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두율교수대책위 발족식상에서 발표한 글

 

 

 

호소의 글

 

 

 

송 두율 교수의 처, 정 정희입니다.

 

저희 남편이 하루라도 빨리 풀려나기를 바라며 관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할지 정말 답답하고 착잡한 심경,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40여 년만에 자나깨나 꿈에도 그리던 고국 땅을 밟은 벅찬 기쁨과 감격도 잠시, 그 동안 국정원조사로부터, 검찰조사, 그리고 구치소 수감에 이르기까지 남편이나 저에게 벌어진 일들은 그 동안 외국 땅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정말 상상하기 어려웠던 힘든 나날들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조국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다고 하면서도 그 동안 고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체포, 구금, 투옥, 심지어 고문까지도 우리에게는 가까이서 느끼고 체험한, 일상적인 삶이 아니었구나, 고국의 민주화운동은 그렇게도 많은 사람을 고통에 몰아넣고 가족들을 절망에 빠뜨리며 울게 하고, 그럼에도 또 다시금 힘을 내게도 만드는 거대한 흐름이었구나 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 땅의 대다수 언론들이 제 남편이 '공작금을 받은 거물간첩', '말 바꾸기나 하는 비겁한 지식인' 등으로 비난하는 것을 접하며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찾아온 아버지의 나라에서 평생을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고민하고 글을 써온, 존경하며 또한 자랑스러워했던 아버지에 대해 쏟아지는 비난들에 대해 아이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아버지 나라를 원망하며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도 저희 남편에게 보여준 여러분들의 따뜻한 관심과 지지, 후원에 힘입어 저희는 다시금 새로운 힘을 얻으며 우리가 고국에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고국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기에, 떠나 살면서도 이다지도 잊지 못하고 절절이 그리워하다가 체포영장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기어이 돌아오게 만드는 고국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 봅니다.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합니다. 왜 체포될 각오까지 하고 돌아왔느냐고요.

고향이기에, 태어나서 자란 땅,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가 모두 소중하고 늘 눈에 어른거리며 그리운 고국 땅이니까요.

37년을 한결같이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이니까 체포당하는 것이 그리 두렵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저희는 군사독재 시절에 한국정부를 비판하며 독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고, 또 통일을 향해 남북한간의 화해와 꾸준한 교류, 특히 남북한간의 자유로운 학문적 연구 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최근 몇 년간 잦았던 북한 왕래 등이 이처럼 해방 이후 최대 거물간첩으로 둔갑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말하는 것이 주저스럽지만, 저희 남편이 한창 젊었던 30여년 전, 당시 상당한 발전 가능성을 보여 주었던 북한, 우리 고국의 반쪽인 북한에 들어가 통과의례로 썼다는 노동당 입당원서가 이렇게 엄청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리라고는 정말 저희는 알지 못했습니다.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고국의 엄정한 현실에 너무 어두웠던 것이었을까요? 그리고 저희 남편의 북한 왕래를 인정하고 관용할 만큼 한국사회가 정말 민주화되었노라고 잘못 판단한 것일까요? 수많은 남한 인사들이 북한을 오가는 것을 보며 저희 남편의 북한 방문도 이제는 별로 문제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것 역시 멀리 떨어진 외국 땅에서 살면서 조국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고 체험하지 않은 데서 오는 한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희 가족은 말하고 싶습니다.

남편은 언제나 한반도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치열한 삶을 살아 왔노라고요.

통일을 하려면 북한을 알아야 하기에 사회주의권과 북한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실제로 현장을 알아야 하므로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남북한간의 학술교류와 연구를 위한 열정에서 북을 오가며 학술대회 성사를 위해 정말 까다롭고 힘든 조정의 역할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저희 남편의 삶이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북에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해서는 수 차례 사과와 반성의 뜻을 이미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의 법을 존중하며 살아가겠다고 국민들 앞에 다짐하였습니다.

 

제 남편은 자신의 학자적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학자에게 입혀진 죄수복, 쇠창살 너머로 보는 그의 침울한 얼굴이 저를 미치도록 가슴 아프게 합니다. 더욱이 수갑에 포승까지 채워 하루 종일 심문하고 수사하는 검찰의 처사에 대해서는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와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피의자에 대한 검찰의 이러한 인권 침해가 다반사이고 일상화되어 있다고 해서 이것에 대해 항의하고 분노하는 것 역시 저희가 외국에서 오래 살면서 한국의 현실을 너무 모르는 데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제 남편은 학문을 사랑했습니다.

선후배 동료들과 함께 학문을 논하고 토론하는 삶을 늘 꿈꾸어 왔습니다. 하지만 독일에서 고국의 현실과 삶, 역사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래 살았지만, 뼛속 깊이 내 조국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외국 땅에서 언제나 멀리서 고국을 바라보며 고국을 그리는 심정은 외국 땅에 살아보지 않으면 그리 절절히 느껴지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말을 듣고 우리 언어로 읽으며 거침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는 삶을 살고자 저희 남편은 체포를 무릅쓰고 고국에 돌아온 것입니다.

그가 마음껏 학문에 정진하고 국가보안법이 아닌, 학문적 연구와 토론을 통해 평가받으며 이 땅에 정착할 수 있도록 존경하는 여러분께서 부디 큰 힘으로 도와주십시오. 저희 남편과 가족이 겪고 있는 이 고통이 통일로 가는 여정에서 한 디딤돌로 승화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항상 저희 남편에게 관심을 가져 주시고 지원해 주십시오.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03년 11월 13일

 

송두율의 처 정 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