사회진보, 평화통일을 갈망하는
모든 국민과 힘을 합쳐 국가보안법 완전폐지의 길로 끝까지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감시와 억압, 반민주의 역사를 끝장내고 인권의
시대, 평화통일의 시대를 열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냉전수구세력이 우리의 미래를 저당잡는 오욕의 역사를
종식시키자. 인권과 평화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며 화해와
열림의 문화를 지향하는 모든 국민이 힘을 합치자. 국가보안법을
연내에 폐지하여 역사의 새로운 문을 활짝 열자!
2004년 12월 28일
국가보안법 연내 폐지를 요구하는 교수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