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와 대학원 시절뿐만 아니라 같은 대학의 녹을 먹게 된 지금까지도 꼿꼿한 선비와 속 깊은 학자의 학덕을 두루 보여준 긴내 김태준(동국대 국문과 교수, 한국문학연구소 소장) 선생님의 『한국문학의 동아시아적 시각 3』(집문당 2004)을 읽었다. 여러 개의 글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글들은 「서양의 충격과 동아시아」(9-26)라는 글과 「유길준의 개화사상과 민족아 형성」(85-110)이라는 글이었다. 이 글들은 동아시아의 근대는 일본식 근대와 중국식 근대가 있었고, 근대 초기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개화당과 수구당만이 있었다고 생각한 나의 아둔함에 일격을 가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에 서양의 충격으로 이루어진 동아시아의 근대화는 중국식 근대와 일본식 근대, 그리고 조선식 근대가 개별적으로 존재했었고, 당시의 조선에는 개화당과 수구당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개화당과 수구당을 조화하고 상생시키고자 했던 점진적 개화주의가 존재했었다는 것이다. 이런 조선식 근대, 그리고 개화당과 수구당을 조화하고 상생시키고자 했던 점진적 개화주의가 바로 유길준의 『서유견문(西遊見聞)』에 등장하는 그의 “개화론”이다.
유길준의 개화론은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 세계 고금의 어느 나라를 돌아보더라도 개화의 극진한 경지에 도달한 나라는 없다. ... 개화란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김태준 135)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김태준 교수가 유길준의 “개화론”을 제시하는 위의 문장 속에서, 나는 “남북의 상생과 평화를 구현시키는 그러한 아름다운 통일은 동북아의 안정과 번영, 나아가 날로 좁아지는 지구촌의 미래도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송두율 교수의 항소심 최후진술문을 생각했다.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등장한 위의 두 글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을 고민하는 나에게 100여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한반도 근대화의 단초를 제공하는 듯 했다. 유길준과 송두율의 차이는 하나가 내부에서 외부를 이야기하고, 다른 하나가 외부에서 내부를 이야기한다는 차이일 것이다. 즉, 유길준의 개화론은 통일된 한반도(조선) 내부를 외부에 드러내자는 것이고, 송두율 교수의 통일론은 외부에 드러내어 분단된 한반도를 다시 통일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길준의 개화론과 송두율의 통일론의 내용은 서로 동일하다. 유길준은 당시의 조선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일본의 서구화와 미국, 그리고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소개하면서 “개화란 인간의 온갖 사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개화의 극진한 경지에 도달한 나라는 없”으니, “온갖 사물을 깊이 연구 경영하여,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개화의) 상태”를 우리가 달성하자고 역설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송두율 교수는 “거문고와 가야금을 구별할” 줄 모르면서 “서양 음악가나 연주단이 오면 표를 구하기 위해서 장사진을 치는”(『경계인의 사색』 228) 상황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북이 어떤 사회를 건설하려 하는지 우선 그들의 눈으로 보며 배우는 태도”와 “남이 어떤 사회를 건설하려 하는지 우선 남의 눈으로 보려는 태도”(105-106)를 중시하면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생각하고, 이러한 사고의 지평을 전지구적 차원까지 넓힐 수 있는, 통일된 조국을 그려보는 정치적 상상력”이라고 역설한다. 유길준의 “개화”가 지니는 “날로 새롭고 더 새로워지도록 기약하는 상태”나 송두율의 “통일”이 지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생각하고, 이러한 사고의 지평을 전지구적 차원까지 넓힐 수 있는” 상태는 수많은 이견과 역사적 굴곡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진 한반도식 근대의 꿈이라고 확신한다.
중국식 근대나 일본식 근대와 다른 한반도식 근대가 유길준의 개화론과 송두율의 통일론으로 유사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개화나 통일을 동아시아적 시각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길준은 그의 스승이기도 한 복택유길(福澤諭吉)의 문명지상주의를 상대주의로 비판하고, 그의 “전통파괴와 탈아론(脫亞論)”에 저항하여 “유교적 전통에 바탕을 둔 점진적 개혁”(김태준 137)을 주장했다. 송두율 교수도 또한 최후진술서에서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扁)」”에 나오는 “계발(啓發)”에 대한 예를 들면서 “이번 재판의 결과가 남남갈등, 남북갈등 나아가 동북아 갈등이라는 다른 세 모서리의 문제를 깨우치는 계발의 계기가 되었으면”하는 동아시아적 시각을 강조한다. 유길준은 “개화(opening and becoming)"라는 언어적 의미에 충실하게 “실상개화(實狀開化)”와 “허명개화(虛名開化)”를 구분한다. “실상개화”는 “개화의 주인”이 되는 것이고, “허명개화”는 “개화의 빈객, 개화의 노예,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 등등이 되는 것이다. “개(開, opening)”는 하였지만, 한반도가 분단되어 남과 북이 모두 “화(化, becoming)”가 되고자 하는 통일의 시대에 우리는 진정한 “실상개화”를 통한 “개화의 주인”인지, 아니면 “허명개화”로 이루어진 “개화의 빈객, 개화의 노예,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 등등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유길준과 송두율의 유사점이 또 하나 있다. 유길준은 “일본에 머물기 1년 남짓한 시점에서 고국에 소환되고, 그 뒤에 미국유학과 유럽시찰에서 돌아오자마자 신병이 국가권력에 구속되는 상황(1885-1892의 7년간) 속에서 (『西遊見聞』의) 초고의 일부까지 잃어버리는 불운이 겹쳤다.” 개화당 사건으로 유길준은 당연히 구속될 줄 알면서도 일본에서 만난 김옥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국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유길준의 불운은 애초의 계획보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서유견문』의 책을 출판하는 민족적 불행으로 이어졌다. 당시의 급박한 동북아 정세의 상황에서 유길준의 책이 좀더 일찍 출판되어 많은 당시의 지식인들이 그의 책을 읽었다면, 일본의 침략에 그렇게 무력하게 대응하지 않는 방책이나, 혹은 일제강점 이후의 수구당과 개화당이 구국의병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상생적 결합이 좀더 빨리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유길준이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책이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지나간 역사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우리는 송두율 교수를 통하여 다시 겪게 된다. 그는 오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고국 행을 단행함으로 인하여 7년형을 선고받았다.
다행이도 유길준의 7년간 유폐는 지나간 역사의 질곡이지만, 송두율의 7년형은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지나간 역사를 바꿀 수는 없지만, 과거를 돌이켜 현재의 과오를 수정한다는 측면에서 현재진행형의 역사는 바꿀 수 있다. 지나간 역사의 질곡에서 유길준의 7년간 유폐는 수구파에 의하여 단행된 것이고, 오늘날의 송두율 교수에 대한 국가보안법을 토대로 한 7년형의 선고도 또한 공안검찰과 판사들로 이루어진 수구파에 의하여 단행된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근대화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100여년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수구파”라는 동일한 언어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유길준 시대의 수구파는 “척왜양이(斥倭洋夷)”를 부르짖으면서 외세의 모든 힘을 차단하는 쇄국정책의 권력자들이었는데 반하여, 오늘날의 수구파는 오직 북진통일이나 흡수통일만을 부르짖으면서 왜(倭)와 양(洋)인 일본과 미국의 시각과 동일시된 반공ㆍ냉전주의자들이다. 참으로 한반도 근대화 과정의 역사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00여년의 한반도 근대화 과정에서 “수구파”라는 언어의 변천은 유길준이 수구파와 개화파의 양 쪽에서 비난을 받으며 고독하게 전지구적인 근대적 보편성과 한반도의 특수성을 결합한 “개화론”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유길준은 “아, 개화하는 일이란 남의 장기를 취하는 것뿐 아니라, 자기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여 지키는 데에도 있는 것이다”(김태준 137)라고 말한다. 유길준은 결코 “남의 장기를 취하는 것”이라는 “개(開, opening)”와 “자기의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여 지키는” 것이라는 “화(化 , becoming)”를 구분하여 사고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시의 개화파와 수구파는 “개”와 “화”를 구분하고 단절하여 사고했다. “개”와 “화”의 통일이 부재한 상황의 결과는 일제식민지 36년의 고통이었고, 그 고통조차도 우리는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이라는 이중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송두율 교수의 통일론이 유길준 선생의 개화론과 상통하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송두율 교수는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에 대하여 “전자의 이론은 지구화 외에는 어떠한 대안도 있을 수 없다는 주장으로, 후자는 제국주의의 최후 단계로서의 지구화 압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현재적 모습으로 각각 자신을 드러내”며, “분단된 한반도의 남북에는 극단적으로 맞서는 이 두 가지 세계파악 방식이 아직 긴장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유길준이 “개”와 “화”를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하듯이 송두율은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지수탈론”을 하나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송두율 교수는 한반도의 통일이 “북의 자주성”과 “남의 세계성”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역으로 통일의 과정을 통하여 남이 북의 자주성을 획득하고, 북이 남의 세계성을 획득해야만 한다는 것을 일컫는다. 이러한 통일의 과정을 무시하고 자주성이 더 우월하거나 세계성이 더 우월하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 “개”나 “화”가 서로 결합하여 “개화”라는 하나의 언어가 되듯이, 자주성과 세계성이 결합해야만 하나의 온전한 나라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아름다운 나라”론은 유길준이 개화론과 송두율의 통일론을 잇는 역사적 가교 역할을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선이 ‘강대국’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오늘날 모두 ‘개술대국’, ‘정보대국’, ‘경제대국’이 되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아름다운 나라’나 ‘도덕이 선 나라’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기술도 정보도 주요하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이 화해할 수 있는 통일된 ‘아름다운 나라’를 건설한다는 희망이 깔려 있지 않는 그러한 ‘기술대국’, ‘정보대국’, ‘경제대국’은 갈등과 추함만을 낳게 될 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송두율의 『21세기와의 대화』 259-60)
유길준이 추구했던 일본식 근대나 중국식 근대와 다른 조선식 근대는 그의 생애에 달성되지 못했다. 일제 식민지와 미군정기, 한반도의 남북전쟁, 그리고 반세기의 분단 역사를 겪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럽게 유길준의 7년 유폐가 아쉬운 것은 그러한 역사적 불행이 다시 송두율 교수에게 가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실행되지 않은 불행한 역사서의 자료로 남아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던 백범 선생은 분단고착세력의 총탄에 의하여 싸늘한 시신이 된지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났다. 21세기인 오늘날에 우리는 근대화 과정의 불행을 다시 반복하면 안 된다. 유길준의 7년 유폐가 없었다면, 우리의 또 다른 근대를 꿈꿀 수 있었듯이 백범 선생이 살아서 남북대화가 지속되었다면 통일은 더 빨리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지난 7개월 동안 이루어진 송두율 교수의 재판과정이 그의 소망처럼 수많은 인문사회학자들이 참여한 자유롭고 첨예한 논쟁의 학술세미나였다면, 한반도나 동아시아, 혹은 전지구가 평화롭게 상생하는 미래의 세계는 좀더 확실하게 우리의 시야와 삶 속으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 송두율 교수를 기소하여 15년형을 구형한 검찰이나 그들의 말을 따라 7년형을 선고한 판사들, 그리고 송두율 교수 재판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우리들 모두가 스스로 유길준이 말한 “개화의 빈객, 개화의 노예, 개화의 죄인, 개화의 원수, 개화의 병신” 등등은 아닌지 점검해 볼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