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나오는 월간 <시민과변호사> 7월호에 실린 권두시론입니다.
제목 : [권두시론] - <경계인>과 ‘솥·냄비’ -
필자 : 박호성 <<< 서강대 정외과 교수
송두율 교수는 지난 1심에서 44년형을 선고받았다.
조국을 찾지 못하며 해외에서 보낸 37년에 7년을 덧붙인 것이니, 결국 44년 징역형을 선
고받은 셈이다.
이 1심 재판은 우리 모두를 탈 냉전시대인 21 세기가 아니라 박정희 시대에 살고 있다
는, 무서운 착란증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담당 재판부는 사법부의 존엄성까지도 단숨에
내팽개쳐버린 듯이 보였다. 여론재판에 발맞춰 과도한 형량을 주저 없이 선고했을 뿐만 아
니라, 공안검찰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함으로써, 양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까지 법원이 “검
찰의 2중대”에 지나지않는구나 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 판결문은 검찰의 공소장 복사 본
같았다.
재판부는 오로지 북한을 비판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송 교수가 “지도적 임무”를
수행했다는 단세포적인 논리까지 흔쾌히 구사했다. 재판부의 논리를 따르면, 예수를 비판하
지 않으면 모두가 다 예수쟁이가 된다. ‘개는 동물이다, 그리고 인간도 동물이다. 그러므
로 인간은 개다’ 라는 절묘한 논법으로, 송 교수를 북에는 따뜻한 눈길을 보내고 한국에
는 싸늘한 눈빛을 보내는, ‘경계인’으로 위장한 기회주의자라 처단한 것이다.
이번 재판의 쟁점은 송 교수가 과연 북한 정치국 후보위원인가, 그가 쓴 글 및 남북학술
회의를 중재한 것이 지도적 임무를 수행한 것인가 하는 세 개의 초점으로 모아졌다. 그러
나 재판부는 이 세 가지 주요쟁점 중 유독 ‘저술 활동’ 만을 문제삼았고, 이를 유죄의 근
거로 몰아부쳤다. 그러나 송 교수가 다룬 ‘내재적 접근법’은 결코 그의 전유물이 아니
다. 문화인류학 등에서 서로 다른 두 체제를 비교·연구할 때 이미 전 세계적으로 널리 활
용해오던 일반적 방법론인데, 하필 그에게만 ‘친북적’이라는 올가미를 뒤집어씌운 채 이
적활동이라고 단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송 교수를 처벌한 “지도적 임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명확
한 법규정이 없는 만큼, 그 자체가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고 보는 것이 양식 있는 대다
수 법조인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하지만, 재판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6·15 공동선언 이후 이산가족 면회, 개성공단 신축 등 남북관계의 급격한 진전이 이뤄지
는 상황임에도 오히려 국가보안법이라는 냉전시대의 유물로 세계적 학자에게 중형을 내린
것이다. 서양에서는 “학문에는 왕도가 없다”고 했는데, 우리 사법부에서는 “학문에는 국
가보안법밖에 없다”고 자랑스레 선포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한 판결은 민족적 자해행위
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송 교수는 스스로 자신을 <경계인>이라 불렀다.
그러나 재판부는 ‘경계인’을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식으로, 남한과 북
한 양쪽을 두루두루 살펴보다가 기회를 보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서 빌붙는, 그러한
‘기회주의자’로 이해하였다. 결코,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경계인>이라는 것은 남-북
한 양쪽에 다 두루두루 통달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양쪽을 화해와 통일의 길로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그 방안 모색에 가장 통달해 있는 존재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취지에서 나는 송 교수를 ‘솥·냄비’라 부른다.
나는 지난 1월 초, 교수 세미나 관계로, 20여명의 동료 교수들과 함께 금강산에 갔다온
적이 있다.
우리들은 남한과 북한 양측에서 이른바 CIQ(Customs Immigration Quarantine = 세관 출입
국 및 검역)라고 부르는 곳에서 통관 절차를 밟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요컨대 외국 여행하듯
이, 엄연한 독립 국가 상호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입국 절차를 다 밟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북한을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는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딱한 현실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런데 금강산 지역의 대단히 흥미로운 현상 하나가 나의 두눈을 사로잡았다.
현대 아산에 의해 채용되어 각종 업무에 종사하는 종업원들이 대부분 다, 연변에서 건너온
‘조선족’이었다. 말하자면 이 조선족들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남-북의 이질감과 적대의식
을 평화롭게 완충해 주는 충격 방지용 수단으로, 금강산 관광단지 내에서 적절히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바로 금강산의 ‘경계인’이었다.
아울러 또 다른 흥미로운 광경이 하나 더 눈 앞에 전개되었다.
우리는 금강산에 도착한 날 저녁식사를 ‘금강원’이라는 북측 식당에서 했다. 그런데
그 식당의 술값과 보통 가게에서 파는 술값이 동일할 뿐만 아니라, 여성 종업원들은 “우리
가 행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한사코 팁을 거부하는 게 아닌가.
그때 어느 교수 한 분이 “남한과 상이한 이러한 북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재적 접근법이 필수적이야” 하는 바람에, 다들 즐겁게 동병상련의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
다.
그때 나의 뇌리에는 습관처럼 송두율 교수가 번갯불처럼 떠올랐다.
이른바 <경계인> 송 교수는 무엇보다도 바로 남-북의 화해와 평화공존의 굳건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스스로 완충장치가 되도록, 자기 자신을 민족에 기꺼이 헌납한 순교자는 아
닐까 하고 말이다.
이런 취지에서 나는 송 교수를 ‘솥·냄비’라 부른다.
물과 불은 서로 상극이어서 결코 합칠 수 없다. 그러나 이 물과 불 사이에 솥·냄비가 얹
히면 어찌될까. 이 솥·냄비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물과 불의 힘을 한데 모아 갖은 맛을 내
는 음식을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새로운 생산물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물불을 가리어 그
둘을 조화롭게 엮어나가는 일, 그리하여 또 하나의 새로운 ‘멋진 신세계’를 일으켜 세워
나가는 일, 이 일을 바로 솥·냄비가 떠맡지 않겠는가. 허나 솥·냄비는 잘 찌그러진다.
나는 송 교수를 퉁탕거림 속에 자신은 끊임없이 찌그러지면서도 두루두루 물과 불, 요컨
대 남과 북을 화해롭게 잘 껴안아나가며 새롭고 가치있는 생산물을 만들어내고자 애쓰는 솥
·냄비 인생을 살아가는 분이라 규정한다. 스스로 찌그러짐으로써 자신의 존재이유를 덤덤
히 펴나가고 있는 통일지향적 민족인, 그가 바로 인간 송두율이라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우리의 ‘경계인’ 송 교수는 자신을 낳아준 이 땅에 살고 헌신하기 위해 험한 여정을 거
쳐 고국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송 교수를 민족과 조국의 일원으로 따뜻하게 끌어안아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끝 부분이 조금 상했다 하여 아름드리 재목을 다 버리지는 않지 않는가.
J.S.Mill은 이렇게 외쳤다. “전 인류가 하나의 견해를 갖고 있고 단 한 사람만이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면, 그 한 개인이 전 인류를 침묵시킬 수 없는 것처럼, 전 인류 또한 그
개인에게 침묵을 강요할 수 없다”. 명심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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