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올 재판장님께,

 

- 금강산에서 만난 <경계인>과 솥・냄비 -

 

 

 

저는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민주주의론, 휴머니즘론, 이데올로기론, 민족주의론, 국제정치 사상, 사회주의 정치사상 과목 등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박호성 교수입니다. 제 전공분야는 정치사상입니다.

저는 현재 <참여연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만, 핵심적으로는 <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 부설 연구소 소장 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연구소장의 직분으로 작년 8월에는 본 기념사업회의 나병식 상임 이사 및 KBS의 이종수 이사장과 함께 독일 베를린을 방문하였고, 9월에는 김형태 변호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송두율 교수를 직접 대동하고 귀국 길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두 차례에 걸쳐 송두율 교수 귀국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 베를린을 다녀온 사람은 오직 저밖에 없습니다. 말하자면 제 자신이말로 송두율 교수 귀국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 떼래야 뗄 수 없이 직접적인 연관성을 맺고 있는 ‘사건’ 당사자란 말씀입니다.

제 자신이 독일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를 하였고, 또 송두율 교수와 개인적으로 깊은 친분이 있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고려되어, 그렇게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리고 제 자신이 황장엽 사건의 변호인 측 증인 역할을 한 적도 있기 때문에, 저의 이 탄원서가 중립성을 상실한 문건으로 이해될 수도 있으리라는 걸 잘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정한 학자적 양식과 객관성에 올곧게 입각하여 이 글을 풀어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재판장님께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지난 1월 6일(화) 변호인 측 증인으로 출석한 바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근엄해야 하는 법정 질서에 전혀 익숙치 못한 관계로 재판장님으로부터 자상한 가르침까지 받는 은혜를 입은 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 제약 등등으로 인해 그 기회에 못 다 드린 주요한 말씀이 하도 많아 다시 필을 들게 되었습니다.

복잡한 재판 관련 업무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시리라는 걸 잘 짐작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재판장님께서 제 글을 꼭 참작하시는 것이, 재판장님 특유의 재판에 임하는 사법적 자세라 널리 알려진, 공정한 평결에도 본질적인 도움이 되리라는 좁은 생각으로, 이 탄원서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올리는 말씀에 가벼운 눈길이라도 한번 던져주신다면, 무한한 영광으로 깊이 간직하겠습니다.

 

 

* * 그는 왜 귀국했는가?

 

저는 송두율 교수가 37년만의 귀국을 결행하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분석하고 있습니다.

첫째, 독일에서 태어난 두 아들이 이제는 결혼할 나이에까지 이르렀음에도 조국을 한번도 체험케 하지 못한 부모로서의 죄책감,

둘째, 인권변호사인 노무현씨 및 고영구씨의 대통령 당선과 국정원장 취임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듯이, 한국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신뢰심을 북돋아주는 민주화 과정을 직접 관찰하고 체험하고 싶다는 국민으로서의 욕구,

셋째, 조국에 대한 자신의 오랫동안의 해외에서의 비판적인 평가가 과연 공정하고 정당하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학문적으로 객관화시켜 현장에서 직접 올바로 검증해보고자 하는 학자로서의 의지,

넷째, 해외에 장기간 체류하는 동안 북한 방문은 수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었지만, 정작 자신의 고향인 남한 방문은 한번도 성사시키지 못하여, 인간적으로나 학자로서 균형감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는 자괴감,

다섯째, 무엇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평소에 대단히 보수적이라 경시해마지 않던 <한국 철학회>가 숙식 및 여행 경비까지 부담하며 자신을 학술 심포지엄 주제 발표자로 초청까지 하는 것을 보니, 한국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이 분명하구나 하는 신뢰심,

등등이 한데 어울리어 송 교수의 귀국 결단을 용이하게 했으리라 저는 자신 있게 추정하는 바입니다.

 

 

* * 그는 어떠한 인간인가?

 

저는 송두율 교수를 저의 20대 후반이자 그의 30대 중반이었던 1977년 가을, 베를린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당시 베를린의 한인사회에는 ‘빨갱이’와 ‘사쿠라’만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고국을 조금만 비판해도 빨갱이로, 반대로 조금만 추켜세워도 사쿠라로 금새 낙인찍히는 실정이었지요. 한국 사회의 냉전적 대결의식이 베를린에서는 이런 극한적 대립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는 당연히 ‘빨갱이’의 수괴급이어서 기피의 일차적 대상으로 지목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박사논문 지도교수는 20세기 세계 최고의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하버마스였으니, 정치사상을 전공하고자 했던 저에게, 그는 선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이제 막 공부하겠노라 허겁지겁 날아온 저의 나이와 비슷한 28세 경에 이미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버마스 같은 대 철학자 밑에서.

그래서 저는 호기심 반, 젊은 학도다운 모험심 반에 들떠, 제 발로 그를 직접 찾아가 만났습니다.

그 당시 그는 베를린 자유대학 부설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학위 취득 후 강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한국학 강좌가 개설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학 도서관까지 갖추어져 있어 한국 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들곤 했습니다.

그 연구소에서 공부도 함께 하고 한국 문제에 관해 토론도 자주 벌이면서, 저는 그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다가 저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독신으로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힘들게 고학하던 노총각 신세여서, ‘형수님’(저는 송 교수의 부인을 이렇게 불렀고, 송 교수를 ‘송 선배님’이라 칭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으로부터 실은 밥도 자주 얻어먹었고, 또 제 자신이 두주 불사하던 형편이라 역시 그러하던 송 교수와 술도 무던히도 자주 어울려 마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 댁의 두 아들 녀석이 아직도 어려서, 그 놈들과 씨름도 해가며 마치 한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 녀석들은 ‘虎聲’, 즉 ‘호랑이 소리’라는 제 이름 풀이에 빗대어, 그때나 지금이나 저를 ‘Tiger(호랑이) 아저씨’라 부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저는 가족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컨대 민족사적 비극이었던 광주사태를 이국 땅에서 함께 처절히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점에서는, 함께 싸우고 저항하기도 했던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는 뮌스터 대학에서 사회학 정교수 자격증까지 얻었습니다. 외국인으로서는 대단히 힘든 학문적 업적까지 쟁취한 것입니다. 게다가 생활조건이 지극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해외임에도, 조국의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저항적 지식인으로 굳건히 살아가고 있었으니, 송 교수는 가히 의식 있는 모든 유학생들의 ‘우상’이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골고루 지니고 있었던 셈입니다.

 

칸트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론 없는 실천은 맹목적이고,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다”라고 말입니다. 우리 동양 사회에서도 전통적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 하여,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높이 기리지 않았습니까.

한마디로 저는 송 교수를 지행합일을 추구하는 한 사람의 순수하고 탁월한 학자로 평가합니다.

 

저는 작년 10월 16일에 발행된 <주간 시사 저널> 제 729 호에 『인간 송두율을 말한다』는 제목의 글을 200자 원고지 40매의 분량으로, 그리고 10월 8일자 <조선일보>에는 『宋교수 추방만은 안 돼』라는 제목의 시론(첨부-2)을 원고지 9매로 각각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9월 30일, 저는 - 우여곡절을 겪긴 했습니다만 간신히 성사되었던 -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가 주최한 『한국 민주화 운동의 쟁점과 전망』이라는 학술 심포지엄의 마지막 순서였던 송두율 교수의 ‘나의 통일 철학’ 강연에서 사회를 맡아보기도 했습니다. 그 강연이 끝나갈 무렵 성균관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한다는 어느 교수의 제안과 그 자리에 운집한 대다수 청중의 전폭적인 동의를 거쳐 사회자로서 만세 삼창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사회자였던 제가 선창을 했고, 만세의 구호는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민족통일 만세’였습니다(이 장면은 조선일보 2003년 10월 2일자에 사진과 함께 보도된 바 있습니다(첨부-1).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조선일보의 칼럼에 다음과 같은 글을 게재했습니다.

“1900년대 초반 영국 런던의 어느 연주회장에서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화재가 발생해 청중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지휘자가 홀연히 연주 곡목을 영국 애국가로 바꾸어버렸다. 청중들은 경건한 자세로 애국가를 경청하며 그 곡이 끝날 때까지 동요 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 사이 화재가 진압되고, 아무런 피해 없이 연주회가 조용히 끝났다. 애국가가 인명을 구제한 것이다.

나의 유학생 초년병 시절 언젠가, 베를린에서 동포들이 모여 소박하게 8-15 경축식을 거행하면서 모두 기립해 애국가를 부른 적이 있었다. 우연히 나는 송 교수의 옆에 서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동안 그는 손수건으로 끊임없이 눈물을 닦아내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경악하였다. 과격한 반체제 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역전의 투사가 어찌 저렇게 나약하게 눈물을 보일 수 있는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거리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한마디로 말해, 송 교수가 결코 투사나 운동가는 못 된다는 게 저의 지론입니다. 무엇보다도 운동가로서 지녀야 할 대중성이나 저돌적인 담력 같은 게 그에게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는 어려움을 모르고 고이고이 자라온 온실 속의 난초 같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험을 저지를 수 없는, 곧고 부드럽고 착하기만 한 성정을 지닌 인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 탓에 그와는 이질적인 분위기에서 마구잡이로 성장해온 저로서는 독일에서도 자주 그가 참 답답하다고 느꼈으며, 이따금 어떻게 저런 사람이 저항운동까지 하게 되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베를린에서 지켜보기에도, 그는 광부 및 간호사 출신으로 구축된 그쪽 운동권 주류에서도 소외당하는 눈치였습니다. 때에 따라 그들은 강인하고 과격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송 교수에게는 나약하다던가 온건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곤 하는 걸 직접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저는 유학생 시절 서백림에서 남한 정부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로 맹활약하고 있던 파독 간호사 출신들의 모임인 <여성회>와 더불어 일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그런 비판을 가까이서 경청할 기회가 적잖았습니다. 그때까지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고학하고 있던 저를 이른바 극렬 ‘반정부단체’로 알려진 이 <여성회> 회원들은 간단히 ‘총각 선생님’이라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세계사와 유럽 노동운동사 등을 자신들에게 강의해달라는 그들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그들과 자주 어울려 함께 공부하는 사이였던 것입니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있다면” 하고 안타까워했던 전태일이 불현듯 떠올라, 제 자신 논문 준비로 몹시 바빴음에도 불구하고 그 요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들과 내내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 덕분으로 이젠 환갑을 넘어서기도 한 그들과의 인간 관계는 지금까지도 줄곧 다정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정치사상을 전공하는 저의 관점에 입각해서 보면, 송 교수의 이념적 위상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중도파 정도 수준이 아닌가 합니다.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은 우리 모두가 경청할만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교조는 지성의 무덤이다. 그러므로 좌파의 교조라 해서 우파의 그것보다 하등 나을 게 없다”고 말입니다. 송두율 교수는 적어도 이러한 교조를 뛰어넘어 합리적 차원의 진보를 추구하고 있다고 저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가 타고난 선비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성실한 성품과 덕성, 그리고 순수한 예지력을 갖춘 양심적인 학자로서, 더러운 곳에 기꺼이 더불어 몸을 던질 줄 모르는, 순수하기만 한 학 같은 인물이 바로 송두율 교수 같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한마디로 그는 외국에서 남북한을 공정하게 함께 사랑하는 선비로 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그를 <한반도적 민족주의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랜 외국생활에 기인한 탓도 있겠지만, 그는 남한과 북한을 등거리에서 이해하고 포옹하고자 하는 전체 한반도적 시각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송 교수는 스스로를 <경계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계인’이라는 칭호는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식으로, 그가 남한과 북한 양쪽을 두루두루 살펴보다가 기회를 보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서 빌붙는, 그러한 ‘기회주의자’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남-북한 양쪽에 다 두루두루 통달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양쪽을 화해와 통일의 길로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그 방안 모색에 가장 통달해 있는 존재가 바로 <경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저는 굳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 * 금강산에서 만난 ‘경계인’과 ‘솥・냄비’

 

저는 지난 1월 9일(금)에서 11일(일)까지 저희 대학 공공정책 대학원 교수 세미나 관계로 20 여 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금강산에 다녀왔습니다.

저희들은 남한과 북한 양측에서 이른바 C I Q(Customs Immigration Quarantine = 세관 출입국 및 검역)라고 부르는 곳에서 통관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외국 여행하듯이, 엄연한 독립 국가 상호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입국 절차를 다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딱한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금강산 지역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이 하나 존재합니다.

현대 아산에 의해 채용되어 각종 업무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다 연변에서 건너온 ‘조선족’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조선족들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남-북의 이질감과 적대의식을 평화롭게 완충해주는 충격 방지용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단지 내에서 적절히 활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 금강산의 ‘경계인’이었습니다.

아울러 또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하나 더 눈 앞에 전개되었습니다.

저희는 금강산에 도착한 날 저녁식사를 ‘금강원’이라는 북측 식당에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술값과 보통 가게에서 파는 술값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여성 종업원들은 “우리가 행 할 일을 한 것 뿐”이라며 한사코 팁을 거부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때 어느 교수 한 분이 “남한과 상이한 이러한 북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송두율 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 필수적이야.” 하는 바람에 다들 즐겁게 동병상린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저의 뇌리에는 습관처럼 송두율 교수가 번갯불처럼 떠올랐습니다.

이른바 <경계인> 송 교수는 무엇보다도 바로 남-북의 화해와 평화공존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완충장치가 되도록 자기 자신을 민족에 기꺼이 헌납한 순교자는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저는 송 교수를 ‘솥・냄비’라 부릅니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어서 결코 합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물과 불 사이에 솥 냄비가 얹히면 어찌될까요. 이 솥 냄비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힘을 한데 모아 갖은 맛을 내는 음식을 만들어냅니다. 이를테면 새로운 생산물을 창조해내는 것입니다. 물불을 가리어 그 둘을 조화롭게 엮어나가는 일, 그리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멋진 신세계’를 일으켜 세워나가는 일, 이 일을 바로 솥 냄비가 떠맡지 않겠습니까. 허나 솥 냄비는 잘 찌그러집니다. 저는 송 교수를 퉁탕거림 속에 자신은 끊임없이 찌그러지면서도 두루두루 물과 불, 요컨대 남과 북을 화해롭게 잘 껴안아나가며 새롭고 가치 있는 생산물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솥・냄비 인생을 살아가는 분이라 규정합니다. 스스로 찌그러짐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덤덤히 펴나가고 있는 통일 지향적 민족인, 그가 바로 인간 송두율이라는 것이 제 확신입니다.

 

송두율 교수는 예컨대 『21세기와의 대화』라는 그이 저서 속에서도 우리 한반도 문제에 대한 고뇌에서 한치도 빗나가고 있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는 특히 이 시대의 한반도가 요구하는 위기극복의 철학은 어떠한 것이라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도 간략하게나마 그의 고뇌의 파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송 교수는 ‘위험사회’와 ‘분단사회’의 중층 구조에 의해 신음하고 있는 한반도적 현실이 던지는 모순은 바로 민족적 화해와 민족국가적 통일을 통해서만 극복할 수 있다고 단언합니다. 그의 소망은 지극히 간결합니다. 요컨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는 통일된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희망”이 전부라 할 수 있습니다.

 

 

* 글을 닫으며

 

지금 송 교수 문제는 우리 사회를 시험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국민적 분열과 불신감이 엄청나게 확산되어 마치 ‘추궁하는 사회’, ‘심문하는 사회’로 전락한 듯한 느낌마저 줍니다. 서로를 서로 서로가 다 ‘혐의자’, ‘간첩’, ‘거동 수상자’, ‘수배자’, ‘잠재적 범법자’ 등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는 말입니다. 이 모두가 다 냉전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송 교수는 자신을 낳아준 이 땅에 살고 헌신하기 위해 험한 여정을 거쳐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선 송 교수를 민족과 조국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끌어안음으로써, 우리 사회를 이러한 ‘추궁하는 사회’로부터 ‘포용하는 사회’로 만들어나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공정한 법률적 처분과 인도적인 정치적 결단을 동시에 병행함으로써 그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고대한다는 말입니다. 끝 부분이 조금 상했다 하여 아름드리 재목을 다 버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다른 한편 대한민국은 스스로 <사상과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무엇보다 국제적 성격까지 띠는 송 교수 문제를 관용의 정신으로 풀어나감으로써, 이 기회에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자유민주주의적인가 하는 것을 과시할 수 있는 길을 열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대한민국이 얼마나 평화통일 지향적이고, 자유민주주의적이며, 인권을 존중하는 국가인가 하는 것을 세계 만방에 자랑스럽게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역사적 기회가 바로 재판장님의 공정한 판정과 숭고한 결단에 놓여 있다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가호가 언제나 재판장님과 함께 하옵길 삼가 기원드리며, 제 난삽한 글월을 마감하겠습니다.

내내 건강하십시오.

 

 

2004년 1월 14일

 

 

박 호 성 교수  

 

두 손 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